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64.말룽꺄긴경-족쇄를풀어 열반으로

※後記: 말룽꺄 긴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7. 9. 7. 11:58


말룽꺄 긴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오하분결(五下分結)'로 알려진 '낮은 단계의 다섯 가지 족쇄'에 대해서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그대들은 내가 설한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족쇄들을 기억하고 있는가라고

물으시자 말룽꺄뿟따 존자는 1)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는 견해(유신견), 2) 의심, 3)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4) 감각적 욕망, 5) 악의의 다섯 가지를 설하신 것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 세존의 가르침은 그 방법이 특이하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그런 식으로 호지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호지해서는 '갓난 아이의 비유'로써 다른 이들로부터 논박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존의 가르침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명료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존재의 근거를 모두 부수어, 위없는 해탈의 성취'를,  '지금여기 바로',

'분노하지 않고, 추억하지 않고', 그렇다고 하여 '둔감하지도 않을' 것을, 그리하여 딴하, 아라띠,

라가라고 이름하는 '갈애, 권태로움, 애욕'의 쇠살을 뽑아버린 채 머묾을 향합니다.

                                         (* S4:25, 마라의 딸들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005)


이것은 참으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도달이 가능한 목적지입니다. 보통의 중생들과 똑같이

감각적 욕망과 성냄과 견해와 무명의 폭류를 따라 흘러가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본질의 문제요 최후의 일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런 흐름을 추구하던 몸과 마음을 제어하여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괴로움이며 슬플 수 밖에 없고 오염될 수 밖에 없는' 이 모든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 M26, 성스러운 구함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38)


     “여래의 아들이여,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며

      방황하는 마음을 잘 억제하여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항상 둑카 속에 살게 되어 행복을 찾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마하웃(코끼리 조련사)이 코끼리를 잘 다루듯이

      네 마음을 잘 억제하고 다스릴지니라.



     "지난 과거 네 마음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좋은 것을 따라가 그를 즐겼었다.

 

      자, 이제는 네 마음을 현명하게 다스려라.


      마치 조련사가 발정한 코끼리를

      뾰족한 쇠끝으로 다스리듯이."


                                         (* 법구경 게송 326: http://blog.daum.net/ibakdal/17370843)



그러하기에 세존의 가르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그냥 넘어가는 부분에 있어서도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식으로 흐름을 따라 그냥 넘어가시는 부분이 없습니다.

'오온을 바로 봄'이라는 핵심을 항상 거침없이 정면으로 향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한치의 우회나 물러섬 없이 천명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가르치신 바입니다.


나와 세상이라는 이 끝없는 정신물질의 전개로부터 벗어남을 가르치시는 그분은 그 방법으로써,

이 모든 것의 '일어남과 달콤함과 위험과 재난과 벗어남을 분명하게 꿰뚫어 알아서'

그렇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가르침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특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있어서 있는 것을 그것은 이렇게 있는 것이라고 뼈를 추려내어 드러내 보이둣 분명히 가르치시고, 2) 그렇게 분명히 드러내 보인 그것을, 그것은 이렇게 있는 것이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보아

    이렇게 벗어남이 마땅하다고  가르치시어, 먼저 드러내 가르치신 것들을 차례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십니다.

3) 그리고 궁극에 그 벗어남에서도 매이지 않는, 일체의 매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이름하여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에 이를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역마차 교대 경(M24)에서 1) 계의 청정(戒淸淨), 2) 마음의 청정(心淸淨), 3) 견의 청정(見淸淨),

4)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疑淸淨), 5) 도와 도아님의 지견에 의한 청정(道非道知見淸淨),

6) 도닦음에 대한 지견의 청정(行道知見淸淨), 7) 지견에 의한 청정(知見淸淨)을 차례로 말씀하시고,

이것은 7대의 교대하는 역마차와 같은 것이며, 그리하여 '취착없는 완전한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러나 이같은 7대의 역마차 각각을 열반이라고 이해한다면 세존께서 취착이 있는

것도 취착없는 완전한 열반이라고 천명하는 것이 되고 말며, 그렇다하여 이러한 7대의 역마차 없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면 범부도 열반을 성취할 것이라고 설하여, 이같은 하나하나의 닦음 없이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함을 가르치시는 것이 그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긍정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정으로, 그 부정에 대하여 다시 부정으로, 다시 그 부정을 부정하여,

