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38.갈애멸진의긴경-육근에서의존재

※後記: 갈애 멸진의 긴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7. 2. 9. 18:08


갈애 멸진의 긴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싫 때

                                                                                                                     

어부의 아들 사띠라는 비구에게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계속되고 윤회한다.'라는 견해가 생긴 것을 계기로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1.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누구든 세존의 법을 의지하고 공부하는 자라면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과 같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알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공부하는 자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같은 가르침을 대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그 느낌과 색깔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사성제나 37가지 도닦는 법 등과 같이 가르침의 요체나 그 뜻을

해석하거나 파악함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세존께서는 당신께서 설하신 법에 대하여,

1)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2)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며, 3) 시간이 걸리지 않고,

4) 와서 보라는 것이며, 5) 내 안에 머물도록 인도할 만한 가르침이며, 6) 현자들이라면 각자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수없이 천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법은 잘 설해졌기에 그 해석을 달리할 여지가 없어, 어떤 이는 이렇게 혹은 다른 이는

저렇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오류나 흠이 없는 가르침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견해가 다른

경우라면 잘못 호지하고 있거나, 공부의 깊이가 다르거나, 수행을 통한 검증이나 성취의 차이 내지

근본적으로 그가 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지 이유의 차이 등 여러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



세존께서는 비구들의 잘못된 행위를 경계하시면서 재가자들이 신심으로 가져온 음식으로

살면서 쓸데없는 이야기에 이어서 논쟁에 몰두하는 것을 경계하시면서


   1)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제대로 모른다. 나야말로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안다.'

   2) '어찌 그대가 이 법과 율을 제대로 알겠는가?'

   3) '그대는 그릇된 도를 닦는 자이고, 나는 바른 도를 닦는 자입니다.'

   4) '그대는 먼저 설해야 할 것을 뒤에 설했고, 뒤에 설해야 할 것을 먼저 설했다.'

   5) '그대가 (오랫동안) 주장해오던 것은 (한 마디로) 논파되었다'

       '나는 그대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했다. 그대는 패했다.'

       '비난으로부터 도망가라. 혹은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 설명해 보라.'

                                                           (* 사문과경, D2:  http://blog.daum.net/ibakdal/17369872)

                                                                                                                     

라와 같이 논쟁에 몰두하는 것 멀리 여읠 것을 설하신 바, 그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라면 먼저

견해를 달리하는 경우에 이같이 논쟁에 몰두해서는 안될 일이라 생각됩니다.

세존의 말씀과 같이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하물며 '법이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논쟁할 이유가 없고, 논쟁한다고 해서 다른 견해를 고수하는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아 다툼에 따른 유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로 다투기 이전에 세존의 모든 가르침은 단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음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갈애의 멸진'이요, '괴로움의 소멸'이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소멸'이요,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지향이야말로 법담을 하고 법을 묻고 가르치며

상대에게 배우는 유익함을 증장시키는 유일한 지향이기에 말입니다. 그러기에 법을 가지고

다툰다든가 견준다는 것은 거룩한 부처님의 법 앞에서는 처음부터 설 자리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 유익함, 건넘을 위한 것일 뿐, 잠과 똥과 존경과 이득과 명성을 다투지 않으며

하물며 「심재 비유의 긴 경」(M29)에서와 같이 계의 구족, 삼매의 구족, 지와 견의 구족조차도

머물 바가 아닌 것으로 보기에 참으로 '의처(依處)와 대상(對象)과 전생(轉生)을 여읜' 청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할 수 없는 어떤 고고한 향기와도 같다고 느껴집니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1978)



그러므로 견해가 다르다 할지라도, 날 선 비판이나 비난 이전에,

정신·물질을 바로 보는 번개와 같은 지혜,, 그런 경우를 부딪히게 되더라도 그러한 업이 자신임을 보는

평온의 지혜,, 수순의 지혜가 현전함과 동시에,, 상대에 대한 동정심과 자애와 연민이 항상 먼저 앞서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다운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럴 뿐이기에,,, 견해가 다르다 하더라도 다투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욕설하지 않고,,, 그 어떤 경우에도 화내지 않는 바른 길을 세존께서는 몸소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 설해진' 부처님의 법을 청정하게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 갈애 멸진의 긴 경의 흐름


본 「갈애 멸진의 긴 경」(M38)의 흐름을 보면


1) 사띠 비구가 '다름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계속되고 윤회한다.'라는 견해를 일으킨 것을 계기로

