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43.교리문답의 긴 경-方等

※後記: 교리문답의 긴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7. 3. 13. 08:24


교리문답의 긴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마하꼿티따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가서 법을 묻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리문답'은 vedalla(웨달라)인데 구분교 중에서 「방등(方等)」으로 옮겨집니다. 예를 들면

본경이나 제석문경(D21), 바른 견해 경(M19) 등과 같이 '모든 신성한 지혜와 만족과 여러 가지

이익됨이 질문된 경들이라고 주석서는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하꼿티따 존자는 앙굿따라니까야 하나의 모음(A1:14:3∼10)에서 '무애해(patisambhida)를 얻은

비구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언급된 분이신데, 사왓티의 부유한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삼베다에 통달했으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으며, 사리뿟따 존자와 교분이 깊었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경에서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모두 31개의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누구나 궁금하게 생각할 그런 질문들

임을 알 수 았습니다. 어떤 것은 용어의 정확한 의미, 어떤 것은 그들끼리의 연관성, 같고 다름,

중요한 곡절은 무엇인지, 상세히 분석하여 요소들을 분명히 함 등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궁금하게 생각할 바로 그런 것들을 마하꼿타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께 물어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쉽게 삼장(三藏) 전부를 다 접할 수 있지만,

당사의 제자들은 아직 문자화되지 않은 세존의 가르침을 세존으로부터 직접 혹은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들은 몇 가지의 법문만을 듣고 수행한 것을 볼 때 위와 같은 의문들은 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몇 가지를 듣고 그것에 의지하여 수행하여 도과를 얻은 것을 생각하면 그 청정한 믿음과 깨달음에

대한 갈망과 무소의 뿔과 같이 혼자 감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치열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마하꼿티따 존자와 사리뿟따 존자의 문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맨 처음 질문은 '통찰지(panna)'라고들 하는데 무엇을 두고 '통찰지가 없다'라고 하는가입니다.

    질문의 정수가 아닐 수 없는 바, 첫 질문에서 바로 정곡에 들어갑니다.

    사리뿟따 존자의 대답은 간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를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을 '통찰지가 없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원하기 이를 데 없는 답변에 마하꼿티따 존자는 '장하십니다.'라고 찬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들은 적이 없어서 내지 사성제를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많이들 통찰지 내지 般若(panna)를 말합니다마는, 그것은 사성제를 꿰뚫어 앎이라는 사리뿟따

    존자의 꿰뚫음에 놀란 것일 것입니다.



2) 다음은 '통찰지가 있다.'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는 사리뿟따 존자의 답변입니다.



3) 다음은 '알음알이(識)'이라고들 하는데 대체 무엇을 두고 '알음알이(識)'라고 하는가입니다.

    느낌으로부터 '분별해서 아는 것'이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답하십니다.



4) 그러자 마하꼬티따 존자는 그렇다면 이 '알음알이(識)이라는 것과 '통찰지(panna)'는

    결합되어 있는 것인지, 분리되어 있는 것인지, 이것들을 분리하여 그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인지

    를 묻습니다.


    풀어보면 '사성제를 꿰뚫어 앎(통찰지)'은 '분별해서 앎'(識)과 결합 혹은 분리된 것인지를

    등을 묻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분별해서 앎(識)'이라는 작용의 영역 속에 '사성제를 꿰뚫어 앎(통찰지)'도

    있는 것이므로 이 둘은 결합되어 있고 분리된 것이 아니며,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그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라고 천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를 안다함도 그 꿰뚫어 앎의

    차이일 뿐 무슨 상상를 뛰어넘는 이상한 경계가 아니라 결국 '분별해서 앎(識)'의 영역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5)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그렇다면 '통찰지(panna)'와 '알음알이'의 차이는 무엇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위에서는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한 것은 그 작용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여기서는 그 작용 상의 차이가 없다면, '사성제를 꿰뚫어 앎(통찰지)'과 '분별해서 앎(識)'은

    그 성취의 과정에 있어서 혹은 그 특징상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통찰지는 '닦아야'하고, 알음알이는 '철저히 알아야'하는 것이라고

    답변하십니다. 참으로 심오한 법문입니다.


    풀어서 보면 '사성제를 꿰뚫어 앎(통찰지)'은 앎(識)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정·혜를 수행하여 드러나는 것이고, '분별해서 앎(識)'이란 '철저히' 알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히 앎'이란 무엇입니까?

