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109.보름밤의 긴 경-오온을 바로 봄

※後記: 2) 보름밤의 긴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8. 11. 10. 07:36


Ⅱ.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을 짓고 받는다는 말인가?

                
■ '나', '자아', '존재',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은 무엇인가?, 왜 생겨났나?'의 문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자아'는 있는가 없는가?,

'자아'가 있다면 무엇을 두고 자아의 실체라고 하는가?

'자아'가 없다면 이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은 '내가 내가 아니라면 내가 누구란 말인가?'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만은 실체로서 영원한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보는 이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럼 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전에 도대체 '존재'란 무엇인가? 무엇을 두고 '존재'라고 하는가?, 

어떻게 '존재의' 실상이 증명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는 것이니 막 살아도 되는건가?

                   

'무아(無我)'라고들 한다.,,,  '내가 아니다.' 인가? '내가 없다.'인가?,,,

아니, 내가 없다니?,,, 그렇다면 나와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이 모든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꿈인가? 현실인가?, 내가 꿈이라면 이 모든 것도 꿈이란 말인가?,

떤 이의 말처럼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두고 현실(reality)이라고 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말입니다.

'데카르트가 (Descartes)가 방법론적 회의 끝에 도달한,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제1원리.

즉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고 일체가 허위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그와 같이 의심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이 생각하는 나의 자기 확실성을 

표현한 것이 이 명제이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절실하면 이렇게라도 실마리를 잡겠습니까?

                          

그만큼 '나'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의 뿌리에 자리하고 질문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살아가지만

뇌리에서, 심연에서, 일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항상 떠나지 않는 근본적 질문입니다.

             

                

    

1] 세존께서 가지셨던 의문: '괴로움의 출구'
                             _ 존재의 출구/오온의 출구/'나'의 출구/이 모든 것의 출구

                 

- 세존께서는 늙고 죽고 다시 태어남을 보시고 '이 괴로움의 출구'를 찾아 현세에서도

   출가하셨습니다. 위빳시 부처님처럼 모든 여래들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구나.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늙음 · 죽음이라는 이 괴로움의 출구를 꿰뚫어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디서

        늙음 · 죽음(老死)라는 이 괴로움의 출구를 꿰뚫어 알 것인가?"

                 

                                                           (* 대전기경, D15: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0)

               

                

- 세존께서는 당신 자신께서도 아직 보살이었을 때조차 우리들과 같이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구해

   사셨음을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나도 역시 깨닫기 전, 아직 정등각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1) 내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2) 내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3) 내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4) 내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5) 내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6) 내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태어남이 없고, 늙음이 없고, 병듦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이 없고, 오염이 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리라."

                  

                                           (* 성스러운 구함 경: M26: http://blog.daum.net/ibakdal/17371940)

                    

                         

- 세존께서는 결국 깨달으셨고, 구하셨고, 꿰뚫어 아시게 되었고, 보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하신 법문, 세존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법문에서 아래와 같이

   스스로 게송을 읊으십니다.

                  

       "한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 짓는 자가 누군지 알기 위해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괴로움이었네.

 

        아! 집 짓는 자여!

        이제 그댈 보았나니,

    그대 더 이상 집 짓지 못하리. 

        이제 그대의 모든 서까래는 부셔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러

        갈애의 부숴짐을 성취하였다."

                 

  (* 법구경 게송153~154

   * 디가니까야 주석서 서문: http://blog.daum.net/ibakdal/17371457 )

                

               

- 이와 같음을  볼 때, 세존께서 4아승지 10만 대겁 그 '괴로움의 출구'를 찾으심이,

   '나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들은 왜 생겨났는가?'라는 질문의 해결

   통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다른 말로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셨다는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집짓는 자'가 누군지 알기 위해' 헤매면서 칮으셨고,

  '이제 그댈 보았나니' 즉 그것을 꿰뚫어 알아서 '열반'에 이르셨음을 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괴로움의 출구'는 결국 '존재의 출구'며 그것은 결국 '오온의 출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괴로움의 출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나를 포함한 이 모든 것', 다른 말로 '오온', 다른 말로 '일체 정신·물질'을 '철저히 앎'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苦聖諦], 그것은 어디서 왜 생겨났는지?[苦集聖諦/緣起],

   그것은 어디서 왜 소멸하는지?[苦滅聖諦/緣起]

   어떻게 해서 그것의 소멸에 이르는지?[苦滅道聖諦]'를 꿰뚫어 알아서 입니다.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일컬어지는 사성제(四聖諦)를 꿰뚫어 알고 보아서입니다.  

                  

               

                   

2] '나', '자아', '존재', '이 모든 것'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의 가르침

                 

 1) '존재란 무엇인가?'를 천명하심 _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 "요컨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무더기들(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苦聖諦]"


 - 그 결과로서 세존께서 천명하신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sacca)'의 첫 번째인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요컨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1) (나 등으로)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2) (나 등으로)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3) (나 등으로) 취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4) (나 등으로) 취착하는 상카라들의 무더기(行取蘊),

        5) (나 등으로)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요컨대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 대념처경, D22: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2)

                

                         

 ■ 일체 존재(현상)는 괴로움(의 드러남)이다.[一切皆苦]

                   

 - "다섯 가지 무더기 자체가 괴로움이다."라는 선언은 무엇입니까?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무더기' 즉,

    색(물질, form), 수(느낌, feel), 상(지각, perception), 행(sankara, 잠재성향과 의도가 뒷받침된

    형성/지음, formation), 식(알음알이, consciousness)의 다섯 무더기,

    혹은 존재가 존재이게 하는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 그것 외에는 없으므로 모든 '존재',

    혹은 나를 포함한 일체 세상, 혹은 일체 정신·물질(현상)이, 혹은 일체

    바로 '괴로움'(一切皆苦)이라는 놀라운 진리의 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다."라는 '존재'에 대한 선언이 바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다.'라는 명제는 '존재'란 결국 '괴로움의 드러남'이요,

   '존재'란 '괴로움이 표현되는 방식'이라는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갈애와 취착, 그 이전에 무명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에(열반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라는 방식으로 그 괴로움이 드러나 있다.'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엄정난 도약이고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선언인 셈입니다. 세존께서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렸다.'라

    하는 말은 바로 이 진리의 선언을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기실 사성제가 다 어렵지만,,,

    그 중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다음 나머지 3가지의 진리

    즉,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苦滅道聖諦)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 일체에 대한 안내서 _ 아비담마[論藏]

                   

 - 다섯 무더기,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 오온(五蘊), 갈애가 있을 때의 오온인 오취온(五取蘊),

    색(色)·수(受)·상(想)·행(行)·식(食), 그러므로 정신·물질(名色), 이것이 모든 존재의 존재방식이므로

    모든 존재, 혹은 나를 포함한 일체 세상, 그러므로 오온(蘊)·12처(處)·18계(界)에 펼쳐지는 일체

    (一切)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결국 정신·물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흔히 구경법이라고도 불리는  아비담마는 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의 4가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결국 법(dhamma) 혹은 일체(一切)에 대한 설명이요 안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일체(一切)를 설하신 것이 법(dhamma)요, 그 일체와 법은 결국 정신·물질이라는 벽돌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무더기에서 색(色)은 물질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名/마음)이니,

    아비담마가 물질로써 물질을, 마음과 마음부수로써 정신을, 그리고 열반으로써 그 정신과 물질의

    일어남과 머무름과 사라짐을 무상(無常)·고(苦/dukkka)·무아(無我)를 보아 그 족쇄를 풀어서

    벗어남이 무엇인지 설하는 것이니 결국 '오온에 대한 안내서'요, '일체에 대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법(dhamma)이 집이라면 오온은 벽돌이니 '벽돌에 대한 안내서'라고 비유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는다."

                                 _ 존재계(界)에 있는 그 어떤 '존재'도 괴로움일 뿐이다.

                       

 - 세존께서는 유무(有無)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고

   설하십니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취착천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 깟차나곳따경, S12:15: http://blog.daum.net/ibakdal/17371073)

                  

                        

 - 존재에 대한 이같은 관점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의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도다."

