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추라기 비유 경은
세존께서 앙굿따라빠의 아빠나라는 앙굿따라빠들의 성읍에 머무실 때
우다이 존자가 명상 중에 먹는 것과 관련하여 세존께서는 참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괴롭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해주셨고, 많은 즐겁고 유익한 법들을 가져다주셨다.'라는 마음이
떠올라 세존을 찾아뵈었을 때, 이를 계기로 세존께서 우다이 존자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우다이 존자는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적당하지 않은 때에 먹는 것 즉, 오후에 먹는 것 그리고 저녁에
먹는 것을 차례로 금하신 것을 말씀드리며, 처음에는 '당황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느꼈음'을,
그러나 '세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과,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보면서' 그것을
버렸음을 말씀드리고, 그런 것을 기억하면서 위와 같이 세존께서는 괴롭고 해로운 법들은 제거하고
즐겁고 유익한 법들은 가져다주셨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아룁니다.
■ 세존께서 '버리라'고 하는 것은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지나친 완벽을 위해서가 아니다.
_ 그것이 강하고, 견고하고, 질기고, 썩지 않는 속박이고 두터운 족쇄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적당하지 않은 때 먹는 것'을 금하시는 것처럼, 세존께서 어딴 것을 '버리라'라고 하실 때 어떤 자들은 '뭐 이런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것까지?' 이 사문은 지나친 완벽주의자로군!' 과 같이
대꾸하면서 세존과 그러한 세존의 말씀을 따르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고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불만을 드러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그것이
강하고 견고하고 질기고 썩지 않는 속박이며, 두터운 족쇄이기 때문이다라고 꿰뚫어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이같은 도리를 아래의 4가지 비유로써 설하십니다.
1) 썩은 넝쿨에 묶여 부상을 당하고 감금 되어 죽음에 이르른 암 메추라기
→ 여기서 암 메추라기는 세존께서 버리라고 하시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요,
썩은 넝쿨은 그들이 사소하고 보잘것 없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다치게 하고 감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존께서 버리라고 하는 괴롭고 해로운 법들입니다.
2) 묶어 놓은 가죽끈을 끊어버리는 건장하고 전쟁에 능숙한 왕의 코끼리
→ 여기서 건장하고 전쟁에 능숙한 왕의 코끼리는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요
그를 묶어 놓은 질긴 가죽끈은 그같은 자에게 강하지 않고 허약하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음
3) 가난하고 무일푼이고 곤궁에 처한 사람이 출가하고자 하여도 그가 가진
허름한 오두막, 초라한 침상, 한 항아리의 곡식과 씨앗, 봎품없는 아내를 버리지 못하여
출가하지 못함
→ 그가 가진 오두막, 침상, 곡식과 씨앗, 아내 등은 말로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다치게 하고 감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존께서 버리라고 하는
괴롭고 해로운 법들입니다.
4) 모든 것을 버리고출가하는 장자나 장자의 아들의 출가
→ 이 경우 수많은 금괴, 곡식, 짐마차, 전답과 토지, 아내, 하인, 하녀도
강하지 않고 허약하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음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이런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까지 세존께서는 버리라고 하시는구나.
선서께서는 포기하라고 하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받아들이며
그것을 버리고, 나와 나의 가르침대로 공부짓고자 하는 비구들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담담하고 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시주물로만 살고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머문다.
그들에게 이것은
강하지 않은 속박이고 허약한 속박이고 썩은 속박이고 속 빈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밝혀 설하셨습니다.
■ (갈애에) 속박된 자/속박되지 않은 자
세존께서는 이어서 이 세상에 4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중 3가지 부류는 '속박된 자'라하고 1가지 부류를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설하십니다.
