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35.삿짜까 짧은 경-오온, 내가 아님

※後記: 삿짜까 짧은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6. 12. 12. 07:03

 

삿짜까 짧은 경은

 

세존께서 웨살리에서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무실 때 니간타의 후예이며 논객인 족성이 악기웨사나인

삿짜까가 탁발을 하러 나온 앗사지 존자를 만난 것을 계기로, 세존의 가르침을 논파하여 논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하면서 세존을 찾아 뵙는 것을 계기로 설하신 경입니다.

 

 

1. 오온은 무상하며, 내가 아니다.

 

삿짜까는 세존께 어떻게 제자들을 인도히고, 가르침을 어떻게 분류하여 제자들에게 거듭 가르치시는지를 여쭈는 바, 세존께서는

 

   '물질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인식은 무상하다. 심리현상들[行]은 무상하다.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물질은 무아이다. 느낌은 무아이다. 인식은 무아이다. 심리현상들은 무아이다. 

    알음알이는 무아이다. 

 

    제행은 무상하고 제법은 무아이다.'

 

라고 가르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2. 공박_오온이 자아다.

 

삿짜까는 위와 같은 세존의 가르침이 '달갑지 않고', '나쁜 견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존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렇게 세존의 가르침을 공박합니다.

 

   '이 인간이란

    물질을, 느낌을, 인식을, 심리현상들을, 알음알이를 자아로 삼아

    이러한 오온을 바탕으로 공덕을 짓기도 악덕을 짓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이러한 공박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그렇다면 그대는

    물질이, 느낌이, 인식이, 심리현상들이, 알음알이가

    즉, 오온이 자아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삿짜까는 자신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3. 반증_오온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

 

세존께서는 이러한 삿짜까의 공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차례대로 '오온이 자아다'라는

논리를 풀어서 헤치십니다.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라는 오온에 대하여

 

1] 그들 각각이 나의 자아라면

    '나의 오온은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되지 마라.'고 그 오온을 지배할 수 있는가?

 

     - 오온을 지배할 수 없다

 

        → 오온 즉 일체 (정신·물질)현상, 일체 (존재가 존재임을 주장할 근거가 되는) 존재형식이란

            '나'와 (그 앞에 펼쳐지는) '세상'이라는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된) 업(業)의 결과

            혹은 인과를 (정신·물질이라는 표현의 형식, 혹은 감득(感得)의 형태로) 모아 놓은(蘊) 것일

            뿐이며, 그것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나' 자신에 대한 천명일 뿐이어서

            내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현실(現實)이 그 말과 같이 알음알이의 드러남 혹은 드러난 알맹이(혹은 얼)가 아니라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환상(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의 구성요소인 물질과 정신(현상)은 알음알이(識)으로부터 오직 연기(緣起)의 법을,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됨(因果)을 태생으로 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은 현실로서 엄연 존재에게 존재하고 감득되며, 현실은 환(幻)이 아닌 것이다.

            계(界)와 '존재'가 성립하는 메카니즘이다.

 

            이렇게 보면 정신·물질의 무대가 펼쳐지는 시공간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인과의 순서 혹은

            인식의 순서의 불가역성, 예를 들면 마음의 행위만 하더라도 무엇이 바뀌는 것과 같은

            인과율의 바탕이 되는 절대 동시성(synchronization), 한 계(界)에서의  얽힘

            (entanglement), 또한 그 동시성을 존재에게 담보하기 위하여 적어도 빛을 매개로 하는 

            관측계(혹은 거친 물질의 세계)에 있어서는 왜 빛보다 빠를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지에 

            대한 가설의 성립도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2] 그들 각각은

    1) 무상한 것인가, 항상한 것인가?

    2)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3) 이와 같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이 내 것이다, 나이고,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 오온은 무상하고, 그러기에 괴로움이고, 그러기에 내가 아니다.

 

        → (내 몸을 포함한 일체의) 물질(혹은 대상, form), 느낌(feel), 인식(perception),

            심리현상들(formation), 알음알이(consciousness)는 혹은 일체 정신·물질현상들은

            모두 원인을 조건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것을 취착하고 거머쥐면 그것이 소멸하고 사라질 때 반드시 괴로움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언제까지 그러한 것을 내 것으로, 나로, 나의 자아로 거머쥘 것이며,

            과연 그것이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여, 이제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 시작하라. 그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족쇄를 풀어서 벗어나는 길임을 보기 시작하라.

 

.

3] 본성이 '괴로움'인 것에 들러붙어 그것을 '나'라고 보는 자가

                                                  그 '괴로움'을 바로 보거나 그것을 부숴버리고 머물 수 있는가?

 

       ' 괴로움에 들러붙고 괴로움에 의지하고 괴로움을 고수하여

         괴로움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자가 

 

         그 스스로 괴로움을 통달하여 알 수 있거나 

         혹은 괴로움을 철저히 부수어버리고 머물 수 있겠는가?'

