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사리뿟따 이야기

8. 인간 사리뿟따 / 성냄이 없는 이

이르머꼬어리서근 2011. 1. 2. 13:00

 

『법구경』 주석서(389-90)에는

이 상수제자의 또 다른 탁월한 성품이라 할 참을성너그러움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가 있다.

 

 

부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기원정사 근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존자께서는 참을성이 많으셔서

누가 모욕하고 때리더라도 도무지 화낼 줄을 모르신다."

하면서 사리뿟따의 훌륭한 성품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떤 브라만이 불쑥 끼여들었다.

 

"그렇게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바로 우리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그야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브라만이여."

 

"그렇다면 내가 그에게 시비를 걸어 화를 내게 해보겠소."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오!"

 

"내게 맡겨보시오. 다 하는 수가 있지."

 

 

 

사리뿟따 존자가 탁발을 하러 그곳을 지날 때

그 브라만은 뒤로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등을 내리쳤다.

 

"이게 뭐지" 하면서도 사리뿟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 브라만은 온통 죄책감에 사로잡혀 장로의 발아래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리뿟따 장로는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의 참을성을 시험해 보려고 제가 당신 등을 때렸습니다."

브라만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랬나요? 뭐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존자시여, 용서하시는 뜻으로 저희 집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사리뿟따가 이를 말없이 받아들이자

브라만은 그의 발우를 받아들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공양을 올렸다.

 

그러나 사리뿟따를 때리는 광경을 보았던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다.

그들은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그 브라만을 죽이기라도 할 듯이 그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사리뿟따가 발우를 든 브라만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이 소리쳤다.

"존자시여, 저 브라만을 우리 손에 넘겨 주십시오."

 

"왜들 그러십니까?"

 

"저자가 존자님을 때리지 않았습니까. 혼을 내주려고 합니다!"

 

"혼을 내다니요? 저 사람이 여러분을 때렸습니까, 나를 때렸습니까?"

 

"물론 존자님이지요."

 

"그 일에 대해서라면 저 사람은 벌써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니 가서 일들 보시지요."

 

이렇게 사람들을 흩어보내고 그 브라만도 집으로 보낸 후에

사리뿟따 존자는  조용히 사원으로 돌아갔다.

 

 

 

사리뿟따 존자는 참을성도 대단했지만 겸손하기로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 어떤 지적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들이곤 했다.

 

「수시마경(『상응부』 2:29)」 주석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존자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속옷 한 자락이 밖으로 조금 삐져 나왔는데

일곱 살짜리 사미가 그것을 보고 존자에게 말씀드리자,

 

존자는 잠시 비켜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미에게 합장을 하고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고쳐 입었습니다, 스승이시여!"

 

이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밀린다왕문경』에도 나오는데,

사리뿟따가 다음 게송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일곱 살 어린이라 해도

    나보다 나아 가르침을 준다면 머리 숙여 받아들이리.

    그 앞에 나는 정성과 존경을 표하노니,

    언제나 스승의 자리에 모셔도 좋으리.

 

                                                          ― 『밀린다왕문경』, 397 ―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해주었던 앗사지 존자에 대해

그가 평생 존경심을 지녔던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와 숫따」(『숫따니빠따』 주석서)『법구경』(392) 주석서를 보면,

사리뿟따는 앗사지 존자와 같은 사원에 머무르게 될 때면

언제나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고 난 곧바로 앗사지 존자에게 경배를 드리러 가곤 했다.

 

"이 분이 나의 첫 번째 스승이시다.

내가 부처님의 교법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분을 통해서였다."

 

앗사지 장로가 다른 사원에 있을 때에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하여 오체투지를 하고 두 손을 합장하며 예를 올렸다.

 

그런데 이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사리뿟따의 이런 행동을 보고 다른 비구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상수제자가 되고 나서도 천상계에 경배를 올리다니!

아직도 브라만의 견해를 버리지 못했구나."

 

 

이런 험담을 들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렇지 않다. 사리뿟따는 천상계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법을 접하게 해 준 분을 스승으로 받들어 예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사리뿟따는 스승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이니라."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나와 숫따」를 설하신 것이 바로 그때였다.

 

 

   천신들이 인드라를 경배하듯

   사람은 법의 길로 이끌어준 분을 경배해야 하느니라.

 

 

 

은혜를 소중히 하는 사리뿟따 존자의 성품에 관한 일화가 라다 장로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법구경』(76) 주석서를 보면

라다사왓티에 있는 기원정사에 머물고 있던 가난한 브라만이었다.

 

그는 잡초를 뽑거나 청소를 하는 등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하던 불목하니였다.

그런데 그가 계를 받도록 이끄는 비구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세존께서 혜안으로 세상을 널리살피시다가

이 브라만이 장차 아라한이 될만한 그릇임을 보셨다.

 

 

세존께서는 모여있는 비구들에게 그에 대해 알아보시며

그들 중 누군가가 이 가난한 브라만으로부터 도움 받은 적이 없는지 물으셨다.

 

사리뿟따는 언젠가 라자가하에서 탁발하러 가던 자신에게

이 가난한 브라만이 구걸해 온 음식을 한 국자 가득 준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이 사람에게 계를 주라 하셨고 사리뿟따는 세존의 말씀에 따라 그렇게 했다.

