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은 유신견이 무엇이며,
유신견이 어떤 사견을 일으키며, 어떻게 해로운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여러 경전을 통해서 유신견, 상견, 단견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하는 시간입니다.
1. 맛지마니끼야 유명소경(有明小經) - 근본 오십품
유명소경에서는 아나함인 위사카와 그 부인이었던 아라한 비구니 담마디나가
유신견은 무엇이며, 어떤 원인으로 일어나는지를 묻고 답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위사카는 담마디나에게
'붓다께서 말씀하신 ‘몸이 있다는 有身'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담마디나는 ‘몸이 있다는 유신(有身)은 오온입니다’ 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위사카는 ‘어떤 방식으로 유신견이 일어납니까?’ 라고 다시 물었으며,
담마디나는 ‘오온을 잘못 이해하고, 오온을 실재라고 믿으며, 자아, 나, 라고
그릇되게 파악할 때 유신견(有身見)이 일어납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다시 위사카는 ‘그럼 무엇 때문에 유신견이 일어납니까?’라고 물었으며,
담마디나는
‘첫째,
범부는 성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법을 밝게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둘째, 범부에게 성자나 덕 있는 사람의 법문을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1) 색수상행식을 자아라거나,
2) 자아가 오온을 소유한다거나,
3) 오온 안에 자아가 있다거나,
4) 자아 안에 오온이 들어있다고
오온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타오르는 불과 불빛을 구별하지 못하고,
불을 불빛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답을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범부는 법을 들을 기회가 없었고,
그래서 법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오온을 '나'로 너무 당연히 알고, 항상 오온을 집착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신견이 일어나는 원인입니다.
2. 상윳따니까야 - 야마까경
비구 야마까는 단견(斷見)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죽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공공연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오온 안에 자아라는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가지고서,
윤회가 끊어지는 아라한의 죽음을 아라한의 실체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열반을 실체가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유신견을 가진 사람은 열반을 얻으려하지도 않고 결코 열반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야마까 비구에게 색, 수, 상, 행, 식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인지 묻고,
야마까는 그에 대해서 오온은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답을 합니다.
그래서 오온 안에 변하지 않는 나라는 실체가 있지 않다는 답을 유도하여,
야마까가 오온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라는 바른 견해를 갖게 해줍니다.
그래서 야마까는 사견인 유신견을 제거했습니다.
3. 찬나 장로
찬나 장로는 싯달타 왕자가 출가 할 때 왕자의 말을 끌고 나온 마부로써
왕자의 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찬나 장로는 부처님이 출가할 때 자신이 부처님의 출가를 도왔다는 자만심으로
유신견(有身見)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40년 이상 수행을 하면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통찰은 얻었지만
오온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아는 지혜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유신견이 강해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자아가 없다면 이 몸과 마음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겠는가라고
내가 있다는 견해를 더욱 집착했습니다.
찬나 비구는 자아 개념이 너무나 확고하여
무아에 대해 명상을 하려고만하면 마치 절벽의 가장자리에 서있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붓다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시고 어디에도 물어볼 곳이 없어지자
찬나 비구는 낙심과 후회에 젖어 마지막으로 아난다 존자를 찾아갔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찬나 비구가 연기(緣起) 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유신견을 뿌리 뽑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연기법을 충분히 숙지하도록 지도했습니다.
드디어 찬나 비구는 연기법을 이해하고 유신견, 상견, 단견을 뿌리 뽑을 수 있었으며,
결국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했습니다.
이처럼 연기법에 대한 이해는 수행자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해야
자신 안에 내재된 뿌리 깊은 유신견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만일 유신견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는 항상 무명과 갈애의 지배를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신견은 여러 가지 무명 중에서 가장 해롭고 나쁜 것입니다.
유신견은 우선 도과의 성취를 일차적으로 막고, 대신 사악도로 가는 토양이 됩니다.
유신견이 있으면 수다원의 도과조차도 얻을 수 없지만,
유신견만 제거되면 다른 무명과 갈애가 아직 남아있어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도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연기를 통해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하고
유신견, 상견, 단견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악도로 가는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4. 사띠 비구
사띠 비구는 자아로서의 마음은 영원한 것으로 변하지 않고 항상한다는 상견(常見)을
가졌습니다.
그는 붓다께서 설하신 본생담에 열거된 열 명의 붓다의 전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떼미야로부터 시작하여 웨산따라에 이르는 열 명은 모두 같은 자아를 가진 한 사람이라고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는 붓다의 전신인 열 명은 모두 같은 한 사람으로 죽고 새로 태어날때마다 마음은 그대로 있고, 단지 몸만 바꾼 것이라고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개체의 마음은 동일하며 변하지 않는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몸은 죽어도 나라는 실체는 죽지 않고 영원한 것이라고 아는 상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견해를 가진 사띠 비구를 직접 불러서,
마음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며,
적합한 원인이 없이는 어떤 마음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은 눈과 대상과 빛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질 때 일어나며,
만일 이런 조건이 없으면 안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한 번 일어난 안식은 두 순간을 지속하지 못하고 바로 그 순간에 사라지며,
다시 다른 대상과 감각기관이 촉하여 다른 대상을 아는 마음이 새로 일어난다.
그래서 의식은 무상하고 항상 변하며
똑같은 상태로 연속적인 두 순간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띠 비구의 잘못된 견해인 상견을 제거하셨습니다.
" 이것은 마치 연료로 인해 불이 피어오르는 것과 같다.
오직 이러한 원인을 통해서만 저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나무가 타고 있다면 그것을 장작불이라고 한다.
만일 소똥이 타고 있으면 그것을 소똥불이라고 한다.
똑같은 방식으로
의식은 그 대상과 감각기관에 따라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것이 존재하므로 저것이 존재하고
이것이 일어나느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멈추면 저것이 멈춘다.
이것이 연기에 따라 현상들이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나는 모습이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이런 저런 마음을 일으키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저런 마음이 일어날 조건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현생의 의식은 죽는 순간의 마음인 사몰심으로 종결되고,
내생을 시작하는 재생연결식은 조건에 의해 새로 일어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재생할 때 현생의 의식이 내생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오직 인과법에 따른 새로운 의식이 일어난 것뿐입니다.
불교는 영혼이 옮겨간다는 환생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재생연결식은 전생의 사몰심을 원인으로 일어난 것일 뿐,
어떤 영혼이나 의식이 한 존재와 다음 존재에서 일치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일시적이며 무상하고 항상 변하며 동일한 상태로
연속적인 두 순간을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전생의 의식과 다음 생의 의식이 동일한 한 개체의 것이라는 믿음은 상견에
해당하며,
한 존재의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믿음은 단견입니다.
이들 두 가지 사견은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신견을 제거하면 상견과 단견도 함게 제거됩니다.
이런 세 가지 사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중도, 즉 팔정도(八正道)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수다원의 도과를 얻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하고 점차 유신견을 제거해 나갑니다.
만일 수행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유신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위빠사나 수행을 해도 도과의 첫 단계조차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연기를 이해하여 유신견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수행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14장에서 유신견 상견 단견 등의 사견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이런 사견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인과법의 이해의 필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은 15장 사견을 직접 제거하는 수행법으로 위빠사나 수행,
즉 알아차림의 확립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 출처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사단법인 상좌불교 한국명상원 2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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