                         

                                                    (* 와지라 경, S5:10: http://blog.daum.net/ibakdal/17370029)

                       

    이 와지라 비구니님의 게송은 어떤 '존재'에게 '중생' 즉 '어떤 존재'라고 덧씌우는 마라의 잘못된

    견해를 파하여 바로 잡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실 유무정의 일체의 존재(현상)에 대해서 그것은 단지 갈애에 끄달리고 무명에 덮혀서

    그를 풀어서 벗어나지 못한 괴로움이 6가지 감각기관의 인지를 빌어 정신·물질(현상)이라는

    방식으로, 혹은 다섯 무더기 즉 오온(현상)으로, 혹은 '존재(현상)'로서 생겨나고(드러나고), 

    머믈고, 없어지는 것이요,,,

                  

    그러므로 존재(현상)가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존재계(界)에서는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는 것'이며,,,,

                    

    결국 '존재계(存在界)'에 펼쳐지는 일체의 모든 '존재(현상)'는 모두가 '괴로움'이 드러난 것일

    뿐이요, 그 드러난 것이 잠시 머무를 때 그를 이름하여, 인습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라고 혹은 그 '존재'는 자신을 칭하여 ''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니,,,

                         

    이런 방식으로 정신·물질은 인과(causality)라는 법칙을 따라 그러한 '나'의 오온을 실시간으로

   '나'에게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무름"

                     

 -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여래의 몸은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물러 있다."

                         

                                                       (* 범망경, D1: http://blog.daum.net/ibakdal/17369848)

    라고 설하십니다.

                        

    세존께서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 당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계신지를

    잘 드러내는 설하심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물러 즉, 인습적인 표현을 사용하면 '존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유여열반'이라고 이르는 '궁극의 존재방식(不死)'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하나는 '무여열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궁극의 존재방식(不死)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기실 '궁극의 존재방식'에서는 '존재'가 소멸하고 없습니다.

    그는 '존재'라는 것을 완전히 벗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어남·사라짐에 다시 듦이 없습니다.

                               

                         

 - 세존께서는 「범천의 초대 경」(M49)에서 자신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바까 범천에게 이같이

    설하십니다.

                     

       "나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노라.

        존재하지 않음을 구하는 자들에서 존재를 보노라.

        어떤 존재도 나는 환영하지 않고

        즐김을 움켜쥐지도 않는다,"

                     

                              (* 범천 초대경, M49: 진흙속의연꽃  http://blog.daum.net/bolee591/16155002)

                  

                           

 2) 오온은 내가 아니다 & 오온에는 내가 없다 [無我]

                                

 ■ '오온은 내기 아니다.'는 가르침

                   

 - 세존께서는 위와 같이, 또 「초전법륜경」에서도

                    

       "요컨데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거 괴로움이다."

                           

                                          (* 초전법륜경, S56:11: http://blog.daum.net/ibakdal/17370889)

                       

    라고 드러난 일체, 모든 존재, 오온, 취착하는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천명하십니다.

                  

             

 - 세존께서는 본 경 「보름밤의 긴 경」에서와 같이, 또 「초전법륜경」에 이어서 설하신

  「무아경」에서도 오온은 내가 아님을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이 몸(色, 물질현상)은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니기 때문에

                        

         1) 이 몸에는 고통이 따른다.                        

         2) 그리고 이 몸에 대하여

            '나의 몸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몸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이어서 느낌, 지각, 심리현상, 알음알이 각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설하십니다.) 

                                 

                   (* 무아경/무아의 특징 경/無我相經, S22:59: http://blog.daum.net/ibakdal/17371040)

                                 

           

     - 세존께서는 '오온이 내가 아님'의 이유로 두 가지 즉,

        첫 번째로 '나'가 아니기 때문에 이 다섯 무더기가 '나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

        두 번째로 '나' 아니기 때문에 이 다섯 무더기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오온에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관찰할 만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

                                                            _ '오온에 내가 없음'의 가르침

                         

 -  세존께서는 아래와 같이 오온에서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음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몸을 포함한) 물질현상(色)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영원하지 않은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영원하지 않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이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무아경/無我相經, S22:59: http://blog.daum.net/ibakdal/17371041)

                                       

    오온에서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음을 설하심은

   '오온에는 내가 없음'을 설하시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 세존께서는 '오온에 내가 없음'의 이유로 두 가지 즉,

    첫 번째로 오온 중 어느 것이라도 '영원하지 않기 않기 때문'이요,

    두 번째로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거머쥐었다가는 결국 '괴로움'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

    그것을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로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 오온은 내가 아니다 & 오온에는 내가 없다

                                        _ '존재'는 내가 아니다 & '존재'에는 내가 없다

                      

 - 한편 '오온은 내가 아니다.' 내지 '오온에는 내가 없다.'라는 가르침의 함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일체 존재(현상)' 내지 '일체 정신·물질(현상)' 내지 '일체'는 내가 아니요,

    이것에는 '나'가 없다는 가르침에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왜 그렇게 가르치십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3) 존재는 왜 생겨나는가? _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緣起]

                 

 ■ '존재(오온)란 무엇인가?' 연기법[緣起法]/조건따라 생김

                       

 - '존재'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은 참으로 특이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소위 '존재(有)'만을 대상으로 할 때도

                 

       "아난다여,

       '조건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만일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취착(取)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 대인연경, D15: http://blog.daum.net/ibakdal/17370164)

                         

    라고 설하십니다. 또한

                     

       "무엇이 없을 때 존재가 없으며,

        무엇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를 통해서 마침내

              

       '취착(取)이 없을 때 존재가 없으며,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존재가 소멸한다.'"라고.

                      

                                                   (* 대전기경, D14: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2)

                  

    와 같이 설하십니다.

                        

   '존재'란 조건이 있기 때문에 '존재(有)'하는 것으로 생겨나는(드러나는) 것이며,

    조건이 없으면 소멸(無)하여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 그 뿐 아닙니다. '존재(有)'도 조건이 있을 때 생겨나고 조건이 없을 때 소멸하는 것처럼

    오온 즉 '존재'를 확인 가능하게 하는 일체 인지의 형태를 이루는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

    내지 다섯 무더기도 그렇다고 천명하십니다.

                   

    정신·물질(名色)은 알음알이(識)을 조건으로,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과 지각(想)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

    라는 형성(行)이,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라는 형성(行)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각각 '존재'한다고 설하십니다.

                                                          (* 대인연경, D15: http://blog.daum.net/ibakdal/17370164)

                      

    그러므로 '일체 존재' 내지 '존재를 인지하는 일체 방식' 모두가 오직 '이것이 있는 것을 조건으로

    이것이 일어나고, 이러한 조건이 없으면 이것이 소멸하는' 방식으로만 '존재'는 '존재'하는 것으로

    가르치십니다.

                 

                   

 ■ 오온의 생겨남과 사라짐

                        

 '조건 따라 생김'(緣起)은 추상적인 개념의 유희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그런 법을 설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손으로 만져지듯이 구체적이고 명징한 법만을 설하십니다. 연기와 오온의 법도 바로

 그러합니다. 내가 깨어있거나 잠을 자거나 간에 그것은 어떤 중생에게든 항상 매순간 일어나고

 있는 법이며, 합리적인 추론을 해봐도 그 이외에 다른 그 무엇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오온의 생겨남(만들어짐)

                 

  -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에서, 예를 들어 형색의 경우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접촉하여 눈에 따른 오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설하십니다.

                 

        "도반들이여, 

         1) 안으로 이 손상되지 않았지만 

         2) 밖에서 형색이 눈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3) 그곳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알음알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1) 안으로 이 손상되지 않았고 

         2) 밖에서 형색눈의 영역에 들어오더라도 

         3) 그곳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알음알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1) 안으로 이 손상되지 않았고 

         2) 밖에서 형색이 눈의 영역에 들어오고

         3) 그곳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상응하는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물질은 취착의 [대상인] 물질의 무더기[色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느낌은 취착의 [대상인] 느낌의 무더기[受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인식은 취착의 [대상인] 인식의 무더기[想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심리현상들은 취착의 [대상인]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알음알이는 취착의 [대상인]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에 속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이렇게 해서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모임, 적집, 더미가 

         만들어집니다."라고.

                      

                            (*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 M28: http://blog.daum.net/ibakdal/17371967)

             

                  

  -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위 눈의 예에서와 같이 6가지 각각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알음알이'가

     생겨나는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1) 안으로(몸의)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마노)이 손상되지 않았고,

     2) 밖으로 감관의 대상(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들)이 나의 감각기관의 영역에 들어오고

     3) 그러한 감각기관이 그 대상에 대한 접촉이 일어났을 때 그곳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것에 상응하는 알음알이는 일어난다고 설하시고, 이같이 각 감각기관별로 접촉을 통해

     알음알이(識)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각 감각기관별로 물질(대상), 느낌, 지각(인식), 심리현상들

    (형성)의 무더기들이 만들어짐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리뿟따 존자의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천명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이렇게 해서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모임, 적집, 더미가 만들어집니다."