'속박된 자'의 3가지 부류는
재생의 근거를 놓아 버리기 위해 도를 딖을 때,
1) 그가 재생의 근거와 관련한 기억과 사유들을
품고, 버리지 못하고, 제거하지 못하고, 끝내지 못하고, 없애지 못하여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하는 경우
2) 그가 재생의 근거와 관련한 기억과 사유들을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애지만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에 압도되는 경우
3)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에 압도되지만
빨리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애는 경우
를 '속박된 자라고 하지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4) 재생의 근거야말로 괴로움의 뿌리라고 알고서,
재생의 근거를 여의고 재생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하는 경우
이를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주석은 범부(puthujjana), 예류자(sotapanna), 일래자(sakadagami), 불환자(anagami)의 4부류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 자'라고 하며, 또한 '버리는 자'라고도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불환자도
'와, 행복해'라고 즐기기 때문이며, 위빳사나를 시작한 비구가 범부라 할지라도 오염원이 일어나면
절박감에 이를 뿌리뽑기 때문이라 하는데, 참조할만한 견해라 생각됩니다..(MA.iii.170)
또한 세존께서는 위와 같이 어떤 자는 속박되었고, 어떤 자는 속박되지 않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 사람이 가진 기능의 차이를 알기 때문이다.'라고
밝혀 말씀하시는 것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능이라 함은 그 사람의 근기 즉 근(根, indriya)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어떤 중생이 가진 기능을 특수하고 고유한 능력의 측면에서 해체해서 보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모두 22가지의 관점으로 22근(根)입니다.
1) 6가지 감각기능의 기능 : 눈, 귀, 코, 혀, 몸, 마노의 기능(眼根, 耳根, 鼻根, 舌根, 身根, 意根)
2) 3가지 생명으로서의 기능 : 여자, 남자, 생명의 기능(女根, 男根, 命根)
3) 5가지 느낌의 기능(五受根) : 즐거움, 괴로움, 기쁨, 불만족, 평온(樂根, 苦根, 喜根, 優根, 捨根)
4) 5가지 믿음 등의 기능(五根): 믿음, 정진, 마음챙김, 삼매, 지혜(信根, 精進根, 念根, 定根, 慧根)
5) 3가지 성자들의 기능 :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구경의 지혜의 기능(己知根),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
의 22근이 그것입니다. (* 22根: http://blog.daum.net/ibakdal/17371791)
이렇게 그 사람의 기능(根, indriya)의 관점에서 속박된 자와 속박되지 않은 자를 보면,
메추라기에게는 썩은 넝쿨도 강한 속박이지만, 잘 훈련 받은 힘센 코끼리에게는 질긴 가죽끈도
아무 장애가 되지 않듯이, 그 도(팔정도)를 닦아서 얻은 갈애를 벗어나는 힘(능력)이야말로
그를 속박된 자로부터 속박되지 않은 자로 벗어나게 하는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신물질이라는 갈애의 늪에 빠진 코끼리는 자신의 힘으로 죽을 힘을 다해 스스로 거기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 법구경 327게송, 빠웨이야까 코끼리 이야기: http://blog.daum.net/ibakdal/17370844)
다른 말로 5가지 기능의 힘이니 37보리분법에서 오력(五力)이라함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라
이해됩니다. 오력(五力)이 있을 때 칠각지(7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하나씩 하나씩 그 구체를
드러내고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제게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왜 세존께서는 세존께서 '버리라'리고 하신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그런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강한 속박이요
족쇄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신 후 이 '속박된 자, 속박되지 않은 자'의 법문을 설하시는가?
둘째는 아라한은 아예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갈애가 일어나지만 즉시에 그것을
제거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으로 들었던 바, 이 법문을 따르면 괴연 어느 쪽인지에 대한
의문이 그것입니다.
ㅇ 왜 여기에서 '속박된 자, 속박되지 않은 자'를 설하시는가?
- 세존께서 '버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그렇게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라고 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은 기실 그에게 아직도 정신물질(오온)에 대한 깊은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그것은 '강하고 견고하고 질기고 썩지 않는 속박이요 두터운 족쇄'라고 천명하십니다.
주석에서 '재생의 근거'는 1) 무더기(오온, 정신물질), 2) 오염원, 3) 업형성력, 4) 감각적 욕망의
4가지 재생의 근거를 말한다고 합니다.