     맛지마니까야 제1경인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에서 세존께서는 범부, 유학, 아라한의 앎을

     설하시면서 물질(色)에 대하여, 존재(有)에 대하여, 존재의 거주처(界)에 대하여,

     인식(六識)에 대하여, 같음과 다름에 대하여, 일체에 대하여, 열반에 대하여, 여래의 철저한 앎에

     대하여 설하시면서, 그 '철저히 앎'이 어떤 것인지를 설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미루어 볼 때 통찰지는 닦아야 함을 수행(patipatti)으로,  철저히 알아야 함을

     교학(pariyatti)으로 이해하여도 될 것입니다. 교학과 수행은 매의 양쪽 눈과 같다고

     들었습니다. 하나가 결여되면 한쪽 눈이 먼 것과 같아 목표를 향해 날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학(pariyatti)과 수행(patipatti)이 두 다리처럼 서로 의지하여 가르침을 꿰뚫음(pativedha)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도리를 성찰하게 됩니다. 예, 세존께서는 교학과 수행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苦聖諦)

             닦아야할 것을 닦았으며,       (苦滅道聖諦)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다.   (苦集聖諦)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苦滅聖諦)

                                                                                 * 숫타니빠따 「셀라의 경」(Sn3.7)


    위는 부처님의 게송입니다. 이것은 「초전법륜경」(S56:11)에서 세존께서

    '나는 사성제를 꿰뚫어 알았다.'고 천명하심의 그 구체적 내용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진리에 대해서는 철저히 알아야 하고, 알았으며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는 진리에 대해서는 철저히 버려야 하고, 바렸으며,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는 진리에 대해서는 실현해야 하고, 실현했으며,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는 진리에 대해서는 닦아야 하고, 닦았음을

    즉 소위 '삼전십이행(三傳十二行)'에 대한 참으로 간명한 게송이기도 합니다만,

                                                                (*http://blog.daum.net/ibakdal/17370892)


    위로부터 각각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는 교학(pariyatti)에, 닦아야 할 것을 닦음과 버려야 할 것을

    버림은 수행(patipatti)에,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가르침을 꿰뚫음(pativedha)에 각각 대비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 바 그 제자들이야 두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6) 이와 같이 문답이 오간 후 마하꼿티따 존자는 3) '알음알이(識)'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이어

    이제는 그 알음알이의 첫 번째 대상이 되는 '느낌(受)'에 대해서 물어 들어갑니다.

   

   '느낌(受)'이라고들 맣하는데 무슨 이유로 '느낌(受)'라고 하는가고 묻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답하십니다.

    즐거움이라고, 괴로움이라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을 느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7) 이어서 마하꼿티따 존자는 그렇다면 '인식(想)'은 무엇을 두고 '인식(想)'이라고 하는지 묻습니다.

    다섯 무더기(五蘊) 중에서 알음알이(識), 느낌(受), 인식(想)에 대해서, 즉 물질(色)과 샹카라(行)을

    제외하고는 다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想)'이라 한다고 답하십니다.

    예를 들어 푸른색, 노랑색, 붉은색, 흰색이라고 각각 인지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십니다.



8) 이렇게 하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이제 '느낌(受)'과 '인식(想)'과 '알음알이(識)'라는 법들이

    결합되었는지, 분리되었는지, 이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묻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이들은 결합되어있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십니다.

    또한 그러기에 이들을 잘 분리해서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9) 이어서 마하꼿티따 존자의 물음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향해 갑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능(눈, 귀, 코, 입, 몸)을 벗어나 마노(心)만으로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즉 다섯 가지 감각기능을 벗어난 감각기능인 마노가 있는 바, 보이지 않는 그 마노가 있다면

    그것만이 알 수 있는 알음알이(識)가 있을 터인데 그 반증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의 무색계 선정을 알 수 있는 것을

    그 반증으로 말씀하십니다. 비상비비상처는 그 인식이라 할 것이 지극히 미약하므로 제외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색계 선정은 그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공무변처의 정형구를 새겨 보면,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함을 볼 때 다섯 가지 감각기능의 감역인 물질의 세계를 초월하여 오직 마노로서만 증득되는

    의식(意識, mano-vinnana)의 영역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10)

    이 다음 마하꼿티따 존자의 질문은 '무엇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다소 애매해 보입니다만, 예를 들면 위에서 이미 물어본 통찰지, 알음알이, 느낌, 인식,

    무색계 선정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치기 위해 정신·물질 등의 법을 분별해서 철저히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의지하여 이 법들을 알아야 꿰뚫어 알게 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통찰지의 눈(慧眼)'으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꿰뚫어 안다고 답하십니다.

    '통찰지(panna)'는 이미 1), 2)에서 '사성제를 꿰뚫어 앎'이라고 정의하셨으므로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눈'으로 알아야, 알아야 하는 법들을 알아야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11)

    이에 이르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그렇다면 그 '통찰지(panna)'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통찰지는

    1) 최상의 지혜(abhinna)를 목적으로 하고,

    2) 통달지(parinna)를 목적으로 하고,

    3) 버림(pahana)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주석을 따르면 '완전히 알아야 하는 법들을 완전히 안다(abhijanati)'라고 해서

      '최상의 지혜(초월지, abhinna)'라고 합니다. 그러나 '통찰지(panna)'의 정의가 '사성제를 꿰뚫어

       앎'이라고 이미 정의하셨고 그것을 진리라고 하고, 그 이상의 지혜는 없으므로 그것이 최상의

       지혜여서, '사성제를 꿰뚫어 앎'이 '최상의 지혜'라 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 통달지(parinna)는 주석을 따르면 '철저히 알아야 하는 법들을 철저히 안다(parijanati)'라고 해서

      '통달지(parinna)'라고 합니다. 대림스님의 주석을 따라 '철저하게 알았다(parinnatam tassa,

       통달지)'를 주해한 「뿌리에 대한 법문」(M1) §3의 주석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땅을 잘 아는 자는 세 가지 통달지를 통해 철저히 안다. 그것은
       ① 안 것의 통달지(nata-parinna, 知遍知),
       ② 조사의 통달지(tirana-parinna, 審察遍知),
       ③ 버림의 통달지(pahana-parinna, 斷遍知)이다.