궁극에 긍정도 아니요, 부정도 아니며, 긍정인 동시에 부정도 아니며, 긍정이 아닌 것도 부정이 아닌

것도 아닌, 유무일체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가슴 깊이 박힌 일체의 쇠살을 뽑아 버린 채,


   "지금여기에서 바로 

    태어남 ‧ 늙음 ‧ 죽음 ‧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함"

                                              (* M63, 말룽꺄 짧은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2319)

                                                               

이 현전(現前)한 채 머무는 법을 그분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갓난 아이의 비유_그런 식으로 호지해서는 안된다/그런 식으로 알아 들어서는 안된다. 

                                

본경에서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와 관련하여 '어리고 유약하고 아직 뒤척이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누워만 있는 갓난 아이'에 대한 세존의 비유는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많은 경우에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모습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모습이요 지향해야 할

모습으로 회자됩니다. 어린 아이의 모습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짐승들까지도 어린 것들은

아직 오욕에 오염되지 않았고 숨김이 없는 순진한 모습이어서 보기에도 아름답고 빛이 납니다. 

분명 어른들이 잃어버린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렇다고 하여 그 모습이 결코

른들이 돌아가야 할 실상이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와 관련하여 이러한 갓난 아이는

                                         

1) 불변하는 존재 더미라는 생각조차 없는데, 어떻게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겠는가?

2) 법이라는 생각조차도 없는데, 어떻게 법에 대한 의심이 있겠는가?

3) 계율이라는 생각조차 없는데, 어떻게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이 생기겠는가?

4) 감각적 욕망이라는 생각조차 없는데, 어떻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생기겠는가?

5) 중생이라는 생각조차 없는데, 어떻게 중생에 대한 악의가 생기겠는가?

                                   

라고 반문하십니다. 그렇디면 그런 갓난 아이야말로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자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여기서 '그러나 그 갓난 아기에게는' 그러한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족쇄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다.'라고 천명하시며 바로 그것이야말로 문제임을 설하고 계십니다.

                               

장차 그 갓난 아이의 잠재성향이 어떤 경로를 거쳐 그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지 못하는지의

문제를 설하시기 위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설하셨다고 설법의 목적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호지해서는 안된다.'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성자들을 친견하거나,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면,

년기와 청장년기를 거치면서 혹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눈, 귀, 코, 혀, 몸, 마노에서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경험하면서 마음챙김하는 법을 모르고, 그 마음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들로부터 해탈하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욕망과 성냄에 구속되어, 그 느낌들을 환영하고 움켜쥐고, 갈애를 일으키고 취착하게 되고, 

그리하여 존재하고 태어나고 늙음과 죽음, 근심과 탄식,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그리고 절망하는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겨나는 도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M38, 갈애 멸진의 긴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2052)

                                       

그야말로 이것이 보통 사람의 '인생유전'이며, 이러한 길 외에 벗어나는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그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이 살다 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일생인 것입니다.

                             

                                                       


  ■ 「갓난 아이의 비유」와 「삼예사의 논쟁

                                

  세존께서 말씀하신 갓난 아이의 비유를 볼 때 같이 떠오르는 것은 불교사의 중요한 논쟁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삼예사의 논쟁」, 혹은 「라사의 논쟁」입니다.

                                                       (* 삼예사의 종론: http://blog.daum.net/ibakdal/17369749)

                       

                          

  중국 선불교의 대표격인 화상 마하연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의도적으로 선행이나 악행을 한다면 그 결과로서 선처나 악처에 태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며, 깨달음을 얻는데 항상 장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고작용도 없는 사람은 그러한 존재의 입음을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이같은 방식으로 사람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산타락시아의 제자인 까말라쉴라는 이같이 반론합니다.