-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가 그를 압도한다'힘은 무엇입니까? 위 주석에서는 4가지로
분석하여 '재생의 근거'를 말하지만, 이들은 한 마디로 '정신물질에 대한 갈애'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한 갈애가 그를 압도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세존께서 '버리라'고 하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1)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2) (갈애를) 버림, 3) (갈애를) 놓아버림,
4) (넌더리를 쳐 더 이상 정신물질에 대한) 집착없음'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D22, 대념처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4)
그가 세존께서 '버리라'고 하시는 것을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 잠재성향으로 깊이 뿌리박힌 갈애를 뿌리뽑지 못한 때문이고, 이것은 비록 도를 닦지만
재생의 근거 즉 '정신물질에 대한 갈애'의 기억과 사유에 압도되는 것과 그 근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존께서 갈애에 '속박된 자, 속박되지 않은 자'의 법을 설하시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라 생각됩니다.
- 그리고 그 기준과 성취의 엄격함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도 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를 닦는 자라 하더라도 재생의 근거인 정신물질에 대한 미련과 갈애를
· 품고, 버리지 못하고, 제거하지 못하고, 끝내지 못하고, 없애지 못하고 그에 압도되는 경우,
·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애지만 다시금 다시금 일어나 그에 압도되는 경우,
·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이따금씩 압도되지만 빨리 그에서 벗어나는 경우
모두가 결국은 '속박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ㅇ 아라한은 아예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일어나는 즉시 벗어나는 것인가?
-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속박된 자와 속박되지 않은 자'를 설하시면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계신다고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근거인 오온(정신물질)에 대한 갈애에
압도되지만 빨리 마음챙겨 그것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속박된 자'라고 설하십니다.
- '속박되지 않은 자'는 재생의 근거야말로 괴로움의 뿌리라고 알고서,
재생의 근거를 여의고 재생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한 자를 말한다고 설하십니다.
꿰뚫어 알았고, 그러므로 그것을 여의었고, 부수었고, 낱낱이 풀어서 벗어났기 때문에
'온종일 달군 철판에 두 세 방울의 물이 떨어졌을 때 그것이 즉시에 증발하여 사라지는 만큼' 이라도
갈애를 일으키는 일이 한순간도 영영 없는 것입니다.
-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아라한은 이 모든 것, 내 안에 있는 것이든
밖에 있는 것이든, 오온(五蘊)을 꿰뚫어 알고 바로 봅니다. 당연히 그는 무더기 중의 하나인
느낌(受)를 '바로' 봅니다, 그러기에 그는 느낌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이 법은 「삿짜까 긴 경」
(M36), 그리고 「갈애 멸진의 짧은 경」(M37)에서 상세히 밝히신 바와 같습니다.
마음챙겨 '느낌'을 보면서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든
그에서 1) 무상을, 2) 탐욕이 빛바램을, 3) 소멸을, 4) 놓아버림을 관찰하면 머물기에
(* M37, 갈애 멸진의 짧은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2040)
그 느낌에 마음이 지배당하는 일이 없으므로, 성스러운 연기(緣起)의 법을 따라
느낌을 조건으로 그 다음의 일어나는 '갈애'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여열반(有餘涅槃)인 아라한이라서 오온(정신물질)의 세상에서 오온(정신물질)의 작용이
있는 데에 머물고 있다하더라도, 그가 이같이 마음챙겨 갈애를 바르게 멸진하여 머물고 있는 이상
그는 '존재의 사슬을 끊어버린 채로 머물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그에게 갈애는 일어나지 않고
갈애가 한순간이라도 일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어떻게 속박되지 않는 자가 되는가?, 그 시작으로써
_ 5가닥의 감각적 욕망(갈애)으로부터/마음을 조복시켜(正定)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즐거움을 닦음(出離)
세존께서는 이같이 설하신 후 그렇다면 어떻게 그같이 '속박되지 않은 자'가 그 방법을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이 부분의 법문은 부처님의 가르치신 바 오의(奧義)를 투박스러울 정도로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법문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아주 간결하게 두 가지입니다.
1) '얽어매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꿰뚫어 알아, 이를 두려워 하고 추구하지 않음이요
2) 위를 추구하지 않지 않으면 그의 삶에는 아무 즐거움도 없을 것인 바,
가만히 두면 감각적 욕망을 향애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향해 끝없이 날뛸 이 마음을 조복시켜
초선∼제4선의 바른 삼매(正定)의 '두려워 할 것이 없는'즐거움을 받들어 행하라
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입니다.
