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둠바리까 사자후경은
세존께서 라자가하(왕사성) 독수리봉(영취산)에 머무실 때,
우둠바리까 왕비가 소유하고 있던 원림에 니그로다 유행승이 3천명의 유행승 회중과 정착하고
있었는데 세존의 제자인 산다나 장자가 세존을 친견하러 나왔다가 시간이 일러 잠시 이곳에
들르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니그로다 유행승의 무리는 큰 목소리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바, 산다나 장자는
'세존께서는 숲이나 밀림 속에 있는 조용하고 소리가 없고 한적하고 사람들로부터 멀고 혼자 앉기에
좋은 외딴 처소들을 수용합니다.'라고 하자,
니그로다 유행승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는 마치 '외눈박이 소가 조심스럽게 변두리만을 다니는 것과 같다'라며 세존을 비난합니다. 세존께서는 신성한 귀로 이를 들으시고 이들을 제도하시기 위해
그들에게로 가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모르기에 '쓸데없는 이야기'에 빠져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열가지 유익한 법(十善業)의 반대인 열 가지 해로운 법(十惡業) 中 입으로 짓는
악업에서 '잡담을 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생각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합니다만 왕 이야기, 겁나는 이야기, 탈 것, 여자, 영웅,
전에 죽은 자, 세상의 기원,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 等 세존께서 예시하신 내용을 보면
오늘 우리가 TV, 영화, 혹은 다른 매체를 들을 통해 생산되고 매일 접하게 되는 내용일 뿐 아니라
인터넷 등을 통해 소비되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그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 이들을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하신 데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새겨야
하겠습니다.
니그로다 유행승은 '한 방의 질문으로 그를 꼼짝 못하게 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그가 세존께 던진
질문은 '세존께서 제자들을 인도하는 세존의 법은 무엇입니끼?'라는 것이었던 바, 세존께서는
그대의 스승에게 전승된 금욕에 대해서 '고행을 통한 금욕은 어떻게 해서 완성이 되며, 어떻게 해서
완성되지 않습니까?'라고 먼저 그들이 지닌 교설의 완성에 대해서 논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고행을 통한 금욕을 설하고, 고행을 통한 금욕을 본질로 하고, 고행을 통한 금욕에 계합하여
머룰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지켜려하고 행하는 여러가지 절제와 고행과 금욕이 그들의 기준에 의해서
다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갖가지 오염원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고행자가
이러힌 오염원들로부터 청정하지 못하면 결국 그 고행을 통한 금욕은 오염되고 보람없게 됨을
아래와 같이 24가지로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1) 그가 그 고행으로 마음이 흡족하고 이제 그의 의도는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것
2) 그가 그 고행으로 자신을 칭송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
3) 그가 그 고행으로 취(醉)하고 혹(惑)하고 방일함을 얻는 것
4) 그가 그 고행으로 이득과 명성과 존경을 얻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마음이 흡족하고 이제 그의 의도는 성취되었다고 여가는 것
5) 그가 그 고행으로 이득과 명성과 존경을 얻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자신을 칭송하고 남을 업신여기는것
6) 그가 그 고행으로 이득과 명성과 존경을 얻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취(醉)하고 혹(惑)하고 방일함을 얻는 것
7) 그가 그 고행으로 음식에 분별을 가져 위험을 보지 못하고 출구를 보지 못하면서 즐기는 것
8) 그가 그 고행으로 이득과 존경과 명성에 집착하게 되어
왕과 대신들과 왕족들과 바라문들과 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9) 그가 그 고행으로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그러고서도 사문이라고 떠벌리느냐'고 얕보는 것
10) 존경받고 예배받는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을 보면서
저들은 고행이나 금욕을 하지 않고 풍족하게 살면서 존경받고 예배받는데
나는 고행하며 어렵게 사는데도 존경받고 예배받지 못하는구나라고 질투와 인색을 일으키는 것
11) 붐비는 길에 앉아 고행으로 시선을 끄는 짓을 하는 것
12) '나는 고행을 합니다, 나는 고행을 합니다.'라고 자신을 드러내지 앟는 척하면서
여러 가문들에게 다니는 것
13) 좋으면서도 싫은 척, 싫으면서도 좋은 척 딴청부리며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
14)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법을 설할 때 좋은 방편이라고 인정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15) 고행자가 분노하고 원한을 품는 것
