뽓타빠다경은
세존께서 한 때 사왓티에서 제따숲의 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아침에 사왓티로 탁발을 하러 가시다가 그 근처에 다른 유행승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뽓타빠다 유행승을 만나러 가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유행승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가
세존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냐고 묻자 뽓타빠다는 그것 말고
며칠 전에 토론했던 주제인 '인식은 어떻게 소멸하는가?'에 대해 세존께 여쭙니다.
유행승들이 의견으로는 ,
1) 인간의 인식은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일어나고 소멸한다.
일어날 때는 인식하는 자가 되고 멸할 때는 인식이 없는 자가 된다.
2) 인간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자아이다.
그것은 다가오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는데
다가올 때는 인식하는 자가 되고 물러러갈 때는 인식이 없는 자가 된다.
3) 큰 신통과 위력을 가진 사문·바라문들은 사람의 인식을 집어넣기도 빼기도 하는데
집어넣으면 인식하는 자가 되고 빼면 인식이 없는 자가 된다.
4) 큰 신통과 위력을 가진 신들은 사람의 인식을 집어넣기도 빼기도 하는데
집어넣으면 인식하는 자가 되고 빼면 인식이 없는 자가 된다.
와 같은 의견들이 있는데
'참으로 어떻게 인식은 소멸합니까?'라고 세존께 묻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원인과 더불어, 조건과 더불어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기도 멸하기도 한다.'고 설하시며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기도 소멸하기도 한다.'는 견해는
'처음부터 틀린 것'이라고 천명하십니다.
더욱이 세존께서는
'어떤 인식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그 '공부지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1) 43가지의 계를 구족
2)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단속의 구족
3) 마음챙기고 알아차림
4) 필수품만으로 만족함
5)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함
6)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벗어남
을 구족한 비구가
1) 초선을 구족하여 머무는 이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감각적 욕망의 인식'이 소멸하고
'떨쳐버림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만이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이
이것이 공부지음에 의해 어떤 인식은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소멸하게 되는 공부지음이며,
2) 이선을 구족하여 머무는 이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떨쳐버림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은 소멸하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만이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이
이것이 공부지음에 의해 어떤 인식은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소멸하게 되는 공부지음이며,
3) 삼선을 구족하여 머무는 이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의식'은 소멸하고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만이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이
이것이 공부지음에 의해 어떤 인식은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소멸하게 되는 공부지음이며,
4) 사선을 구족하여 머무는 이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평온에 기인한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은 소멸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참되고 미묘한 의식'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만이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이
이것이 공부지음에 의해 어떤 인식은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소멸하게 되는 공부지음이며,
5) 공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무는 이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물질에 대한 인식'은 소멸하고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 만이 있게 되고, 이와 같이
이것이 공부지음에 의해 어떤 인식은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소멸하게 되는 공부지음이며,
6) 식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무는 이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공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은 소멸하고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만이 있게 되고, 이와 같이
이것이 공부지음에 의해 어떤 인식은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소멸하게 되는 공부지음이며,
7)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무는 이 때에는
이전에 있었던 '식무변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은 소멸하고
'무소유처의 미묘하고 참된 인식'과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만이 있게 되고, 이와 같이
이것이 공부지음에 의해 어떤 인식은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소멸하게 되는 공부지음이며,
이와 같이 초선(初禪)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무소유처(無所有處)라는 '인식의 구경(究竟)'에 이르르게 되며
이 인식의 구경에 서서 다시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일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업을) 형성해 나가면
이런 나의 인식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업을) 형성하지 않으리라.'라고.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업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업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소멸을 체험한다.'
와 같이 수행하여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하며
이와 같이 '공부지음'에 따라서
'알아차리는 인식이 차례대로 소멸하는 하는 증득' 즉,
상수멸(想受滅) 혹은 멸진정(滅盡定)까지의 증득이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이와 같이 설하자 뽓타빠다 유행승은
무소유처 하나만이 인식의 구경이냐라고 묻고
세존께서는 무소유처 하나만을 인식의 구경이라고도 할 수 있고
4禪3處에서 각각의 인식이 소멸을 체험할 때마다 얻게되는 인식도 인식의 구경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뽓타빠다 유행승은
'인식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는지?, 지혜가 생기고 인식이 생기는지?,
이들이 전후없이 (동시에) 생기는지?'에 대해서 세존께 여쭙니다.
세존께서는
'인식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김,
인식에 조건지워져 지혜가 생김,
그러나 인식이 생기면 반드시 지혜가 생김.'을
천명하십니다.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께
'인식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뽓타빠다에게
'그런데 무엇을 두고 그대는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으십니다.
