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47. 열반 - 탐진치의 소멸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6. 1. 17:14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을 완성한 경지를 가리킨다.

혹은 깨달음의 완성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열반이란 초기불교의 최종 목표로서 사성제의 구조에 배대하자면 멸성제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갈애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든가,

갈애를 버리는 것이 열반이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열반이란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포기·버림’을 내용으로 하는 멸성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멸성제와 열반은 정서적·심리적 차원의 가르침으로 제시된다.

결국 실천·수행의 관건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얻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맨 처음 읊었던 것으로도 유명한 경구 또한 그것을 나타낸다.

 

욕망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가르침을 깨닫기 어렵다.

 

 1) 흐름을 거슬러가고

 2) 오묘하고

 3) 심오하고

 4) 미세한

 

 이것을 보기 어렵다.

 

 어둠에 싸여 욕망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한다.”

 

따라서 내면의 번뇌를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깨달음에 우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서 깨달음 혹은 지혜의 성취는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명상의 실천을 통해 잠시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다.

수개월 혹은 수년의 집중수행은 번뇌로부터 정화된 느낌을 갖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 혹은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은 명상은 오래지 않아 흐트러지고 만다.

예컨대 현실로 되돌아 와 가족 구성원끼리 부딪히는 와중에 생겨나는 문제라든가 사회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휩쓸리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평정심을 지속하면서 올바로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혜의 성취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혜 혹은 반야는 그 자체로서 마음의 번뇌를 정화하는 능력을 지닌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욕심 따위는 몸이나 말로써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지혜로써 관찰하고

 관찰하여 버려야만 한다.”

 

 라고 기술한다.

 

 

예컨대 형제간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번뇌는 일방적인 주장과 노력만으로는 해결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때에는 당사자 모두의 시각을 벗어나 부모님의 입장에서 문제를 반조해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완전한 해결책이 일시에 보장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지혜로써 보고 나면 번뇌가 완전히 소멸한다.”라고 가르치며, 또한

지혜로써 바르게 닦인 마음 모든 번뇌로부터 바르게 해탈한다.”라고도 언급한다.

 

이러한 경구들은 지혜의 개발이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지혜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확고히 하고, 또한 역으로 정서적 안정을 통해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초기불교의 실천·수행에서

정서적 안정과 지혜의 개발은 서로를 의존하여 더욱 깊어져가는 관계에 놓인다.

 

 

 


간혹 열반의 경지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상태로 이상화되곤 한다.

그러한 이해에 따르면

열반이란 ‘축복이 넘치는 불생불멸의 상태’ 혹은

‘태어남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적 경지’이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에서

멸성제에 대한 일반적 서술은 갈애의 소멸을 언급하는 것으로 엄격히 제한된다.

 

또한 많은 경우 열반에 대한 묘사 역시 탐냄이라든가 분노 따위가 소멸된 경지로만 나타난다.

이것은 멸성제 혹은 열반에 대한 우상화를 막고

현실의 삶에서 그것을 직접 실현하라는 의도로 이해된다.

 

 

 

다음의 가르침이 전형적인 경우이다.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탐냄의 소멸 · 성냄의 소멸 · 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이 열반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열반이란 감정적·심리적 동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열반이란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추스르는 와중에 실현되는 경지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