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공포 경」은
맛지마 니까야에서 모든 법의 뿌리인 열반에 대해서 철저히 앎으로써 갈애를 소멸한다는 방법으로
설하신 「뿌리에 대한 법문 경」, 모든 번뇌를 없애고 단속하여 머무는 법을 설하신 「모든 번뇌 경」, 그리고 팔정도로써 없애야 하는 법들인 16가지 오염원들을 벗어남을 설하신 「법의 상속자 경」에
이어 그 네 번째 경입니다.
세존께서 사왓티 제따숲의 아나따삔디까 원림에 머무실 때,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을 뵙고
세존께서는 제자들인 출가 사문들의 지도지이며, 돕는 자이며, 인도자이며, 본보기이신데
세존께서는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서의 한거를 하시는 바
만일 세존의 제자들이 세존을 그와 같이 따라 한다면, 그러한 숲과 밀림의 떨어진 외딴 곳에 거주함은
1) 참으로 견뎌내기 어렵고, 2)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고, 3) 혼자됨을 즐기기는 어렵고, 4) 그 비구들이
삼매를 얻지 못한 경우라면 그러한 비구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릴 텐데,
이러한 수행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세존께 일종 도발적이기도 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함은
1) 참으로 견뎌내기 어렵고, 2)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고, 3) 혼자됨을 즐기기는 어렵고, 4) 그 비구들이
삼매를 얻지 못한 경우라면 그러한 비구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는 것을 자눗소니 바라문의 말과
같이 다 인정히시고,
이어서 세존께서 아직 정각(正覺)을 이루시기전 보살 때도
그와 같이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함은
1) 참으로 견뎌내기 어렵고, 2)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고, 3) 혼자됨을 즐기기는 어렵고,
4) 숲은 삼매를 얻지 못한 자들의 마음을 빼앗아가 버린다고 생각했었노라고 솔직하게 천명하십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당신께서 보살이었을 때를 상기하시면서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서 설하시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서 거주하는 것의 어려움 즉, 1) 참으로 견뎌내기 어렵고,
2)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고, 3) 혼자됨을 즐기기는 어렵고, 4) 숲은 삼매를 얻지 못한 자들의 마음을
빼앗아가 버린다고 함의 '핵심'이 바로 '두려움과 공포'이기 때문이다라고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즉 '두려움과 공포' 야 말로 밀림의 외딴 곳에는 혼자 거주하기가 어렵게 되는 핵심적 원인
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후 세존의 말씀은 동문서답을 하신 것이 될 터이고, 이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자눗소니 바라문도 이상한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니, 결국 세존께서는 자눗소니 바라문의
질문에 대해서 그 핵심이 '두려움과 공포'라는 것을 꿰뚫어 아시고 그에 관하여 설하신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기실 이 「두려움과 공포 경」은 그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는 것을 설하시지만, 그에 대하여 설하신
후에는 그리하여 그 다음에 어떻게 열반을 증득하시는 데에 이르렀는가까지를 상세하게 설하고 계신 바, 자눗소니 바라문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질문을 곡절로 그에 대한 답과 더불어서 그를 제도하기 위한 광대하고 상세한 법문을 담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란 어떤 것입니까?
존재라는 모든 존재는 두려움 속에서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구경의 지혜를 실현하여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 버린 채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
입니다.
고통, 불행, 괴로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가진 것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룸과 공포,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 무서운 것에 대한 공포 等. 하다 못해 어젯 밤 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다가도
무서워서 꼼짝달싹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움과 공포가 주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약한 자는 약한 자대로, 강한 자는 더욱 강한 존재를 만나게 될까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는 것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이든 아귀든 축생이든 혹은 천상의 신이든, 그가 욕계든 색계든 물질과는 아예 결별한
무색계의 존재든, 그가 존재라면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를 벗어날 수 는 없는 것이기에
'두려움과 공포'는 '존재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한 개의 곡절이, 심연이 있는 바,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공포'일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바로 그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서 그 원인과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을 본 경에서 밝히고
계시는 고로 참으로 소중한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나는 원인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16가지로 설하셨습니다.
1) 몸의 행위가 청정하지 못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몸의 행위를 청정히 하여 이를 벗어나고,
2) 말의 행위가 청정하지 못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말의 행위를 청정히 하여 이를 벗어나고,
3) 마음의 행위가 청정하지 못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마음의 행위를 청정히 하여 이를 벗어나고,
* 몸, 말, 마음으로 업을 지으니 1) ∼ 3)은 어떤 존재의 해로운 업, 즉 악업(惡業)
4) 생계가 청정하지 못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생계를 청정하게 하여 이를 벗어나고,
5) 욕심을 부리고 감각적 욕망에 깊이 탐닉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욕심을 부리지 않음으로 이를 벗어나고,
6) 악의와 타락한 생각을 품음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자애로움으로 이를 벗어나고,
7) 해태와 혼침에 압도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해태와 혼침이 없음으로 이를 벗어나고,
8) 들뜨고 고요하지 않은 마음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고요한 마음으로 이를 벗어나고,
9) 유익한 법에 대하여 의혹과 의심을 품음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의심을 건넘으로 이를 벗어나고,
* 5) ∼ 9)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10)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난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나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않음으로 이를 벗어나고,
11) 무서움과 두려움에 질려있음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소름끼침이 없음으로 이를 벗어나고,
12)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바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바라는 것이 적음으로써 이를 벗어나고,
13) 게으르고 정진하지 않음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열심히 정진함으로써 이를 벗어나고,
14) 마음챙김이 없고 알아차림이 없음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이를 벗어나고,
15)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함이 두려윰과 공포를 불러오니,
삼매의 성취로 이를 벗어나고,
16) 통찰지 없음과 멍청함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오니,
통찰지의 구족으로 이를 벗어난다.