 

 

그리고나서 사리뿟따는 수계자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해 그

에게 몇 번이고 가르쳐 주었다.

 

라다는 항상 그의 가르침을 기쁜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이 일을 본 비구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리뿟따의 마음을 칭송하면서,

남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도 그러한 상좌를 두게 되는 법이라고 말들을 했다.

 

 

이에 대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뿟따는 그때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잊지 않고 감사를 표시했다고 하셨다.

 

이와 관련해서 세존께서는 「알리나찟따 전생담(본생경 156)」을 설하셨다.

여기에서는 사리뿟따가 코끼리였는데,

그의 상처를 치료해 준 목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일이 있다.

 

 

 

사리뿟따 존자의 참을성과 겸손함은 그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원정사에 머물 때 일이었다.

우안거가 끝나자 존자는 세존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많은 비구들이 사리뿟따에게 하직인사를 드렸다.

 

사리뿟따는 하나하나 성과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을 떠나보냈다.

그 중에는 존자가 성도 이름도 모르는 비구가 한 명 있었다.

그 비구는 작별하면서 상수제자가 자기 성과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대중 가운데 자기만 그런 배려를 받지 못하자 그는 몹시 섭섭했다.

'나한테는 다른 비구들에게 하듯이 자상하게 인사해 주시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리뿟따에 대해 악의를 품게 되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존자의 옷자락이 자기 귀를 스치게 되자 불만은 더욱 커졌다.

 

 

그는 부처님께 다가가 이렇게 모함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는 분명히 '나는 상수제자다'라고 으스대며

귀가 먹을 정도로 저를 쳤습니다.

그래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세존께서는 사리뿟따를 부르셨다.

그러는 사이에 마하목갈라나와 아난다는 이 중상모략을 알고 대중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스님네들, 이리 오십시오!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을 친견하게 되면 사자후를 터뜨릴 것입니다.

 

 

세존께서 존자에게 물으시자 그는 혐의를 부정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몸을 관하는 마음챙김이 확고히 서있지 못한 사람

도반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용서를 빌지 않은 채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리뿟따의 사자후가 이어졌다.

 

 

그는 분노와 증오에 매이지 않는 자신의 자유로움

깨끗하건 더럽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대지의 참을에 비유했다.

 

자기 마음의 평온

뿔 잘린 황소에,

버림받은 천민 출신 젊은이에,

에,

에,

바람에,

그리고 염오의 제거에 비유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염오(厭惡)

이나

시체에서 느끼는 혐오감에 비유했으며

 

자기 육신이 유지되는 것기름진 혹덩어리가 유지되는 것에 비유했다.

 

 

그가 이 아홉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참마음을 드러내자

대지는 아홉 번 진동하여 이 진리의 말씀에 화답하였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장엄한 사자후에 감동되었다.

 

 

사리뿟따가 자신의 참마음을 밝히자 부당하게 그를 모함했던 비구는 회한에 사로잡혔다.

그는 곧바로 세존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가 모함한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쳤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이 미망에 빠진 자를 용서해주어라.

그러지 않으면 그의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져버릴 것이다."

 

사리뿟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스님을 기꺼이 용서합니다."

 

그리고 합장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라도 이 스님을 편치 않게 했다면 이분도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비구들은 탄복을 하였다.

"우리 장로님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자신을 거짓으로 비방하는 사람에게조차

아무 노여움도 미움도 품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앞에 정중히 몸을 숙여 합장하고 용서를 구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 같은 사람이 노여움이나 미움을 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리뿟따의 마음은 대지와 같고, 일주문 기둥처럼 든든하고, 깊고 잔잔한 연못물과도 같다."

 

그리고 나서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인욕은 대지와 같이 흔들림 없고

   뜻은 일주문 기둥처럼 든든하며

   마음은 깊고 잔잔한 연못처럼 맑으니

   이런 이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도다.

 

                                                          ― 『법구경』 95 ―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함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기에 불행한 결말을 맺고 만다.

 

한번은 꼬깔리까라는 비구가 부처님께 두 상수제자를 모함한 적이 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못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꼬깔리까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자애와 믿음으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대하여라!

그 두 사람은 모든 행동이 훌륭하고 칭찬할만하다!"

 

 

하지만 미혹에 빠져있던 꼬깔리까에게는 부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근거없는 모함을 계속했고 이내 온몸이 종기로 뒤덮였다.

결국 그 병이 심해져 죽자 지옥에 떨어졌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상응부』(6:10), 『숫따니빠따』 대품(10), 『증지부』(10:89),

딱까리야 전생담(『본생경』 481)」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일화를 보면 '참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사리뿟따나 목갈라나는 꼬깔리까의 모함에 아무런 나쁜 마음이 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사 꼬깔리까가 용서를 빌었다 해도 이 두 상수제자의 태도는 여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꼬깔리까 자신은 참회를 했더라면

스스로에게 참으로 이로운 일이 되어 악업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에게 악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거두기 마련이다.

꼬깔리까도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스스로 과보를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