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구함 경은
세존께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일단의 비구들이 세존의 면전에서 설법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아난다 존자에게 청하여
세존의 면전에서 법을 들을 기회를 청한 것을 계기로 세존께서 그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의 지혜로 먼저 모여있던 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지
물으시고 그들이 '세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는 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그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 본경의 내용입니다.
세존께서는 모여있던 이들을 칭찬하시면서 그대들이 모이면 '오직 두 가지 할 일이 있나니,
법담을 나누거나,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그분의 제자
들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시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바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에서 '세존은 과연 어떤 분이셨던가?'에 대한 많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경의 내용을 보면 당신이 어떤 분인가를 대부분 유학(有學)으로 짐작되는 그 비구들에게
자상한 아버지가 아이들을 대하시듯 간명하고 쉽게 전달하려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분의 가르침의 요체(要諦)가 어떤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 경이기도 합니다.
세존께서는 과연 어떤 분이셨습니까?
한때 나체 수행자이셨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몸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데 몰두하여 지내셨으며,
먼지와 때는 여러 해 덕지덕지 몸에 쌓여 극도로 더러웠으며, 극도로 나쁜 행위를 혐오하여
한 방울의 물과 땅의 틈새의 미물들도 연민하였으며, 숲으로 밀림으로 골짜기로 능선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은둔하셨으며, 송아지의 똥을 또 자신의 오줌과 똥이 다할 때까지 드시고,
무시무시한 숲에서 추위와 시달리면서도 불을 가까이 가지 않고 궁구를 거듭하시며,
송장의 뼈다귀를 베게로 공동묘지를 잠자리로 하시고, 한 개의 대추, 혹은 녹두, 참깨, 쌀로
연명하시어 사지가 마르고 등뼈가 줄로 엮은 구슬처럼 몸이 부셔지도록 구하신분,,,,
(http://blog.daum.net/ibakdal/17371594)
두려움과 공포를 똑바로 보고 물리치기 위해서 무서운 곳을 찾아가신 분, 낮을 밤으로 밤을 낮으로
인식하는 어리석음에 속아 사는 자들과 같이가 아니라 그러한 어리석음의 본성을 초월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정복하신 분,,,,
(http://blog.daum.net/ibakdal/17371593)
과연,,, 도대체,,, 이 분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구하여 그렇게 그 길을 가셨던 것일까요?
1] 나는 무엇을 구하여 출가에까지 이르렀는가?
1. 성스럽지 못한 구함을 추구하심
세존께서는
'1)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2)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3)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4)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5)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6)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하는'
이 이상한 삶의 모습에 대해서 통찰하셨던 것을 알 수 잇습니다.
세존께서는 위와 같은 구함을 '성스럽지 못한 구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럴 것 같으면 왜 태어나는가?'에 주목하신 것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양상에서 '슬픔'과 오염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이 '오염'되고 마는 것을 성찰하신 것도 범인을 뛰어남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출구를 찾을 생각은 커녕
더욱 그러하기 마련인 것들을 구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깨닫기 전, 아직 완전한 정등각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셨을 때
당신 역시도 그와 같은 '성스럽지 못한 구함'을 구하셨다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제 생각으로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괴로움의 진리(苦聖
諦)'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한마디로 '취착하는 다섯 무더기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씀은 나를 포함하여 내 앞에 펼쳐지는 일체의 정신·물질현상, 혹은 나와 세상 모두가
실상 '과로움'이라는 '진리'의 천명입니다. 참으로 하늘과 땅을 두 쪽내는 청천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대웅(大熊)의 가르침이십니다.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세존의 가르침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생로병사가 괴로움이 아닌 사람에게는 그것은 즐겁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그 무엇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슬픔 혹은 오염으로 와닿지도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이 아니므로
그후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란 것도 알 필요도
성립될 이유도 없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세존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 미묘하고,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미세하다.'라고, 혹은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수승하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고,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에 대한 성찰
'나는 왜
1) 내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2) 내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3) 내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4) 내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5) 내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6) 내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하는가?'
라고 스스로 성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나는 참으로 '열반'을 구하리라.
연후에 세존께서는
'나는 참으로
1)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지만
태어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2)
자신이 늙기 마련이지만
늙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늙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3)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지만
병들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병듦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4)
자신이 죽기 마련이지만
죽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죽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5)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지만
슬퍼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슬픔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6)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지만
오염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리라.'