                     

      라는 부분입니다.

                     

      오온은 6가지의 감각기관(根)이 각각 그 대상(境)을 감촉하여

      각 알음알이(識)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각각 거기에 따른 각각의 물질무더기, 느낌무더기, 지각무더기, 심리현상들

      (行, 형성))이 무더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 이것을 두고 오온이 조건따라 생겨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오온의 소멸/존재의 소멸/윤회의 종식/괴로움의 소멸 

                             _ 갈애로 (나 등으로) 취착하는 오온[오취온]으로부터의 벗어남

                             

  - 세존께서는 놀랍게도

                     

     1) 눈으로 형색을 볼 때, 2) 귀로 소리를 들을 때, 3) 코로 냄새를 맡을 때,

     4) 혀로 맛을 볼 때, 5) 몸으로 감촉힣 때, 6) 마노(마음)으로 법(마노의 대상)을 지각할 때

                  

     느낌에 마음챙겨서 갈애(愛)를 소멸시키고,

     그 갈애를 소멸시키므로 취착(取)을 소멸 시키고,

     그 취착을 소멸시키므로 그 존재(有)를 소멸시키고,

     그 존재를 소멸시키므로 태어남(生)을 소멸시키고,

     그 태어남을 소멸시키므로 늙음과 죽음, 근심과 탄식,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절망을

     소멸시킨다고 설하십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이 무더기가 소멸한다,'고 천명하십니다.

                    

                                                    ( * 갈애 멸진의 긴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2053)

                   

  - 그러므로 오온이 일어나는 것도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이지만,

     오온이 사라지는 것도 조건을 따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갈애를 소멸'하여 오온이 사라진다,

     소멸한다, 즉 오취온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할 것입니다.

                              

                         

【3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설하신 것이 사성제다.

            

  - 세존께서는 「대념처경」(D22)에서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상세하게

     설하십니다.

               

  - 세존께서는

            

     1) 일체 (나 등으로) 취착하는 오온(존재 무더기)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임을[苦聖諦],

                     

           "비구들이여, 그러면 요컨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1) (나 등으로)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2) (나 등으로)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3) (나 등으로) 취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4) (나 등으로) 취착하는 상카라들의 무더기(行取蘊),

           5) (나 등으로)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요컨대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 * 대념처경, D22:http://blog.daum.net/ibakdal/17370352)

                  

    2)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근(根), 경(境), 식(識), 촉(觸), 수(受), 상(想), 행(行), 애(愛), 심(尋), 사(伺)의

        즐겁고 기분좋은 곳에서 갈애가 일어나 여기서 자리잡음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임을[苦集聖諦]

                                                ( * 대념처경, D22: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3)

                         

    3)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근(根), 경(境), 식(識), 촉(觸), 수(受), 상(想), 행(行), 애(愛), 심(尋), 사(伺)의

        즐겁고 기분좋은 곳에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소멸함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임을[苦滅聖諦]

                                                ( * 대념처경, D22: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4)

                              

    4] 그라하여 팔정도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이며

        위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임을[苦滅道聖諦]

                         

    을 설하십니다.

                      

                       

 - 따라서 사성제는

   1] 오온이 무엇인가를[苦聖諦], 2] 오온의 일어남을[苦集聖諦], 3]오온의 소멸을[苦滅聖諦],

   4]오온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설하신 것[苦滅道聖諦]에 다름이 아닙니다.

              

               

 ■ '존재'/'오온'을 바로 봄 _ 해탈[解脫]

       

 - 세존께서는 이렇게 연기법으로 일체, 나를 포함한 세상, 오온, 일체를 꿰뚫어 보아

    즉 '오온을 바로 보아', 그것이 무상하고, 실상이 괴로움의 드러남인 것을, 그 안에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 할 갓이 없음을 꿰뚫어 알아서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셨음'을 천명하십니다.

                                                   (* 대전기경, D14: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3)

                   

    또한 오온의 실상이 그러하므로 '오온을 염오하고(염오), 염오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바래고(이욕),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함(출리)'을 설하십니다. 

                
                                                   (* 뱀의 비유 경, M22: http://blog.daum.net/ibakdal/17371910)

            


- 해탈의 도리가 이러하므로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도반들이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연기(緣起)을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 M28: http://blog.daum.net/ibakdal/17371967)

                  

  라는 세존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4) '존재'는 실제로 존재(實存)하는가? _ 존재론/유무(有無)의 문제

                  

 ■ '존재'의 상대성 _ 조건을 따라 생멸하는 것이 '존재'이므로

           

【1그분은, 그분도,,, '존재'했다

                    

  - 세존께서는 '집 짓는 자가 누군지 알기 위해 한없는 생사윤회 속에서 계속해서 태어났다,'라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러 갈애의 부숴짐을 성취하였다.'라고

     하십니다.,,,,

                      

     모든 아라한들은 그 구경에 이르러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고 세존께서는 설하십니다.

                            

  - 세존께서는 2562년전에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세월을 존재하셨습니다.

    '나 없음'의 뜻을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 내가 없음(無我)의 도리를 알아, 대자유인이 되었으니 

     이제 무엇을 해도 매임이 없다고 하면서 막행막식하는 넋이 나간 자들은 세존께서  설하신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 할 것이 없다는 성스러운 도리를 왜곡되게 운운 할 것이 아니라, 

     세존께서 이같이 분명히 존재하신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존재로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고행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존재하시던

     그분께서는 마침내 '내가 왜 존재하는지' 깨달으셨고, 오온으로써 연기로써 그 존재를 낱낱히

     꿰뚫어 존재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 놓으셨습니다. 오온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존재란 무엇인지를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있는 것을 있다고 하시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없는 오온을, 없는 존재를, 없는 일체를, 망상이나 환영을 꺼내서 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현실을 환영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존재셨고,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설하신 것입니다.

                

                       

【2그런 그분이 '존재의 소멸'을 천명하심

                        

  - 그런데 그런 세존께서는 구경에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와 같이

    '존재의 소멸'을 천명하십니다.

                                                 (* 사문과경, D2: http://blog.daum.net/ibakdal/17370509)

                   

   

  - 또한 존재들을 염오하고. 존재에 대한 욕망을 빛바래게 하고, 존재의 소멸을 위해

     도를 닦는다고 설하십니다.

                          

        "'존재의 소멸은 반드시 있다.'라는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 ‧ 바라문 존자들의 견해는

          욕망 없음에 가깝고 족쇄 없음에 가깝고 환락 없음에 가깝고 집착 없음에 가깝고

          취착 없음에 가깝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하면서

          존재들을 염오하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 도를 닦는다." 

                         

                                             (* 확실한 가르침 경, M60: http://blog.daum.net/ibakdal/17372276)

             

                        

【3'일체의 소멸'을 천명히심

                   

 - 그뿐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놀랍게도 열반과 더불어 '일체의 소멸'을 설하십니다.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을 굳건히 서지 못하며

          여기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정신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

                                             (* 께왓다 경, D11: http://blog.daum.net/ibakdal/17370107)

                      

                          

【4'존재더미가 존재하는 한(갈애가 남아있는 한), 이 모든 것은 존재한다.'

                          

 - 세존께서는 존재와 해탈한 결과로서의 구경인 불사(不死)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십니다.

                      

         "아난다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처럼 숙고한다. 

                    

        '현재의 감각적 욕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이건, 

         현재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건, 

                            

         현재의 물질들이건 미래의 물질들이건, 

         현재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미래의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건, 

                      

         흔들림 없음에 대한 인식이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건,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인식이건, 

                      

         존재 더미[오취온]가 있는 한 이 모든 것이 존재 더미이다

         취착없이 마음이 해탈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사(不死)이다.'라고."

                              

                                (* 흔들림 없음에 적합한 경: M106: http://blog.daum.net/ibakdal/17372726)

                           

   "존재 더미[오취온]가 있는 한 이 모든 것이 존재더미이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나를 포함한 내 눈 앞의 이 모든 것, 오온이, 그에 대한 갈애가 남아있어 취착하면 존재더미(오취온)

    으로 존재하는 것이요, 갈애를 소멸하여 취착없이 마음이 해탈하면 존재는 소멸한다, 즉 존재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정신물질이 펼쳐져도 거기엔 이미 '나'가 없고 일체가 청정할

    뿐인 것입니다.