        1> 이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인가?
            "그는 땅의 요소를 잘 안다.
             이것은 내적인 땅의 요소이고, 이것은 외적인 땅의 요소이고,
             이것은 그 특징이고, 이것은 역할이고, 나타남이고, 가까운 원인이다."라고
             철저히 아는 것이 아는 것의 통달지이다."

        2> 어떤 것이 조사의 통달지인가?
            "물질을 무상으로, 괴로움으로, 으로 본다."(Ps.ii.238)라고
             마흔 가지 측면에서 땅의 요소를 조사하는 것이 조사의 통달지이다."

        3> 어떤 것이 버림의 통달지인가?
            "이렇게 조사한 뒤 최상의 도로써 땅의 요소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버림의 통달지이다."



       혹은
       ①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는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이고,
       ②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부터 수순의 지혜까지를 조사의 통달지라 하고,
       ③ 성스러운 도에 대한 지혜를 버림의 통달지라 한다.

   

    - 버림(pahana)은 주석을 따르면 '버려야 할 법들을 버린다(pajahati)'라고 해서 '버림(pahana)'

       이다라고 합니다.


       가르침과 같이 연기의 법을 따라 사성제를 보고 즉,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여,

       다시는 갈애를 일으켜 오온 혹은 정신·물질을 거머쥐고 일어남·사라짐에 들지 않는 것이

      '버림'이라 생각됩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 '통찰지(panna)' 즉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의 목적이 '버림'이라고

       천명하시는 곳에서 땅이 흔들리는 울림이 있습니다.



12)

    '통찰지(panna)' 즉 '사성제를 꿰뚫어 앎'은 결국 '오온을 바로 봄'입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그러므로 마하꼿티따 존자의 다음 질문은 '바른 견해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1)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과 2)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란 'yoniso manasikaro'입니다.

    여리작의(如理作意)로 옮겨지는 부분입니다.


    범부가 '바른 견해(正見)'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고, 그것을 이치에 맞게

    성찰하고 새겨야한다는 조건입니다. 이 담담하기 짝이 없는 사리뿟따 존자의 답변도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13)

    위 '바른 견해(正見)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는 괴로움의 끝을 향한 구도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하꼿티따 존자는 어떤 구성요소들이 바른 견해를 도와 해탈의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가라고 묻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계, 배움, 담론, 사마타(止), 위빳사나(觀)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비른 견해를 도와 해탈의 결실과 이익을 가져온다라고 답하십니다.



14)

    이제 마하꼿티따 존자의 다음 질문은 외연을 넓혀 '존재(有)'로 향합니다.

    얼마나 많은 존재가 있읍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가 있다고 답하십니다.



15)

    그러자 다음 마하꼿티따 존자의 질문은 존재의 그 존재의 '태어남(生)'으로 향합니다.

    어떻게 해서 미래에 다시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중생들이

    1) 무명에 덮이고, 2) 갈애에 속박되어, 3) 여기저기서 즐기기 때문에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다고 답하십니다.



16)

    그러면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까라고 묻습니다.


    1) 무명이 빛바래고, 2) 명지가 생기고, 3)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다라고 답하십니다.   



17)

    마하꼿티따 존자의 다음 질문은 초선(初禪)으로 넘어갑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증득의 첫 관문이 초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선에 이를 만큼의 마음의 제어 내지 조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가 깨달음으로 가기란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여 마하꼿티따 존자의 다음 질문은 '무엇이 초선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세존의 가르침과 같이

    1)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2) 일으킨 생각[尋]가 지속적 고찰[伺]이 있고,

    3)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것이

    초선(初禪)이라고 답하십니다.



18)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초선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묻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초선은 얼마나 많은 구성요소를 가졌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초선은

    1) 일으킨 생각(尋), 2)지속적인 고찰(伺), 3) 희열(喜), 4) 행복(樂),

    5)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傾)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졌다고 답하십니다.


    마음을 제어하고 조복시켜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을 놔두고 선정을 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9)

    마하꼿티따 존자는 여기 초선에서 더욱 들어가서 분명하게 합니다.

    초선에 들어서 무엇이 버려지고 무엇이 증득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초선을 증득한 비구에게

    1) 감각적 욕망, 2) 악의, 3) 해태와 혼침, 4) 들뜸과 후회, 5)의심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버려지고,


    1) 일으킨 생각(尋), 2)지속적인 고찰(伺), 3) 희열(喜), 4) 행복(樂),

    5)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傾)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증득된다고 답하십니다.


    다섯 가지 장애와 초선과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밝혀주는 소중한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경에서 세존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0)

    여기서 마하꼿티따 존자의 질문은 '바른 견해(正見)'의 본질로 향하게 됩니다.