라고 하시고 바로 이것을 구하여 출가하시기에 이르십니다.
태어남이 없고, 늙음이 없고, 병듦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이 없고,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기 위해 출가하신 것입니다.
목숨을 내던진 구도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스러운 구함'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십니다.
2] '칼날은 있지만 칼끝은 없는' 가르침들을 만나시다.
세존께서는 출가하신 후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에게서 각각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선정(禪定)을 배우고 증득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고 정진하여 단순한 믿믐으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선정을
'알고, 실현하고, 증득하여 머묾'에 이르고 그 스승들로부터 그것을 인가받고 같이 머물면서
그 교단들을 같이 지도하거나 혹은 스승이 되어 지도해달라고 부탁을 받는 데에 이릅니다.
그러나 출가 후 첫 번째 스승인 이들로부터 떠나십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염오로, 탐욕의 빛바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최상의 지혜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각각 무소유처에, 비상비비상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
라고 성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법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염오하면서 떠나갔다고
설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한 가르침과 증득으로는 그분이 구하셨던
'성스러운 구함' 즉 열반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용맹정진하여 스스로 열반을 증득하시다.
이 부분 세존께서는 당신 구하셨던
자신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슬프고, 오염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에서 채난을 보아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오염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증득했다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경에서 설하셨듯 6년간의 고행이라든가, 구체제주등지에 관한 말씀이라든가, 연기에 대한
것이라든가, 오온을 바로 봄에 대한 것이라든가 혹은 사성제 등에 대한 일체의 말씀이 없이
당신이 구하셨던 '성스러운 구함'을 당신은 '이루었다'고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어떤 때는 더 이상 바닥이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본경을 보면
이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극히 간단하게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4] 사함빠디 범천의 간청
사함빠디 범천의 권청(勸請)으로 알려진 이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오비구에게
법을 처음 설하시기(初轉法輪) 前의 이야기는 심심미묘함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시게 된 계기를 담고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백겁에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과 높고 고귀한 어떤 신(神)과의 대화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를 선포하셨던 바라나시 녹야원에서의 일을 법륜을 처음으로 돌리셨다함이 마땅하겠습니만, 이 사함빠디 범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바라나시로 가실 때 우빠까
유행승을 만났을 때까지의 부처님의 말씀은 법륜을 굴리기 시작하시기 전의 법륜이라는 의미에서 전전법륜(轉前法輪)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세존께서 법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하심
세존께서는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히여
1) 보기 어렵고
2) 깨닫기 어렵고
3) 고요하고
4) 수승하고
5) 사유의 영역을 넘어섰고
6) 미묘하여
7)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십니다.
심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심오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보기 쉽지 않습니다. 깨닫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시끌벅적하고 시끌벅적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승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과 같은 것도 비슷한 것도
아닙니다.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습니다. 숙고하고 사유하고 증득해야 하지만 사유의 소멸까지를 말씀하십니다. 미묘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것을 다시 표방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심심미묘합니다. 지혜없는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눈앞에 두고도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2. 왜 그런지 그 내용(이유)을 말씀하심
사람들은 집착을 좋아하고 기뻐하고 즐기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이런 경지, 즉
1]'이것에게 조건이 됨'인 연기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2]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음,
3] 모든 재생의 근거를 완전히 놓아버림,
4] 갈애의 멸진,
5] 탐욕의 빛바램,
6] 소멸,
7] 열반을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데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곱 가지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부처님의 깨달으신 바 가르치고 설하신 그 내용물입니다.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연기는 부처님 가르침의
심장이요 엔진과도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연기입니다. 형성된 것들임을 보기도 어렵거니와
그것들의 가라앉음은 더욱 어렵습니다. 재생도 어렵고 그 근거도 어렵고 그것을 완전히 놓아버림은
더욱 어렵습니다. 갈애를 보는 것도 어렵고 그 멸진도 어렵습니다. 탐욕을 보기 어렵고 그 빛바램을
증득함도 어렵습니다. 소멸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괴로움이 아닌 바에야 열반을 구하는 자 참으로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성취하고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내가 '어렵게' 증득한 이러한 법을 설할 필요가 잇을까라고 생각하시고는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한 자들이(참으로 맞는 말씀이 아닌가요?) 이 법을 깨닫기란 '실로 어렵다.'