   ·- 참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유신견의 한 예이며, 극단이라고 생각됩니다.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2) 세존께서는 이 알음알이도 감각기관과 그 대상을 조건으로 '생겨난' 것임을 설하신 후


   -  눈과 형색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와 소리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와 냄새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와 맛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과 감촉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마노의 알음알이[意識]


   - 그러하기에 이 알음알이도 결국 덩어리진 음식, 감각접촉, 마음의 의도, 알음알이(段, 觸, 意思, 識)

      이라는 4가지 '음식'을 음식으로(자양으로) 생겨난 것이며, 그러하기에 음식(자양)이 소멸하면  

      알음알이도 소멸할 뿐이며.


   - 그러하기에 이같이 '이 알음알이도 조건을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라는 이 청정한 알음알이

      조차도 그것을 집착하고, 즐기고, 재산으로 여기고, 나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며, 그러한 

      청정한 알음알이조차도 건너기 위함이지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을 뱀의 비유 경(M22)에서

      법을 뗏목에 비유하신 것을 상기시키시면서 가르치신 후,

                                                     (* http://blog.daum.net/ibakdal/17371905)



3) 여기서 더욱 들어가 그 알음알이가 자양으로 하는 4가지 '음식' 즉,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덩어리진 음식, 감각접촉, 마음의 의도, 알음알이(段, 觸, 意思, 識)를

    설하시면서, 이것이 생겨난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게 할 중생들을 지탱하게 한다고

    설하시고는,


    이같이 어떤 개체(존재)를 유지하고 지탱하게하는 이러한 '음식'은

    '갈애'를 원인으로, 조건으로, 근원으로, 기원으로 생겨남을 천명하십니다.


    1> 세존께서는 이같이 설하신 후 즉, '알음알이←감각기관과 대상←음식←갈애'의 관계를

        천명하신 후, 다시 갈애로부터는 연기법을 따라

        '갈애←느낌←감각접촉←육근←정신물질←알음알이←의도적 행위←무명'의 도리를 가르치시고


    2> 이 말미에 다시 12연기의 순관 즉, 

         '무명→의도적 행위→알음알이→정신물질→육근→감각접촉→느낌→갈애

           →취착→존재→태어남→늙음죽음'과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겨나는 도리를

         설하십니다.

       

     여기서 위 1>과 2>를 같은 반열로 대응하게 하시는 것은 이후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을

     볼 때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본 「갈애 멸진의 긴 경」이 가지는 심심미묘한 가르침

     즉 '존재론'의 핵심 내지 곡절이 되는 부분이며,


     그러기에 경의 끝에 '내가 간략하게 설한 이 갈애의 멸진을 통한 해탈잘 호지하라.'라고

     이 경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 세존의 당부를 의미있게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위 1>과 2>를 서로 비교해 보면,

                                                                                                                                                                                                                     

     ■ 12연기와 알음알이에 대한 가르침의 대응

                                                                                               

      - 12연기: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의 발생

       · 무명(無明)→의도적 행위(行)→알음알이(識)→정신물질(名色)→육근(六入)→감각접촉(觸)

         →느낌(受)→갈애(愛) 

                                        취착(取)→존재(有)→태어남(生)→늙음죽음(老死)


      -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알음알이에 대한 가르침

       · 무명(無明)→의도적 행위(行)→알음알이(識)→정신물질(名色)→육근(六入)→감각접촉(觸)

         →느낌(受)→갈애(愛) 

                                        →음식(段, 觸, 意思, 識)→[감각기관(六入)/대상(名色)]→알음알이(識)


      와 같이 서로 대응되기 때문입니다.



     ■ 괴로움(존재에 매임)의 발생 구조 vs 존재의 메카니즘의 구조


        위에서 보듯이 1>과 2>는 무명∼갈애까지는 그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12연기의 순관에 있어서 갈애 이후는 취착∼늙음죽음까지 괴로움이라는 관점에서

        괴로움의 무더기가 전개되는 과정을, 그리고 알음알이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는 갈애 이후

        음식으로부터 알음알이에 이르는 과정을 설하시는 것이 그 차이입니다.