                              

 '만일 사념하지 않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면

  기절하거나 술에 취한 사람도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관찰작용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념작용을 중지했다고 하면 어떻게 일체법의 무자성함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공성을 증득하지 못한다면 어떤 장애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작용에 의해서만 잘못된 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화상 마하연의 취지는 불사불관(不思不觀),

  무작(無作)으로도 표현되며, 그러므로 생각나는대로 마음대로 행해도 심지어는 계(戒)를 범

  하더라도,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취(無取), 무사(無捨), 무착(無著)'하여 마음에 아무 걸림이

  없는 것이야말로 대자유인의 무애행(無涯行)이라고 하게 되며, 실제 그러한 모습은 '어린 아이'

  의 모습과 저 멀리 닿아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마타로써 날뛰는 자신의 마음을 조복시킨 자의 모습도, 반야(panna, 지혜)로써

 '오온을 바로 본' 자의 모습도, '존재의 근거를 모두 부숴버린' 자의 모습도 아닙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라고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1) 그는 법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_ 가는 길과 목적지, 둘 다를

                                      

  - 세존께서는 '어떤 사고작용도 없는' 그러한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 대념처경(D22)에서 설하신 바와 같이 몸, 느낌, 마음, 법의 4가지에 념념불망 '마음챙겨서',

                         

    ·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에서 설하신 바와 같이 물질(현상), 존재, 세상(界), 일체의 감득(感得),

      일체의 사량분별, 일체, 열반의 7가지에 대하여 '철저히 알아서',

                              

    · 계(戒)를 수지하고, 삼매(定)를 닦아 마음을 조복시키고, 이치에 맞는 마음 기울임(如理作意)

      으로써  연기(緣起)를 보아 지혜(慧)로써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여,

                            

    ·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로

      이뤄진 팔지성도(八支聖道),괴로움을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을 설하셨습니다.

                              

                           

    '마음챙기고', '철저히 알아', '오온을 바로 본다', 내지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를 닦아' 와 같은

     세존의 가르침은 '사념작용이 없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사념작용이 없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나 술취한 사람 혹은 기절한 사람의 무지(無知), 유약함, 대책 없음, 무명(無明), 

     그로 인한 해태와 혼침, 내지 컴컴한 절벽길을 등불도 없이 마음대로 활보해도 나는 괜찮다는

     만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여기 그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바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잘못 파악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그는 세존이 설하신 바 '열반'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감각적 욕망, 성냄, 견해, 무명이라는 4가지 폭류를 건너서 저 언덕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상념으로 건너서 가보지 않은 저 언덕을 마음대로 자신의 그릇대로 추론했을 뿐, 

     저 언덕으로 헤엄쳐 가기 위해 강에 발도 담궈보지 않은 것입니다

                              

     4가지 폭류를 힘써 헤엄쳐 건넌 자는 '사념작용이 없는 것이 깨닫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 그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길을 따라 가보지 않았기에 세존께서 가르치신 바

     목적지를 스스로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같이 그는 뱀의 몸통이나 꼬리를 잡은 것처럼 '뱀을 잘못 잡은 것' 입니다. 

    '법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뱀은 돌아서 이 사람을 물 것이고 그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 M22, 뱀의 비유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03)

                    

                              

 2) 그는 왜 법을 잘못 파악하게 되었는가?

                                    _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법을 배우기 때문

                                      

  - 세존께서는 그 이유에 대해 이헣게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미혹한 자들이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본생담‧미증유법‧문답 같은 법을 배우지만   

                              

        그 법을 배워 통찰지로 그 법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

        그 법의 뜻을 통찰지로 자세히 살피지 않을 때 그들에게 그 법들은 확립되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을 배우므로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다."

                                                (* M22, 뱀의 비유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03)

                                  

  -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진리에 대한 성찰이나 자각이 실상 아직 없습니다. 

     부처님이 왜 출가하셨는지 왜 그런 가르침을 펴셨는지 그 근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가자든 재가자든 그가 세존의 법을 배움은 지금여기 나와 일체 중생의 행불행,

     생사(生死) 일대사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가닥 취향이나 지적유희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김을 향하여 위해 법을 배웁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꼭대기에 서서, 논리의 꼭대기 서서, 적어도 논리에 의해서 만큼은 다른 이들에게 지배 당하거나

     압도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압도하고 지배하기 위해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의 법 배움은 희론을 향하게 됩니다. 그는 법으로써 '흐름을 거슬러' 자신을 성찰하고,

     갈애와 자만과 사견이라는 잠재성향을 뿌리뽑은  '침묵의 성자'를 향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벗어나야할 세상으로, 정신물질로, 갈애와 자만과 사견의 바다로 더욱더 들어가고

     그러한 견해와 그러한 '나'를 거머쥐거나, 그런 것들이 주는 혼미함과 방일에 빠지고 맙니다.

