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사리뿟따 이야기

9. 인간 사리뿟따 / 친구와 친척들

이르머꼬어리서근 2011. 1. 22. 13:54

 

사리뿟따 존자는 감사하는 마음과 친절, 남을 돕는 마음과 참을성 같은 훌륭한 성품 덕분에

출가자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깊은 교우관계를 많이 맺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목갈라나와는 젊었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리뿟따가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하고싱가경」(『중부』 32)의 주석서를 보면 사리뿟따가

아난다와도 깊은 우의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뿟따로서는 '스승님을 시봉하는 일은 나의 의무인데도 아난다가 애쓰고 있구나'하며

고마워했고, 아난다로서는 부처님께서 사리뿟따를 상수제자로 삼으셨기에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아난다는 자신이 사미계를 주었던 어린 제자들을

나중에 사리뿟따에게 보내어 구족계를 받도록 하는 일이 많았다.

 

사리뿟따 또한 아난다에게 그렇게 했고,

그리하여 두 사람에게는 5백 명의 공동제자가 있었다.

 

 

아난다는 아주 좋은 가사나 공양물을 받게되면 사리뿟따에게 갖다주었고

사리뿟따 역시 특별한 공양물을 받으면 아난다에게 주곤 했다.

 

한번은 아난다가 어떤 브라만에게서 아주 값진 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세존의 허락을 받고 사리뿟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열흘 동안이나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석서를 해설한 복주(復註)에서 이러한 관계에 대해 훗날 논사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난다는 아직 아라한과를 이루지 못했으니 그런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되지만

번뇌를 다 끊은 아라한이었던 사리뿟따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이에 대해 '사리뿟따가 보이는 정은 세속적 애착이 아니라 아난다의 공덕을 아끼는 마음이었다.'

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이렇게 물으신 적이 있었다. "너도 사리뿟따를 귀하게 여기느냐?"

 

아난다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미숙하고 타락하고 우매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사리뿟따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리뿟따는 현자입니다.

사리뿟따는 위대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드넓은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빛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민첩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예리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통찰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는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해 합니다.

그는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어울려 다니기를 내켜하지 않습니다.

그는 불굴의 정진력이 있고, 그의 말은 심금을 울립니다.

남의 말에 기꺼이 귀기울이고,

사악한 것을 경책하는 훈도자(薰陶者,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는 분)입니다."

(『상응부』 2:29)

 

 

『장로게』(1034 이하)에서 아난다는 사리뿟따가 죽었을 때

"고귀한 도반인 사리뿟따가 떠나니 세상이 온통 캄캄하구나."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도반이 떠나고 세존께서도 열반에 드신 후,

자신에게 남은 벗이란 몸에 대한 마음챙김밖에는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리뿟따의 죽음을 전해들은 아난다의 슬픔이 어떠했는지는

「쭌다경」에도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리뿟따는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

그는 남의 장점을 어떻게 계발해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참다운 친구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처럼,

그는 때로 직언과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누룻다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이

사리뿟따 존자의 솔직한 비판이었다고 『증지부』(3: 128)에 나와 있다.

 

 

어느 날 아누룻다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갔다.

예를 갖추어 인사를 나눈 후 앉아서 사리뿟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벗이여,

나는 인간의 육안을 초월하여 청정해진 천안으로 일천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정진력은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챙김은 늘 오롯하여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나의 육신은 경안(輕安)하여 고요합니다.

나의 마음은 삼매에 들어 한 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대답하였다.

"벗이여, 당신의 천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당신에게 자만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

당신의 정진력이 굳건하고, 당신의 마음챙김이 오롯하고, 당신의 육신이 고요하고,

당신의 마음이 삼매에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당신이 들떠있는 뜻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에게 근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자만과 들뜸과 근심의 세 가지 마음상태를 버려서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불사의 경지에 뜻을 모은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일입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사리뿟따의 충고를 받아들인 후 오래지 않아 번뇌의 소멸을 이루었다.

 

 

 

사리뿟따에게 조언을 구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을 보면,

도반들에게 그가 늘 힘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마하고싱가경(『중부』 32)」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기질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그 말씀과 인품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저녁 마하목갈라나, 마하깟사빠, 아누룻다, 레와따, 아난다 이렇게 다섯 분이

사리뿟따에게 법문을 들으러 갔다. 사리뿟따가 그들을 반기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고싱가 사라수 숲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달빛은 환하고 사라수 나무는 꽃이 만발하였으니 천상의 향기가 감돌고 있는 듯합니다.

아난다여, 이런 고싱가 사라수 숲을 더욱 빛나게 할 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다른 네 분의 스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각자 기질에 따라 대답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사리뿟따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기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침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낮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저녁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왕이나 재상의 옷장이 색색의 의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왕이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 어떤 옷을 입고 싶으면

그때그때 그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여 자신의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스님과 같습니다.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목갈라나여, 이런 스님이 이 고싱가 사라수 숲을 빛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부처님께로 가서 자신들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모두 수긍하신 다음 당신의 말씀을 해주셨다.

 

이 이야기를 보면 사리뿟따가 뛰어난 지성을 지녔고 승가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독단적인 성향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우러나는 사색의 분위기를 도반들에게 몸소 표현해 보임으로써

그들도 직접 자기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고무해줄 수 있었다.

 

그는 감성이 섬세하여 스스로 자연 경관에 감응을 잘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반들로부터도 그러한 감응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사리뿟따는 다른 많은 스님들과도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목갈라나, 아난다, 아누룻다뿐만 아니라,

마하꼬티따, 우빠와나, 사밋디, 사윗타, 부미자 등이 그들이다.