ㅇ 여기서 얽어매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은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1)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 2) 귀로 인식되는 소리, 3) 코로 인식되는 냄새, 4) 혀로 인식되는 맛.
5)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의 5가지가 바로 그것임을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 그리고 '이 얽어매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을 일러
1)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 2) 불결한 즐거움, 3) 범부의 즐거움, 4) 고결하지 못한 즐거움이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 그리고 이러한 즐거움들은 행해서도, 닦아서도, 거듭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ㅇ 초선∼제4선의 바른 삼매(正定)
_ 얽어매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의 추구,
즉, '갈애'로부터 마음을 조복받음
-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은 초선∼제4선의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얽어매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거의 모든 중생들이
삶을 통해 평생을 추구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두려워하고,
이와는 명백하게 반대 방향의 전혀 다른 즐거움으로써 '바른 삼매'를 말씀하시고,
바로 그것을 추구하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괴로움의 끝, 윤회의 끝, 존재로부터의 벗어남, 끝없는 정신물질의
전개라는 늪에서 벗어남에 있어서, 도대체 '삼매(定,samatha)'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하는 소중한 가르침이라 이해됩니다.
- 세존께서는 초선∼제4선의 바른 삼매를
1)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여의는) 출리의 즐거움,
2)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갈애라는 불결한 즐거움을) 떨쳐버림의 즐거움,
3) (열의와 들뜸과 재난이 함께하는 범부들의 즐거움을 여읜) 고요함의 즐거움,
4) (고결하지 못한 즐거움이 아닌 무명을 벗어버린, 적멸청정을 향한) 깨달음의 즐거움이라고
설하셨습니다.
- 세존께서는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받들어 행하고, 닦고, 거듭해야 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설하셨습니다.
■ 속박되지 않은 자 _ 작든 크든 모든 족쇄를 벗어난 자
_ 동요됨이 없고 의지하는 바가 없는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
세존께서는 위에서 '감각적 욕망에 의자하여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에 대비하여
'속박되지 않은 자'가 되기 위해 그 첫걸음으로써 초선∼제4선의 선정(禪定, jhana)를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법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출리, 떨쳐버림, 고요함, 깨달음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즐거움을 받들어 행하고, 닦고, 거듭해야 하는 것이지만,
구경의 위없는 깨달음을 위하여는 가야할 길이 더 남아있음을 설하십니다.
'구차제주등지(九次第住等地)'로 알려진 '9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세존께서는 여기서 초선∼제3선의 선정(禪定, jhana)의 증득에 대하여
'나는 이것을 동요하는 법이라고 한다.'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제4선에 이르러 이것을 '동요하지 않는 법'이라고 설하십니다.
1) 초선 :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2) 제2선: 희열과 행복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3) 제3선: 평온과 행복이 소멸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요한다.
4) 제4선: '나는 이것을 동요하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설하신 후 세존께서는 다시 초선∼제4선의 색계선정을 넘어
공무변처∼비상비상상처의 무색계선정의 4선4처, 그리고 상수멸까지의 '9가지 차례로 머묾의 증득'
(구차제주등지)을 차례로 말씀하시면서 아래와 같이 천명하십니다.
1) 초선 :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되지 않았으므로
2) 제2선: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희열과 행복이 소멸되지 않았으므로
3) 제3선: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평온과 행복이 소멸되지 않았으므로
4) 제4선: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비로소 동요하지 않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질이 소멸하지 않았으므로
5) 공무변처: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물질의 소멸에 아르었다. 그러나 '무한한 허공'에 의지해 있다.
6) 식무변처: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공간의 소멸에 이르었다. 그러나 '무한한 알음알이(識)'에 의지해 있다.
7) 무소유처: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있는 것이 없음에 이르었다. 그러나 그 없다함은 있음을 반연해 있다.
8) 비상비비상처: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있고없음을 초월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식(想, perception)이 소멸되지 않았다.
9) 상수멸: '이같이 비상비비상처조차도 버려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6가지 감각장소 만큼의 번잡함은 성성히 있다.
그는 마음을 기울여 느낌(受)과 인식(想, sanna)까지를 소멸하여 머문다.