     그는 법을 배우더라도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합니다'.

                                        

     고요함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자,,,  다른 이들과 논쟁할 일이 없습니다.

     자신과 남을 바로 보고 연민의 마음을 가질 지언정,,, 그 어떤 것과도 다툴 일이 없습니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 월착담저수무흔(月搾潭底水無痕)'

     대 그림자 섬돌을 쓸지민 먼지 나지 않고, 달빛 연못 바닥을 꿰뚫으나 수면에 흔적이 없다라는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의 근거를 모두 부숴버리고 삼계를 뒤흔들지만, 다툼과 소란이

     하나도 없는 적연(寂然)한 모습은 바로 이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부똔의 《불교사》기술에 따르면 논쟁에서 진 화상 마하연은 약속대로 티벳을 떠났고,

     밀사를 보 까말라쉴라를 암살했고, 이 논쟁을 주관했던 티벳의 왕 예세 왕뽀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단식하다가 죽었다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법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한 일일진대,,,  

     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일이며,,, 논쟁의 결과입니까?,,,,,

                              

                               

 3) 그 결과는 결국 감각적 욕망에 오염됨과 계를 어김으로 나타난다.

                                     

  - 그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바 법이 설해진 이유를, 길을, 목적지를 잘못 파악하고,

     그 잘못된 견해로써 '열반'에 이르렀다라고 생각하고,  그런 '나' 즉, 마음대로 행해도 아무

      마음에 걸림이 없는 '나'와, 그러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도 그것으로써 나는

                                   

      '1) 무명을 제거했으므로, 빗장을 밀어제쳤고,

       2) 다시 태어남의 업형성력을 제거했으므로, 도랑를 가득 채웠고,

       3) 갈애를 제거했으므로, 기둥을 뽑아버렸고,

       4)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풀었으므로, 걸쇠를 풀었고,

       5) 나라는 자만을 제거했으므로, 깃발을 내리고 짐을 내려 놓았고 족쇄를 풀었다'라고 생각하여

                                  

      이러한 나의 알음알이야말로 '이것에 의지해 잇다'라고 파악할 수 없고,

      이러한 나야말로 '지금여기에서 알 수 없는 경지' 즉 아라한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완강하게 고수하고 고집하고 주장하게 됩니다. 혹은 다른 이에게 그렇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 M22, 뱀의 비유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11)

                         

                             

  - 그러나 이러한 그의 모습은 마음대로 행하지만 걸림이 없다고 하면서 감각적 욕망으로 향합니다.

     결국 그에 탐닉하여 계(戒)를 어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범계를 해도 그는 그의 마음에

     장애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설하신 것을 수용해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 M22, 뱀의 비유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02)

                                   

     라와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같은 견해에 대해

                                       

        "그가

         감각적 욕망 없이,

         감각적 욕망의 인식 없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일으킨 생각 없이

                             

         감각적 욕망에 탐닉할 것이다.'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

                                           (* M22, 뱀의 비유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03)

                                     

     라고 일축하여 논파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 여기서 그의 모습은 아무 생각이나 사념작용이 없이 천진난만한 것을 빌어 감각적 욕망에 다시

     탐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천진난만을 가장하여 감각적 욕망, 악의,

     불변하는 존재더미의 사견에 사로잡힌 행위들을 마음껏 탐닉하게 됩니다. 그로서는 

     '아무 생각 없음' 내지 '오직 천진난만할 뿐임' 이라는 한 개의 출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더욱더 오염되고 차례대로 계(戒)를 모두 범하게 되고 맙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갓난 아이의 비유'를 드시면서 그 갓난 아이에게 그러한 '족쇄의

     잠재성향이 있는 것'이야말로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우 그는 법을 잘못 파악하여 그가 

     법을 제대로 배워  없애야 할 잠재성향 즉,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푼 것이 아니라,

     그 잠재성향이 온전히 드러나 그에 묶여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같은 모습을 훈계하면 그는  '당신이야말로 법을 모른다'고 하면서 돌변하여 

     화를 내고 악의를 드러낼 것입니다.