이에 뽓타빠다는
1) 거친 자아의 획득(慾界의 존재)
- 거칠고, 물질로 되었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졌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것
2)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色界의 존재)
- 물질을 가졌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것
3)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無色界의 존재)
- 무색이요, 인식으로 이루어진 것
세 가지의 경우를 들어 각각 자아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위에서 말씀하신 공부지음에 따른
인식의 발생과 소멸 4禪(색계), 3處(무색계)까지를 포함하여,
각각 그러한 경계에 머물러 있는데도 그에게는 그와 다른 인식이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되고 만다라고 설하십니다..
결국 뽓타빠다는
'그렇다면 저는 인식이 인간의 자아인지,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까?'라고 세존께 여쭙고,
세존께서는
그대와 같이 다른 견해를 가졌고, 다른 (가르침을) 좋아하고, 다른 수행을 추구하고,
다른 스승을 따르는 자는
참으로 인식이 인간의 자아인지,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인지 알기 어렵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인식이 자아인지 인식은 자아와는 다른 것인지
자아가 인식을 가진 것인지 인식안에 자아가 있는 것인지의 의문은
여전히 미궁 속이 됩니다.
급기야 뽓타빠다는 소위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질문을 세존께 드리게 됩니다.
1) 세상은 영원한가?
2)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3) 세상은 끝이 있는가?
4) 세상은 끝이 없는가?
5) 자아는 이 몸인가?
6) 자아는 이 몸이 아닌가?
7)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8)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9)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10)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의 질문이 그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위의 각각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설하지 않는다.(無記)'라고 설하십니다.
뽓타빠다는
'왜 세존께서는 이것을 설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게 되고
세존께서는
'이것은 참으로
1) 이익을 주지 못하고,
2) (출세간)법에 바탕한 것이 아니며,
3) 청정범행의 시작에도 미치지 못하고,
4)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5)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6)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7)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8)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9)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10)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뽓타빠다는
'그러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즉 나는 사성제(四聖蹄)를 설한다고 천명하십니다.
뽓타빠다는
'왜 세존께서는 이것을 설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은 즉, 사성제(四聖蹄)는 참으로
1) 이익을 주고,
2) (출세간)법에 바탕한 것이며,
3) 청정범행의 시작이며,
4)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고,
5)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6) 소멸로 인도하고,
7)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8)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9)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10)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설한다.'고 천명하십니다.
이에 다른 유행승들은 세존께서 십사무기의 질문들에 대해서
하나로 확정된 법을 결코 보지 못했다며 세존을 비난합니다.
그후 이삼일이 지난 후 뽓타빠다는 이삼일 전 7차례 환속을 한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다와 함께
세존을 찾아뵙습니다.
그 자리에서 뽓타빠다가 저번에 다른 유행승들이 세존께서는 하나로 확정된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고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십사무기의 질문과 같은 질문이야말로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지 못하는 질문이며,
사성제(四聖蹄)와 같은 법이아말로 (열반의 구현이라는)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는 법들이라고
천명하십니다.
아울러 세존께서는
'자아는 죽고 난 후 전적으로 즐거움만을 느끼며 병들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사문·바라문들을 예를 들어서
과연 그들 중에 누구라도 그러한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무는지?',
하루 낮, 하루 밤, 혹은 '반나절이라도 전적으로 즐거움만 느끼는 자아를 인식하는 자가 있는지?',
'어떤 것이 그러한 세상을 얻기 위한 도닦음인지 아는자가 있는지?',
혹은 누구라도 그러한 세상에 태어나서 '이같이 도를 닦아 그러한 세상을 얻었다.'라고 말하는 자를 보았는지?라고 물으면,
그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하므로 결국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여인을 갈망하고 탐하는 것과 같으며,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누각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설하십니다.
여기에서 세존께서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자아의 획득이 있다고 설하십니다.
1) 거친 자아의 획득(慾界의 존재)
- 거칠고, 물질로 되었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졌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것
2)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色界의 존재)
- 물질을 가졌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것
3)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無色界의 존재)
- 무색이요, 인식으로 이루어진 것
그러나 세존께서는 이어서
이와 같은 세 가지 자아의 버림 즉,
거친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하심을 천명하십니다.
그리고 뽓타빠다에게
그런 자아의 획득을 버려버린 머묾이 괴로움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오히려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환희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경안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라고
천명하십니다.