    '바른 견해(正見)'이 '오온을 바로 봄'이라고 할 때 오온 즉 존재의 존재형식 다섯 가지(五蘊)는

    정확히 말하면 육입(六入)의 오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하꼿티따 존자는 여기서 마노(心)을 놔두고 일단 다섯 가지 감각기능 즉 눈, 귀, 코, 혀, 몸은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가지고 있어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음을 지적한 뒤

    무엇이 그들 각각의 의지처이고 무엇이 그들 각자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감관이 있더라도 그 존재는 그로부터 일어나는 오온을 한 개의

    통일체로서 받아들이고 종합하고 경험을 축적합니다. 따로따로 인식의 주체가 있어서 그

    다섯 가지 감관의 경험이 따로 놀지 않음을 지적하여, 그렇디면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의지처인가

    라고 물은 것입니다. 알음알이(識)의 메카니즘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마음[意]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고,

         마음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라고 답하십니다.

                                                                       

    해탈할 때 무엇이 해탈합니까? '마음'이 번뇌들로부터 해탈한다고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1)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서 그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왜 존재하는지를

    묻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한다.'라고 답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수명이 있는 존재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존재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그렇다면 '수명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수명은 온기를 조건으로 존재합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렇다면 그 '온기는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라고 묻자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온기는 수명을 조건으로 존재한다.'라고 답하십니다.

                                                                    

    이에 마하꼿티따 존자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리뿟따 존자의 답변은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하십니다.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불꽃에 의지하여 빛이 드러나고

         빛을 의지하여 불꽃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컨대 이 비유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등불, 불꽃, 빛이 그것입니다.

    1) 등불은 존재로,

    2) 모든 존재는 형성된 것이고,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므로 명근(命根)을 가집니다.

        그러기에 불꽃은 명근 즉 수명이라고,

    3) 수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다섯 가지 감각기능을 가지고 존재형식인 오온의 작용을 합니다.

        정신·물질(名色)을 불태우며 생리작용을 하며 내가 나라 하며 빛을 낸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은 온기라고.

                                                 

    그러기에 어떤 존재(등불)가 아직 존재의 영역(건너지 못한 영역)에 속해 있다면

    그는 그가 누구든 수명(불꽃)이 있고,

    그 수명(불꽃)이 다 할 때까지는 그 앞에 펼쳐지는 정신·물질을 땔감으로 오온의 작용(빛)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존재의 영역을 벗어난다면(해탈·열반에 이르러) 그 존재(등불)는 이미 존재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나고 죽음을 여의었으므로 수명(불꽃)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 수명(불꽃)이 이미 없으므로 그 앞에 펼쳐지는 정신·물질을 불태워서 오온의 작용 즉

    빛을(온기)내면서 내가 나라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그 알음알이가 다하였으므로 존재를 풀어서 벗어났으므로 

    거머쥐기에 끊임없이 펼져졌던 정신·물질이라는 땔감은 이미 태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정신·물질조차도 있다 없다할 것이 이미 없는 것(空)입니다.

    그는 그 일어남·사라짐에 드는 것을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등불이 없으므로 이것을 어둠이라고 깜깜한 적막이라고 해야하는 것일까요?,,,,,

    어떤 빛이 있더라도 그보다 수억배 밝은 빛에 비하면 어두운 것이고, 어떤 암흑이 있더라도

    그보다 더 어두운 암흑이 있어 그 암흑은 대낮처럼 밝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 어떤 것이 밝음이요 어떤 것이 어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빛과 암흑을 둘 다를 완전히 여의어 버림.

    그것이야말로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밝음과 어둠을 다 끌어 안고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나게 하는

    빛없는 빛이요, 참된 빛이요, '난 적이 없는 빛'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존재하는 이유는 수명이 있기 때문이요,

    수명은 온기를 의지하고, 온기는 수명을 의지한다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은

    말장난이 아니요, 삼베다에 능통한 도반의 날카로운 질문에 논리와 앎이 다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근본도리를 드러내고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22)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그 수명이 느낌과 동일한 것인지를 묻습니다.

    오온을 바로 보고 마음챙기기 위한 첫 관문은 '느낌(受)'를 바로 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느낌이라는 삼사화합(三事和合)을 바로 보고 그것에 마음이 지배되지 않는 것이

    수행의 첫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마하꼿티따 존자는 어떤 자가 느끼는 한은 그는 수명이 있는 것이고, 하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도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느낌이 있는 한 수명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수명이 바로

    느낌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고 묻는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수명은 느낌과 다른 것이라고 천명하십니다.

    그 반증은 비구가 상수멸에 들어 느낌(受)과 인식(想)이 멸진한 선정에 들어있을 때

    그는 분명히 느낌이 없다가 살아있는 상태로 그 상수멸에서 출정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느낌이 없다하여 그가 수명이 다했다고 할 수 없고, 그와 같이 그 둘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3)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그렇다면 어떤 것이 수명이 다한 것인가? 즉,

    그러면 어떻게 되면 몸이 통나무와 같은 무정물이 되는가라고 묻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수명과 온기와 알음알이의 세 가지 법들이 이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통나무와 같은 무정물이 된다고 답하십니다.