그는 공무변처에 들면서 이미 '물질(色)'을 초월했다. 차례로 '공간'을, '알음알이(識)'를,
'일체가 없음(無)'을 초월했다. 이제 상수멸(想受滅)에서 느낌(受)와 상(想, sanna)을
멸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일체 마음작용(mental fermentations)의 소멸)에 다름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느낌(受)를 멸하였으므로 그 다음의 인식(想), 형성(行), 알음알이(識)도
일어날 수 없으므로 일체의 마음작용도 소멸합니다.
말로만 들었던 심단(心斷) 현상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체 물질정신 현상의 소멸 즉, 명색멸(名色滅)이 검증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같이 차례로 '이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버려야 한다.'라고 설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바른 삼매(正定)의 구족을 증득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에 함몰되어 거머쥐고 안주해서는 안됨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같이 설하신 후 우다이 존자에게
"우다이여,
작든 크든 간에 내가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은 그런 족쇄가 있다고 보는가?"
라고 물으십니다.
일체 물질정신작용의 소멸이라고 해야 할 상수멸 이전 초선∼비상비비상처의 삼매의 증득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증득(等至)으로 인해 펼쳐지는 세상과 존재에 대하여 그것 또한 결국 '족쇄'임을
분명히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ㅇ 어째서 세존께서는 여기서 위빳사나의 법을 말씀하시지 않는가?
세존께서는 여기서 연기(緣起)의 법을 따라 즉,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의 위빳사나의 법을 별도로 설하시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으로부터 시작하여 온전히 삼매의 법만으로 법문을 마치고 계십니다.
왜 그러셨을까라고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띠뿟사 경」(A9:41)은 세존께서 어떻게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하고,
사문·바라문을 포함하고,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
(正等覺者)'가 되셨음을 스스로 천명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나는 이러한 9가지 차례로 머묾(구차제주등지)를
순서대로나 역순으로 자유롭게 증득하고 출정하지 못했더라면,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9가지 차례로 머묾(구차제주등지)를
순서대로나 역순으로 자유롭게 증득하고 출정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명했다."
(* A9:41, 띠뿟사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453)
라고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 즉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9가지 삼매의 증득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임에 분명하며,
세존께서는 이렇게 하여 '붓다(佛)'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 「띠뿟사 경」(A9:41)에서 세존께서는 상수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 이같이 설하십니다.
"아난다여,
그런 나는 나중에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에 들어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했다."
이같이 세존께서는 상수멸에서 출정하셔서 '통찰지로써 사성제를 본 뒤' 즉 위빳사나로써
오온을 바로 본 뒤 해탈하셨다고 분명히 밝혀 설하십니다.
(* A9:41, 띠뿟사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453)
이같은 과정이 분명히 있고, 이같이 한 구절만 더 말씀하셨어도 되는데, 왜 우다이 존자에게 이것을
설하시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존의 법문은 처음도, 중간, 끝도 훌륭합니다.
더할 것도 덜 할 것도 하나가 없는 그분의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메추라기 비유의 경」이야말로 심해탈(心解脫), 즉 양면해탈(兩面解脫)을 설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ㅇ본경에서 심해탈(心解脫)을 설하심
세존께서는 대인연경(D15)에서 어떻게 해서 윤회가 전개되고 계속되는지 연기법(緣起法)을
설하십니다. 9지 연기로 이를 설하신 후, 세존의 가르침은 바로 '자아를 어떻게 관찰하는가?'로
향합니다. 연기(緣起)를 설하시는 목적이 바로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내지 '나는 무엇인가?'를
꿰뚫어 아는 것임이 분명해지는 부분입니다.
1] 사람들은 1)물질을 가진 것의 여부, 2)유무한의 여부를 가지고 '자아'를 천명하지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그와 같이 자아를 천명하지 않으면서 '자아'라는 것을 천명하지 않음을.
(* D15, 대인연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167)
2] 사람들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느낌(受)'을 기준으로,
1) '느낌이 나의 자아다.', 2)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3)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지만,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다.'라고 자아를 관찰하지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1)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으며', 2)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
고 관찰하지 않으며, 3)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느낀다고도 관찰하지 않음'을
설하십니다.
