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할리경의 전개
디가니까냐 제1권 계온품 제6경 마할리 경을 보다가 일어난 의문입니다.
마할리(릿차위의 웃탓다)가 세존께 여쭙기를
마할리는
세존의 제자들은 '삼매 수행의 실현을 위해서 세존 밑에서 청정범행을 닦습니까?라고 묻고
세존께서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부정하시고
'더 높고 더 수승한 법이 있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내 밑에서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말씀하신 뒤 그것은 네 가지 성자의 과위 즉,
예류자(豫流者), 일래자(一來者), 불환자(不還者), 아라한.(阿羅漢)의 과위임을 밝히시고
다시 마할리는
'이러한 법들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 있는지?, 그 길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 것인지?'묻습니다.
이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그 길과 그 길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팔정도(八正道/八支聖道)가 바로 그것임을 밝히십니다.
2. 팔정도에 대한 설명을 다른 예를 빌려 하심
이어서 세존께서는
유행승 만딧사와 목발우를 지닌 자의 제자인 잘리야라는 두 유행승이
세존께 드렸던 질문 얘기로 넘어 가십니다. 즉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
의 질문을 빌어 마할리의 질문에 답을 이어 가십니다.
하여,,,,
1)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믿음을 가지고 출가하고
2) 43가지의 계를 받아지녀 구족하고
3) 감각기능을 잘 단속히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4) 필수품만으로 만족하며 수행하고
5) 다섯장애를 제거하고
6) 떨쳐버림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고
7) 다시 제2선∼4선을 구족하고
8) 다시 8가지의 통찰지 中 첫번째인 '그런데 이 알음알이는 무상한 '이 몸'에 묶여있는 것'을
알고
9) 8가지 통찰지 中, 두 번째인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들어내는' 데부터 시작하여
10) 6가지 신통을 차례로 설명하여 마지막인 누진통(해탈)
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시어
두 유행승이 비로소 '자아(생명)와 몸이 같다, 다르다 '라는 주장은 '적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납득하게 되는 과정이 나오고
릿차위의 웃탓다는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라는 것이 마할리 경인 것입니다.
팔정도(八正道/八支聖道)가 네 가지 과위를 얻기 위한 길임을 말씀하신 뒤
달리 팔정도를 하나씩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두 유행승의 질문을 빌어 1) ∼ 10)까지의 정형구로 설법하신 바
결국 1) ∼ 10)까지의 내용을 빌어 팔정도를 설명하신 것이고
이 안에 팔정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설명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말은 하지 않으셨다'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제게 일어난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으셨다'라는 열 가지 문제(十事無記)에 속하는 이 물음,,,
'자아(생명)와 몸이 같은가, 다른가?'
두 유행승이 납득하게 된 이렇게 긴 설명을 두고 '설명하시지 않으셨다'라는 표현이 맞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나는 이와같이 알고 이와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를 그대로 인용하여
'그러한 말은 하지 않으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읺을까?라고 생각이 됩니다.
허면, '왜 그러한 말은 하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수행에 아무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론적인 단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맞는 말 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담,,, 어딘가 미흡해 보입니다.
(어느 경에 실제 세존께서 이러한 이유로 '無記'하셨다고 나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자아와 물질'의 관계와 관련하여 범망경(D1)에 나와 있기로는,
먼저 과거로 모색하는 자들 18 견해 中에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 영속론자 4.
- 일부영속 일부비영속 4,
- 유한과 무한을 설하는 자들 4,
- 애매모호한 자들 4,
- 우연발생론자들 2
견해 중에는 언급이 없어 보입니다.
미래로 모색하는 자들 44 견해 즉,
- 사후에 자아는 인식을 가지고 존재한다 16,
- 사후에 자아는 인식없이 존재한다 8,
- 사후에 자아는 인식을 가지는 것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8,
- 사후단멸론자 7,
- 지금여기 열반을 실현한다 5
견해 中에서
인식을 가지고 존재하면서,
혹은 인식없이 존재하면서.
혹은 인식을 가지지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자아가 물질의 연관성 4가지의경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즉
1) 물질을 가진다,
2) 물질을 가지지 않는다,
3) 물질을 가지기도 가지지 않기도 한다.
4) 물질을 가지는 것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가
그것 입니다.
한편, 마할리경 혹은 이 다음의 잘리야경을 보면,
1)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믿음을 가지고 출가하고
2) 43가지의 계를 받아지녀 구족하고
3) 감각기능을 잘 단속히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4) 필수품만으로 만족하며 수행하고
5) 다섯장애를 제거하고
6) 떨쳐버림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고
7) 다시 제2선∼4선을 구족하고
8) 다시 8가지의 통찰지 中 첫번째인 '그런데 이 알음알이는 무상한 '이 몸'에 묶여있는 것'을
아는 데까지 가더라도,
유행승들은 '자아(생명)와 몸이 같다, 다르다 '라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말하고 있고, 다시
9) 8가지 통찰지 中, 두 번째인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들어내는' 데부터 시작하여
10) 6가지 신통을 차례로 설명하여 마지막인 누진통(해탈)에 이르르서야
어째서 이러한 전개가 이루어지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1)∼8)까지의 닦음을 보면, 결국 8)에서 밝하는 바
비로소 이 알음알이가 이 몸에 묶여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쨌든 '자아'는 이 몸에 묶여잇다는 것이 되고, 이 몸은 물질이므로
결국 '자아는 물질을 가진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행승들의 견해와 같이 '자아는 물질을 가진다.'라는 주장은
굳이 틀리지 않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9) 이후 즉,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들어내고, 마음을 향하게 하여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이것은 물질이 무너진 세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아는 이 몸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어서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하다면,
자아는 처음에는 물질을 가지다가, 깨달음이 진행되면 물질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인가요?