24)

    그러자 마하꼿티따 존자는 그러면 죽은 것과 상수멸의 차이는 무엇인가고 묻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죽은 자는

    몸, 말,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고 가라앉고, 수명과 온기가 다하고 감각기능들이 완전히 파괴되지만,


    상수멸에 든 자는

    몸, 말,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고 기리앉지만,

    수명이 다하지 않고, 온기가 식지 않고, 감각기능들은 아주 분명하다고 답하십니다.


    세존께서는 구차제주등지(九次第住等至)를 설하시면서,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을 증득하여 머문다.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 (진리를) 보아서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983)

    라와 같이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위와 같이 미루어 보면 상수멸에 든다 함은 1) 마치 죽은 자처럼 되어 통나무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님을, 2) 느낌(受)과 인식(想)을 제어하여 소멸하므로 대상을 부딪히거나(色) 이름지음(名)

    을 소멸했음을, 3) 그러나 그 감각기능들은 '아주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상수멸이 무엇인지 아직 가늠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다음의 의문이 있었습니다..

    1) 상수멸에 든 자는 정말 숨을 쉬지 않는 것인지? 죽습니다.

    2) 상수멸에 든 자는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고 가라 앉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마음의 알음알이라는

        작용까지가 소멸한 것인지?,

    3) 그렇다면 상수멸에 든 자가 어떻게 거기서 사성제를 볼 수 있는지?,

    4) 상수멸에 든 자는 자신이 상수멸에 들어있다는 앎이 있는지?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4선의 해탈, 무량, 무소유처, 공(空),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괴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오래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마음에 갈려 이번에는 이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여, 안양의 한국마하시선원에서 우 또다나 사야도와

    함께 계시는 일창스님께 이를 여쭈어서 의문을 해소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에 별도의 추신(post

    script)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25)

    이제 마하꼿티따 존자의 질문은 점점더 깨달음이라는 고지의 9부 능선을 향해 나아갑니다.

    디음 마하꼿티따 존자의 질문은 4선정의 해탈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즉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합니까?'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초선이 감각적 욕망을 왼전히 떨쳐 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는 도닦음의 첫 단계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또한 거친 물질의 세계(慾界)에서 미세한 물질들의 세계(色界) 즉

    초선∼4선의 증득으로의 첫 관문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이 4선(四禪)은 그러한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로부터 시작하여 물질의 세계를 초탈한 무색계(無色界)를 향한 관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하꼿티따 존자는 이 4선을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이러한 4선은

    1)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2)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3) 평온으로 인해

    4)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이 4가지가 제4선(四禪)을 구족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세존의 가르침대로 설하십니다. 

   

   

    제4선에서 '평온'으로 인헤 마음챙김이 청정정하다는 표현은 초선이 그러한 것과 같이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평온(upekkha)'로 표현되는 이 경지는 위빳사나의

    지혜를 제쳐두고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빳사나의 지혜라고 일컬어지는 열 가지

    즉, 명상의 지혜(정신, 물질을 분별하여 보는 지혜), 생멸의 지혜, 무너짐에 관한 지혜, 무서움에

    관한 지혜, 공포에 관한 지혜, 염오의 지혜, 열반을 원함의 지혜, 숙고의 지혜, 평온의 지혜,

    수순의 지혜를 이야기 할 때도 평온의 지혜는 드러납니다.


    전체 위빳사나의 지혜가 대전기경(D14)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일체의 일어남·사라짐에

    대한 연기의 지혜임을 직관한다면(http://blog.daum.net/ibakdal/17371151),

    열 가지 위빳사나의 지혜라함도 결국 일체 즉 정신·물질을 분별하여 그 일어남·사라짐의 도리인

    연기법을 꿰뚫어 아는 것이요, 바로 그 법으로 일체 정신·물질 즉 오온을 바로 보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바,


    이 '평온(upekkha)'이라 함은 이러한 눈으로 보았을 때 나를 포함한 일체 '존재'가 결국

   '업(kamma)'의 결과를 모아 놓은 것(蘊)이고, 그 앞에 펼쳐지는 세상 또한 바로 그러한 자신의

    업에 대한 천명임을 꿰뚫어 알았을 때 '평온(upekkha)'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업이 자기 자신임을 아는 것'이 평온의 지혜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눈으로 보았을 때 나 자신이나 다른 중생들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괴로움에 대해,

    청정한 마음으로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4선의 증득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러하기에 인욕이나 억울한 죽음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나의 업이구나'라고 하는

    확고부동의 '평온'에 의지하여 그 다음 '수순의 지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4선은 비록 이것이 사마디 혹은 선정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실체나 내용을 보면

    무르익은 '위빳사나의 지혜'를 두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이미 정신·물질을 바로 봄이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물질현상 자체가 남김없이 소멸한다하더라도 마음에 걸림이 하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지혜가 확고한 다음에야 비로소 행복도 괴로움도 다 버린