                            

                                         

  - 세존의 가르침을 따라 길을 가는 자는 그가 도과를 얻은 자든 아니든,

     혹은 그 얻는 도과가 낯은 것이든 높은 것이든 결코 이런 류의 행위를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장애가 되는 법들을 설했고

         그것을 수용하면 반드시 장애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감각적 욕망은 

         1) 달콤함은 적고, 2) 많은 괴로움과 많은 절망을 주고, 3) 거기에는 재난이 도사리고 있다

         말했다. 

         ···············

         쓸모없는 자여,

         그것은 그대에게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 M22, 뱀의 비유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02)

                                         

  - 그는 그가 잘못 취한 그런 견해와 방법으로 결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오염됨과 감각적 욕망과 갈애와 성냄과 견해와 무명과 혼침과 방일의 늪 속으로

     더욱 깊이 깊이 빠져들고야 맙니다. 

     그 업(業)의 결과로 긴 세월의 고통과 불이익을 피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4) 부처님은 그런 법을 설하시지 않았다. _ 사성제를 설하셨다.

                              

  - 이 삼예사의 논쟁은

                               

   · '만일 망심이 생기지 않고 일체 망상을 떠난다면, 진실한 본성이 본래 있는 것으로(眞性本有)

      일체종지는 자연히 현현하게 될 것이다.'와 같은 '진성본유(眞性本有)'

                                  

   · '본주법성의 도는 금은을 산출하는 광산과 같은 것이다. ……

      법계는 상주하는 것이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시든 출현하지 않으시든

      이러한 제법의 법성, 법의 상주성, 법의 결정성은 …… 존재하는 것'이라는 '본주법성(本住法性)'

                                

   · '그것은 자성적으로 청정하고 본래 청정하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에 의거해

     '불성은 본래적으로 존재하며 이것은 수행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탐진치] 3독을 떠난다면 허망한 망분별과 그 습기의 더러운 옷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佛性本有 非是修成 但離三毒 虛妄妄想 習氣垢衣 則得解脫)와 같은 '중생본래유불성

      (衆生本來有佛性)'

                                    

     의 입론(立論)으로 이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러한 입론은 이 삼예사의 논쟁 이전에 벌써부터

     싹이 자라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소위 '대승'의 이러한 교설들이 생겨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성본유(眞性本有)', '본주법성((本住法性)', '중생본래유불성(衆生本來有佛性)'과 같은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의 참된 성품이요, 법성이라 함은 무슨 법의 성품을 말함이요, 불성이라함은 무엇을 두고

     불성이라 하는지가 그것입니다. 마음과 마음부수와 물질은 그 고유한 성질과 개념이 있어서

     언어라는 인습적인 표현을 빌어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존께서는 여러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37보리분법이 그것입니다. 설하신 그 법들은 모두 어떤 측면의 고유한

     성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열반을 설하셨습니다. '진성본유(眞性本有)', '본주법성((本住法性)',

    '중생본래유불성(衆生本來有佛性)'도 모두 열반의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어떤 방편으로도 이와 같은 법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같은 소위 '대승'의 교설들은 모두 '열반이 무엇인가?', 혹은 '열반이 성품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대가 깨달은 것은 열반이 아니다,

     그대는 열반을 잘못 파악했다, 그대가 어찌 열반을 알겠는가? 등으로 그 사량분별과

     지적유희와 말장난과 지어냄이 끝을 모르고 우열을 다투며 상대를 치고 압도하는 모습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힌 모습은 모두 모래 위에 집을 짓고, 그 위에 또 집을 지은 모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분명히 '열반'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영반'이 무엇인지 그 성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 군더더기 없이 간략히 설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보다도 더욱 상세하게 힘들여 설하신 것은 '지금여기가 어디인지?', 그리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 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 여기 목이 말라 죽음에 이르른 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고 합시다. 어떤 이가 이르되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히면서, 그 물을 마시면 그 맛은

     어떤 것이고 그 물의 성품은 어떤 것이고, 그 물의 유래는 어떤 것이며, 그 물을 마셨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라는 등의 말을 끝없이 하면서,,,,

                                   

     종국에 그 우물이 어디에 있는지, 그 우물에 이른 길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되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면 이같은 법을 설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하물며 이것이 행불행의 문제요, 생사의 문제라면 더욱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움이란 '부처님을 근원으로, 부처님을 길잡이로, 부처님을 귀의처로'