 

    - 오온이 나라고 거머쥐는 한 괴로움을 벗어닐 수 없다

 

       → 활활 타오르는 불이 불인 줄 모르고, 그 속에 머묾을 즐기고, 거기 머물 것을 고집하는 자가

           뜨거움과 불에 데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4. 오온이 내가 아님을 보게 된 것을 이유로

                                   세존의 제자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행하고 머문다.

 

논쟁에서 완파당한 삿짜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고따마 존자의 제자들은

    가르침을 실천하고, 훈계를 받르어 행며, 의심을 건너고, 회의를 극복하고,

    무외를 얻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까?'

 

 

참으로 논객다운 의미심장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세존의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애써 실천하고 따르며 의심하지 않고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음을 성취하며, 그 가르침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게 되는지 그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1)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_ 시간을 초월하여

    2)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_ 내 안에 것이든 남이나 내 밖의 것이든

    3) 거칠든 섬세하든 _ 삼계(三界) 어디의 것이든

    4) 저열하든 수승하든 _ 악처든 인간이든 천상의 것이든

    5)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_ 공간을 초월하여

 

 

    그 모든 오온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써 본다.'

 

 

바로 이것을 이유로 나의 제자들은 나의 가르침을 애써 실천하고 따르며 의심하지 않고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음을 성취하며, 나의 가르침에서 떠나지 않고 머문다라고 설하십니다.

 

참으로 세존·아라한·정등각자의 포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을 따르고 믿음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향하는 이유가 세존에 대한 두려움, 외경, 공포,

맹신 등을 이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오온 즉 나 자신과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에 대해서

모든 존재 현상에 대하여, 시공을 초월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아님(無我)'을 바로 보게 됨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 어떻게 해서 삶의 목적을 완성합니까?

                             _ 오온이 내가 아님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삿짜까는 이어서 또 세존께 중차대한 질문을 합니다. 역시 논객다운 모습입니다.

어떻게 해서 아라한이 되고 삶의 구경(究竟)을 성취하는 것인지를 여쭈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1)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_ 시간을 초월하여

    2)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_ 내 안에 것이든 남이나 내 밖의 것이든

    3) 거칠든 섬세하든 _ 삼계(三界) 어디의 것이든

    4) 저열하든 수승하든 _ 악처든 인간이든 천상의 것이든

    5)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_ 공간을 초월하여

  

    그 모든 오온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써 보아,

 

    취착없이 해탈한다.'

 

라고 답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비구는

 

    1)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어

    2) 삶을 완성하고

    3) 할 바를 다 하고

    4) 짐을 내려놓고

    5) 참된 이상을 실현하고

    6) 삶의 족쇄를 부수고

    7)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다.'

 

라고 답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대전기경(D14)에서

 

   "그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을 하면서 머물자

 

    오래지 않아

 

    1) 취착이 없어져서 

    2) 번뇌들로부터

    3) 마음이

    4) 해탈하였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3)

 

와 같이 모든 보살들이 어떻게 부처님을 이루게 되는지에 대한 법문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앞뒤가 다른 것이 없고, 깨달음에 대해서도 숨기는 것이 없으십니다.

참으로 대자대비(悲)하신 부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6. 세 가지 위없음의 성취, 나는 왜 법을 설하는가?

 

이어지는 세존의 말씀은 큰 울림을 전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비구는 세 가지 위없음

 

    1) 위없는 견해,

    2) 위없는 도닦음,

    3) 위없는 해

 

    을 구족한다.'

 

라고 하시는 부분입니다.

 

 

세존께서는 말이라는 인간의 인습적인 표현과 개념을 빌어서 법을 전하셨습니다.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법을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뽓타빠다경 D9: http://blog.daum.net/ibakdal/17370637)

 

세존께서는 견해도 위없는 견해가 있고, 도닦음도 위없는 도닦음이 있고, 해탈도 위없는 해탈이

있음을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위없는 견해, 도닦음, 해탈은 모두 '오온이 내가 아님을

바로 보아' 이루어지는 것임을 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온이 내가 아님을 있는 그대로 바로 봄'을

제외하고 구경의 성취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신견(有身見)을 벗어야만 비로소 수다원 즉

깨달음의 길에 흐름에 들 수 있다는 세존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악기웨사나여,

    이와 같이 해탈한 비구는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숭배한다.

 

   '1)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2) 제어되신 세존께서는 제어를 위해 법을 설하신다.

    3) 고요하신 세존께서는 고요함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4) 건너신 세존께서는 건너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신다.

    5) 구경열반을 성취하신 세존게서는 구경열반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라고.