    평온 속의 마음챙김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마하꼿타따 존자의 제4선에 대한 물음은 그 질문의 단계로 보아서 위와 같은 곡절과 함의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 다음인 질문인  '무량한 마음의 해탈', '무소유처 마음의

    해탈', '공(空)한 마음의 해탈',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로의 도약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그 위에 사리뿟따 존자의 마지막 법문인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의 법문까지가 한 실로

    꿰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26∼28)

    이렇게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의 지경에 대한 질문을 마친 후

    마하꼿티따 존자는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이 조건들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이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은 대림스님의 주석과 같이 「공에 대한 짧은 경」(M121)에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 경에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공(空)에 들어 머묾'에 대하여

    여쭈는 바, 세존께서는 이 '공(空)에 들어 머묾'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8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축차적으로 그것을 다음과 설하십니다.


     1) 대상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머묾으로 그 나머지가 공함

     2) 그 까시나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며 머묾으로 그 나머지가 공함

     3) 물질을 초월하여 공무변처의 삼매에 들어 그 나머지(물질계)가 공함

     4) 식무변처의 삼매에 들어 그 나머지(물질계와 공간)이 공함

     5) 무소유처의 삼매에 들어 그 나머지(물질계, 공간, 존재)가 공함

     6) 비상비비상처의 삼매에 들어 그 나머지(물질계, 공간, 존재, 인식)가 공함

     7) '표상없는 삼매'에 들어 여섯 감각장소 외에 일체가 공함

     8) 표상이 없는 삼매 자체도 형성된 것이고 소멸하기 마련이어서 그것도 공이라고 꿰뚫어 보아

         해탈함(일체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이 공하나 여섯 감각장소만이 남아있음)

   


    이와 같이 설하시면서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는 '무소유처라는 인식과 비상비비상처의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 하나만을 마음에 잡도리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2097)


    이 경의 주석을 따르면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란 위빳사나와 함께한 마음의 삼매'라고, '영원하다는

    표상들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다'고, '위빳사나와 함께한 마음의 삼매란 찰나삼매'를 말함을,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無想三昧)는 무위에 이르는길'과 같이 그 의미를 새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에 관한 이어지는 마하꼿티따 존자의 질문에 대해


    1)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2) 표상이 없는 요소[界]를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이

    그 증득을 위한 조건이요,

                                         

    1)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2)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함과 

    3) 이 증득에 들기 전의 결심

    그 지속을 위한 조건이요,

                                                                                                                     

    1)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함과

    2)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

    그 출정을 위한 조건임을 설하십니다.




    표상없는 삼매와 관련하여 위 「공에 대한 짧은 경」(M121)의 주석에는  아쉽게도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와 '상수멸'과 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감히 합리적인 추론을 해본다면,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와 '상수멸'은 대단히 유사한 것이지만

    그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먼저 그 유사점을 보면 첫째로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나 '상수멸'이 둘 다 부딪힘의 인식을 넘어서

    물질계(色界)를 초월하한 무색계 선정인 무소유처나 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지극히 높은

    선정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의 실질적인 의미는 그 둘 다에 있어서 그의 인식이 무한한 공간(공무변

    처), 무한한 알음알이(식무변처), 아무 것도 없음(무소유처), 인식하는 것도 인식하지 않는 것도

    아님(비상비비상처)를 넘어선 것이므로 공간, 알음알이, 존재, 인지(想) 자체를 벗어나서 성립되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 둘 다가 그에 입정하여 출정하기까지의 머무는 시간이 입정하기 전에 마음의 결심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머묾이 어떤 대상을 반연함이 없거나 없는 것에

    가까우므로 입정하기 전에 맺은 마음의 결심을 반연하지 않고는 출정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선정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 둘 다에 있어서 '여섯 가지 감각기능들은 매우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교리 문답의 긴 경」에 나타난 사리뿟따 존자의 상수멸에 대한 설명이나, 「공에 대한 짧은 경」에

    나타나는 표상없는 삼매에 대해서 세존께서 설하신 바 논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함에

    삼매에 든 자나 상수멸에 든 자의 상태가 통나무와 같이 죽은 자의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이 때에도 여섯 가지 감각기능은 성성(惺惺)하여 어떤 혼미한 상태의 그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먼저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는 '표상없는 삼매'를

    마음에 잡도리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표상없는 삼매에 머물 때 그 알음알이(識)가 분명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상수멸'에 든 자에게는 내가 상수멸에 들어있다라는 알음알이(識)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는 상수멸에 입정하기 전에 그러한 알음알이까지를 완전히 소멸하여 머물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 중 어느 하나에 입정할지는 그가 입정하기 전에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지

    상수멸에 들지 선택하기에 달린 것이라 생각됩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를

    증득한 자는 시험 삼아서라도 상수멸에 들 것이며, 상수멸에 들었던 자가 표상없는 삼매에 들지

    못할 경우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에 든 자에게는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

    라는 인식(알음알이)만큼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그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마저도 놓아버리고

    거머쥘 것이 아님을 보고 그것마저 소멸하고도 평안한 지경이 성립하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수멸에 들어 그것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 둘 다에서 아직 구경의 해탈·열반을 증득할 수는 없습니다.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건 '상수멸'이건 그 둘 다는 마음의 제어요 마음의 조복입니다.