     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상윳따니까야 잠부까다까 상응에서 

     '열반과 아라한과 모두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참으로 완전하고 소박한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세존께서는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에서 아라한도 부처님도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설하십니다. 그 이유를 설하십니다. '탐욕을 끊어 탐욕에서 벗어났고, 성냄을 끊어 성냄에서

     벗어났고, 어리석음을 끊어 어리석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붓다고사 스님의 말씀처럼

     '열반은 있으나 열반에 들어가는 '자(者)'는 없습니다'. 열반에 든 어떤 자도 열반을 떠들지 

     않습니다. 집어들 것도 없고, 집어들 자도 없으며, 그러기에 말할 것도 없고, 말할 자도 없으며,

     그 이전에 그 무엇이 어떠할 그 어떤 이유라는 것이 이미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 '열반에 이르는 길'을 고구정녕하게 설하신 스승님의 길은 먼지가 쌓인 채 놔두고,

     열반이 무엇인지, 열반의 성품이 어떠한지, 누가 열반을 더 잘 아는지,,,

     모래 위에 집을 그 위에 집을 지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세존께서 행하신  바가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여기 진실로 행복하게 머무는 불사(不死)의 법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법에 대한 잘못된 파악과 잘못된 열의의 결과로 세존께서 고속도로처럼 닦아 놓으시고

     드러내신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은 실로 그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평생을 공부해도 범인로서는 알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런 법을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법들은 1)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없고, 2) 청정범행의 시작에도 미치지 못하며,

     3)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4)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5)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6)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7)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8)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9)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그런 토끼뿔 거북털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사성제의 진리야말로 중생들을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후세에 다른 비구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열반'의 진실한 의미에 대해서 더욱더

     상세하게 살을 붙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국 '열반'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법을 덜 설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천명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잘 설한 법

                             

        1) 분명하고

        2) 열려있고

        3) 명확하고

        4) 군더더기가 없다."

                                              (* M22, 뱀의 비유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14)

                                          




■ 무엇을 이유로 족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을 이유로 족쇄를 벗어나는가?


세존께서는 모든 존재가 가지고 태어나는 '족쇄의 잠재성향'을 왜 어떤 이는 벗어나고,

어떤 이는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이어서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성자들과 바른 이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법에 인도되지 않은

범부는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라는 견해(유신견), 의심,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

감각적 욕망, 그리고 악의의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에


   '그의 마음이 압도되고 사로잡혀,

    이미 일어난 그 족쇄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그 족쇄가 견고하여 제거되지 않으면,

    그로써 그에게 그것들이 족쇄가 된다.'


라고 설하셨습니다.



그와 반대로,

성자들과 바른 이들을 친견하고, 법에 능숙하고, 법에 인도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불변하는 존재더미가 있다라는 견해(유신견), 의심,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

감각적 욕망, 그리고 악의라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에


   '그의 마음이 압도되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이미 일어난 그 족쇄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아,

    그 족쇄들을 잠재성향과 더불어 그에게서 완전히 제거하기 때문에,'


그로써 그가 그러한 족쇄들로부터 벗어난다고 설하셨습니다.




■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들을 풀기 위한 도와 도닦음이 있다.

                            - 도와 도닦음이 없이 족쇄들을 알고, 보고, 제거할 방법은 없다.


세존께서는 이어서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들을 풀기 위한 도와 도닦음이 있음을 천명하시고,

나무의 겉부분을 자르지 않고 그 심재(深材)를 자를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이 다음의 설하시는 바 도와 도닦음 없이는 족쇄들을 '보고, 알고, 제거할 수 없음'을

뷴명히 하셨습니다.



그 도와 도닦음 아래와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1) 초선∼제4선의 4가지 색계 선정과, 공무변처∼무소유처의 3가지 무색계 선정을 증득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2) 그리고 위 7가지 선정의 각각에 대하여,


      "그는

       거기에 있는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 법들은 모두 

       1) 무상하다

       2) 괴로움이라고 3) 이라고 4) 종기라고 5) 쇠살이라고 6) 재난이라고 7) 질병이라고

       8) 남[他]이라고 9)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10) 공한 것이라고 11)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에서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에서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멸진이요,

            탐욕의 빛바램[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의 소멸을 얻는다[阿羅漢]. 