 

 

또 사리뿟따는 깨달음을 얻은 분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히 세존께서 칭찬하셨던 분들은 꼭 만났다.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도 그 중 한 분이었는데,

부처님이 대중 앞에서 그를 칭찬하시기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뿐나가 그 지방에 왔다는 것을 알고 사리뿟따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에게로 찾아가

청정에 이르는 여러 단계와 열반의 관계에 대하여 심오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가 뿐나에게 했던 질문에서 저 유명한 「라타위니따경(『중부』 24; 역마차 비유경)」이 유래하게 되었다.

 

이 경에 제시되어 있는 불교의 여러 수행단계들은

후대 아짜리야 붓다고사(佛音尊者)가 쓴 기념비적 논서

『청정도론(Visuddhimagga)』의 근간이 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리뿟따에게 하신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경전에 나오는 많은 부처님의 말씀이 "법장"으로 불린 사리뿟따에게 설하셨던 것이었음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번은 사리뿟따가 부처님께 다가가 이전에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풀이하였다.

 "고귀한 교우관계, 고귀한 도반관계, 고귀한 인간관계. 이것이 청정한 삶의 전부입니다."

(『상응부』 45:2) 이 상수제자의 생애가 바로 이런 가르침을 가장 잘 구현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사리뿟따는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우빠띠사 마을의 어느 브라만 가문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와간따이고, 어머니는 루빠사리였다.

 

사리뿟따가 그의 아버지와 같이 지낸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남자 형제로 쭌다, 우빠세나, 레와따 셋이 있었고,

 누이로는 짤라, 우빠짤라, 시수빠짤라 셋이 있었다.

 

여섯 남매가 모두 승단에 들어 계를 받고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쭌다는 비구가 된 후에도 승가에서 사미를 뜻하는 사마눗데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마하쭌다 장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사리뿟따의 임종시에 그를 시봉한 것이 쭌다였고,

상수제자의 유물을 가지고 부처님께 가서 그의 죽음을 알린 것도 그였다.

이것은 「쭌다경」에 있는 이야기로서 내용은 이 책의 후반부에 나와있다.

 

 

사리의 아들이 사리뿟따이듯이

우빠세나는 와간따의 아들을 뜻하는 와간따뿟따로도 알려져 있다.

우빠세나의 몸가짐은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육처상응경(『상응부』 35:69)」에 의하면 그는 뱀에 물려 죽었다.

 

 

레와따는 형제들 중에 막내였다.

어머니는 막내가 계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가 아주 어렸을 때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결혼식 날 그는 늙어서 추해진 120살이나 된 신부의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세속적인 삶에 역겨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핑계를 대고 결혼식 도중에 빠져 나와 사원으로 도망쳐 가서 계를 받았다.

훗날 부처님을 뵈러 가는 도중에 어느 아카시아 숲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기를 지내는 동안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후에 그는 아카시아 숲의 레와따라는 뜻의 레와따 카디라와니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처님께서는 그를 숲 속 수행자들 중의 으뜸으로 치셨다.

 

 

오빠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짤라, 우빠짤라, 시수빠짤라 세 자매는 결혼한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들은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씩 두었는데,

각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짤라 혹은 짤리, 우빠짤라, 시수빠짤라로 불리웠다.

 

이들 세 자매의 아들 셋도

외삼촌인 레와따 카디라와니야의 사미가 되어 계를 받았으며,

『장로게』(42)의 주석서에 의하면 사리뿟따가 그들의 선행을 칭찬한 바 있다.

 

세 자매가 비구니가 되었을 때에 마라가 나타나 그들을 조롱하고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훌륭히 대처했는지는 「비구니상응경」에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사리뿟따의 어머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 내내 증오심을 품어왔던 고집 센 브라만이었다.

 

『법구경』(400)의 주석서에 보면 사

뿟따 존자가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고향 마을에 와있을 때 탁발하는 길에

어머니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음식을 주면서도

"이 먹던 찌꺼기나 얻어먹는 것아!"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쉰 쌀겨죽 찌꺼기도 못 얻어먹는 날이면,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주걱에 묻은 찌꺼기나 핥아먹어라.

80 크로어나 되는 재산을 버리고 중이 된 것이 겨우 이 꼴 보자고 한 짓이었니!

네가 내 신세도 망쳤다. 자, 어서 먹어라!"

 

사리뿟따를 따라온 다른 스님들에게 음식을 주면서도

"흥! 당신들이 바로 내 아들을 종으로 부리는 작자들이로구나! 그래 어서 드시오!"

 

 

이렇게 그녀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으나

사리뿟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리뿟따는 음식을 받아서 먹고는 소리 없이 사원으로 돌아왔다.

 

 

부처님께서는 그때 사리뿟따와 함께 있었던 아들 라훌라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비구들은 사리뿟따가 어떻게 그 일을 다 견뎌냈을까 놀라워했으며,

부처님께서는 회중 앞에서 다음의 게송을 읊으시며 그를 칭찬하셨다.

 

   그는 성내지 않고, 수행에 근실하고,

   계행에 덕이 높고, 욕망에서 벗어났으며,

   감관을 잘 다스려, 태어남이 마지막이 되었다.

   나는 그를 브라만이라 부른다.

                                       (『법구경』 400)

 

 

 

사리뿟따는 자기가 죽을 즈음에 이르러서야 어머니를 귀의시킬 수 있었다.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거니와

위의 일화는 사리뿟따 장로가 얼마나 겸손하고 너그럽고 참을성이 있었던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