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쓰기를 그쳤습니다.
Daum이 블로그를 개편했는데 제게는 그것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식으로 고쳤는지 모르겠습니다.
둘째로는 눈이 더욱 안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작은 글씨들을 쓰기도 읽기도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 글쓰기를 멈추었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꿰뚫어 알기 위해 디가니까야 34경과 상윳따니까야 152경 사경을 마쳤는데,,,
돌이켜 보니 그 각 경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가가 즉시적으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각 경마다 후기로 정리하고 새겨가면서,, 10년에 걸쳐 경을 사경한 다음,,
이제 그 경에서 세존의 가르침은 무엇인가가 즉시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같이 맹탕이라면,,,
과연 그 경들을 그렇게 사경한 10년의 결실이 무엇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래서 각 경의 가르침을 다시 새기기 위해서 각 경을 축약해서 '불망가(不忘歌)'라는
이름으로 새겨 보려했는데 이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길어져서 축약과 새김의 의미가 없어지고,,
자칫하면 너무 짧아 가르침의 구체를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외우기 좋게 운율을 맞추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은 세존의 말씀처럼 그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합니다.
각 부분이 표현과 의미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아곳에서 저곳으로 곡절도 훌륭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분명하여 그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느 곳은 늘이고 어느 곳은 줄이면 좋을만한 데가 없는 완벽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신이든 인간이든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세존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이 각 경의 의미를 간단히 새길 수 있도록 축약하기 어렵게 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각 경의 가르침을 바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축약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고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경에서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분명하기 때문이고,,,
그런 정도로 간단하게 어느 한 경의 취지가 간파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을 공부하거나 파악할 때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경에서 설하신 대로 그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여 호지하는 것입니다. 간단명료한 방법입니다.
세존께서는 그랗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렇게도 듣는 이들에게 법은 잘 전달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다."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신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하나는 해당 경에서 설해진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해당 경의 주석서, 복주석서, 혹은 아비담마 등에 설해진 바를 더하여 그 경이 설해진 배경,
혹은 그 경에 설해진 용어의 정의 등까지를 상세히 파악하고, 그 경을 설하신 옛날이나 근현대의
장로들의 설하신 바까지를 더하여 그 경의 가르침을 상세히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훌륭한 방법입니다, 경을 공부하되 전체든 부분이든 그 의미를 자신의 선입견이나 공부 부족 등으로 인해잘못 이해하고마는 심각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세존께서 간략히 설하신 경 하나가 흔히 별도의 책 한 권이 되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그 뜻을 다시 풀어주어야만 비로소 그 뜻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그런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렇게 장황하게 구석구석 다시 설해짐으로 인해서,,,
원래 세존께서 그 경에서 간곡히 전하려 했던 그 한 가지의 뜻은 점점 더 멀어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영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 명행족(明行足)'이라고 부처님을 새길 때
그 영지(vijja, 윗짜)와 실천(carana, 짜라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암밧타 경」(D3)에서 세존께서는 그 영지는 8가지 지혜요, 실천은 10가지 닦음임 설하십니다.
세존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두고 지혜(panna, 빤냐, 반야, 般若, 통찰지)라고 합니까?
세존께서는 「소나단다 경」(D4)에서 17가지가 그 지혜임을 분명히 설하십니다.
물론 다른 경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설하시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경에서의 가르침의 구체가 다른 경에서 다른 방법으로 설해졌다고 해서 한 치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도 세존의 가르침에서의 참으로 놀라운 점입니다.
문제는 이같이 니까야의 한 개 경에서 분명히 드러난 세존의 가르침을 제대로 새기지 않은 채
혹은 정등각자이신 여래께서 이미 천명해두신 법을 두고 달리 언설이나 추정을 더하여 '영지(vijjja)', '실천(carana)', 혹은 '지혜(panna)'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의 가르침을 배움에 있어서 경(經)을 공부하는 방법은
위의 두 가지 방법이 모두 겸비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각 경의 요지를 축약하여 호지하려는 저의 노력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디나니까야 34경과 맛지마니까야 152경을 '불망가(不忘歌)'로 축약하여 외우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완결하려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세존의 가르침을
적어도 공부했던 2부 니까야에 대해서 만큼은 무슨 경하면 무슨 가르침이라고 즉시적으로
그 요지를 외워서 잊지 않으려 합니다. 2부 니까야 만큼이라도 호지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면,,, 그곳에 발판을 두고 앙굿따라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법구경 등으로 공부를 더해 나가려합니다. 기왕의 공부를 허탕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씩 하니씩 정리하여 해당 경의 끝에 정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디가니까야 34경, 맛지마니까야 152경, 합하여 186경을 연이은 불망가를
완성해 보고자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하신 법에 귀의합니다.
거룩하신 승가에 귀의합니다.
2020. 9.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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