       만일 번뇌의 소멸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 법을 좋아하고 이 법을 즐기기 때문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 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不還者]."


라고 설하셨습니다.



너무나 심오하여 힐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

이렇게 족쇄들을 풀고,  이렇게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알지 못할 머나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길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법문에서 저는 초선∼무소유처 이디에서라도 출정하여 아라한을 이룰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삼매(사마타)요 위빳사나입니다.

팔정도에서 말씀하시는 바, 바른 삼매(正定)요 바른 견해(定見)입니다.



아주 간략히 줄여서


- 'Quantum Field Fluctuation'과 같이 미쳐 날뛰는 '마음의 조복'(사마타, 定, 止)이요,

                                                   (* Quantum Field Fluctuation: https://youtu.be/J3xLuZNKhlY)

- '오온을 바로 봄'(위빳사나, 慧, 觀)이라 새깁니다.




※ 부수적인 얻음


ㅇ 허약한 사람과 힘센 사람


세존께서는 특히 오온을 나 등으로 취착하는 유신견의 소멸을 위해,

존재더미의 소멸을 위해 어떤 사람에게 법이 설해질 때,


어떤 이의 마음은

그것에 들어가지 못하고, 깨끗한 믿음을 낼 수 없고, 안정되지 않고, 해탈하지 못하지만,


어떤 이는 그 법을 듣고 그의 마음은

그것에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내고, 안정되고, 해탈한다고 설하시며,


그것은 마치 '허약한 사람'은 강을 헤엄쳐 건너지 못하지만 '힘센 사람'은 두 팔로 헤엄쳐서

강가 강의 흐름을 가로질러 안전하게 저 언덕에 도착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힘센 사람도 있고,,, 허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ㅇ 초선(初禪)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초선(初禪)에 대하여 다른 경에서는 언급하시지 않은 특별한 언급을 하십니다.


   "1) 재생의 근거를 멀리 여의고 

    2)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고 

    3) 몸의 무력증을 완전히 가라앉혀서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초선에서 '재생의 근거를 멀리 여의고', 또한 '몸의 무력증을 완전히 가라앉혀서'라는 가르침은

과연 이 초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새로움을 더합니다.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을 완전히 떨쳐버림에서 '재생의 근거를 멀리 여읜다'라는 말씀은

이해됩니다만,


'몸의 무력증을 완전히 가라앉혀서'라는 가르침은

'갈애와 권태로움과 애욕'에 시달려 무력해진 이 몸을 반조하여 가르침을 따라 참되게 정진하는

정진하는 자의 마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ㅇ 왜 어떤 이는 심해탈을 증득하고, 어떤 이는 혜해탈을 증득하는가? 


아난다 존자께서는 위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아라한에 이르는 것이라면

왜 어떤 이는 심해탈(心解脫) 즉, 양면해탈을 증득하고, 어떤 이는 혜해탈(慧解脫)을 증득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여쭙니다.


아난다 존자께서는 많은 이들의 의문을 풀 수 있는 참으로 요긴한 질문을 때맞춰 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님의 공덕에 예경합니다.


세존께서는 '그것은 그들의 기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능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근(根, indriya)입니다.

사람마다 지은 업이 다르고 그에 따라 각각 다른 근기(根機)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근기가 다르기에 그에 따라 어떤 이는 양면해탈을, 어떤 이는 혜해탈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에 대해 이렇게 상세한 법문을 해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




「라훌라를 교계한 긴 경」(M62)의 후기를 쓰면서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대(四大)가 업을 따라 허공에 모여있는 것이 이 몸임을 보라는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하므로

그간 궁금했던 '물질'에 대한 사변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겠다라는 생각,

그리고 수행의 첫걸음이요 전부라고 해도 좋을 '들숨날숨에 마음챙김' 수행방법을 한 번이라도

그 의미와 방법을 제대로 새기고 넘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말룽꺄 짧은 경」(M63)의 후기를 쓰면서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십사무기와 관련한 이 부처님의 법문은 왜 세존께서는 그러한 설명을 하지 않으셨는가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은 '나란 무엇인가?' 내지 존재론과 인식론에 이르게 되고, 결국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무엇을 설하셨으며 그것은 왜 설하셨는지에 대한 근본법문인 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두려했던 바, 역시 쉽지 않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본경「말룽꺄 긴 경」(M64)도 후기를 쓰면서 생각지 않게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갓난 아이의 비유'로부터 시작하여 삼예사의 종론에 연관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누가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을 집중하여 그 끝을 파헤치고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삼계(三界)의 정신과 물질을 지배하고, 자신과 남을 아직도 '중생'이라고 거머쥐며,

