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11.사자후의 짧은 경-무엇이 다른가

後記: 사자후의 짧은 경(M11)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6. 5. 23. 19:55


사자후의 짧은 경(M11)은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사자후'라는 표현이 붙여진 경을 다 본 것은 아닙니다만, '사자후'라는 형용이 붙은 경들은

다른 경과는 다른 일종의 특색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자가 그 소리를 내면 내노라하던

뭇짐승들이 모두 움츠려들고 조용해진다고 합니다.


대림스님은 주해에서 '사자후(sihanda)라는 제목이 붙은 경은

모두 다른 종교나 사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결코 따를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부처님과 불교 교단에서만 있는 뛰어난 가르침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뭇짐승들이 사자후를 듣고 두려워하듯이,

부처님의 이러한 사자후를 듣고 외도들은 두려워하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라고 하신 바

참으로 적절한 새김이라 생각됩니다.




정신·물질의 증장에 철저히 기대어 있고, 그러기에 '나'나 세상이 무엇인지 그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

모른채 어쩌면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어떤 인간이나 존재의 교설과 그 일체를 바르게 꿰뚫어 버린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서로 비교조차가 되겠습니까마는,


본 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직접 당신의 가르침은 그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명확히 하고 계신 바,

늘날에도 어떤 이가 '불교가 다른 종교가 무엇이 다른가?'라고 묻는다면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같이 '바르게 사자후를 토해야'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경(經)을 공부하면서 놀라는 점 중에 하나는 어떤 경이라도 그냥 설해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요지가 불분명하다거나, 그저 이런저런 가르침을 섞어서 중언부언화여 설했을 뿐

그 경을 설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겟다거나 하는 경우란 전혀 없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분명한 지향점과 요지가 있고, 그 가르침을 폄에 있어서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진행에 있어서도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이 분명한 곡절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사자후의 짧은 경도 처음에 보면 단지 부처님께서 '나의 가르침이 최고다'라고 하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참으로 심심미묘한 도리를 가르치고 천명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세존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을 펴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가 최상의 신이라 할지라도

다리가 후들거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각설하고 세존께서는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라고 천명하시고,

비구 제자들에게 "이렇게 '바르게' 사자후를 토하라."라고 천명하십니다.


중도(中道)를 표방하시는 세존을 생각하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야만 사문이라 할 만하다.'라는 극단적인 천명을 하시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다른 외도들의 교설에는 사문이 텅 비어있다."라고 다시 천명하십니다.


그 이유로 세존께서는 네 가지 법을 설하신 바,

스승과 법에 대한 깨끗한 믿음, 계행의 구족, 수행자들간의 소중히 여김과 호의가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중요한 곡절은 그 다음인데, 다른 교설을 따르는 무리들이 그러한 네 가지는 우리도 그렇다.

그대들은 우리와 무엇이 다르다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부터 시작합니다.




1. '존재를 어떻게 보는가?' 즉 존재론의 차이


세존께서는 어떤 교설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먼저 가르침을 펴시는 바,


1) 구경의 경지는 하나인지 여럿인지

2) 그것은 탐욕을 여읨을 지향하는지

2) 그것은 성냄을 여임을 지향하는지

4) 그것은 어리석음을 여읨을 지향하는지

5) 그것은 갈애를 여읨을 지향하는지

6) 그것은 취착을 여읨을 지향하는지

7) 그것은 현명함을 지향하는지

8) 그것은 순응도 저향도 여읨을 지향하는지

9) 사량분별을 즐기거나 기뻐하지 않음을 지향하는지


의 아홉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극적인 반전은 그 다음인데,

세존께서는 존재에 대한 견해, 비존재에 대한 견해에 집착하거나,

이 두 가지 견해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재난, 이들로부터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 그는 위의 아홉 가지를 지향할 수 없고, 따라서 해탈하여 괴로움을 종식할 수가 없다고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존재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재난, 이들로부터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면, 그는 위의 아홉 가지를 지향하는 자이어서 해탈하여 괴로움의 끝에 이른다고

천명하십니다.




존재에 대한 견해, 비존재에 대한 견해의

1) 일어남과 사라짐. 2) 달콤함과 재난을 꿰뚫어 알고, 3) 그로부터 벗어난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다른 외도들의 교설과 세존의 가르침이 다른 그 첫 번째가 바로 '존재에 대한 바른 견헤(正見)'라는

존의 가르침은 마치 천둥 벼락에 천지가 진동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취착을 철저히 아는가?