저 '어둠의 무더기'에덮혀 있고 '탐욕에 물든'자들은 보지 못한다라고 보시고
법을 설하시기 보다는 무관심으로 마음이 기울어지시게 됩니다.
여기서 세존께서는 다시 한 번 법의 성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 흐름을 거스르고
2) 미묘하고
3) 심오하고
4) 보기 어렵고
5) 미세한 법'
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예, 흐름을 거스릅니다. 그는 흐르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낱낱이 끊고 해체하고 마음챙겨서
그 이유를 찾아 흐름을 거슬러 갑니다. 심심미묘합니다. 심오합니다. 참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미세합니다. 신도 악마도 detail 안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가르침은 그 정도의
미세함을 훨씬 넘어 갑니다. 너무나 미세하여 마지막으로는 미세함의 대상인 정신·물질이 끊어지고 소멸하고 그에서 벗어납니다. 미세하고 거친 것 자체를 넘어가 버려 신도 악마도 그를 볼 수
없습니다.
3. 예경받아 마땅할 사함빠디 범천
사함빠디 범천은 이때 세상에는 '눈에 때가 덜 낀' 중생들이 있어
'그 법을 이해할 만한 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서라도 법을 설하시라고 간청드립니다.
이어지는 사함빠디 범천의 게송에는 주목할 만한 대목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세존을 칭하여 부르는 표현들이 그것입니다.
'1) 때 없는 분
2) 모든 거울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신 분
3) 슬픔을 제거하신 분
4) 영웅
5)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
6) 대상의 지도자
7) 빚이 없는 분'
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심오한 표현들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세존께 법을 설하시기를 청하면서 '불사(不死)의 문'을 여소서라고 청하는 것도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불사(不死)'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기 보다는 무관심으로 마음을 기울이시는 것을 보고
'세상은 망할 것이고, 세상은 파멸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함빠디 범천께서는 세존이 무엇을 깨달으셨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인지?
사함빠디 범천이 이렇게 세 번을 간청한 끝에 세존께서는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법을 설하시기로 하십니다.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31천의 모든 중생들이 사함빠디 범천의 지혜와 용기를 '사∼두∼'로 칭송해 마땅할
것입니다.
5] 제일 먼저 오비구에게 법을 설하시기 위해 바라나시로 향하심
이렇게 법을 설하시기로 마음 먹으신 후 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해야 할까를 생각하시다가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는 일 주일 전에, 스승이자 동료였던 웃따까 라마뿟따는 지난 밤에 임종한 것을 아시고, 당신께서 용맹정진하실 때 당신을 시봉하면서 많은 도움을 줬던 오비구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시기로 하고 바라나시로 유행하십니다. 참으로 잘 된 보시의 공덕은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세존께서 제일 먼저 누구에게 법을 설해야 할까라고 생각하실 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 수
있을까?'를 기준으로 하신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 나는 누구인가?
세존께서 바라나시로 가시면서 중간에 우빠까라는 유행승을 만나는데 그는 세존께 스승이 누구며
어떤 분의 가르침을 따를고 있느냐고 묻게 되는데, 이에 대한 세존의 게송은 그분 당신께서는
당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계시는 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소중한 법문입니다.
부처님의 부처님 자신에 대한 의미부여이며, 당신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하려 하시는 지에 대한
스스로의 의미부여여서 반드시 새겨야 할 법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1) 일체승자요,
2) 일체지자요,
3) 아라한이고,
4) 위없는 스승이며,
5) 유일한 정등각자이고.
6) 번뇌 다한 나와 같은 자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며,
7) 일체의 악한 법을 정복했기에 나는 승리자이다.'
라고 설하시는 부분입니다.
2. 나는 어떤 일을 하려 하는가?
'나는 까시의 성으로 가서 법의 바퀴[法輪]를 굴리리라.
어두운 이 세상에 불사(不死)의 북을 울릴 것이다.'
혹은 다른 번역에는 '무지(無知)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불사의 북을 울릴 것이다'라고 된 것을
보았습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뒤흔드는 부처님의 사자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시고, 그래서 당신께서 무엇을 하시려 했는지
이보다 더 명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6] 오비구에게 법을 설하시다.