헌데 어떤 자아는 어떤 시점의 어떤 자아이므로 물질을 가지거나, 물질을 가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편이라고 말을 하면 어느 편에 대해서는 틀리기 때문에
'그러한 말은 하지 않으셨'을까요?
만일에 그러하다면
'자아는 물질을 가지기도 가지지 않기도 한다'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한편 '자아는 물질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단지 논리적인 것일 뿐(takkagaheneva)이라고 주석서는 말하므로(DA.i.119)
종국적으로 이러한 귀결들을 종합해 보면,
'그러한 말은 하지 않으신' 이유가 과연 자아란 것은
1) 물질을 가진다, 2)물질을 가지지 않는다, 3) 물질을 가지기도 가지지 않기도 한다.
4) 물질을 가지는 것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中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서가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 범망경(D1)에서도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견해들은 '감각접촉을 조건한 것일 뿐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D1.3.45 ∼ 57)
4. 왜 그러한 말은 하지 않으셨을까? - 질문이 잘못되었으므로 달리 설명하신다
그러하다면 대체 '자아'란 무엇이관대
'물질'과 관련하여 그 어느 경우에도 속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어째서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만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바로 그 이유에 대한 추론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아란 무엇인가?' 혹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최근에 본 비구니 상윳따 中 와지라 경(S5.10)을 인용할까 합니다.
"누가 중생을 창조하였는가?
중생을 창조한 자는 어디 있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行)들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도다."
이 게송들에서 '중생'을 '나'로 바꿔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누가 너를 창조하였는가?
너를 창조한 자는 어디 있는가?
너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너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왜 그대는 '너'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行)들의 더미일 뿐
여기서 "나"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나'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도다."
"누가 이 꼭두각시를 만들었는가?
꼭두각시를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이 꼭두각시는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요
이 불쌍한 것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잘 자라기 위해서는
땅의 영양분과 수분의 둘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도다.
그와 같이 무더기들(蘊)과
요소들(界)과 여섯 감각장소들(處)은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여기서 꼭두각시를 '꼭두각시 같은 나'로 바꿔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이 꼭두각시 같은 너를 만들었는가?
꼭두각시 같은 너를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꼭두각시 같은 너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꼭두각시 같은 너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이 꼭두각시 같은 나는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요
이 불쌍한 것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잘 자라기 위해서는
땅의 영양분과 수분의 둘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도다.
그와 같이 무더기들(蘊)과
요소들(界)과 여섯 감각장소들(處)은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종합해 보면 결국 '자아'란 '혹은 '나"'는,,,,,
1) 형성된 것들(行)의 더미 뿐이요
2) 따라서 이 더미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으며
3) 무더기(蘊, 육입의 오온 즉 색수상행식)이 있을 때 '나'라는 인습적인 표현이 있을 뿐이며
4) 그러한 '나'='괴로움' 이 생겨나고 머물고 없어질 뿐이며
5) 그러한 '나'='괴로움' 말고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그러한 '나'='괴로움'말고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앟고
6) '나'는 '나'가 만든 것이 아니고
7) '나'는 남이 만든 것도 아미고
8) '나'는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9) '나'는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며
10) '나'는 무더기들(蘊)과 요소들(界)과 여섯 감각장소들(處)를 이르는 것이어서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 부서지면 소멸하는
그러한 '나'라는 것입니다.
'자아' 혹은 '나'에 대한 귀결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자아란 것이 1) 물질을 가진다, 2)물질을 가지지 않는다, 3) 물질을 가지기도 가지지 않기도 한다.
4) 물질을 가지는 것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라는 견해는
콩밭에 가서 소금을 찾는 격이 되고 맙니다.
'자아'는 대한 연기론에 귀결됩니다...
"나는 이와같이 알고 이와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바가 지당하시고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에 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설파하시는 과정 끝에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까지에 이르러
'자아와 물질'의 연관 훨씬 이전의 문제 즉,
'자아' 혹은 '나'란 무엇인가를 설파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이르르게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은 몸은 다릅니까?' 라는 질문 혹은
'참으로 자아는 물질을 가집니까?
아니면 자아는 물질을 가지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질문이 틀린 것이므로,,
왜냐하면 물질을 가지든, 가지지 않던,
가지기도 않가지기도 하던, 가지지도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던 간에
'자아'라는 '주어' 자체에 대한 설정이 '있다 혹은 없다'라는 잘못된 설정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래서 '그러한' 말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러한 미망을 깨쳐주시기 위해
'자아' 혹은 '나'의 실상에 대해서 설파하신 것이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읍니다.