                       

                        

【5아예 '태어나지 않음'을 천명하심, 그것도 지금여기에.

                      

 - 세존께서는 더욱 놀랍게도 아예  '나'의 태어나지 않음 에 이를 것을 천명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이것은 나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허망한 생각은 병이며, 질병이고, 가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허망한 생각을 극복하

        그는 침묵의 성자[muni]라고 한다.

                         

             

        이 침묵의 성자에게는

        더 이상 (윤회하여)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으며, 떨리는 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어떤 것(번뇌와 무명)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서 태어나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나이를 먹어 늙겠는가?

        늙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죽음이 있겠는가?

        죽음이 없는데 어떻게 떨리는 것이 있겠는가?

        떨리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욕망하는 것이 있겠는가?"

                          

                         (*中部』140『界分別經』MA III, 246: http://blog.daum.net/ibakdal/17370786)

                        

                          

 - 그것도 언젠가는, 혹은 이디에서는 그렇게 한다 혹은 된다의 개념이 아닙니다.

    지금여기에서 바로 '나의 태어나지 않음'을 구족하고 실현하여 머물 것을 설하십니다

                        

        "말룽꺄뿟따여,

         나는 지금 ‧ 여기에서 바로 

         태어남 ‧ 늙음 ‧ 죽음 ‧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하는 것을 가르친다."

                         

                                                 (* 말룽꺄 짧은 경, M63: http://blog.daum.net/ibakdal/17372319)

                 

                         

【6'존재'라는 것, 존재의 상대성, 존재의 실상

                  

 - 존재라는 것이,,, 우리가 실상으로 거머쥐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사성제라는 진리의 눈, 그 사성제를 뒷받침하는 연기의 눈으로 보면,,,

                   

    존재라는 것은,,,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되어,

    그 존재가 해소하지 못한 괴로움(discrepancy)이 표현되어 다섯 무더기로 드러난 것이요,

                    

    그 존재의 원인 즉, 갈애로 인한 괴로움(discrepancy, 균열, 부조화)이 해소되면,

    응당 그 괴로움의 표현인 존재의 드러남도 소멸하는 것,

    즉 다섯 무더기도 혹은 일체 정신물질도 소멸하는 것이어서

                  

    이런 정신물질의 생겨남과 사라짐의 양상을 두고 그 이름을 '존재'라고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존재'는 지금여기에서 조건을 따라 생겨나서, 기실 머물지도 않으며, 조건을 따라

    소멸하는 것이고, 실로 찰라생 찰라멸이라 해도 좋은 것이며, 숨이 들이 쉴 때 한 세상이 생겨났다가

    숨 내 쉴 때 한 세상이 소멸한다고 해도 좋을 존재계(存在界)요 존재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과를 따라 물질(현상)이 전개되는 기본구조는 공간이요, 역시 인과를 따라 정신(현상)이

    전개되는 기본구조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양상 즉 그러한 존재계(存在界)에서의 어떤 '존재' 내지 그 '존재'에게 펼쳐진 일체 세상이

    업과 과보의 원리를 따라 드러나고 사라지는 정신물질(현상)의 양상을 두고 '존재'한다 혹은

    '그것이 있다'고 인습적인 표현을 빌어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실상에 있어서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는 바 없이 영속하고 독립자존하는 실체적 개아(個我)

    로서의 '존재'라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존의 가르침에서  '존재'의 실상

    것입니다.

                            

              

【7존재의 소멸/존재를 벗어남/존재계를 벗어남/일어남·사라짐에 다시는 들지 않음/

                                     태어남의 다함/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음/해탈·열빈

                 

 - 세존께서는 이같이 존재를 벗어난 세계에 대해서 설하십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1)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2)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3)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4)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5)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6)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

                     

        나는 말한다.

                   


        그것은

        7) 의처(依處)를 여의고,

        8) 전생(轉生)을 여의고,

        9) 대상(對象)을 여읜다.

                     

      10)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 우다나, 열반의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609)

                 

- 또한 이렇게 설하십니다.

               

      "형성된 이 모든 것 참으로 무상하여   (諸行無常)

       이 오직 일어나 사라짐일 뿐              (是生滅法)

       일어남 사라짐 다시는 들지 않음       (生滅滅已)

       그대로 적멸하고 청정하구나.           (寂滅爲樂)"

                     

                                                 (* 마하수닷사나경, D17: http://blog.daum.net/ibakdal/17370271)


                     

 ■ '존재'는 존재하는가? _ '존재'의 유무(有無)

                

【1】'존재'의 '유무(有無)' 는 존재의 실상을 떠난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_ 진실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괴로움임을 보는 것이다.

                

  - '존재'의 실상이 위와 같은 것이므로 세존께서는 '있다', '없다'함이 잘못된 견해, 관념을 취착함에

     불과한 것이요, '바른 견해'를 가진 자는 그러한 관념의 취착에서 벗어나 있음을 설하십니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차나곳따경, S12:15: http://blog.daum.net/ibakdal/17371073)

 


- 그럼 그는 '존재(현상)'을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차나곳따경, S12:15: http://blog.daum.net/ibakdal/17371073)

                         

   - 그는 일체 '존재(현상)'에 대해서 있고없음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오직 괴로움이 생겨나고

      괴로움이 소멸할 뿐임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입니다.

                    

                     

【2】'유무(有無)'를 벗어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 세존의 이같은 가르침에 대해 왓차곳따 유행승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세존께서는 연기(緣起)로써 오온(존재)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마음이 해탈한 비구가

     존재에 매여 있음을 벗어남이 아래와 같다고 설하십니다.

                  

         "그에게는

          1) '태어난다.'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다.

          2)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다.

          3)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다.

          4)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다."

                            

                                           (* 왓차곳따 불 경, M72: http://blog.daum.net/ibakdal/17372379)

     라고.

                     

     이 설하심을 들은 왓차곳따 유행승은

                      

         "고따마 존자시여,

          여기서 제게 당황함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혼돈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전에 고따마 존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깨끗한 믿음이 생겼는데

          그것마저도 지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 세존께서는 그에게 '존재의 소멸',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그 도리를

    설하십니다.

                  

    그대 앞에 불이 마른 가지와 풀과 연료를 조건으로 타오르고 있을 때 '내 앞에 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그대는 알 것이 아닌가?, 그 불이 꺼져 버리면 '내 앞에 타고 있던 그 불이 꺼졌다'고

    그대는 알 것이 아닌가?라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다음은 이어지는 대화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 불이 꺼졌는데, 꺼진 그 불은 꺼진 후에 어떤 방향으로 갔는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그 말씀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불은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타올랐고

        그 연료를 다 써버리고 더 이상 다른 연료의 공급받지 못하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고 합니다."

                         

                                                (* 왓차곳따 불 경, M72: http://blog.daum.net/ibakdal/17372380)

                      

                        

 - 세존께서는 당신께서는 이같이 1) 물질이라는 이름에서 마음이 해탈하여, 2) 느낌이라는 이름에서

    해탈하여, 3) 인식이라는 이름에서 해탈하여, 4) 심리현상들이라는 이름에서 해탈하여,

    5) 알음알이라는 이름에서 해탈하여,

                       

    그러한 존재 내지 존재의 양식으로는 여래를 묘사할 수 없고,

                             

    1) '태어난다.'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고,

    2)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고,

    3)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고,

    4)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다고 천명하시며,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나니, 마치 맘망대해와 같다고 설하셨습니다.

                     

                                                (* 왓차곳따 불 경, M72: http://blog.daum.net/ibakdal/17372381)

                     

  - 이것이 '존재의 소멸'이요,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입니다.

                  

                  

【3】지금여기에서도 여래를 실재하고 견고하다고 입증하지 못함

                      

  - 세존께서는 다섯 무더기의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설하신 후,

                  

     1) 여래를 물질(色)로도, 느낌(受)로도, 인식(想)으로도, 형성들(行)로도, 알음알이(識)로도

         관찰할 수 없고,

     2) 색, 수, 상, 행, 식 안에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요,

     3) 섹, 수, 상, 행, 식이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도 아니요,

     4) 물질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인식도 아니요, 형성들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닌 것이

         여래인 것도 아니라고 설하시면서,

                       

     여래를 눈 앞에 두고 대화를 하는 그 현재에서마저도

    '지금여기(현재)에서도 여래를 실재하고 견고하다고 입증하지 못한다.'라고 설하십니다.