본 경을 보면 세존께서 법을 전하시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같이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에 법을 전하려 하시지만
그들은 새존을 '여래'로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존에 대해서
'그런 행동과 그런 도닦음과 그런 난행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이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대는 이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
하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없는 성취를 하시고,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그 법을 가장 빨리 이해할 만한 자들에게
법을 전하시는 데도 그러한 어려움이 따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 하셔도 전법 혹은
법을 설할 기회를 얻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들 비구를 설득하시는 세존의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세존께서는 시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밀씀하십니다.
'여래는 호사스런 생활을 하지도 용맹정진을 포기하지도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지도 않았다.'가
그것입니다.
2)
세존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 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여래는 아라한이요 바르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이다.'
당신께서는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3)
세존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성취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귀를 기울여라. 불사(不死)는 성취되었다.'
사함빠디 범천이 간청을 할 때도 '불사의 문을 여소서.'라고 간청하는 점,
세존께서는 '감로의 문은 열렸다.'라고 선언하시는 점,
다시 세존께서 우빠까 유행승에게 나는 어두운 이 세상에 '불사의 북'을 울릴 것이라 말씀하시는 점,
오비구를 설득하시면서 '불사는 성취되었다.'라고 선언하시는 점을 볼 때,
불사(不死)란 열반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4)
세존께서는 당신께서 무엇을 위해 법을 설하려 하시는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설하십니다.
'내 이제 그대들에게 가르쳐주리라.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내가 가르친 대로 따라 실천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떠나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1)지금‧여기에서, 2)최상의 지혜로 알고, 3)실현하고, 4)구족하여, 5)머물 것이다.'
라고 설하시는 부분입니다.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모호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검증하고 이루셨으므로
내가 가르친대로만 하면 내가 성취한 것을 그대들도 반드시 성취할 것이니 그대들 스스로 검증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먼 장래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입니다.
5)
세존께서는 마지막까지 설득하십니다. 이렇게 해도 오비구들이 납득하지 앉자 세존께서는
'그대들은 이전에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라고까지 말씀하시어
오비구들을 확신시킬 수 있었음을 말씀하십니다.
본경을 보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처음에「초전법륜경」을 설하신 다음 다섯 번째 되는 날에
「무아경」을 설하셔서 오비구가 아라한인 된 과정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득 초전법륜경에 나오는대로 말씀하시니 꼰단냐 장로가 수다원을
이루고, 그 다음 어느 때 무아경에 나오는대로 설하시니 오비구가 모두 아라한을 이루었다라는
것과 같은 내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비구가 탁발을 나간 사이 나머지 세 비구를 가르치시고, 세 비구가 탁발을 나간 사이
나머지 두 비구를 가르치시고 그헐게 탁발을 해오면 여섯 분이 탁발해 온 것으로 연명을 하셨다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그 가르침의 과정은 상세하고도 집중적인 교육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명을 위해 탁발가는 시간까지도 줄여가며 그 시간에도 가르침은 계속되었던 정도이니 말입니다.
7] (오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가?_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세존께서는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오비구에게 법을 설하시고 그들이 열반을 증득하였음을
즉,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슬픔과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 안은에 이르게 되었음을
설하신 후, 이때까지의 법문을 듣던 비구들에게
1) '다섯 가지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벗어닐 것을 설하십니다.
2) 그리고 '어떻게' 이러힌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는지?
3) 그리고 어떻게 번뇌를 소멸하여 세상에 대한 집착을 초월하는지?
를 설하십니다.
본경은 세존께서는 일단의 비구들에게 당신은 어떤 분인지를 말씀하시는 경입니다.
