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49. 팔정도와 돈오점수(頓悟漸修) - 사성제 순서에는 돈오점수 원리 담겨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6. 1. 17:45

 

 

팔정도(八正道)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도성제를 이루는 여덟의 바른 방법을 가리킨다.

곧 바른 견해·바른 의도·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를 일컫는다.

 

붓다는

고성제를 통해 괴로움의 현실을,

집성제를 통해 그 원인을,

멸성제를 통해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를,

도성제를 통해 구체적인 실천양상을 밝혔다.

 

이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팔정도는 맨 마지막의 도성제를 구성한다.

 

 

 


사성제의 순서와 관련하여 일부 이견이 존재한다.

두 번째의 집성제는 첫 번째의 고성제에 대해 그 원인이 되고,

네 번째의 도성제는 세 번째의 멸성제에 대해 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집성제가 먼저이고 고성제는 나중이며

또한 도성제가 먼저이고 멸성제는 나중의 것이 된다.

 

사실 괴로움은 갈애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의 경지는 닦음을 통해 얻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사성제의 순서는

집성제로부터 고성제로, 도성제로부터 멸성제로 나가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성제의 실천에 관한 초기불교의 전형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누각의 아래층을 짓지 않고서 위층을 짓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하듯이 비구들이여,

 고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서,…  집성제를, 멸성제를, 도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서,

 괴로움을 바르게 종식시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SN. V. 452).”

 

이렇듯 사성제의 실천적 순서는

고성제로부터 시작하여 집성제와 멸성제를 걸쳐 도성제에 이른다.

 

 

 

 


붓다는 이러한 순서를 엄격히 고수하였고 또한 그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고성제로부터 차례대로 성취한 연후에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SN. V. 420 이하).

 

흔히 ‘위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 anuttaram.  samma- sam.  bodhi)’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로 표현되는 붓다 자신의 깨달음은

이러한 순서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성제의 실천 순서야말로 초기불교의 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팔정도를 통해 멸성제의 실현으로 나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일부 경전에서는 도성제를 닦고서 멸성제로 나간다는 뉘앙스의 언급을 하기도 한다(MN. III. 289). 그러나 초기불교의 일관된 입장은 멸성제를 실현한 연후에 도성제로 나간다는 것이다.

 

이점은 매우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며, 또한 팔정도의 위상에 관해 중대한 사실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팔정도가 깨달음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도성제의 팔정도가 사성제의 최후에 등장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른 견해·바른 의도 등으로 구성된 팔정도는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에 매이지 않는 상태에서만 온전하게 수행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음을 벗어난 경지에서라야 비로소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후대의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이것을 두고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참된 닦음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표현하였다. 혹은

“몰록 깨달음을 얻고서 차례로 닦아 나간다”라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사성제의 순서에는 이러한 원리가 절묘하게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멸성제의 실현을 통해 비로소 팔정도의 거룩한 닦음으로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확립된 순서이다.

 

멸성제가 전제되지 않은 팔정도는 뿌리를 제거하지 않은 채 돌로 풀을 덮어 누르는 것과

같은 억압적 행위일 수 있다.

 

한편 멸성제를 실현한 연후에 행하는 팔정도란

이미 번뇌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행하는 닦음이다.

 

이것은 범부의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닦음이 아닌 닦음(修而無修)’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