                      

                                               (* 아누라다 경, S22:86: http://blog.daum.net/ibakdal/17371795)

                     

                        

  - 세존께서는 당신 자신의 '존재'를 보심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존재의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물고' 계신 것입니다.

                           

     현재의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보시는 바, 하물며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천명하겠는가라고 위와 같은 표현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설하십니다.

                          

                         

  - 세존께서는 "'여래의 알음알이는 이것에 의지해 있다'라고 파악할 수 없다."라고 천명하십니다.

                        

     1) 빗장을 밀어제쳤고 _ 무명을 제거하여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였고,

     2) 도랑을 가득 채웠으며 _ 다시 태어남을 가져다주는 태어남의 업형성역을 제거하여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였고,

     3) 기둥을 뽑아버렸고 _ 갈애를 제거하여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였고,

     4) 걸쇠를 풀어버렸고 _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들을 제거하여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였고,

     5) 깃발을 거두었고, 짐을 내려놓았고, 족쇄에서 벗어난 성자가 된

                                     _ 나라는 자만을 제거하여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한,

                              

     마음이 해탈한 비구들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비구를 

          인드라나 브라흐마나 쁘라자빠띠를 포함한 신들이 찾으려고 해도 

         '여래의 알음알이는 이것에 의지해 있다.'라고 파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여래를 지금‧여기에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 뱀의 비유 경, M22: http://blog.daum.net/ibakdal/17371911)

                           

     어째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까? 

     존재가, 존재임을 알 수 있는 양태(樣態)가, 오온이, 거머쥠이, 취착이, 의지하는 바가,

     대상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인데,,, 일체의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있고, 일체를 여의어,,,

     털끝만한 것도 남아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 날아간 흔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존재를 여읩니다.

                    

                 


  - 이와 같이 '존재'를 바로 보아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리신' 그분,

                    

    '1) 때 없는 분, 2) 모든 거울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신 분, 3) 슬픔을 제거하신 분,

     4) 영웅, 5)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 6) 대상(隊商)의 지도자, 7) 빚이 없는 분'

                           

    '1) 일체승자요, 2) 일체지자요, 3) 아라한이고, 4) 위없는 스승이며, 5) 유일한 정등각자이고.

     6) 번뇌 다한 자요, 7) 진정한 승리자며, 8) 일체의 악한 법을 정복했기에 승리자'

                              

                                         (* 성스러운 구함 경, M26: http://blog.daum.net/ibakdal/17371944

                                                                                http://blog.daum.net/ibakdal/17371946)

                      

     이신 그분, 존재를 끝장내버리신 그분께서는 과연 무엇을 설하셨습니까?

                    

                        

 - 존재를, 오온을, 일체 번뇌를 여의신 그분께서는 이같이 설하셨습니다.

                  

       "아누라다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

                      

                                       (* 아누라다 경, S22:86: http://blog.daum.net/ibakdal/17371795)

                       

                     

  5)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  "자아는 있습니까?", "자아는 없습니까?"

                      

  - 왓차곳따 유행승이 세존께 "자아는 있습니까?", "자아는 없습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세존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가 떠난 후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세존께서는 왜 왓차곳따 유행승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세존께서는

                       

         "내가 만일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이것은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들을 편드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했으면

          이것은 단멸론자인 사문·바라문들을 편드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이것은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라는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과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면

                    

         미혹에 빠져있는 왓차곳따 유행승은

        '오, 참으로 이전에 나의 자아가 지금은 없구나.'라고 하면서

         다시 더 미혹하게 되었을 것이다."

                      

                                                  (* 아난다 경, S44:10: http://blog.daum.net/ibakdal/17370660)


                   

 ■ 내가 있다는 생각은 질병이요 가시이다.

                     

 - 세존께서는 '내가 있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요, 질병이라고 천명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이것은 나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허망한 생각은 병이며, 질병이고, 가시이다."

                     

                                                (* 요소의 분석 경, M140: http://blog.daum.net/ibakdal/17370786)

                   

                        

 자아에 대한 미혹

                 _ 오온, 존재, 일체의 일어남·사라짐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자의

                

 -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육입에서의 오온, 존재, 일체의 일어남·사라짐을 꿰뚫어 보지

    못한 자들이 다음과 같이 '자아(自我)'에 대해 혹은 '나'의 '있고없음(有無)'에 대해 미혹된 견해를

    가진다고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나는 정말 과거에 존재했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는가?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에 어떠했을까?

          나는 과거에 무럿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라고

                           

          과거로 치닫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나는 정말 미래에도 존재할까? 

          아니면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에 어떠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라고

                   

          미래로 치닫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현재에 대해서 안으로 의심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갈애 멸진의 긴 경, M38: http://blog.daum.net/ibakdal/17372051)

                 

                       

 6)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길래,, '나'를 어떻게 보고 있기에,,, 

                                    거기에 대해서 혼란도 걱정도 의심도 없다는 말인가?

                    

 ■ '나'는 내가 만든 것도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_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원인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 '나'?, 원인이 있어 드러났으며, 원인이 부셔지면 소멸한다네.

    아라한이신 셀라 비구니께서는 '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천명하십니다.

    단지 내가 아닌 원인이 있어 생겨난 것이라 설하십니다. 그 원인조차에도 '내'가 없습니다.


                      

    [마라 빠삐만]

                   

        "누가 이 꼭두각시를 만들었는가?

         꼭두각시를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셀라 비구니]

          

        "이 꼭두각시는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요

         이 불쌍한 것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잘 자라기 위해서는 

         땅의 영양분수분

         둘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도다.

                      

         그와 같이

         무더기들(蘊)요소들(界)여섯 감각장소들(處)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 셀라 경, S5.9: http://blog.daum.net/ibakdal/17370027)

                   

               

 ■ '나' _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되어 드러난 무더기에 대한 인습작인 표현

                      

 - '나',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되어 드러난 무더기(蘊)를 부르는 '인습적인 표현'

                     

    [마라 빠삐만]

               

       "누가 중생을 창조하였는가?


        중생을 창조한 자는 어디 있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와지라 비구니]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行)들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도다."

                    

                                            (* 와지라 경, S5.10:  http://blog.daum.net/ibakdal/17370029)

                  

                      

 ■ '나'의 몸 _ 사대(四大, 물질)가 원인을 따라 허공에 모여있는 것

                       

 - '나'의 몸, 나의 것이 아니다.

                 

        "내적인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릐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

         외적인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릐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

         그것은 단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릐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일 뿐이다.

                   

         이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 보아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를 염오하고

         마음이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릐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한다." 

                     

                                     (* 라훌라를 교계한 긴 경, M62: http://blog.daum.net/ibakdal/17372298)

                   

                     

       "도반들이여, 

        마치 목재와 덩굴과 진흙과 짚으로 허공을 덮어서 

       '집'이라는 명칭이 생기는 것처럼 

                       

        그와 같이 

        뼈와 신경과 살과 피부로 허공을 덮어서 

       '몸[色]'이라는 명칭이 생깁니다."

                             

                             (*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 M28: http://blog.daum.net/ibakdal/17371966)

               

                       

       "보라, 잘 치장했고 상처덩이이고

        잘 세워진 저 몸을.

        그것은 고통스럽고 많은 관심의 대상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보라, 보석과 귀걸이로

        잘 치장한 형색을.

        해골이 피부에 포장되어

        옷으로 아름답게 꾸며졌구나."

                       

                                               (* 랏타빨라 경, M82: http://blog.daum.net/ibakdal/17372495)

                 

                 

 ■ '나' _ 무명의 세상에, 업의 들판에서,

                    알음알이를 씨앗으로, 갈애를 수분으로 핀, '나'라는 이름의 '존재'

                    

 - 「앙굿따라 니까야」의 「존재 경」(A3.76)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존재, 존재라고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됩니까?

                  

        “아난다여, 

         욕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저열한 []계에 알음알이를 확립한다.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런 것이 존재이다.”

                       

         (이같이 색계, 무색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설하신다.)

                    

               

 7)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을 짓고 받는다는 말인가?

                     

 ■ 다시 그 질문으로

              

 - 본 경 「보름밤의 간 경」의 마지막에 어떤 비구는

                    

       '참으로

        물질은 자아가 없다고 한다   

        느낌은 자아가 없다고 한다.