첫 번째 가르침으로부터 세존의 가르침은 한 단계 비약합니다.

갑지기 네 가지 취착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먼저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欲取], 2) 견해에 대한 취착[見取], 

3)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戒禁取], 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我語取]의

네 가지 취착이 있음을 천명하시고,


이어서 다른 사문·바라문들의 경우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을 알더라도, 혹은 감각적 욕망과 견해에 대한 취착을 알다라도, 혹은 이에 더하여 계금취까지 더하여 알더라도,

각각의 경우 나머지 취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계금취까지 3가지 취착을 알더라도

결국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안다고 천명할 수 없다고 천명하십니다.




세존의 사자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취착에 대하여 철저히 안다고 천명하지 못하는 가르침, 즉 그런 법과 율을 따르는

자들은 설사 그들이 스승과 법에 대한 깨끗한 믿음, 계행의 구족, 수행자들간의 소중히 여김과 호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른 길을 갔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세존의 천명이 그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법과 율이


    1) 잘못 설해졌고

    2) 잘못 선언되었고 

    3) 벗어나게 하지 못하고 

    4)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5) 정등각자에 의해서 선언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천명하십니다.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세존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에 대한

정등각자의 평가로 보아도 좋을 것이며, 그 이유는 여가서 상세하게 설하시는 바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이란 바로 디가니까야 범망경(D1)에 설하신 바 62가지 자아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한 견해들은 모두 '감각접촉을 조건'한 뿐인

것이며,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빠져있는 자들이, 느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느낌이

동요된 것'에 불과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연기법으로써 정신·물질 혹은 오온을 '바로 보지' 못하여

취착하게 된 망상에 불과한 것임을 범망경에서 세존께서는 천명하셨습니다.


'존재'의 이야기에서 '취착'으로의 도약은 세존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랍들에게는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하겠습니다만, 존재의 원인이 취착이므로 이 취착에 대한 꿰뚫어 앎이 없이는 존재를 바로

봄이 불가하므로 이러한 가르침의 전개는 참으로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눈여겨 봐여할 것은 비록 취착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이 가르침은 여전히 첫 번째 가르침인

존재론의 차이를 상세하게 하기 위한 보론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연기로써 '존재를 바로 봄'


이렇게 천명하신 후 세존께서는 그 꿰뚫어 알아야 할 취착의 원인이 무엇인지 연기로써 설하십니다.


즉, 취착은 갈애를 원인으로, 갈애는 느낌을 원인으로, 느낌은 감각접촉을 원인으로, 감각접촉은 여섯

감각장소를 원인으로, 여섯 감각장소는 정신물질을 원인으로, 정신물질은 알음알이를 원인으로,

알음알이는 의도적 행위를 원인으로, 의도적 행위는 무명을 원인으로 설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로써 오온을 바로 보는 명지(明知)가 일어날 때 (사성제를 보아) 무명이 제거되고,

바로 그러한 명지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감각적 욕앙, 견해, 계행과 의례의식, 자아에 대한 교리라는

모든 취착들을 '움켜쥐지 않게 되고', '움켜쥐지 않을 때, 번민하지 않게 되어' 스스로 열반에 든다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존재에 대한 견해, 비존재에 대한 견해에 빠지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즉 이 모든 것, 혹은 정신물질, 혹은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을 여읨, 움켜쥐지 않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연기법으로써 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이 다른 가르침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나'와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은 감관되든 되지 않든, 그것이 신이든 비인간이든 인간이든 혹은 그들의 대상이든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 다른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부터 시작하여 존재 혹은 비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을 가르쳐

'무지(無知)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불사(不死)'의 법을, 대자유의 길을 가르치신 분은

오직 세존 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두 손 높이 모아 그분께 예경합니다.




이 사자후의 짧은 경을 사경한 공덕 몫을

여기에 거하는, 이 인근에 거하는 모든 천신들과 비인간들께

31천 존재하는 부처님의 법을 좋아하는 모든 존재들께

부처님의 법을 만나 행복의 문 여시기를,,,

장애없이 열반에 이르시기를 기원하면서,,,

회향합니다,,,,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요.

사∼두∼  사∼두∼  사∼두∼



2016.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