바꿔서 말하면 1) 오온을 나라고 관찰하지 않으며, 2) 나의 자아는 오온(작용)을 하지 않는다고도
관찰하지 않으며, 3) 나의 자아가 오온(작용)의 성질을 가졌다고도 관찰하지 않는 것입니다.
3] 그가 이같이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즉 '느낌' 내지 '오온'이 '내가 아님'을 바로 보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취착하지 않고, 갈증내지 않으며, 갈증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드는' 도리를 천명하십니다.
(* D15, 대인연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170)
4] 이어서 세존께서는 그러한 그는 1) 존재한다, 2) 존재하지 않는다, 3)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가도 한다, 4)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와 같은 유무(有無) 즉 '존재로부터
벗어남'을 설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1) 이름과 그것의 토대, 2) 어원과 그것의 토대, 3) 개념과 그것의 토대, 4) 통찰지와 그것의 영역,
5) 윤회의 범위가 어디까지든, 그 모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안 뒤 해탈했기 때문이다'라고
천명하십니다.
이것이 대인연경(D15) 후반부의 흐름입니다.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로부터 시작하여,
'이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작용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라고
삼계(三界)에 '존재의 이유'를 선포하시며,
-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의 '갈애(愛)'의 부분에서 별론으로
어떻게 세상에는 이같이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지를 설하신 후,
대인연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위와 같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내지 '나는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5] 세존께서는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내지 '나는 무엇인가?'를 위와 같이 설하신 후,
그 다음에 비로 '9가지 알음알이 선 곳' 즉, '7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識處)와 2가지 장소'와
'통찰지로로써 해탈한 자(慧解脫)'를 설하시는 것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갑작스런 도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1) 첫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 각자 다른 몸,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
- 예) 인간들과, 어딴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 → 그러므로 욕계 세상으로 추정됨
2) 두 번째 알음알이ㅢ 거주처: 각자 다른 몸,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
- 예) 초선을 닦아서 범중천에 태어난 신들 → 그러므로 초선천인 범보천, 범중천, 대범천으로
추정됨
3) 세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 모두 같은 몸, 각자 다른 인식을 가진 중생들
- 예) 광음천의 신들 → 그러므로 제2선천인 소광천, 무량광천, 광음천으로 추정됨
4) 네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 모두 같은 몸,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진 중생들
- 예) 변정천의 신들 → 그러므로 제3선천인 소정천, 무량정천, 변정천으로 추정됨
5) ∼ 7)
다섯 번째∼일곱 번째 알음알이의 거주처: 각각 공무변처, 식무면처, 무소유처에 도달한 중샌들
8) 무상유정처라는 알음알이의 장소(거주처는 아님)
9) 비상비비상처라는 알음알이의 장소(거주처는 아님)
- 세존께서는 위와 같이 7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識處)와 2가지 알음알이의 장소를 설하십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그 중생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알음알이(識)' 내지 재생연결식에 따라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의 마음과, 바왕가의 마음 이 셋은 그 대상이 같음을 상기할 때,,,)
그가 존재의 거주처 31곳 中 어떤 세상에서 어떤 무리의 중생으로 태어나는지를 설하심에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 세존께서는
1) 이 各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장소를 꿰뚫어 알고,
2) 그것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3) 그것의 사라짐을 꿰뚫어 알고,
4) 그것의 달콤함을 꿰뚫어 알고, 5) 그것의 위험을 꿰뚫어 알고,
6)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꿰뚫어 알아서,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처(識處)와 두 가지 장소(處)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서 해탈했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통찰지로써 해탈한 자(慧解脫者)라고 한다."
(*D15, 대인연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171)
라고 '혜해탈(慧解脫)'을 설하십니다.