        인식은 자아가 없다고 한다.

        심리현상들은 자아가 없다고 한다.

        알음알이는 자아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라고."

                  

    하는 의문을 일으킵니다.

                  

                    

 - 주석서는 이 질문의 뜻이 "이 비구는 '(업을 저장하는) 자아가 없는데

    어떠한 자아에 서서 그 업이 과보(vipaka)를 생성하는가?'라는 것임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자아는 있는 것입니다.'라는  주장이 될 수 있습니다,.

                 

    주석이 "그것은 상견(常見,sassata-dasana)에 빠지는 것임을 아셔서"

    그 다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설하시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 반면 다른 관점에서 이 바구의 질문의 뜻을 살펴보면,,,

                 

   '자아가 없는데,,,  없는 자아에 무슨 업을 짓든 간에,,, 그 과보를 받을 자아도 없지 않은가?,,'

    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존의 말씀대로 자아가 없다면,,,

   '결국 업도 없고, 괴보도 없다.'라는 말이 되고말지 않는가? 라는 뜻인 것입니다.  

                         

    바로 '죄악도 공덕도 없다'라는 뿌라나 깟사빠의 교설이요, '선행도 악행도 없다'라는 아지따

    께사깜발라의 교설이기도 합니다.

                                                   (* 사문과경, D2: http://blog.daum.net/ibakdal/17369859

                                                                            http://blog.daum.net/ibakdal/17369861)

                

    이는 혹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깨달았다.', 혹은 '무아(無我)'에 이르렀다, 혹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깨달아 '대자유인' 이 되었다, 혹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운운하면서 막행막식하는 무리들과 닮아 있어서 실로 이 질문이야말로 오군비구나 오군비구니

    무리들의 그것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주석이 이를 받아 '자아가 없는데, 어떤 자아에 서서 과보가 생성되는기?'라고 받아 주석한 것은

    이 비구가 '자아라는 것이 없을 리가 없다. 어쨌든 있으니 인과가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관점으로 기울면 그가 상견(常見)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요,

            

    이 비구가 '자아가 없다면 결국 인과도 없는 것 아닌가?'라는 관점으로 기운다면 그가

    단견(斷見)에 빠질 위험이 있는 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낭떠리지인 외길 절벽에 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다는 말인가?

           
【1】세존께서는 업을, 과보를, 존재를 수도 없이 천명하셨습니다.

                 

  - 세존께서는 그 '존재'의 근본원인이 업이고, 그 '존재'의 업이 그의 귀의처라고까지 설하십니다.

                

        "'나는

                

          1) 업만을 재산으로 하고,

          2) 업의 상속자이고,

          3) 업이 근본원인이고,

          4) 업의 권속이고,

          5) 업이 귀의처이다.

                   

          좋은 일을 행하든 나쁜 일을 행하든 나는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여자든 남자든 자주 반조해야 한다."

                      

                   (* 앙굿따라니까야, 다섯 가지 모음, 57번째 경: 아빈하빳짜웨키땁바타나숫따 웃데사

                                                                                            「자주 반조해야 할 점들 경」 서문)

                     

                       

  - 세존께서는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삼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없다.'고

     설하십니다. 업이 없디면 그 존재는 물론 그 존재에게 드러니는 세상 즉 온(蘊), 처(處), 계(界)

     조차도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존재, 존재라고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됩니까?

                   

        “아난다여, 

         욕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있는가?

                           

                                                                                  (* 앙굿따라 니까의  「존재 경」, A3.76)

                       

                        

  -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세존께서는 '존재가 없다.'라고 설하시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설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정반대로 존재를, 그 존재가 거주하는 31처의 세상까지를 낱낱이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여래는

     1) 지·수·화·풍(地·水·火·風): 근본물질인 4대(四大)이므로 '물질'에 대해서,

          2) 존재, 신들, 빠자빠띠, 브라흐마: 삼계(三界)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

          3)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승자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삼계의 존재가

              거하는 모든 '세상(界)'에 대해서,

          4) 본 것, 들은 것, 감지한 것, 안 것: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入)의 대상인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를 통해 일어난 일체의 '오온(五蘊)' 내지 일체의 '알음알이(六識)'로

              혹은 '일체의 감득(感得)한 것'에 대해서,

          5) 동일한 것, 다른 것: '나'가 있음으로 인한 일체의 판별이나 '사량분별'에 대해서, 

          6) 일체: 수행지의 인식이 더욱 높아져 나와 나 아닌 것 일체가 융섭된 경지에 대해서,

          7) 열반: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즉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 실상을 바로 알고 바로 보는, 즉 나고죽음을

              여읨(靜)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존재, 그 존재 앞에 폂쳐지는 물질·정신현상(名色),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界), 그곳에서 그들이 감득하는 일체와 그 알음알이(識),

           그 알음알이로부터의 일체의 사량분별,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아(個我, 아트만, atman)를

           초월한 전체(梵, 브라만, brahman)로의 범아일여(梵我一如) 혹은 일체, 

           그리고 그 모두를 바로 보아(正見) 초월한 열반이라 7가지이니,

                            

           이것은 각각으로 혹은 연하여 전부라는 것이 있다면 그 전부를 넘어선 것까지의 전부인

          '존재'를 다른 말로 '오온'을, '꿰뚫어 알아서' 여래가 되셨음을 천명하십니다.

                            

                                                           (* 법의 뿌리 경, M1: http://blog.daum.net/ibakdal/17371533)

                                       

          세존께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꺼내서 꿰뚫어 아시고 천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아시고 보시는' 것이며, 바로 그 '존재'를 '바로 보아 꿰뚫어 알아라.'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2】업(kamma)과 과보(vipaka), 인과(causality)는

                                드러난(생겨난) '존재'에게 펼쳐지는 정신·물질의 전개 원리

                           

  - 세존께서 업과 과보를 설하심은 존재계(存在界) 즉,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계박되어 의도된 형성행위인 업을 짓고, 알음알이를 확립하여,

     갈애 취착을 수분으로 하여, 삼계(욕게, 색계, 무색계)에 태어남을 받아 생겨난(드러난)

     어떤 '존재'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의도된 행위를 하면, 즉 업(業)을 지으면,

     즉 존재계의 구성요소, 혹은 오온, 혹은 정신·물질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 즉 과보를 가져온다는, 그 어떤 '존재'에게 적용되는

    '정신·물질계', 즉 '존재계'에서의 정신·물질의 전개 원리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세존께서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꿰뚫어 깨달으시고, 사성제를 천명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천명은 "일체 존재는 괴로움이다."라는 진리의 천명입니다.

                    

     세존께서는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거기에 내라 할 것이 없음을, 거기에 내가 없음을,

     진실로 내가 없음을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여',

     존재의 소멸, 존재로부터의 벗어남, 괴로움의 소멸, 윤회의 끝을 선언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리하여 존재를, 오온을, 일체를 염오하여 해탈함이 마땅하다고 설하십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형성된 것들(諸行)은

           모두 역겨워 해야 마땅하며(厭惡)

           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離慾)

           해탈해야 마땅하다.(解脫)"

                        

                                       (* 마하수닷사나경, D17: http://blog.daum.net/ibakdal/17370271)

                  

                    

  - 그러므로 오온 즉 '존재'를 바로 보아 그 '존재의 소멸', 즉 '열반'에 이를 것을 설하신 것이

     바로 세존의 가르침입니다.

                      

          "취착(取)이 일어나기 때문에 존재가 일어납니다.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합니다.

                    

           이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가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 바른 견해 경, M9: http://blog.daum.net/ibakdal/17371737)

                      

                

  - 세존께서 아라한에 대해서

                  

         "여기 공덕과 죄악의 두 가지 매듭을 모두 넘어서

          슬픔 없고 흠 없고 청정한 자,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 와셋타 경, M98: http://blog.daum.net/ibakdal/17372643)

                       

     와 같이 아라한이 악업도, 선업도 짓지 않는다 하심은 그가 업과 과보에 매여있는 '존재계'의

    '존재'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존재'를 남김없이 소멸했습니다. 그는 행처(行處)도

     의지처(依支處)도 없으며, 다시는 어디에 '있다'함도 '없다'함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벗어난 

     그가 의도를 일으켜 이 일체 일어남·사라짐의 세상에 들어 '존재'를 다시 입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3】비구의 생각이 잘못된 점

               

  ◎ 비구의 질문: 그런데 '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

             

  - 이 비구의 의문은 아래의 2가지 경우가 그 뿌리입니다.              


