(,,, 이어서)
2] '느낌(受)'을 바로 보아
우리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6가지 감각기능으로,,,
각각 그 대상인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심리현상을 접촉(觸)했을 때,,,,
'느낌(受, feeling)들'이 생겨납니다. '느낌의 무더기(受蘊)'라 합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괴로운 느낌',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느낌(受)'이 생겨나면,,, 우리의 마음작용(心行)은 바로 이어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지각(想, perception)을 일으키고,,,
그 지각(想)에 따라서 저마다의 근기나 잠재성향을 따라
형성(지음, 行, sankhara, formation)작용을 일으킵니다.
눈, 귀, 코, 혀, 몸 5가지 감각기능에서 일어난 사건 즉, 접촉(觸)을
나머지 하나의 다른 감각기능인 마음(心, 識, consciousness, citta)은
지켜보고 있다가(五門轉向),, 이를 접수하여,,,
결국,,,, "아!,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앎(識, 앎, 알음알이, 견해)를 형성합니다.
여기서,,, 같은 대상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압니다.
따라서 같은 세상을 살아도,,,, 저마다 온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박쥐가 보는 세상이 사람과 다르듯 말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답다'라고 할 때,,, 어떤 이는 '참으로 역겹다'고 합니다.
【'느낌'을 바로 보아 갈애를 멸진하고 해탈하는 것임】
여기서,,,, 세존께서는
평소에 감각접촉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이 '몸(身)'에 대해서,
그에 속하는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기능과 그 대상들에 대해서도
잘 마음챙겨야(sati)하고 단속해야 하지만,,,,
특별히 그 접촉(觸)이 일어난 바로 다음에 생기는
'느낌(受)'의 무더기들을 마음챙겨서 잘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느낌이란 것은 도대체 뭐지?'라고 지혜롭게 꿰뚫어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갈라나 존자가,,,
"어떻게 해서 비구가 갈애를 멸진하고 해탈합니까?"라고 여쭐 때,,,
세존께서는 '느낌에서 그 느낌을 바로 보아 비구가 해탈에 이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간략하게 말하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갈애를 멸진하여 해탈하고,
구경의 목표에 이르고, 구경의 유가안은을 얻고, 구경의 청정범행(梵行)을 성취하고,
구경의 완성을 성취하여,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 으뜸이 됩니까?"
"모든 법들을 철저히 알아
그가 어떤 느낌을 느끼더라도,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든,
그 느낌들에 대해서
1) 무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2)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3) 소멸을 관찰하면서,
4)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가 이렇게 머물 때
세상에서 그 어떤 것에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으면 번민하지 않고,
번민하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 갈애 멸진의 짧은 경, M37, https://ibakdal.tistory.com/17372040)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의 가르침은 항상 이렇게 정곡을 피해 가지 않습니다.
본 경의 이 가르침은 참으로 간략히 우리가 아떻게
'최상의 행복'인 '열반'(* 마간디야 경, M75, https://ibakdal.tistory.com/17372408)에 이르는지
그 과정의 급소를 찌르듯 설하고 계십니다.
간략히 설하셨으나 그 의미는 간단하지 않고,, 그 실행은 실로 어렵습니다.
그것이 형색이든, 소리든, 냄새든, 맛이든, 감촉이든, 생각이든,,,,
우리는 그것이 내게 좋은 것이고 원하는 것일 때 그것을 즐기고 탐내고 홀리고 빠집니다.
이때 그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이것은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된 감정의 무더기가 생겨난 것이고,,,
'원인이 소멸하면 소멸하기에'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소멸하기 마련(無常)이고,,,,
그러하기에 이런 즐김(耽)과 즐기고자 하는 열망 혹은 그 잠재성향이
바로 '괴로움(苦)의 뿌리'가 되고,,,
내가 이 느낌을 '나', '나의 것', '나의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움켜쥐면,,,,
즐길 때는 '나의 실체'가 있다가, 그 '실체'가 이 느낌이 사라지면 없어지는 것이어서,
여기 느낌에서 진실로 '나의 실체'를 구할 수 없고(無我),,,
이 느낌이란,,,
단지 전기화학적인 감득(感得)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므로,,,
이러한 '무더기(受蘊)'를 즐기고,,,
눈, 귀, 코, 혀, 몸,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느낌과 그 느낌을 향한 열망에
한정없이 묶여있고 매여있는 내 모습(존재, 有)을 보아,,,
자신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노예인 그 모습을 꿰뚫어 알고 보아,,,
그 취착(着)의 저열함을 다시는 넌더리치고 싫어하게 되고(厭惡, 염오),,,
"What is real?
How do you define real?
If you're talking about what you feel,,,
what you can smell, taste, and see,,,
then, real is simply electrical signals interpreted by your brain."
하여,,,,
그 일체 물질정신현상(名色)들에 대한 즐김(眈慾)들이 빛바래고(離慾),,,,
궁극에 그 영원한 족쇄들로부터 로부터,,,,
벗어남(出離), 소멸, 완전히 놓아버림, '재생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림',,,
'이 모든 것 가라앉음', '다시는 일어나지 않음', '고요함'에 이르는 법,
'진실한 자유인'이 되는 길을 세존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형성된 이 모든 것 참으로 무상하여 (諸行無常)
이 오직 일어남 사라짐일 뿐 (是生滅法)
일어남 사라짐 다시는 들지 않음 (生滅滅已)
고요하고 청정하여 행복이라 하네." (寂滅爲樂)
(* 마하수닷사나 경, D17, https://ibakdal.tistory.com/17370271)
끝없이 윤회하면서 지은 업, 현생의 업을 따라서,,,
그렇지 얺은 이도 있지만,,,
어느날 갑자기 '문득' 이같은 성취에 확고하게 도달하는 일은 없습니다.