    그곳에 머무른다함은 그것에 머묾일 뿐입니다. 그것은 한 개의 계(界)이며,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그조차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어서 소멸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는 표상없는 삼매든 상수멸이든 그곳에서 출정해야 합니다.

    출정하여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반조하면서 그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이제 단 한 터럭의 의심도 없이 사성제를 꿰뚫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번뇌와 번잡함을 소멸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入)이, 그리하여 오온(五蘊)이

    새벽하늘의 별과 같이 성성(惺猩)한 상태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29)

    이제 마하꼿티따 존자는 1) 무량한 마음의 해탈, 2) 무소유처 마음의 해탈, 3) 공(空)한 마음의 해탈,

    4)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묻는데 이르게 됩니다.


    이 네 가지 지극한 마음의 해탈에 대해서 그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리뿟따 존자께 물어서 그 뜻을 확실하게 파악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모두기 지극한 어떤 경계를 말하는 것이어서 그것들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며, 이 경과 같은 교리문답(方等)이 없다면 그도 또한 후세에는 저마다의

    해석에 따른 논란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인 바, 그를 분명하게 함도 본경의 공덕이라 하겠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방편이 있는데,

         그 방편에 따라 이 법들은 그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며, 

         방편에 따라서는 뜻은 같고 표현만 다릅니다."


    라고 답하십니다. 표현은 그 말대로 어차피 다 다른 것이지만,

    방편에 따라서는 그 의미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30)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이런 방편으로는 그 의미가 각각 다르다고 설하십니다.


    1) '무량한 마음의 해탈'이란 세존께서 설하신 바 사범주(四梵住) 즉 네 가지 거룩한 머묾의 해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각각은 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온의 마음의 함께하는 해탈

        즉 자심해탈(慈心解脫), 비심해탈(悲心解脫), 희심해탈(喜心解脫), 사심해탈(捨心解脫)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무소유처 마음의 해탈'이란 일체 식무변처의 해탈을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의 선정을 구족하여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공간, 알음알이를 초월하여 존재를

        초월한 인식에 다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3) '공(空)한 마음의 해탈'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空)하다.'라고 숙고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공에 대한 짧은 경」에서 8가지 단계로 설하신 모든 공(空)함을

        통칭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안에는 일부로서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4)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은 '모든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표상없는 삼매를 마음를

        증득하여 머무는 것'이라고 설하십니다. 이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는 「공에 대한 짧은 경」

        (M121)에서 설하신 바 특정한 부분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이 4가지는 그 가지는 고유한 특성에 따라서는 의미가 다릅니다.




    무량한 마음의 해탈, 네 가지 거룩한 머묾이라고 불리워지는 자애가, 연민이, 함께 기뻐함이,

    평온이 함께하는 4가지 마음의 해탈(자심해탈, 비심해탈, 희심해탈, 사심해탈)에 관하여는

    비록 그것이 위빳사나의 지혜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지극히 선한 마음, 또 그러한 마음을 관철하기 위한 믿음과 의지에 의하여 '평온(upekkha)'의

    요소까지의 거룩한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공덕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연민이, 함께 기뻐함이,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라는 이 거룩한 머묾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자애경에서 '고귀한 삶'이라고 설하신 바입니다.

    비록 이러한 해탈의 경우 그를 범천의 존재로는 인도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오온을 바로

    봄'에 이르지는 못하므로 괴로움의 끝으로 인도할 수는 없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세존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 장애(五蓋)에서 벗어남을 설하신 후 삼매를 설하시기 전에

    거의 항상 이 거룩한 머묾을 닦아야한다고 설하신 것을 기억해야 하겟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 즉,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을 벗어나지 못한 자가

    삼매나 위빳사나에 든다 함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만, 작은 그룻 내지 오염된 그릇을 가진 자가

    삼매나 위빳사나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능하게 된 경우를 상정해보면, 그야말로 「앗사뿌라 짧은

    경」(M40)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바 '마따자라는 무기가 덮개에 싸여있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지혜와 위력으로 자애와, 연민과, 함께 기뻐함과, 평온이라는 거룩한 덕목과

    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 힘을 쓰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전기경」에서 위빳시 세존께서는


      "1) 관용이 (그 특징인) 인욕은 최상의 고행이고

       2) 열반은 최상이라고  

       부처님들은 설하신다.

 

       3) 남을 해치는 자는 출가자가 아니며

       4) 남을 괴롭히는 자는 사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1160)

    라고 부처님의 제자되는 자들의 근본을 천명하십니다.