제가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왜 그러한 말은 하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제 스스로 가지게 된 것이므로 더 이상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5.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가?
저의 의문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무상 · 고 · 무아를 얘기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알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기 제가 있는데,,,번뇌하는 내가 있는데,,,진리를 찾는 내가 있는데,,,
그럼 이 '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나'는
1) 형성된 것들(行)의 더미 뿐이요
2) 따라서 이 더미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으며
3) 무더기(蘊, 육입의 오온 즉 색수상행식)이 있을 때 "나"라는 인습적인 표현이 있을 뿐이며
4) 그러한 '나'='괴로움'이생겨나고 머물고 없어질 뿐이며
5) 그러한 '나'='괴로움' 말고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그러한 '나'='괴로움' 말고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앟고
6) '나'는 '나'가 만든 것이 아니고
7) '나'는 남이 만든 것도 아미고
8) '나'는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9) '나'는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며
10) '나'는 무더기들(蘊)과 요소들(界)과 여섯 감각장소들(處)를 이르는 것이어서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 부서지면 소멸하는
그러한 '나'라면
적어도 그러한 '나'는 원인 부서지면 소멸할 지언정
혹은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의 '나'가 될 지언정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는 그러한 '나'조차도 아예 없다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나조차도 없다면 이 현실은 환(幻)이라는 극단에 떨어질 것이고
하물며 환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진리가 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무아란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나'가 있는 것이고, 있을 뿐이요
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나'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다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허면 여기서,,, 첫번째,
'나라고 할만한 나'는 따로 있는 것이고
원인을 조건으로 하는 '나'는 '나라고 할만한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요?...
그 다음의 얘기입니다.
마지막의 통찰지까지를 얻어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가 되었다고 칩시다.
여기서 두번째,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그는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마치 범망경(D1.27) 애매모호한 자들의 견해를 밝하면서
그 中 13번째 질문 즉,
(13)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오?'…
(14) '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지 않소?'…
(15) '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오?'…
(16) 만일 그대가
'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오?' 라고 내게 묻고,
내가 '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여래는 사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
를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는 사문,바라문들이 이러한 질문에 애매모호한 것은
'이것은 해로움(不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억겁의 인욕과 수행 끝에 아라한과를 얻어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의 그가 되었을 때,
그 열매라는 것이,,,
결국 완전히 없어져서
다시는 그 어떤 것으로도 태어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라는 의문,,,,.
허면 사람보다도 저 골짜기에 슬픔도 기쁨도 없는
태어난 적이 있는 지 모를 돌맹이 하나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란 말인지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종 목표다....
세존께서는 범망경(D1.3.73)에 이르시기를
"비구들이여,
여래의 몸은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물러 있다.
그런 몸이 머무는 동안에 신과 인간들은 그를 보게 된다.
그러나 몸이 멸하여 생명이 다하면 신과 인간들은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망고 열매들이 달려있는 가지가 있다 하자.
만일 그 가지가 끊어지면
그 가지에 달려있는 망고는 모두 떨어지기 마련인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래의 몸은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버란 채 머물러 있다,
그런 몸이 머무는 동안에 신과 인간들은 그를 보게 된다.
그러나 몸이 멸하여 생명이 다하면 신과 인간들은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D1.3.73)
'여래의 몸은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린 채 머문다'... (D1.3.73)
이 말씀은 어떤 희망적인 메세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남김없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삼십삼천 어디에서라도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린 채 머물'렀셨더라면
어느 아라한이라도 눈깜짝할 사이에 거기로 가서 부처님을 경배드렸겠죠.
그게 아닌 걸 보면, 그냥 완전히 소멸하신 것입니다.
'몸이 멸하여 생명이 다하면 신과 인간들은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한다.'라는
말씀대로 하신 겁니다.
이것은 제게 최대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고 완전히 없어지는 것...
이것이 진실한 최종 목표인가?라는 의문 말입니다.
대승에서 수많은 불국정토를 설정하고, 수많은 부처님들이 거기 설법을 하고 계시고,
다시 수많은 보살들이 중생을 구제하시겠다고 '완전히 없어짐'을 미루시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나타낸 것을 보면
그들도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머물러 있지 않다'라는
유마힐소설경 보살품에서 유마거사가 미륵보살에게 한 말을 위안으로 삼습니다.
이럴 경우 무한한 현재는 적어도 있으니까요...
제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최종 목표다?.....
이런 저는 아직 '존재의 번뇌(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지 못해서 일까요?
언젠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물음을 놓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마할리 경을 보고 일어난 이 질문들...
작년 말에 이 질문들이 일어나면서
제 마음은 청정하지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경을 보면서 생긴 깨끗한 마음, 즐거운 마음이 무엇인가에 오염되고,,,
길을 잘못들어 허무에 빠졌다는 느낌이,,,이건 아닌데 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불도깨비님, 진흙속의연꽃님, 후박나무님, 사띠현정님,
혹은 이 글을 보시게 될 그 누구시라도
먼저 답을 얻으신 분이 계시면
꼭 한 마디 인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200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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