아울러 그 세 가지 자아의 획득이 각각 무엇인지 즉,
이것이 그 거친 자아의 획득이고,
이것이 그 마음으로 된 자아의 획득이고,
이것이 그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무엇인지 꿰뚫어 알고,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하고 멋있는 것이라고 사자후하십니다.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다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통하여 세존께
'어떤 자가 어떤 자아를 획득했을 때,
그때 그에게는 그러한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찟다에게
'어떤 자가 어떤 자아를 획득했을 때,
그때 그는 오직 그때의 그이며
그때 그러한 자아의 명칭만을 얻게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침을 확실하게 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찟다에게
이와 같은 자아의 증득이란 마치
소로부터 우유가 나와, 우유가 응유가 되고, 응유가 생버터가 되고, 생버터가 정제된 버터가 되고,
정제된 버터가 최상의 버터가 되는 것과 같이
자아의 증득이란 자아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 맞는 이름만을 얻을 뿐이며
거친 자아의 획득(색계의 자아), 마음으로된 자아의 획득(무색계의 자아),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
(무색계의 자아)와 같은 세 가지 자아의 획득도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며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어서
각각 그때에 거기에 해당하는 명칭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뽓타빠다 유행승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청신사로 귀의하고,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다는 7번 째로 다시 출가하여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고 닦아 아라한이 되는 것으로
본 경은 끝을 맺습니다.
디가니까야 제6경인「마할리경」, 이어 제7경인 「잘리야경」,
그리고 제8경인 「깟사빠 사자후경」에 이은 本경 제9경 즉, 「뽓타빠다경」은
모두 자아(自我)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경을 번역하신 각묵스님은 디가니가야 제1권 즉 계온품(戒蘊品)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 경을
뽑으라고 한다면 제1경인 「범망경」, 제2경인 「사문과경」, 그리고 본 경 「뽓타빠다경」을
들겠다고 주석에서 밝히셨습니다.
그만큼 자아(自我)와 인식(認識)의 문제를 다룬 본 경은 중요한 것이라 하겠고
이것은 '자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의 관문인 유신견(有身見)의 문제와 닿아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본 경에서 '자아'라는 문제에 정견(正見)을 가지지 못해 매여있는 뽓타빠다는
세존께 자아와 인식과 관련된 거의 질문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各 경을 다시 정리하면서 後記를 적을 때 그 경에서 부처님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정리하고 넘어왔는데 「뽓타빠다경」은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많아
정리를 하고 나니 마치 경 전체를 다시 후기에 쓰게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요한 요의(要意)를 다시 보면
1) 원인과 더불어, 조건과 더불어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고 소멸한다.
2) 어떤 인식은 공부지음에 의해 일어나고 소멸한다.
- 4禪(초선∼사선) 3處(공무변처∼무소유처)에서 그전의 인식은 소멸하고 새로운 인식이 일어남
3) 인식의 구경(무소유처)에서 인식의 소멸(상수멸)을 체험하고 증득한다.
-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인식이 차례대로 소멸한다.
4) 무소유처를 한 개의 인식의 구경으로, 또 4선3처에서 각각의 인식의 소멸할 때 얻게 되는 인식도
모두 인식의 구경이다.
5) 인식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긴다. 인식에 조건지워져 지혜가 생긴다.
인식이 생기면 반드시 지혜가 생긴다.
6) '인식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
→ '그런데 무엇을 두고 그대는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
7) 4선3처를 포함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자아를 증득하고 그러한 경계에 머무를지라도
그에게는 그와는 다른 인식이 발생하고 소멸하므로
그러한 증득을 자아라고 한다면 자아와 인식은 달라질 수 밖에 없게 된다.
8) '인식이 인간의 자아인지,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까?'
→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알기 어렵다.'
9) 십사무기(十事無記)에 대한 질문 → '나는 그것을 설하지 않는다.'
10) 왜 이것을 설하지 않습니까? → 이익을 주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지 못하기 법이기 때문)
11) 그러면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 → 나는 사성제(四聖蹄)를 설한다.
12) 세존께서는 왜 사성제를 설하십니까? → 이익을 주며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는 법이기 때문)
13) 세 가지 자아의 획득 즉,
거친 자아의 획득,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 있다.
14) 그러나 세존께서는 이 세 가지 자아의 획득의 버림을 위해서 법을 설하신다.
15) 그러한 자아의 획득을 버려서 머무는 것이 괴로움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16) 그때는 그때의 자아의 획득이 있고, 거기에 맞는 인습적 명칭의 획득이 있을 뿐이다.
- 우유가 응유가 되고, 생버터가 되고, 정제된 버터가 되고, 최상의 버터가 되어
각각 그때의 인습적 언어적 표현을 얻듯이.
이어지는 이 經이 담은 긴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부처님은 '세상'에 대해서 혹은 '나'에 대해서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사성제(四聖蹄)를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三界(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자아의 획득을 위해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자아의 획득을 꿰뚫어 알 것과
그리고 알고난 後 그 버림을 위해서 설하셨습니다.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환희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경안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상윳따니까야 로히땃사경(S2:26)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이와 같이 받아지녔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
한 곡절의 긴 혼침(昏沈)을 끝내며,,,
2012.3.7
'디가니까야(長部) > D9.뽓타빠다경-인식과 자아, 자아 획득과 버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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