        무명(無明)과 의도적인 행위(行)가 존재가 존재로서 성립하기 위해 그 앞에 펼쳐지는

        정신물질 전개의 시발인 알음알이(識)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이를 일단 제외하고 보면,


          ·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음식이라는 음식(段食)은 물질(色)에,

          · 감각접촉이라는 음식(觸食)은 육입과 감각접촉에,

          · 마음의 의도라는 음식(意思食)은 느낌과 갈애에,

          · 알음알이라는 음식(識食)은 알음알이라고,


        각각 대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이 대응해보면,


        - 12연기에 대한 가르침에서는 존재에 매임에 따른 '일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는 도리를

           설하시는 반면,


        -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알음알이의 가르침에서는 

           위 존재에 매임에 따른 일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는 도리를 설하시는 관점의 

           기저(基底)에 흐르는 존재 혹은 그 존재가 대하는 세상의 생리·존립방식 즉,  어떻게 그 존재나

           세상이라는 것이 '유지, 지탱'하는지를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존재가 존재라고 인식하고 주장하게되는, 혹은 그 존재가 세상이라고 인식

           하게되는 그 세상이 서로 어떤 방법으로, 마치 어떤 개체가 음식을 섭취하여 자신을 유지해

           나가듯, 상호 의지하고 반응하면서 '존재'와 '세상'이라는 것이 펼쳐지고 존립하는지를 밝히는

           '일체의 존재론'을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실 존재 혹은 존재에 대한 매임이 없을 때

           괴로움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경의 흐름을 보면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알음알이의 가르침과 12연기를 엮어서

           한 번에 설하시는 이 부분 세존의 가르침은 실로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4) 세존께서는 이같이 설하신 후에 다시 12연기의 역관을 설하심으로써 일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

    하는 도리를 설하십니다.


    - 즉, '무명→의도적 행위→알음알이→정신물질→육근→감각접촉→느낌→갈애→취착→존재→

       태어남→늙음죽음'과 같이 앞의 조건이 소멸함으로써 뒤의 것이 소멸하는 방식으로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하는 도리를 설하십니다.


    - 그러나 위에서 전체 괴로움의 발생과 또 한편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알음알이를 설하심으로써

       '존재'의 존립 및 그 유지와 지탱을 묶어서 설하신 것을 볼 때, 여기서는 전체 괴로움의 소멸과

       더불어 '존재의 소멸' 내지 '존재에 매임의 소멸'을 함께 설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즉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바른 견해까지를 설하셨다고 보아지는 것입니다.



5) 이같이 세존께서는 12연기를 따라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도리를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이 알음알이에 따른 존재 내지 세상의 유지 및 생리방식을 대응하여

    설하시는 방법으로 설하심으로써 존재론 즉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명쾌하게

    천명하신 後,


    이제 이 법문을 듣는 비구들에게 그들이 세존께서 설하시는 '존재론'을 잘 알아들었는지 물어보고

    확인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전개는 12연기와 더불어 설하신 것이 바로 '존재론'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바, 그것은 이어지는 법문에서


        '그대들이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도 


        '나는 정말 과거에 존재했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는가? - 존재의 여부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 존재의 정체성

         나는 과거에 어떠했을까?    - 존재로서의 양상

         나는 과거에 무었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라고 - 존재로서의 연원과 변화


         과거로 치닫겠는가?'



        '나는 정말 미래에도 존재할까? 아니면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에 어떠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라고


         미래로 치닫겠는가?'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현재에 대해서 안으로 의심을 가지겠는가?'


     라고 하나씩 '나 혹은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비구들에게 확인하시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세존께서는 소위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존재'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과거, 미래, 현재의 시간을 초월하고 불문하여,


     1) 그 존재의 실제 존재 여부,

     2) 그 존재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존재의 정체성,

     3) 그 존재가 어떻다 혹은 어떤 경과를 겪는다라는 존재로서의 양상,

     4) 그 존재를 존재로 볼 때 논할 수 있는 그 존재의 연원과 향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즉, '존재'의 일체에 대해서

     그것이 실제 '괴로움의 무더기'일 뿐이고,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알음알이라는 '존재의 유지·생리방식'에 의해서 펼쳐지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득되는 현상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결코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거머쥘 수 없는 것이라는

     궁극의 자아론 내지 존재론을 천명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법으로서' 나는 그대들을 잘 인도하였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설파하신 후, 비구들도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존재를 바로 본다는 답변을 들으신 후, 비구들이 그렇게 답변하는 것은 스승을 존중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사문께서 그렇게 말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기에 다른 사람을 스승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그러기에 다른 사문·바라문들 같이 서계를

     지니고 예언을 하고 점복하는 것을 다시는 수행의 핵심으로 여기지 않게 됨을 가르치고

     확인하십니다.