   ▶ 경우1: 주석서와 같이 이 질문의 뜻이 '업을 (저장하는) 자아가 없는데 

                  어떠한 자아에 서서 그 업이 과보를 생성하는가?'라는 것이어서,

                  

                  이 비구의 마음 기울임이 '인과는 언제든 분명한 것이어서어떤 경우에도 자아는

                  있어야만 하는 것이며, 도대체 자아가 없는 경우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자아 없음'을 설하시면서 동시에 '업과 과보'를 설하시는 

                  세존의 가르침은 틀린 것이다. 자아가 있는 것이기에 업과 과보가 있는 것이다

                  향하는 경우. 

              

   ▶ 경우2: 이 비구의 의문이 '자아가 없다면,,,  없는 자아에 무슨 업을 짓든 간에,,,

                 그 과보를 받을 자아도 없지 않은가?,는 것이어서,


                 그 마음 기울임이 세존의 말씀대로,, 결국 자아란 없는 것이 궁극 실상이구나,

                 그렇다면 '결국 업도 없고, 괴보도 없는 것이 실상이다.


                 그렇다. 자아는 원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존께서 '업과 과보'를 설하시는

                 것은 실상과는 틀린 것이다. 그것은 방편이고 취향일 뿐,, 으로 향하는 경우

                 

                  

  ◎ 문제의 핵심 _ 이 비구가 꿰뚫어 보지 못하는 있는 3가지

            

  - 세존께서는 이 비구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 대해 

                 

        " 1) 알지 못하고,

          2) 무명에 빠져,

          3) 그의 마음이 갈애에 지배되어,

                

          마음으로 스승의 교법을 능가하리라 생각하면서"

                   

                                      (* 보름밤의 긴 경, M109: http://blog.daum.net/ibakdal/17372764)

                 

     라고 설하십니다.

                          

     본 경에 나타난 이 아무 것도 아닌 서술처럼 볼 수도 있는 가르침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 까다로운 의문의 핵심적인 문제점 3가지를 마치 대나무를 쪼개듯이 쪼개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왜 그렇습니까?

            

    1] 이 비구는 '자아가 있다' 혹은 '자아가 없다'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매여있습니다.

        

        → 세존께서는 그것이 '나'든, '자아'든, '존재'든, '오온'이든, '세상'이든

            그것이 '있다'는 관념도, '없다'는 관념도 가지지 않고, 그런 관념이 없음을 천명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연기(緣起), 즉 '조건따라 생겨남'으로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비구는 무엇을 보지 못하기에 '자아는 있는 것이다, 자아는 없는 것이다.'에 천착하는

            것입니까? 연기(緣起)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지 못합니다.

                 

                

    2] 이 비구는 '자아가 있기에 업과 과보가 있고', '자아가 없다면 업과 과보도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여기 비구는 업(kamma)과 과보(vipaka), 즉 인과(causality)에 대래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과는 무명의 세계에서 '업을 들판으로, 알음알이를 씨앗으로, 갈애를 수분으로,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어떤 세상(界)에, '존재'를 입고',,,

            '존재'로 존재계(界) 즉 정신·물질계에 머물 때, 그 '존재'에게 펼쳐지는 정신·물질이 펼쳐지는

            원리요 법칙입니다.

                

            그 '존재'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의도와 함께 정신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業)를 하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따르는 것을 두고 업과 과보, 인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존재'로서 '존재계'에 몸 담고 있기에 응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에서

            벗어난 세계에는 업도 과보도 인과도 없습니다. '존재'가 없을 뿐아니라, 정신물질(현상)도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비구는 세존께서 설하신 바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

            즉 존재들, 다섯 무더기, 전체 괴로움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다른 말로 '존재들'의 소멸,

            존재로부터의 벗어남, 열반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고 있어서,,, 자아가 없는 것이 궁극의

            실상이라면 '존재' 내지 '존재계'에 적용되는 업도 과보도 없는 것이라고,,,  혹은 반대로

            업과 과보의 영역을 벗어난 세계 즉, 정신·물질의 일어남·사라짐이 소멸한 세계에까지 

            정신·물질의 전개원리인 인과를 확장하여 오독하고,,  자아가 없다면 업과 과보도 없는 것이

            실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 비구는 무엇을 보지 못하기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까?

           '존재의 소멸'을 바로 보지 못함입니다. 즉 존재가 무엇인지, 존재의 일어남을, 존재의 소멸을,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모르는 것이니,,, 사성제를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명에 덮혀있는 것입니다.

                   

                

    3] 이 비구가 '자아가 있다.'라고 생각하든, '자아가 없다.'라고 생각하든,

                           그것은 실상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갈애의 표출일 뿐입니다.

                  

        → 여기 비구가 어떤 이유로든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상견(常見)이라 하고, 그것은 '존재(存在)에 갈애(有愛)'에 다름 아닙니다.

              

            여기 비구가 어떤 이유로든  '그러므로 자아가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단견(斷見)이라 하고, 그것은 '비존재(非存在)에 대한 갈애(無有愛)'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아룰러 그 어떤 견해도 실상과는 멀리 떨어진 것입니다. 이 비구는 자신이 그렇게 그런

            갈애에 묶여잇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세존께서 그가 '알지못하고, 무명에 덮혀있고, 그의 마음의 갈애에 지배되어서'라고 

   지적하시는 것은 참으로 지당하신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 비구가 처한 위험

            

   ▶ 경우1: 주석서와 같이 이 질문의 뜻이 '업을 (저장하는) 자아가 없는데 

                  어떠한 자아에 서서 그 업이 과보를 생성하는가?'라는 것이어서,

                  

                  이 비구의 마음 기울임이 '인과는 언제든 분명한 것이어서어떤 경우에도 자아는

                  있어야만 하는 것이며, 도대체 자아가 없는 경우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자아 없음'을 설하시면서 동시에 '업과 과보'를 설하시는 

                  세존의 가르침은 틀린 것이다. 자아가 있는 것이기에 업과 과보가 있는 것이다

                  향하는 경우. 


            

   ☞ 1) 이 경우 세존의 마부였던 찬나 장로와 같이, '오온에 내가 없음'의 지혜에 확고히 설 수 

           없게 됩니다..

                   

         '자아가 없다면 이 몸과 마음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의지하여 산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하여, 일체에 존재에 내가 없음(無我)을 보려고만 하면 마치 절벽의 가장자리에 

          선 것처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연기(緣起)를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이러한 견해를 고수하는 한 이 비구는 '자아는 있다.'라는 상견(常見)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오온에 내가 없음'을 보아 '존재의 출구', '괴로움의 출구'에 다가갈 수 없게 됩니다.

              

            

   ▶ 경우2: 이 비구의 의문이 '자아가 없다면,,,  없는 자아에 무슨 업을 짓든 간에,,,

                 그 과보를 받을 자아도 없지 않은가?,는 것이어서,


                 그 마음 기울임이 세존의 말씀대로,, 결국 자아란 없는 것이 궁극 실상이구나,

                 그렇다면 '결국 업도 없고, 과보도 없는 것이 실상이다.


                 그렇다. 자아는 원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존께서 '업과 과보'를 설하시는

                 것은 실상과는 틀린 것이다. 그것은 방편이고 취향일 뿐,, 으로 향하는 경우

            

   ☞ 1) 이 경우는 상윳따 니까야 야마까 경의 비구 야마까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일체가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라고 잘못된 결론에 이르러. 삶을 완성한 아라한이

           죽으면 윤회하는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열반이요 궁극의 본질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존재의 소멸'이라는 뜻과 '열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 비구는 세존께서 '오온에 자아가 없다.'하심을 아예 연기적 존재인 '나'라는 '존재'

           조차가 없다는 말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자아 없음'을 아직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를 보지 못했고(무명에 덮혀 

           있고), 갈애의 일어남(苦集聖諦)를 보지 못했고, 갈애의 멸진(苦滅聖諦)을 보지 못하여,

           갈애가 끄는대로 취착하여 생겨난 그 '존재', 그러므로 여전히 윤회하고 인과에 지배받을

           수 밖에 없는 '그'가, 그 '존재'가 아예 없다 하신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연기(緣起)를 설하실 때 '존재'가 없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취착이 있을 때

           존재가 있다.'고 설하십니다.