라고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을 알고 벗어날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하여 숲속에 머무는 데 '더욱더 안전함을 느꼈다.'라고 설하시고 계신 바에 깊이 주목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반대는 바로 '안전함'을 느끼는 것이며 이 안전함이란
어떤 것으로부터의 위험이나 위협도 보지 못한다는 의미이기에 말입니다. 이러한 '안전함'이라는 것의
가치와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살지만, 잘 산다는 것 이전에 안전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현재의 세상에도 얼마든지 목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애경(metta sutta)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항상 기원하는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하신 뜻을 다시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와 더불어서 1) ∼ 4)의 경우는 바로 계(戒)를 구족함에 상응하는 바, 「사문과경」 등 많은
다른 가르침에 있어서도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계를 구족한 비구는
계로써 잘 단속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 이는 관정을 한 끄샤뜨리야 왕이 적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 그리하여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구족하여
안으로 비난받지 않는 행복을 경험한다." (http://blog.daum.net/ibakdal/17369872)
와 같이 가르치신 바 그와 궤를 같이 하며,
또한 5) 욕심과 감각적 욕망에 깊이 탐닉함에 있어서는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入)의 단속을 구족하여
"안으로 더렵혀지지 않는 행복을 구족한다."라는 가르침과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가르침으로
새겨야 하겠습니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0493)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은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와 같이 16가지로 '두려움과 공포'를 제어하시는 보살이던 때도 '그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다.'라고 설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귀신들이 들락거리는 날일런지는 몰라도 상서로운 날에 소름끼치는 곳을 일부러 택하여
머무시면서 '그러면 아마도 두려움과 공포를 볼 수 있으리라.'고 하시면서 머무십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공포'를 마주서서 낱낱히 보면서 그것의 본질을 꿰뚫고 극복하시고자 하셨던 모습을
전해 주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세존께서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왜 이렇게 두려움을 기대하면서 머물러랴 하는가?'라고 자문하시면서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어떤 자세로 있던, 그때 어떤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든, 나는 그 자세를 유지한 채 그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치리라.'라고 마음먹으시고 그것을 실현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으로 위없는 도인(道人)의 위없는 도닦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세존의 법문은 한 단계 더 도약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위에서 세존께서는
그 자세를 유지한 채 무슨 방법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치셨는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자눗소니 바라문에게 대하여,
어떤 자들은
밤인데 낮이라하고 낮인데 밤이라고 인식하는 바 그들은 '어리석음에 속아서 사는 것'이라 하시고
그러나 세존 당신께서는
밤은 밤이라고 낮은 낮이라 인식하시며,
그리하여 '어리석음의 본성을 초월'한 분이 세상에 출현하셨고, 그것은 세상을 연민하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을 두고 했을 때 바른 말이다라고 하시는
부분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관한 법문 끝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공포'는 낮을 밤으로 밤을 낮으로 인식할 만큼 어리석음에 속아서 사는 것 즉,
어리석음이 그 본질이요, 그러한 두려움과 공포는 낮을 낮으로 밤을 밤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처럼
나를 포함한 일체 대상 즉 정신·물질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봄 즉, 어리석음의 본성을 초월함으로써
물리쳐지는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미루어 보건대 이와 같이 알고 보는 것은 이미 보살께서
연기(緣起)로써 오온을 바로 보는 것에 심오한 지경에 이르렀셨던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법문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라고 자세히 읽어 보면 여기에서까지도
보살이셨던 세존께서는 아직 구경의 지혜인 열반을 증득하신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 말, 마음으로 해로운 업을 짓는 것에서 벗어나고, 생계가 청정하지 못함에서 벗어나고,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벗어나고,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난함에서 벗어나고, 소름끼침이 없음을
성취하시고,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바라지 않아 소욕하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항상 알아차리며, 삼매에 능함을 성취하고, 통찰지를 구족한 연후,
그 마지막 뚜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두려움과 공포마저를 이와 같이 물리치시자,
모든 장애와 오염원으로부터 벗어나신 바 되어 그 이전의 닦음을 과거형으로 하면서
비로소 혹은 다시금
"1)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2)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으며,
3) 몸이 경안하여 교란하지 않았고,
4)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이 되었습니다."