16) 고행자가 경멸하는 것
17) 고행자가 앙심을 품는 것
18) 고행자가 질투하는 것
19) 고행자가 속이는 것
20) 고행자가 완고한 것
21) 고행자가 거만한 것
22) 고행자가 사악한 소원을 가져 사악한 소원의 지배를 받는 것
23) 고행자가 삿된 견해를 가져 극단을 취하는 견해를 고루 가진 것
24) 고행자가 자기 견해를 고수하고 그것을 굳게 움켜쥐어서 폐기하기가 어려운 것
세존께서는 어떤 고행자가 이러한 24가지의 오염원를로부터 오염되지 않아 청정함을 갖추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고행을 통한 금욕의 완성을 나무로부터 목재를 얻는 것에 비유하지면
지저깨비(나무를 깎거나 다듬을 때에 생기는 잔조각)를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 24가지를 보면서 마치 가슴이 철렁 내려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주변을 보면 여러가지 도를 닦는다며, 그것이 어떤 종교든 정신적, 육체적인 수련이든 간에
고행이나 노력 비슷한 것을 한 다음에 혹은 조그마한 성취라도 있게 되면 그것을 거머쥐고는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하고 다른 사람들을 하시(下視)하는 많은 경우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은 고행자의 고행이 청정한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만
최고의 고행을 하신 부처님께서 소위 '닦는 자'의 기본과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주신 통렬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어서 니그로다 유행승은 위와 같은 오염원으로부터 청정함을 얻은 것이 최상이 아니라면
무엇인 고행을 통한 금욕의 완성인가라고 세존께 여쭙게 됩니다.
여러 경을 보게되면 세존의 가르침은
1) 계목의 단속을 구족, 2) 감각기능의 단속을 구족, 3)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구족,
4) 필수품 만으로 만족함, 5)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함, 6)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벗어남
경우에 따라 생략되기도 하지만 7) 사범주(사무량심)를 구족하여 머묾,
그리고 8) 초선∼4선의 삼매의 구족, 9) 위빳사나의 지혜∼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지혜까지의
8가지 영지(靈知, Vijjà)에 대한 가르침을 차례대로 설하시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세존께서는 니그로다 유행승에게 먼저
어떤 고행자가 있어
1) 네 가지로 제어로 단속히고(계의 구족), 2)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하고, 3)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4)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벗어나고, 5) 사무량심을 구족하여 머무는 것을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고행자가 위와 같은 것들을 성취한다면
그것은 고행을 통한 금욕의 완성을 나무로부터 목재를 얻는 것에 비유하자면
마치 걷껍질을 얻은 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실 때 네 가지 제어로 단속함을 말씀하시면서,
'1-1) 산 생명을 죽이지 않고
1-2) 산 생명을 죽이도록 하지 않고
1-3) 산 생명을 죽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2-1)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고
2-2) 주지 않은 것을 가지도록 하지 않고
2-3)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3-1) 거짓말을 하지 않고
3-2) 거짓말을 하도록 하지 않고
3-3) 거짓말을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4-1) 감각적 욕망을 갈망하지 않고
4-2) 감각적을 갈망하도록 하지 않고
4-3) 감각적 욕망을 갈망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 나누어서 말씀하신 것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계(戒)를 수지함에 있어서
- 나 자신이 그러한 범계를 해서는 안되는 것은 기본이며,
- 내가 직접하는 것은 피해서 남을 시켜서 그러한 범계를 해서도 인되며,
-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남을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한 범계를 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해서는 안된다
라고 계(戒)를 수지하는 방법과 범위에 대한 상새를 천명하신 가르침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제어로 단속함을 가르치심에 있어서 유의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또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계(戒)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입니다.
1)
「디가니까야 주석서 서문」에 의하면,
마하깟사빠 장로께서 웨바라(Vebhara) 산허리에 있는 칠엽굴에서 오백 아라한들과 함께
경(經)을 결집할 때
'도반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합송해야 합니까?'