하면 혜해탈은 무엇입니까? 연기(緣起)의 법을 따라,
알음알이(識)기 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정신현상 혹은 '오온'을 '바로 보아'
해탈한 자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6] 세존께서는 이같이 '알음알이가 선 곳'과 '혜해탈'을 설하신 후에,
이제 마지막으로 여덟 가지 해탈(팔해탈, 八解脫)을 설하십니다. 심해탈(心解脫)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 앞서 9가지 차례로 머묾(구차제주등지, 九次第住等地)가
초선, 제2선, 제3선, 제4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의 9가지인 바,
이 9가지의 사이에는 8가지의 벗어남이 있는 것인 바, 그것이 팔해탈(八解脫, attha-vimokkha)
이니, 이 둘은 같은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1) 첫 번째 해탈: 안으로 색계에 속하는 선에 들어,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초선 → 제2선)
2) 두 번째 해탈: 안으로 물질들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제2선 → 제3선)
3) 세 번째 해탈: '깨끗하다(淨)'라고 확신한다.(제3선 → 제4선)
4) 네 번째 해탈: 물질을 초월하여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머문다.(제4선 → 공무변처)
5) 다섯 번째 해탈: 공무변처를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머문다.
(공무변처 → 식무변처)
6) 여섯 번째 해탈: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머문다.
(식무변처 → 무소유처)
7) 일곱 번째 해탈: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
8) 여덟 번째 해탈: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상비비상처 → 상수멸)
- 세존께서는
"이 여덟 가지 해탈을
1) 순서대로도 증득하고, 2) 역순으로도 증득하고, 3) 순서대로와 역순으로도 증득한다.
그리고 그는
1) 원하는 곳마다, 2) 원하는 때마다, 3) 원하는 것 만큼 증득하기도 하고 출정하기도 한다."
(*D15, 대인연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172)
와 같이 마음의 해탈 즉 심해탈(心解脫)을 설하시며,
앞에서 설하신 혜해탈(慧解脫)과 더불어 '양면해탈을 한 자'라고 하시며,
'다른 더 높고 더 수승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우다이 존자에게 이 「메추라기 비유 경」을 설하실 때 다시 '오온을 바로 봄'의 관점에서
혜해탈을 설하시지 않고 법문을 마치시는 것은,
알음알이가 서는 모든 곳에서의 물질정신현상 즉, '오온'을 '바로 보아', 즉 오온이 무상함을,
그래서 괴로움임을, 내가 아님을 보아 해탈에 이른 지헤에 의한 해탈(慧解脫)과는 달리,
구차제주등지 내지 팔해탈을 닦아 상수멸(想受滅)을 임의로 증득하는데에 이른 자가 사성제를 보지
못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심해탈이라는 말은 양면해탈과 이미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경을 보면 그 시작이 사소한 것 같으나 그 가르침이 투박할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세존의 가르침의
심오한 뜻을 모두 드러내고 있어, 참으로 그 깊이가 한량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생각하건데
우다이 장로는 혜해탈을 구족한 아라한이거나, 아나함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한 이유로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겨난 즐거움'에 대한 갈애, 그 갈애라는 구속으로부터의
'구속되지 않는 자'로 가는 갈을 설하시면서, 그 구경에 있는 심해탈(心解脫) 즉 양면해탈의 가장
수승한 도리로써만 이 법문을 맺음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새겼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법문을 해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
시작을 모르는 과거로부터 윤회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가르침, 승가,
부모님, 스승님,
저보다 공덕이나 나이가 많은 분들께
제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여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예경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다른 이들이
저에게 범한 잘못들도
선한 이들의 마음으로 다 용서합니다.
적대와 악의와 잔인할 수 있음과 비난 모두 버립니다.
본경을 사경한 공덕 몫을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처와 제 가족들에게, 곤경과 속박을 건너려는 저 자신에게,,,,
저를 지켜보고 도우시려는 모든 천신들과 비인간들에게,,,,
어려울 때 도움을 주신 친척, 친구들, 도반들께
경를 번역하시느라 노고를 마다 않으신 대림스님과 각묵스님,
장유 반룡산과 지리산 실상사와 지리산, 설악산 그리고 보라산에 계시는 천신들과 용들과
비인간들에게,,,
우 또다나 사야도와 일창스님께,,,
새로이 인연을 맺게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법과 그 제자들을 보호하는 천신들을 시작으로
31천 거주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들께
부처님의 법을 따라 참된 행복과 평안을 얻으시기를,,,
이 회향으로도 힘을 얻으시기를,,,
장애없이 닙바나 이르시기를 염원하면서 회향합니다.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2017. 10. 3.
'맛지마니까야(中部) > M66.메추라기비유경-속박되지않은자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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