라고 천명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4아승지 10만겁을 십바라밀을 닦으시고 구족하신 후 이제 정각을 이루시는 바로 직전에
보살의 마음을 이와 같이 상세하게 설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선(禪)과 삼명(三明)을 증득하시는 과정을 설하십니다.
그와 같이 모든 장애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일념이 된 마음으로
초선에서 사선에 이르는 선(禪)을 구족하여 머무시고,
이어서, 이와 같이 하여
'그 마음이
집중되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로,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로,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향하게 하여 꿰뚫어 알게 되어 해탈하셨음을 상세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극도로 간략히 줄여보면,
1) 모든 오염원에서 벗어나고 두려움과 공포까지를 물리치신 바,
(연기로써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짐)
2) 일념이 되어,
(불굴의 정진, 마음챙김의 확립, 몸의 경안, 마음의 집중이 이루어져)
3) 바른 삼매를 차례로 구족하고,
(바른 삼매란 초선에서 사선)
4) 그리하여 그 마음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된 바,
(마음이 집중∼흔들림이 없는 등의 9가지 양상)
5) 그 마음의 집중됨을 향하여 자신의 전생을(숙명통), 중생들의 윤회의 모습과 실상을 꿰뚫어 알게
되셨고(천안통),
6) 그렇게 꿰뚫어 알아 보면,
이 모든 중생, 존재, 세상, 정신·물질, 혹은 오온의 일어남·사라짐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나라할 것이 없음을 사무치게 알고 보니)
오직 괴로움이요, 괴로움의 일어남이요, 괴로움의 소멸이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
있음을 즉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를 꿰뚫어 알게 되시자,
비로소 번뇌들 즉,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 존재에 기인한 번뇌, 무명에 기인한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고(누진통),
다시는 태어남에, 존재에 들지 않게됨(열반)을 꿰뚫어 아셨고,
괴로움의 종식을, 갈애의 부숴짐을 성취하셨다.
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마지막으로 세존께서는 자눗소니 바라문에게 당신께서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하시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하시는 바 이것도 새겨야 할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첫째는, 내 스스로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문다는 이익이 있고,
둘째는, 다음 세대를 연민하는 하기 때문이라는 이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큰 울림을 전합니다.
아! 열반을 스스로 증득하신 위없는 드분 정등각자께서도 지금·여기 행복하게 머묾을 원하시는구나
라는 것과, 아! 그분께서는 당신의 성취를 이루신 다음 그 옛날 그때부터도 벌써 다음 세대를 연민
하시며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서 홀로 궁구하셨구나라는 고마운 마음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받아 지녔습니다.
이와 같이 상세한 가르침을 주신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청정한 믿음으로 거룩하신 붓다, 담마, 상가에 귀의합니다.
삼보에 엎드려 합장삼배하옵고,,,
이 두려움과 공포경을 사경한 공덕을
31천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께 회향합니다.
또한 특별한 의미를 담아 대림스님과 각묵스님께,,,,
우 또다나 사야도와 일창스님께,,,,
또한 보라산과 반룡산의 천신들께 회향합니다.
회향을 받아 행복하시기를,,,
평안하시기를,,,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장애에서 벗어나시기를,,,
원수들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어리석음의 본성을 초월하여 어떤 두려움과 공포도 없게 되시기를,,,,
장애없이 열반에 이르시기를,,,,,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
2015. 7.24
※ 몇 가지 질문들
- 왜 몸의 행위가 청정하지 못함∼통찰지 없음과 멍청함까지의 16가지 요인은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올까? 왜 그런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일까?
원래 그런 것이라면 그 원래라는 것은 무엇일까?
- 집중되고∼흔들림이 없고까지의 9가지 요건을 갖춘 마음을 향하게 하여 삼명(三明)을 얻는다고
하셨다. 도대체 이 마음이라는 것을 실체가 무엇이관대 집중하여 향하게 하면 시공을 초월하여
전생과 겁을,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꿰뚫어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한 억겁의 기억이
어디에 보관이라도 되어 있다, 혹은 지금의 이 두 눈은 어디에 가려져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손치더라도 또 마음에 의해서 그렇게 파악되는 대상 즉, 이 세상, 시공, 존재들의 실체란
그 본질이 무엇이관대 그러한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말인가?
- 초경에는 숙명통을, 이경에는 천안통을, 삼경에는 누진통을 증득했다고 하셨다.
이것은 모두 그 거룩한 하룻밤에 일어난 일로 초경은 저녁 7∼9시, 이경은 9∼11시, 삼경은 11∼
1시이므로 이 각각의 심오하고도 방대한 명지(vijja)는 모두 각각 2시간 정도에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들이다. 마치 격파시범에서 송판이나 기왓장을 격파하듯이 그렇게 말이다.
'맛지마니까야(中部) > M4.두려움과 공포경-공포를 물리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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