법입니까 율입니까?'
라고 비구들에게 물었을 때, 비구들은 대답하기를
'마하깟사빠 존자시여,
율은 부처님 교법의 생명(ayu)입니다.
율이 확립될 때 교법도 확립됩니다.
그러므로 율을 첫 번째로 합송해야 합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계(戒)의 위상이나 입지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율이 확립되지 않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없다는 것이 일의적인 게(戒)의 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2)
대반열반경 4.1 (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5 )에서 밝히신 바와 같이
계(戒)는 수지하고 지켜야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그 근본은 계(戒)는 깨달음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계(戒)를
깨닫지 못히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라고 우리들 뿐아니라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그러했다고 세존께서는 천명하셨습니다.
계(戒)를 수지하고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어째서 계(戒)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지
그 이유를 확실하게 꿰뚫어 알아 다시는 계(戒)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확고하게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3)
다음은 본경 우둠바리까 사자후경에서 네 가지 제어로 단속을 설하시면서 계(戒)의 성격에 대해서
밝히신 것입니다.
"고행자가 네 가지 제어로 단속하기 때문에 그의 고행자됨이 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향상하며 저열한 것으로 되돌아 가지 않는다."
라고 하신 부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있어 계(戒)를 받아 수지하는 것은 그 본질이 고행(苦行)입니다.
그러기에 네 가지로 제어로 단속하기 때문에 그의 '고행자 됨이 실로 존재한다.'고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왜 보시는 쉽고 계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기서 좋은 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계를 지키는 않음은 그가 아직도 '저열한 것'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며,
계(戒)를 받아 지킨다고 함은 그가 드디어 '저열한 것'을 '저열한 것으로 꿰뚫어 알아'
다시는 저열한 것으로 되돌아 가지 않고 향상(向上)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시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계(戒)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해하고 넘어가게 된 것이 제게는 큰 소득이었습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어떤 고행자 위의 모든 것에 더하여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을 얻게 되면 나무의 백목질(白木質)을 얻은 것이며,
이에 더하여 중생들이 그 지은 업에 따라 죽고 나는 것을 아는 지혜(天眼通)을 얻게 되면
고행을 통한 금욕을 완성하려는 자가 얻는 최상이요 심재(心材, 핵심)를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어째서 세존께서는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지혜인 누진통(漏盡通)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나 궁금했습니다. 제가 사경을 잘못한 것인지 다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세존께서 도닦의 마지막 결실인 누진통(漏盡通)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이
획싷하였습니다. 어째서?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 이유는 니그로다 유행승의 질문이 고행을 통한 금욕의 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감각적 욕망으로부터의 번뇌, 존재로부터의 번뇌, 어리석음으로부터의 번뇌에서 완전히 해탈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이 구경의 지헤는 '고행을 통한 금욕의 완성'으로부터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어남·사라짐의 지혜로 무상·고·무이을 사무치게 꿰뚫어 보아, 존재의 다섯 구성요소인
오온을 바로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이 중도(中道) 즉 팔정도(八支聖道)에 의해서 증득되는 것이지
결코 고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과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니그로다 유행승이 세존께 대해 잘못한 것을 인정하자 이를 받아 들이시고
당신께서는 교활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정직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면 법을 교계하고 법을
가르치시는 것을 알리시고 7년부터 7일까지 16번을 양보하여 법을 배을 것을 권유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법을 배울 것을 권유하시면서
1) 그대들의 스승이 누구든 그대로 스승이어도 되고
2) 그대들의 가르침이 무엇이든 그대로 그대들의 가르침으로 가고
3) 그대들의 생계수단이 무엇이든 그대로 그대들의 생계수단이면 되고
4) 그대들의 법이 해롭고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이 해로운 것이라도 그대로 해도 좋고
5) 그대들의 법이 유익하고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이 유익한 것이라도 그대로 해도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이처럼 나는
1) 상좌로 만들 욕심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2)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3) 생계수단으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4) 그대들의 법들은 해로운 것이요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들도 해로운 것이라 불리니
그런 법들에 그대들이 굳게 서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5) 그대들의 법들은 유익한 것이요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들도 유익한 것이라 불리니
그런 법들로부터 그대들이 멀어지게 하려고 사문 고따마는 이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니그로다여,
1) 오염원이요
2) 재생으로 인도하고
3)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며
4)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가져오는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지 못한 채로 있다면,
그런 것을 제거하도록 나는 법을 설한다.'