     왜냐하면 위와 같이 궁극의 자아론 내지 존재론에 이르고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스스로 알고 보고 체득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시고 

     과연 그대들도 그렇지 않느냐고 비구들에게 확인 받으십니다.


     비구들이 그렇다고 획인하자 세존께서는 그 비구들을 '장하구나'라고 칭찬하시며

     '이 법으로서' 나는 그대들을 잘 인도하였다라고 천명하시며,


          '이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설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설한 것이다.'


     라고 설하십니다.



     하면 이때 '이 법으로서 나는 그대들을 잘 인도하였다'라고 하실 때 이 법'은 무엇입니까?


     연기에 따른 전체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그와 함께 설하신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알음알이라는 '존재의 유지·생리방식'에 의해서

     펼쳐지는 '존재형식'에 따른 올바른 존재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바로 그것을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일체를 설하셨던 것입니다.



6)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존께서는 이제 사람의 일생에서 어떻게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하고

    어떤 존재가 어떻게 해서 '존재'가 되는지를 실전적으로 설파하는 단계로 들어가서 설파하십니다..


    ■ 사람의 수태와 성장


    - 수태: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합, 어머니의 월경, 간답바의 존재 이 3가지가 있어야 수태됨

    - 잉태: 9∼10개월의 잉태

    - 출산: 태아를 출산

    - 수유: 어머니가 자신의 피로 키움

    - 유년: 성장하고 감각기능들이 원숙해짐→소년에게 어울리는 놀이를 하면서 놈

    - 청·장년기: 다섯 가지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갖추고 즐김

       ·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혀로 인식되는 맛들,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


  

    ■ 인생유전: 육입(六入)에서의 괴로움과 존재의 전개


    이렇게 사람이 태어나서 자아의식이 생기고, 동시에 감각기능이 원숙하게 되면

    그는 6가지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감득(感得)할 때, 즉

   

    1) 눈으로 형색을 보고,

    2) 귀로 소리를 듣고,

    3) 코로 냄새를 맡고,

    4) 혀로 맛을 보고,

    5)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6) 마노로 심리현상을 지각할 때

   

    사랑스러운 것에는 욕망을 일으키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는 혐오를 일으킵니다.


    그는 아직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못했고, 마음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는

    마음의 해탈[心解脫]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욕망과 성냄에 구속되어


    그가 무슨 느낌을 느끼든지[受],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느낌[受]을 즐기고 환영하고 움켜쥡니다



    그가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움켜쥘 때 즐거워함[愛]이 일어납니다. 

    느낌들을 즐거워함이 바로 취착[取]입니다.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생겨납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난다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존재가 생겨나 늙고 죽는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7) 세존께서는 이같이 사람의 수태로부터 인생을 유전하면서 괴로움과 존재가 전개되는 과정을

    설하신 후, 이제 이러한 괴로움과 존재의 굴레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상세하게 설하십니다.


    ■ 괴로움의 소멸과 존재에 매임을 풀어서 벗어남
         

    먼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을 설하십니다.

    이 법을 듣고 여래에 믿음을 가지고 어떤 이가 출가합니다. 그는


    1) 계를 구족합니다._ 안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

    2) 필수품만으로 만족합니다.

    3) 감각기능의 단속을 구족합니다._ 안으로 더렵혀지지 않는 행복

    4)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구족합니다.

    5)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합니다.

    6)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제거 _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7) 삼매를 구족합니다._ 초선∼4선



    여기까지는 다른 경에서와 가르침과 동일합니다. 본경이 특별한 것 중에 하나는

    이후 통찰지를 구족하는 부분에 대한 그 이후의 법문이 다른 경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문과경(D1)에서는 이 알음알이는 이 몸에 묶여있음을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로부터

    누진통까지의 8가지 혹은 6가지 신통을, 혹은 삿짜까 긴 경(M36)에서와 같이 간략히 숙명통으로

    부터 누진통에 이르기까지 삼명(三明)을 설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경에서는 위 예를 든 사문과경이나 삿짜까 긴경에서 설하신 부분에 대응하여,

    실제 그런 지혜가 어떤 수행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설명하고 계신 바 세존께서는

    이를 '간략하게 설하신 것'이라고 경의 마지막 부분에 설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략하게' 설하신 본경의 내용이야말로 이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법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것입니다. 위와 같이 1)계의 구족∼7)삼매의 구족을 깆춘 자가,,,


    아래와 같이 육근에서 갈애를 소멸하여 전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같이 존재에 매임을 풀어서 벗어나는 길을 설하신 것이라고 보아도 좋릉 것입니다.