 

 

세존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연민하여, 신들과 인간들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법을 설하신다.'라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 이 부분에서는 표현을 달리하여 그 구체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깨달음을, 제어를, 고요함을, 오온이라는 폭류를 건넘을, 구경열반을 성취하신 당신께서는

깨달음을, 제어를, 고요함을, 건넘을, 구경열반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고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미혹과 빠짐을, 제어하지 못함을, 일어나고 사라짐의 번다함에 빠짐을, 오온의 폭류에 쓸려감을,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삶을 완성하지 못함을 위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와 같이 깨달은 비구는 세존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숭배하게

되는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논객 삿짜까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세존께 승복하여 비구승가와 힘께 공양을 청하게

되는 것이 본경의 내용입니다. 

 

 

 

7. 무아경(S22:59)과 삿짜까 짧은 경(M35)

 

본 삿짜까 짧은 경을 보면서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는 경이 무아경(無我經)이었습니다.

이 오온에 대한 가르침은 사경을 하면서 드문드문 그리고 꾸준히 나오는 가르침입니다만

그 가르침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나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사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들어서 알기는 하나 꿰뚫어 알고 확신을 가지지 못한 저 자신때문일 것입니다.

 

세존께서 「초전법륜경」을 설하신 뒤 오비구가 수다원과를 증득하고, 그로부터 닷새 뒤에

이 오비구의 번뇌를 멸진하기 위해 설하신 경이 무아경이며, 이를 듣고 오비구는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아경에서 세존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설하셨던 것일까요? 다음의 4단계의 법문입니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039)

 

 1] 오온은 '나'가 아니다.

 

   '이 오온은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니기 때문에


   1) 이 오온에는 고통이 따른다.

 

   2) 그리고 이 오온에 대하여

      '나의 오온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오온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2] 오온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러기에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오온이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3]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것

         - 오온은 그 어떠한 것이라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보는 것

       

    - 과거의 것이던, 미래의 것이던, 현재의 것이던

    - 안의 것이던, 밖의 것이던,

    - 거친 것이던, 미세한 것이던,

    - 저열한 것이던, 수승한 것이던,

    - 멀리 있는 것이던, 가까이 있는 것이던

 

    11가지 양상의 그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4] 이와 같이 오온을 바로 보아,

      오온을 염오하게 되고, 따라서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탐욕이 빛바래게 되어 해탈한다.

 

       "이와 같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나'의 몸을 포함한) 물질현상(色)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하고,

        느낌(受)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지각(想)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샹카라(行, 정신적 형성, sankhara)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작용(識, 식별하여 아는 작용,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離慾),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解脫)한다."

 

 

본 삿짜까 짧은 경에서의 마지막 부분 '취착없이 해탈한다'라는 부분에서 '취착없이'라고

간단하게 언명하신 부분은

 

- 오온을 바로 보아, 비로소 오온의 실체 즉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아님을, 

-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괴로움이며, 그리하여 종국에 내가 될 수 

   없음을, 

- 시공을 초월하여 혹은 나와 나 아닌 것을 포함하여 그 어떠한 오온이라도 그러할 뿐인 것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게 됨으로 인하여,

 

비로소 오온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오온을 추구하는 탐욕이 빛바램을 얻게 되고,

종국에 존재라는 족쇄를 풀어서 벗어나게 됨을 상술하는 것이 무아경에서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본 삿짜까 짧은 경에서는 무아경에서 설해진 것 이외에

 

   ' 괴로움에 들러붙고 괴로움에 의지하고 괴로움을 고수하여

     괴로움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자가 

 

     그 스스로 괴로움을 통달하여 알 수 있거나 

     혹은 괴로움을 철저히 부수어버리고 머물 수 있겠는가?'

 

와 같이 어떤 수행자가 혹은 범부가 오온을 바로 보는 계기를 잡는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가를 밝히는 도리를 설하시는 것처럼, 무아경의 보론적 상세를 설하시는 부분도 있어

무아경을 설하신 바 그 진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도 크나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이와 같이 일체 존재에게 그 존재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와 같이 일체 존재에게 나와 세상이라는 미망을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께 예경합니다.

높고 높은 스승님, 길 가르쳐 주신 분, 억겁 묶인 저에게, 자유를 주신 분,

그분께 두 손 높이 모아 예경합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공덕으로

행복하고 위험없는 열반으로 장애없이 도착하기를

 

수 많은 생 윤회할 때

고통 위험 원수들과 나쁜 것들 안 만나고

모든 행복 축복들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오늘 지금 행한 공덕 몫을

부모 가족 스승 친척 친구 자신보호

어려울 때 연민과 도움을 주신 도반들

천신들을 시작으로 삼십일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

성취하길 바라면서 회향합니다.

 

경을 번역하여 알리느라 노고를 마다 않으신 대림스님과 각묵스님 건강하시기를,,,

 

이 방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집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김해 장유 반룡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지리산 실상사와 지리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보라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모두 이 회향을 받아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

 

또한 부처님의 고귀한 딸 해란이가 성취하기를,,,,

수미산 같은 선업을 쌓게 되기를,,,,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2016.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