세존께서는 당신은 열반을 구하였고, 그것을 성취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비구에게 그것을 가르치셨음를 말씀하셨는데, 기실 이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법문을 듣던 일단의 비구들이 가장 듣고 싶어했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비구에게
무엇를 가르치셨길래 오비구들이 열반을 증득하게 되었는지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경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세존께서는 여기에 대해서는 상세한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3]에서는 나는 열반을 증득했다라고만 말씀하시고, 위 6]에서는 오비구를 가르치셔서 그들도 열반을 증득했다라고 말씀하시지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의 마지막에 설하신 저 1)∼3)의 법문은 법문을 듣고 있던 일단의 유학인 비구들에게 어려움을 피하고 최대한 간단하고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를 설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섯 가지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_마라의 영역에서 벗어나라.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1)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
2)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3)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4) 혀로 인식되는 맛들
5)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
에 대해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간에
이들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홀리고 푹 빠져서
재난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에 대한 통찰지가 없이 그것을 즐기면,
'그들은 불행을 만났고 재난을 얻었고 사악한 [마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라고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의 처음은 바로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단속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감각적 욕망을 바로 보고, 오온으로 해체하여 보고, 연기로 꿰뚫어 보아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감각적 욕망에 얽매이지 않은 자는 숲 속 사슴이 숲의 밀림에서 다닐 때
두려움 없이 가고, 두려움 없이 서고, 두려움 없이 앉고, 두려움 없이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말씀
하시는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2.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남_삼매의 증득
세존께서는 이어서 사선(四禪), 사처(四處)의 선정을 구족하여 머물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각각의 선정(禪定)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이러한 것이야말로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
라고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3. 통찰지로 진리를 보아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함_세상에 대한 집착을 초월함
세존께서는 이어서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통찰지로 진리(사성제)를 보아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이 경우 위 사선, 사처의 선정에 더하여
이를 '세상에 대한 집착을 초월했다.'라고 한다고 하시면서 이 법문을 맺으셨습니다.
상수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저는 이렇게 짐작합니다.
그의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은 더 이상이라고 할 수 없이 미세하고 명료합니다.
심지어 그가 숨을 들이쉬지도 내쉬는지도 모를 정도로.
국선도(밝돌법) 수련에 약간의 경험이 있는 저는 제멋대로 이런 상상도 해봅니다.
그는 그 한없이 착한 마음과 더불어, 악한 법들을 정복하였고, 매임없는 지극한 마음의 힘으로
숨과 마음과 몸이 일체가 되어 임독(不死關)이 자개(自開)하여 피부호흡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 경우 수화(水火)가 그를 침범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일체(慾界)에 매인 것이 없이 완전히 일념이 되어 있습니다.
'그'라는 것이 있다면 '그'는 몸이라는 물질(色界)을 초월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은 지극히 미세하여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의 접촉(觸)에서
일어나는 느낌(受)과 인지(想)라는 마음작용조차 끊어지는 데에 이릅니다(想受滅).
그는 비로소 자신과 자신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 혹은 자기 자신의 천명인 세상(오온)을,
그 본질을, 연기의 법을 따라 환히 꿰뚫어 보게 됩니다. 실상을 비로소 '있는 그대로' 봅니다.
'오직 괴로움이 일어나고, 오직 괴로움이 사라질 뿐'임을.
그는 이 모든 것의 실상을 꿰뚫어 알게 되었기에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거머쥐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압니다. .
낱낱이 풀어서 벗어버린(解脫) 것입니다.
그런 그는 그에게도 어떤 세상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하여 열반에 이르지만 열반을 증득한 그 자(者)는 이미 없습니다.
있다면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무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세존에 관한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비구들에게
1] 당신은 무엇을 구하려 하셨는지? 어떻게 해서 출가에 이르게 되신 것인지?
2] 출가하신 후에는 어떤 가르침들을 쫓으시고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3] 그래서 구하려 하신 것을 얻으신 것인지?
4] 구하려 하신 것을 얻으신 후 어떤 계기로 법을 전하게 되신 것인지?
5] 당신은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려하신 것인지?
6] 그래서 처음 법륜을 굴리신 일
7] 당신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를 상세하고 알기 쉽게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참으로 상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의미와 표현을 잘 구족하여 보고도 그 뜻을 알 수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세존의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존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땋게 해야할 지를 몰라서 닦지 않았다는 말은
적어도 제게 있어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누구신지 몰라서, 무슨 말씀을 하신지
몰라서 시작한 이 경전 공부를 통해 저는 흔들림이 없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단순히 좋아서
혹은 믿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검증을 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자가의 것이 된 것은 별개의 것임을 저는 잘 압니다.
길을 아는 자와 길을 걷는 자는 다릅니다.
우물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과 그 우물까지 가서 물을 퍼서 마신 자는 다른 것입니다.
계를 수지하고, 모든 악한 법들을 정복하고,
선정을 증득하고, 지혜로써 실로 이 모든 것을 바로 보고 꿰뚫어 아는 것은 그만의 일입니다.
온전히 저의 선택이요 몫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곻덕을
저는 세 분의 천신에게 회향합니다.
이 법다운 회향을 받아주시기를,,,,
사∼두∼ 사∼두∼ 사∼두∼
2016.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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