    삼매나 위빳사나가 먼저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애와 연민, 함께 기뻐함과 평온이라는 대지(大地)위에서만 피는 꽃들입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마음에 남는 영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주성치 감독의 「선리기연」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삼장법사는 관세음보살이 손오공을 벌하려하자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 벌을 대신 받겠다'고 합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느냐?'라고

    합니다. 지장보살의 그 마음입니다. 어떤 지극한 설법만큼이나 그 거룩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마음을 울립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등신불」에서 소신공양을 하는 만적은 그 재가한 어머니의 사악함과

    그 이복동생의 비참한 종말을 보고 '이것은 다 나의 잘못이며 부족함이다'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소신공양하여 그들의 그러한 괴로움에 끝을 맺어주려 하는 데에 이릅니다. 그것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거룩하고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그것이 지혜없는 행위인지는 몰라도 그 마음만은 

    거룩한 지애요, 연민이요, 서원이요, 함께 기뻐하려함이요, 평온의 마음가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모두 이 '무량한 마음의 해탈'을 전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거룩한 마음을 가진 자가,,, 괴로움의 끝을 만드는 것이라고,,,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마저를 넘어서 있는 것이지마는,,,,  그런 거룩한 머묾을 할 줄 아는 자가 괴로움의 끝에 결국

    이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러기에 지혜의 부처님이시지만 그전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고,,, 삼계도사 사생자부아니신가고,,,, 그러기에 그 제자들에게 삼매와 통찰지를 닦기

    이전에 그 네 가지 거룩한 머묾을 닦으라고 항상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느냐고,,,,  생각해 봅니다.

   


   



                                                     

                                      

31)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이 4가지 마음의 해탈은 표현은 다르지만 그 해탈들의 궁극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같다라고 설하십니다.


    1) 무량한 마음의 해탈에 있어서는

        탐욕이 한계를 만들고, 성냄이 한계를 만들고, 어리석음이 한계를 만드는 바

        모든 무량한 마음의 해탈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최상이니

        이는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한 데 이르기때문이요,


    2) 무소유처 마음의 해탈에 있어서는

        탐욕도 그 무엇이 있는 것이요, 성냄도 그 무엇이 있는 것이요, 어리석음도 그 무엇이 있는

        것인 바,

        무소유처 마음의 해탈 가운데서 최상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니

        이는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한 데 이르기때문이요,


    3)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에 있어서는

        탐욕이 표상을 만들고, 성냄이 표상을 만들고, 어리석음이 표상을 만드는 바,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 최상이니

        이는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한 데 이르기때문이라고 설하셨습니다.


    '공(空)한 마음의 해탈'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없다.'라고 숙고하는 것이라고 설하신 바,

    여기서는 별도로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공(空)한 마음의 해탈' 중 마지막 8번째인 그

    최상이 바로 이미 위에서 설하신 바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어서 이미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공(眞空)'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설하시면서 이미 설하셨기에 다시 설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에 저는 눈이 멀고 귀가 머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법문을 듣게 해주신 마하꼿티따 존자님께, 사리뿟따 존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설해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


무명이 빛바래고, 명지가 생기고, 갈애가 소멸하여,,,,

오직 이 한없는 사악함이라는 강을 건너지기를 소망합니다.


이같이 새겼습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공덕으로

행복하고 위험없는 열반으로 장애없이 도착하기를

 

수 많은 생 윤회할 때

고통 위험 원수들과 나쁜 것들 안 만나고

모든 행복 축복들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오늘 지금 행한 공덕 몫을

부모 스승 친척 친구 자신보호

어려울 때 연민과 도움을 주신 도반들

천신들을 시작으로 삼십일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

성취하길 바라면서 회향합니다.

 

경을 번역하여 알리느라 노고를 마다 않으신 대림스님과 각묵스님 건강하시기를,,,

 

이 방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집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김해 장유 반룡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지리산 실상사와 지리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보라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또한 나와 숙업이 쌓였던 그에게 회향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청정한 자애와 연민이 강물처럼 흐르기를,,,

                                                 

모두 이 회향을 받아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한없는 사악함이라는 강을 건너게 되시기를,,,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2017. 3. 12






※ P.S.  상수멸 관련한 일창스님의 답변


저의 질문

1) 상수멸에 든 자는 정말 숨을 쉬지 않는 것인지? 죽습니다.

2) 상수멸에 든 자는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고 가라 앉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마음의 알음알이라는

    작용까지가 소멸한 것인지?,

3) 그렇다면 상수멸에 든 자가 어떻게 거기서 사성제를 볼 수 있는지?,

4) 상수멸에 든 자는 자신이 상수멸에 들어있다는 앎이 있는지?


스님의 답변

1. 숨은 사선정에서도 끊어집니다. 숨을 안 쉰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과학적 해명? 피부호흡? )

2. 예. 정신작용 모두 (느낌, 인식, 형성들, 마음-즉 의식 모두가 일정 기간 생겨나지 않습니다.

3. 멸진정에 든 상태에서는 사성제를 보지 않습니다. 

    참고로 한 문장의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차례대로 경에서 사리뿟따의 경우, 멸진정에 드는 공덕을 드러내기 위해

     아라한이 되기 바로 직전에 멸진정에 관한 내용을 넣은 것..)

4. 감각기능들은 분명합니다. 생명은 유지됩니다. 즉 업 생성물질들은 계속 생겨납니다...

    멸진정에 든 상태에서는 '내가 상수멸에 들었다'라는 앎은 없습니다. 


일창스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