    1) 눈으로 형색을 보고,

    2) 귀로 소리를 듣고,

    3) 코로 냄새를 맡고,

    4) 혀로 맛을 보고,

    5)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6) 마노로 심리현상을 지각할 때

           

    사랑스러운 것에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사랑스럽지 않은 것에 혐오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무량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는

    마음의 해탈[心解脫]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그는 이와 같이 욕망과 성냄을 버려


    그가 무슨 느낌을 느끼든지[受],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줄겁지도 않은 것이든, 

    그 느낌[受]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움켜쥐지 않습니다..



    가 그 느낌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움켜쥐지 않을 때 

    낌들을 즐거워함[愛]이 소멸합니다. 

    그 즐거워함이 소멸하므로 취착[取]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므로 존재[有]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므로 태어남[生]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므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합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합니다.           


 


8) 경을 부촉() 하심


    세존께서는 이같이 설하신 후

    "비구들이여, 내가 간략하게 설한갈애 멸진을 통한 해탈을 잘 호지하라."라고

    비구들에게 경을 부촉하십니다.


    또한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계속되고 윤회한다.'

    라는 어부의 아들 비구 사띠에 대해서는 그는 '갈애의 큰 그물갈애의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라고 설하셔서,


    결국 윤회의 과정에 나타나는 소위 '존재' 내지 '자아'의 실체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데에 대한 위와 같은 세존의 가르침을 잘못 호지한 것이이서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有身見)의 큰 그물과 올가미에 걸린것이다라고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Epilogue


- 존재론 or 자아론


  · 경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본 「갈애 멸진의 긴 경」에서 연기에 따른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의

    발생·소멸과 함께 음식을 자양으로 하는 알음알아를 설하시면서 괴로움의 무더기를 경험하는

    '존재' 내지 '자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설하신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랬었으시라는 짐작은 있었지만,,, 과연 그러셨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 내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결국 모든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역시 그분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구하셨고, 그것에 대한 답을 천명하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 사성제_고멸성제


 · 대념처경(D22)은 사성제를 설하신 초전법륜경(S56:11)보다도 더욱 상세하게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해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를 설하시면서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하는가?'라고 이 중차대한 물음을 스스로 물으신 뒤


   갈애는 눈,코,귀,혀,몸,마노를 하니씩 지적하시면서

   바로 여섯 가지 감각기능(根), 그 각 대상이 되는 형상,소리,냄새,맛,감촉,법이라는 감각대상(境),

   그로인한 각각의 알음알이(識), 그 각 감각접촉(觸), 그 각각으로 인한 느낌(受),

   그 각각으로 인한 지각(想), 그 각각으로 인한 지음(行), 그 각각으로 인한 갈애(愛),

   그 각각으로 인한 일으킨 생각(尋), 그 각각으로 인한 지속적인 고찰(伺)의

   60곳에서 갈애가 소멸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4)


   본 경 가르침의 마지막 부분은 이 사성제의 고멸성제 법문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으로 '간략하게' 설하신 것입니다.

   


- 삼세양중인과(三果)에 대한 단상


 · 삼세양중인과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태생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열두 가지 가운데

   무명(無明)·행(行)이 과거세의 2인(因)이 되어 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라는

   현재  세의 5과(果)를 초래하고, 다시 애(愛)·취(取)·유(有)가 현재세의 3인()이 되어

   생(生)·노사(老死)라는 미래세의 2과()를 초래하여 괴로운 생존을 되풀이 한다는 견해.


   이는 삼세(三世)에 걸쳐 인과(因果)가 겹침으로 삼세양중인과()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시공불교사전)



 · 세존께서는 윤회와 윤회의 끝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생담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연기를 이해할 때 삼세양중인과와 같이 연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 경 「갈애 멸진의 긴 경」에서 연기를 설하실 때 그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소멸함을 설하심과 더불어 사람의 일생에서 그 사람이 성장하여 감각기관이 원숙하면서

   육입(六入)에서 갈애와 더불어 취착, 존재, 태어남, 늙음·죽음이 일어나고 그 반대로 소멸한다고

   설하시는 것을 보면 삼세양중인과와 같이 (실제 그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전생, 현생, 내생의

   전개만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견해도 부정될 수 없는 것이지만, 오히려 매 시간, 시시각각의 정신·물질의 전개와