                 

       3) 그는 이제 일체 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따라 의도를 일으키면

           마음이 앞서는 대로 행위하며 그 결과로 끝없이 정신물질이 펼쳐짐에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내기 여기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내가 없다하고 눈앞에 펼쳐지고 느끼는 현실을 계속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러한 견해를 고수하는 한 그는 결국 결코 '괴로움의 출구'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4) 이같은 견해를 고수하면 그는 살아있으면서도 이미 단견(斷見)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로 인해 업도 과보도 없다는 사견업(邪見業)을 지으니 악처에 떨어질 것이 

           예상됩니다.

                           

       5) 혹은 스스로는 무아(無我)를 깨달아, 업도 과보에도 나도 본성이 공(空)함을 알았으니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걸릴 것이 없다(無涯)라고 하면서, 비구의 계(戒)는 커녕

           살생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음행하고, 거짓말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친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술 마시는 것을 임의대로 하며 개의치 않게 됩니다.

                   

           그와 같이 해로운 업을 산처럼 쌓습니다. 그는 계행(戒行)을 닦는 자를 보고 웃습니다.

           "아직도 세존의 가르침의 진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나 없음을, 일체가 공(空)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방편으로 설하신 계행에 묶여서 사느냐?'고.

         

            

[※ 공(空, sunnata)에 대해서]

            

- 세존께서는 '공(空, sunnata)'을 설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공에 대한 짧은 경」(M121)

   같은 경우입니다.

            

   구경 '열반'은 다른 표현으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며, '취착 없는 완전한 해탈'이라고도

   합니다.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 없는 공'(탁발음식의 경, M151)도 열반의 다른 이름입니다.

   '진공(眞空)'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 '있는 것은 분명히 있고, 없는 것은 분명히 없는 것'이 공(空)입니다.

                  

       "'이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되기 마련인 것이다.'라고.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에서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그러나) 그는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감각장소와 관련한 것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관찰하고

         거기에 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공에 대한 짧은 경, M121: http://blog.daum.net/ibakdal/17372098)

              

   예를 들면, 이것이 세존께서 설하신 유여열반의 공의 경지입니다.

         

          

- 그와 같이 있어야 할 것은 분명히 있고, 없어야 할 것은 분명히 없는 것, 그리하여

   즉 그와 같이 갈애를 소멸하여 삼천대천세계가 눈앞에 일어나고 지더라도

   다시는 그 일어남·사라짐에 들지 않는 것이 공(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세존께서는 중생들이 갈애와 취착으로 거머쥔 그 '존재'에서 '자아 없음'을 설하시는 것이지,

   어떤 가르침에도 연기적 존재로서의 '나'는 없다. '존재'는 없다, 업도 없고 과보도 없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허망에 환영에 떨어질 것입니다. 세존의 가르침 어디에도

   그같은 식의 유뮤를 초월한 공(空)의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 어떤 공(空)의 경지도 태산과 같은

   계행(戒) 위에서만 피어날 뿐임을 설하십니다.

                

- 만일 누가 '나'는 없다, '존재'는 꿈이요 환영이다, 지옥도 천상도 방편이다, 업도 없고 과보도 없다,

   세존께서 그를 설하심은 방편이다 '라고 한다면 그는 아직 '법을 만나지 못한 자'일 뿐입니다.

   그는 실로 세존께서 설하신 바, '뱀의 꼬리를 잡은 자'입니다. 법을 잘못 집어들고 자신과 다른 이를

   같이 미혹하니,, 뱀의 머리가 돌아서 물 것을 두려워 해야 할 것입니다

           

         

           

[※ 해탈한 비구가 다시 타락하거나 계를 범할 수 있는가?]

        

  ■ "해탈한 비구가 다시 타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세존께서는 출가한 비구들에 대해서,


       1) 이득과 존경과 명성에 취하여 방일하게 된 자,

       2) 계의 구족에 취하여 방일하게 된 자,

       3) 삼매의 구족에 취하여 방일하게 된 자,

       4) 지와 견의 구족에 취하여 방일하게 된 자,


    가 되어 '괴로움 속에 머문다.'라고 경계하시고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 그가 출가하여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얻더라도 방일하지 않아서 게의 구족을 성취하고,

    계의 구족을 성취하더라도 방일하지 않아서 삼매의 구족을 성취하고,

    삼매의 구족을 성취하더라도 방일하지 않아서 지와 견의 구족을 성취하고,

    지와 견의 구족을 성취하더라도 방일하지 않아서 '일시적이지 않은 완전한 해탈'을 성취한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가 일시적이지 않은 [완전한] 해탈에서 타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청정범행은 

        1) 이런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공덕으로 삼지 않는다.

        2) 계의 구족을 공덕으로 삼지 않고,

        3) 삼매의 구족을 공덕으로 삼지 않고

        4) 지와 견의 구족을 공덕으로 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청정범행의 목적이고 청정범행의 심재이고, 청정범행의 완결이다."라고.


                                  (* 심재 비유의 긴 경, M29: http://blog.daum.net/ibakdal/17371979)

                                                                             


  ■ 바르게 깨달은 제자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범할 수 없는 아홉 가지


    - 그가 바르게 깨달은 세존의 제자라면,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다음의 9가지를 범하지 않는다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는 다시는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는 일도, 성내는 일도, 다시 알어남사라짐에 들어 존재를

       입는 일도 없습니다. 하물며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살생하고, 가지고, 교접하고, 거짓말하는

       행위를 하겠습니까?


          "도반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알고 보시는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는 제자들에게

           목숨이 있는 한 범하지 못하는 법들을 설하셨고 천명하셨습니다.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비구는

           아홉 가지 경우를 범할 수 없습니다.


           1) 번뇌가 멸한 비구는 고의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습니다.

           2) 번뇌가 멸한 비구는 도둑질이라 불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3) 번뇌가 멸한 비구는 성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4) 번뇌가 멸한 비구는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5)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 두고 감각적 욕망들을 즐길 수 없습니다."


           6) 번뇌 다한 비구는 열의 때문에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7) 번뇌 다한 비구는 성냄 때문에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8) 번뇌 다한 비구는 어리석음 때문에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9) 번뇌 다한 비구는 두려움 때문에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정신경, D29: http://blog.daum.net/ibakdal/17371371)



    -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일체 감각적 욕망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재난 그리고 벗어남을 꿰뚫어 알고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풀어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가 않아서 입니다.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듯이',,,,

       모든 행위 앞에 마음이 앞섭니다. 마음이 그런 행위를 할 의도가 일어나지 않는데,,,

       무아(無我)여서 무념(無念)으로 그런 행위를 임의대로 걸림없이 한다는 말은,,, 

       여기 뿌리없는 나무가 있는데 감도 열리고 사과도 열리더라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이요 미혹이요 사기인 것입니다.

        

                      

          "마음이 그들[五蘊]을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고통(불만족)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 법구경, 제1게송: http://blog.daum.net/ibakdal/17371528)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행복이 뒤따른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듯이"

                     

                                                   (* 법구경, 제2게송: http://blog.daum.net/ibakdal/17371537)


      

     

【4】비구의 의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와 같은 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답하여 그 의문을 바로 보아 해소하게 하겠습니까?          

     세존께서는 '자아'에 천착하여 규명하려 하는 뽓타빠다 유행승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인식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

                 

         "뽓타빠다여,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두고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

              

                                             (* 뽓타빠다 경, D9: http://blog.daum.net/ibakdal/17370618)

          


  - 그와 같이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을 짓고 과보를 받습니까?'라고 묻는 이 비구에게

     그가 연기(緣起)를 알지 못하여, 사성제를 알지 못하여, 갈애에 지배되어,

     '자아'의 있고없음에 매여 있는 바,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두고 자아라고 하는가?"라고 되물을 수 밖에,

     그리고 그대가 '자아'라고 거머쥔 그 어떤 것도 결국 '나'도, '나의 것'도, '나의 자아'도

     아닌 것임을 설명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 비구에게 바로 그렇게 설하십니다. 

     먼저 오온을 설하시면서 '자아 없음'을 설하셨으므로,

     이제 '오온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세존께서 비구의 의문에 답하심


(이상은 보름밤의 긴 경 후기에서 비구의 질문에 대한 부분을 별도로 적은 것입니다.

 이어서  Ⅲ. 세존께서 비구의 질문에 답하심은 후기1)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