'문득' 성취했다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때 한순간,,,
'매여있지 않음'에 속한 하나의 '느낌'을 가지고, 그 '느낌'을 되살리려 애쓰며,,,
그것을 붙접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기에,,, 그는 그 실체나 원인을 풀어서 얘기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하니까,,, 깨달아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苦聖諦)라는 세존의 가르침을 모릅니다.
이것이 괴로움인 줄 모르고,,, 이것을 즐기면서,,,,여전히 거머쥔 이에겐,,,
그것을 벗어나야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깨달을 이유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논쟁을 위해서,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자신(我)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혜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치장을 위해서,,, 또 다른 즐김을 위해서,,,
남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존경과 명성을 위해서,,
그 압도적인 논리로 남들을 '지배'하고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심지어 법을 거머쥐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뱀을 거꾸로 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알게된 이것을 당신은 왜 모르나?'라고 화를 내기 일쑤입니다.
(* 뱀의 비유 경, M22, https://ibakdal.tistory.com/17371903)
이같은 이들은 이같이 논쟁합니다.
"1)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제대로 모른다. 나야말로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안다.'
2) '어찌 그대가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알겠는가?'
3) '그대는 그릇된 도를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른 도를 닦는 자입니다.'
4) '그대는 먼저 설해야 할 것을 뒤에 설했고, 뒤에 설해야 할 것을 먼저 설했다.'
5) '그대가 (오랫동안) 주장해오던 것은 (한 마디로) 논파되었다'
'나는 그대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했다. 그대는 패했다.'
'비난으로부터 도망가라. 혹은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 설명해 보라.'라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논쟁을 멀리 여읩니다.
이것 또한 이 비구의 계(戒)입니다."
(* 사문과경, D2, https://ibakdal.tistory.com/17369872)
그는 무엇 때문에 이같은 법을 배우고 수행합니까?
철저히 오온(五蘊) 알기위해서 입니다.
괴로움을 알기위해서입니다.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입니다.
세존께서는 오직 이것을 평생동안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예나 지금이나 나는 괴로움을 천명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한다."
(* 뱀의 비유 경, M22, https://ibakdal.tistory.com/17371912)
그 어떤 다른 이유도 그에게는 없습니다.
하기에 다른 이의 헐뜸음, 비난, 비방도 성가셔하거나 낙담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존중, 존경, 공경, 숭배에도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득의만만해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한 번' 열반을 봅니다.
다시 '두 번' 봅니다. 더 자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점점 그것에 확고하게 됩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구경의 지혜가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순차적인 실천, 순차적인 도닦음으로
구경의 지혜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 끼따기리 경, M70, https://ibakdal.tistory.com/17371189)
이같이 알아야 할 것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보고,,,
하여 버려야 할 것을 철저히 버려나가고,,,
닦아야 하는 것을 철저하게 닦아나가서,,,,
실현해야 마땅한 것을 성취하는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즐기더라도 이렇게 마음챙겨 빠지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그에 내재된 '달콤함과 위험과 재난과 벗어남'을 알고 보면서,,,
더우기 이것이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나의 모습'이라고 거머쥐어(着)
존재(有)의 족쇄에 에 코가 꿰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위와 같이 알고 보듯이,,,,
그는 '괴로운 느낌', '고통', '아픔'에 대해서도 그같이 알고 봅니다.
이 현전(現前)하는 '괴로운 느낌',,,
내 몸과 마음에 알알이 느껴지는 '괴로운 느낌', '고통', '아픔'도,,,,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난' 느낌의 무더기일 뿐이며,,,
'원인이 소멸하는 소멸하는' 무더기일 뿐이다라고 봅니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내가 계(戒)를 수지하지 못해서,,,,
내 닦음과 공덕이 부족하여,,,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거룩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때도,,,
이 괴로운 느낌은,, '나'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실체'가 아니다라고
꿰뚫어 알고 봅니다.
하여 그는 그 '괴로운 느낌'의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마음챙겨서 분명히 알고 보기에 여기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가 잘 닦은 이라면,,, 그는 그 죽음의 순간에,,, '고요함'을 성취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 수승한 마음으로 선처에 다시 생을 받을 것입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알 것을 알고, 버릴 것을 버리고, 닦아야 할 것을 닦지 못한 채,,,,
그럴 경우가 있습니다. '해태와 혼침'에 따른 것입니다.
부족함이나 절박함이 없이,,, '인생 뭐 있나?'하면서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만하면 나도 알만큼 알았다.'하며 담담히 지냅니다.
그러나 공덕이 다하면 그도 다른 지경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닦은 이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알 것을 철저히 알았고, 버릴 것을 철저히 버렸으며, 닦을 것을 철저히 닦아서,,,
일체 물질정신현상, 오온, 이것의 일어남, 소멸,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분명하게 '알고 보면서',,,
즐거워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이의
출세간(出世間)의 마음이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느낌을 바로 보아',,,
'괴로움', '괴로운 느낌', '고통',,,,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무서움',,,
혹은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순간(瞬間), 시간(時間)의 길이,,, 를 벗어납니다.
여기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습니다.
"이 길은 가지 않아도 되는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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