   태어남·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을 태생이라는 사건까지

   확장했을 때 같은 원리의 관점에서 삼세양중안과의 관점도 성립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기실 시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것은 정신·물질界에서 인과율을 보장하기 위한

   사건 발생 및 전개의 순서이며, 인식의 순서가 그러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어서 시간의 비가역성이나

   적어도 이 정신·물질계에서 빛보다 빠를 수 있는 것은 없도록 이 界의 태생이 그러한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거꾸로라면 인과나 연기의 순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에를 들면 관측의

   동시성을 보장하는 빛과 동일한 속도로 움직일 때,,, 시간은 정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어느 경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런 법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비구에게 세존께서

   물었을 때 한 비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숨을 들이쉴 때 제가 태어나고, 다시 한 숨을 내쉴 때

   제가 죽는다고. 세존께서는 이 비구를 크게 칭찬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같은 관점은 다름아닌

   여섯 감각기관에서 감각접촉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거머쥐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존재가 일어나고

   그때 도닦음에 따라 시시각각 존재가 소멸한다는 본 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


- 다시 느낌에 마음챙김으로


· 세존께서는 사람의 일생과 더불어 전체 괴로움의 소멸이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

  본 경에서 간략하게 설하십니다.


  그 중의 핵심을 뽑으라면,

 "그 느낌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움켜쥐지 않을 때 낌들을 즐거워함[愛]이 소멸한다."라고

  설하시는 부분입니다.


   본 경에 앞의 삿짜까 짧은 경도, 갈애 멸진의 짧은 경도 요지는 느낌에 마음이 지배당하지 않음

   이었고 느낌을 바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느낌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느낌을 바로 보지 않고는 그 다음 모든 것을 놓쳐버립니다.

   그것은 괴로움을 벗어나는 첫 관문과도 같습니다.



- 탐진치에 대하여


 · '간략하게' 설하신 이 가르침은 또 다른 큰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소위 탐진치 즉, 욕망, 분노, 어리석음(무명)의 서로의 연관성에 대한 것입니다.


   '탐진치'라는 말에 우리는 익숙해 있지만 그 연관성이나 뜻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치탐진'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새깁니다.

   즉, '어리석음(恥)→욕망·성냄(耽·嗔)'라고 이해하고 새기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것입니다.



   본 경에서 세존께서는 사람의 일생의 전개와 더불어 이와같이 설하십니다.


      '그가 감각기관으로 감각대상들을 접촉할 때

       사랑스러운 것에는 욕망을 일으키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는 혐오를 일으킨다


       그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마음은 제한되어 있다. 

       그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욕망과 성냄에 구속되어 ·········  "



     이같은 세존의 가르침은 탐진치의 상호연관성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드러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가 괴로움이나 존재의 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지혜가 없기(恥/無明/어리석음)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에는 욕망을 일으키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는 성냄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욕망(耽)과 성냄(嗔)에 구속되는 것이므로, 지혜없음을 따라 욕망과 성냄을 일으키는

     이라고 순서를 따라 이해함이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돌아보며,,,


         無時無空無因門

         한 줄기 맑은 바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질 않으니


         그림자도 일어나

         세 번 절함을

         잊어버렸네.

                                                  (* http://blog.daum.net/ibakdal/4953549)



    돌아보니 2008.8.22,,,   블로그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10년 전에 써 본 것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에 관심은 깊었지만,, 아직 초기불전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벗어나기 위해 써 보고는 혼자서 한동안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한 경계에 대한 짐작은 있었지만 짐작일 뿐 그 요체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정말 하나도

    몰랐던 것입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지만 확신이 있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갈애 멸진의 경을 사경하면서,,, 그 실체와 요체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시고 알게 해주신 부처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소중한 가르침을 잘 호지하겠습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공덕으로

행복하고 위험없는 열반으로 장애없이 도착하기를

 

수 많은 생 윤회할 때

고통 위험 원수들과 나쁜 것들 안 만나고

모든 행복 축복들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오늘 지금 행한 공덕 몫을

부모 가족 스승 친척 친구 자신보호

어려울 때 연민과 도움을 주신 도반들

천신들을 시작으로 삼십일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

성취하길 바라면서 회향합니다.

 

경을 번역하여 알리느라 노고를 마다 않으신 대림스님과 각묵스님 건강하시기를,,,

 

이 방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집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김해 장유 반룡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지리산 실상사와 지리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보라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모두 이 회향을 받아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2017.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