하여 그를 갈애와 권태로움과 애욕의 노예로 묶어두고, 그들이 미망속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그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마라의 장난(作亂)이란 참으로 집요하구나라는 생각입니다. 

한때의 중요한 곡절을 맞고 있기도 합니다만 몸까지 좋지 않았습니다. 많이 망가진 모양입니다.


그러나 본경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라는 잠재성향을 벗고 어떻게 아나함이나 아라한이

되는지, 아니 어떻게 열반에 이르는지에 대한 세존의 직접적 가르침을 담은 요의경전입니다.



이 3가지 경의 유별나게 긴 후기를 쓰면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긴 시간 품어왔던 제 개인적인 숙제들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관점이 달라질 줄

모르겠습니다만, 언젠가는 이렇게라도 한 번은 매듭을 해 두고 넘어가지 않으면 않으면 것들이었고, 파헤친 그 모습들은 바로 긴 시간을 거쳐왔던 제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 줄 몰랐고,, 모두 후기를 쓰면서 만났던 뜻하지 않았던 난관들이었습니다.

경보다 긴 후기들을 이렇게 다시 쓰게 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맛지마니까야 제2권의

끝이 눈앞에 보였는데,,,  사경의 진도도 덕분에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숙제를 다한 학생처럼 제 마음은 가볍습니다. 저를 괴롭혀왔던 어떤 두려움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참으로 많이 없어졌습니다. 심연(深淵)이 나를 바로 쳐다 보더라도 그 심연을

나 역시 정면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세존께서 무엇을 설하셨는지에 대한 의 가르침에 대한 저의 확신은 더욱 깊어졌고,,,

사경도 사경입니다만,,,

비로소 제 마음은 계를 수지함으로,,, 수행으로,,, 점점 더 기울어졌습니다.


참 견디기 어려운 여름이었는데,,, 때마침 가을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숨으로 돌아외서,,,  물질에,,  느낌에,,  마음에,,  마음챙기며,,

때맞게 온 이 가을과 한 철 겨울을 온전히 수행으로 보낼 수 있기를,,,

공부힌 것의 조금이라도 비로소 내 것으로 체득하게 되기를

삼보에 깨끗한 저의 믿음에 의지하여 간절히 소망합니다.  ((()))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공덕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온전히 저 자신에게 회향코자 합니다.

전생에 공덕지음이 없었기로 지혜가 없기로 긴 세월 참으로 혹독한 일들을 겪었고

아직도 어려움에 처해있고,, 이제 큰 곡절을 다시 맞아 풀어서 바로 서기 위함입니다.

                              

시작을 모르는 과거로부터 윤회하면서 지금 생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가르침, 승가,

부모님, 스승님,

저보다 공덕이나 나이가 많은 분들께,

또한 인연따라 만나 자애와 연민과 더불어 기뻐함과 평온의 마음으로 대하지 못하고,,,

제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여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한 것들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장애없이 닙바나에 이르시기를 바라면서 예경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다른 이들이

나에게 범한 잘못들도

선한 이들의 마음으로 다 용서합니다.

적대와 악의와 잔인할 수 있음과 과 비난 모두 버리고,, 

다시는 다시는 품지도 일으키지도 않겠습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공덕을

온전히 제 자신에게 회향하오니

이 회향을 받아 혹독함을 면하기를,,, 잔인함을 면하게 되기를,,,

원수들과 위험과 나쁜 것들 그만 만나고

자애할 줄 아는 이들과 연민을 아는 이들과 지혜있는 이들을 만나게 되고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가 청정하고,

세간과 출세간의 빚 모두 갚는 자가 되게 하여지이다,,,,  ((()))

                        

사∼두∼  사∼두∼  사∼두∼

                            

                          

2017.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