라고 그렇게 법 배울 것을 권유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일체지자로서 중생에 대한 연민 때문에 법을 설한다고 들었읍니다만,
한갓 유행승과 그 무리들을 위해서 오히려 그들에게 보물과 같이 좋은 것을 가르치려 하시면서도
이렇게 까지 당신을 내세움이 없이 양보하시고 상세하게 이유까지 들어 설득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분의 중생 구제하시고자 함이 얼마나 지극하고 정성스러운 것인지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특히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대하거나 전법할 때 우리의 자세를
일깨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이나 신념이나 방식을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종교를 탄압하거나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이러한 부처님의
접근방식과 가르침을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대들의 스승이 누구든 그대로 그대들의 스승으로 두라.'고
세존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얻은 것은 그분이 제자들을 고르실 때 어떤 기준을 가지셨던가에 대한 해소입니다.
그분은 1) 교활하지 않고, 2) 속이지 않고, 3) 정직하고, 4) 지혜로운 자를 선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큰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을 고르는 데 있어서 그 처음을
'교활하지 않음'에 '속이지 않음'에 둔다는 것은 오늘에도 새겨 마땅한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존의 이러한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히고 니그로다 유행승과 그 무리들은 가르침을 받으려
나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마음대로 잡담하며 떠들지 못하고, 전해들은 수행에 따른 불편은 싫고
세존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닌 줄 알면서도 이때까지 해왔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행에 대한 또 다른 가르침인 깟사빠 사자후경(D8)에서
세존께서 밝히신 것과 같이(http://blog.daum.net/ibakdal/17370046) 그들의 고행이란 결국
그들의 고행이란 '단지 방편으로 음식을 먹기에만 몰두하여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이들에 대해 달리 무어랄 것도 없는 것은 이것이 나의 모습이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요,
이러한 것이야말로 그야말로 그 중생 개개인이 그의 삶을 선택해 나가는 바로 일상의 모습이라는
현실의 자각 때문알까요?
세존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시면서 담담히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더 좋은 가르침이 있다고 애쓰시거나, 신통이나 위력을 보이신다거나, 무엇을 강요함도 없이
담담하 대하시는 세존의 모습을 경은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는 중생은 부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왔습니다.
부처님의 9가지 공덕(Buddha Vandana)에서도 '아눗따로 뿌리사 담마사라띠'
즉, '구제할 만한 중생을 구제하시는데 으뜸이시며'라는 말인데,,
왜 천상천하의 부처님이신데 그러하다면 설법하실 때마다
어떤 중생이든 다 구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본 우둠바리까 사자후경을 보면서 역시 부처님께서도 이런 장면은 이렇게 대하시는구나라고
그 뜻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고행자의 청정과 금욕의 완성에 대한 우둠바리까 사자후경,,,
이와같이 새겼습니다.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붓다, 담마, 승가의 보배에 귀의한 청정한 마음으로
이 경을 사경한 공덕을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고 승가 그리고 재가신도들을 수호하시는
북쪽의 꾸웨라 천왕과 그 식솔들인 약카들에게,,,
동쪽의 다따랏따 천왕과 그 식솔들인 간답바들에게,,,
남쪽의 위룰하까 천왕과 그 식솔들인 꿈반다들에게,,,
서쪽의 위루빡까 천왕과 그 식솔들인 용들과 가루다들에게,,,
모두 회향합니다.
회향을 받아 기쁘고 행복하시기를,,,,
부처님의 법을 만나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귀의하시기를,,,
닙바나 성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 자신과 저의 가족들과
삼십일천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
나무석가모니불 ((()))
2014. 2. 26
,
'디가니까야(長部) > D25.우둠바리까사자후경-고행의 청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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