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大林]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속의 토굴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아누라다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아누라다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
“도반 아누라다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1)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2)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3)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4)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십니다.”
4.
이렇게 말하자 아누라다 존자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그러나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1)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2)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3)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3)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시지 않습니다.”
5.
이렇게 말하자 외도 유행승들은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인 모양이다.
만일 장로라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일 것이다.”
6.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아누라다 존자에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다는 말로 모욕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다.
외도 유행승들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서 아누라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여,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 될까?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될까?’라고.
7.
그러자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누라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숲속의 토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승들이 …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 아누라다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자 저는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외도 유행승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인 모양이다.
만일 장로라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일 것이다.’
외도 유행승들은 이렇게 제게 신참이라는 말과 어리석다는 말로 모욕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외도 유행승들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서 제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그 외도 유행승들이 나에게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여,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 될까?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될까?’라고.”
8.
1]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色)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2]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受)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3]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식(想)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4]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심리현상(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5]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알음알이(識)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0
.
“아누라다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色)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受)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想)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識)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11.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1]
그대는 물질(色)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느낌(受)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인식(想)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심리현상들(行)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알음알이(識)을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2.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그대는 물질(色)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느낌(受)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인식(想)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심리현상(想)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알음알이(識) 안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3.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그대는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가 [모두 합해진 것이]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4.
“아누라다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4]
그러면 그대는
물질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인식도 아니요 심리현상들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닌 것이
여래라고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5.
“아누라다여,
이처럼 그대는
지금·여기(현재)에서도
여래는 실재하고 견고하다고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대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즉
‘도반들이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분입니다.
여래께서는 이러한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죽고 난 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로 천명하십니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16.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라다여.
아누라다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
* 출처:http://cafe.daum.net/chobul/Etag/242
초기불전연구원
※ 각묵스님 주해
[주해]
본경의 흐름을 살펴보면,
본경 §§8~9에서 세존께서는 먼저 개념적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하시어
이 오온 각각이 무상이고 괴로움이고 무아임을 천명하신다.
이렇게 하여 §10에서는 각각 강한 위빳사나-도-아라한과-반조로 설명이 되는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성취하여 아라한이 됨을 천명하신다.
그런 뒤 §§11~14에서 다섯 가지 방법으로
지금․여기에서 전개되고 있는 오온을 여래라고 볼 수 없다고 단정하신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여기 §15에서 내생에 여래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하는 언급 자체가 전혀 잘못되었음을 결론짓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석적인 방법으로 본「무더기 상윳따」(S22) 전체에서
오온의 무상․고․무아의 통찰과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혹은 염오-이욕-소멸)을 거듭 강조하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무더기 상윳따」뿐만 아니라 본서 제4권「육처 상윳따」(S35)에서도
오온에 대한 멋진 비유가 나타나고 있다.
제4권「류트 비유 경」(S35:246) §6에서 세존께서는 류트의 비유를 드신 뒤에
§7에서 이런 방법으로 오온을 탐구하면 “
‘나’라거나 ‘내 것’이라거나 ‘나는 있다.’라는 [견해 등은] 더 이상 그에게 존재하지 못한다.”고
강조하신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류트는 오온이고 왕은 수행자(yoga-avacara)라고 봐야 한다.
왕이 류트를 열 조각으로 부순 뒤에 살펴보고
소리를 발견하지 못하여 류트에 대한 흥미가 없어진(anatthika) 것처럼,
수행자도 오온에 대해서 명상하여(sammasanta)
‘나(aham*)’라거나 ‘내 것(mamam*)’이라고 취할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온에 대해서 흥미를 잃게 된다.
그래서 그가 오온을 명상(khandha-sammasana)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SA.iii.67)
이 비유야말로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오온에 대한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가 생긴다는
본「무더기 상윳따」(S22)의 가르침에 대한 멋진 비유라 할 수 있다.
[주해]
“아누라다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라는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세존께서는 사후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시지 않고
지금․여기(현재)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도달하는 실천적인 길을 설할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만으로는 여래에 대한 관찰과는 연결짓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둘째는,
여래란 무상한 여러 현상들이 합성된 것이요 그래서 괴로움이요 그래서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은 단지 인습적 표현(vohāra)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에 대한 모든 사유나 설명은 단지 인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습적인 것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인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을 천명한다는 것이다.
꼭 같은 방법으로 “비구들이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시는『맛지마 니까야』「뱀의 비유 경」(M22/i.140~141) §38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위의「야마까 경」(S22:85) §16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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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본경에서 세존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조차
지금·여기에서도 여래는 실재하고 견다고 입증하지 못한다는 곳에 이르러서는
그분의 그 처절한 존재론에 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렇게 볼 수 있게된 제자를 '장하고, 장하구나'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지향하여만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에 대해서만 설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괴로움을 설하시면서 연기의 법과 더불어 이 모든 것 즉 나와 세상과
그 모든 정신·물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하셨습니다.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죽음의 출구를, 무상의 출구를, 괴로움의 출구를 천명하셨고
그러한 것들을 넘어선 참된 행복을 입증하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래란 무상한 여러 현상들이 합성된 것이요
그래서 괴로움이요 그래서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은 단지 인습적 표현(vohāra)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에 대한 모든 사유나 설명은 단지 인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주해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여래란 이러한 무상한 여러 현상들의 형성됨을 벗어났고
그래서 괴로움을 끝냈고, 그래서 나고 죽음이라는 '존재'의 사슬을 끊었으며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래에 대한 모든 사유나 설명이 인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법이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듯이
여래에 대한 사유나 설명이 비록 궁극에 언설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인습적인 표현'을 놔두고 그를 설명할 방법이 달리 없음도 사실입니다.
세존께서는 '인습적인 표현'을 빌어 그 모든 법을 설하셨습니다.
'식진암(識盡庵) > 그대는 무엇을 두고 '나'라고 하는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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