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사유 경(M19)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숲의 아니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제가 니까야를 사경하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와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그분 세존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서
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나 혹은 각자 다른 전승 혹은 종파의 교설이 섞이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그분이 하신 말씀을 대하는 것만큼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제 생각은
어쩌면 이미 닦아 놓은 반듯한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그분은 무엇을 가르치셨고, 거기에 기반하여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 제 스스로
파지(把指)하고 확신하고자 했던 길에 대해서 후회가 없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과연 그러하였고, 과연 그분은 그런 분이셨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완간된 4부 니까야와
법구경(Dhammapada), 숫타니빠따 정도를 다 사경하고 꿰뚫기 전까지 저의 이 길은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사유 경을 대하면서 느끼는 점은 역시 그분은 당신의 깨달음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인지
그 경위를 상세하기 밝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숨기는 것이 없으십니다.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이 한 장면 한 장면을 꺼내 놓고 한 슬라이드씩 남김없이 설하시는 것입니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훌륭하시고, 모두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고 계셔서,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혹은 이 부분은 이런 점에서 약간 미흡한데라는 혹시나 하는 생각은 가르침을 대할 때마다 아예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거짓이 없는 그분께 두 손 높이 모아 예경합니다.
본경 두 가지 사유 경은 얼핏 경의 이름이나 초반의 도입부를 보면 그야말로 사유를 두 가지로 나눈
도식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사람은 생각하고 살기 마련인 것인데, 세존께서는 바로 그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생각하는 법'에 대해서 설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하는 법으로부터
출발하여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그 다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법이 어떻게
해서 바른 깨달음으로 이어지는지 그 프로세스의 상세를 당신께서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낱낱이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스님의 주석과 같이 본경은 필정도에서 두 번째인 '바른 사유'(正思惟)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비민(悲愍)의 스승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일으킨 생각(vitakka)의 결과를 숙고하여 제어하다.
세존께서는 당신께서 보살이었을 적에
감각적 욕망, 악의, 해코지의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은 나, 다른 사람, 둘 다를 고통에 빠뜨리게 됨을
또한 그러한 생각은 통찰지를 소멸시키고, 곤혹스럽게 하고,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통찰하고
숙고함으로써 그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제거하고 없앨 수 있었음을 말씀하시고,
출리, 악의 없음, 해코지 않음의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은 나, 다른 사람, 둘 다를 고통에 빠뜨리게 하지 않음을
또한 그러한 생각은 통찰지를 증장시키고, 곤혹스럽지 않게 하고, 열반에 도움이 됨을 통찰하고
그러한 생각들이야말로 그로 인한 어떤 두려움도 생기게 하지 않음을 꿰뚫어 아시되,
생각에 너무 천착해서는 몸이 피곤해지고 그로 인해 마음이 혼란해지고 삼매에서 멀어지게 되므로
해로운 법을 떨쳐버리고 의혹과 의심을 끊어내신 뒤에는 마음을 확고하게 하고, 가라 앉히고, 통일
하여 삼매에 들어 머물렀음을 말씀하십니다.
세존께서 이러한 두 가지 구분의 생각들에 대해서
해로운 법들(不善法)들에 대해서는 1) 재난과 2) 비천함과 3) 더러움을 보았고,
유익한 법들(善法)들에 대해서는 1) 출리와 2) 공덕과 3) 깨끗함을 보았다라고 설하시는 부분은
과연 '생각'에 대한 그분의 고찰의 끝이 어디인지, 얼마나 단호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혼란이나 혼선이나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그런 일은 없는 것입니다.
2. 거듭되는 생각은 그 사람의 마음의 성향이 된다.
세존께서는 어떤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고찰하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마음의 성향이 된다고
천명하십니다. 이러한 세존의 천명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합니다. 실제 그렇기 때문입니다.
유익한 법에 대한 확신으로 희열과 행복이 있다가도, 감각적 욕망이나 악의 혹은 해코지의 생각이
일어나 골몰하게 되면 마음은 너무나 쉽게 그곳으로 매몰되는 맙니다.
반대로 감각적 욕망이나 악의 혹은 해코지의 생각에 골몰하다가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혹은
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잠시 모아놓은 실체가 없는 대상에 이 무슨 어리석은 생각인가, 혹은 이러한
생각들이 결국 나 자신에게 평온과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경험칙에 비추어 보는 데 이르게 되면,
비로소 그런 생각에서 빠져 나와 다시 법다운 희열과 행복에 드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우리가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된 것이고, 존재의 구성요소인 오온이라는 방식으로 모아놓은 것이라고 본디면, 결국 '나'란 그것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나의 생각' 혹은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이 '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3. 수행과 증득은 어떤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은 우리에게 '수행'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삼매 이전에, 선정 이전에, 위빳사나 이전에, 여섯 혹은 여덞가지 신통 이전에, 혹은 삼명(三明)
이전에 그러한 증득을 이루게 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설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떤 수행에 골몰한다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다만
기본이나 전체에 데한 파지가 없는 것이기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은 면할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아래와 같이 설하셨음을 본경을 통해 일 수 있습니다.
1)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삼매(心一傾)을 증득
유익하거나 해로운 생각들의 결과를 숙고하여 마침내 해로운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의혹과 의심이 없게되면 그는 마치 추수가 끝난 뒤 소치는 사람과 같이 소를 회초리로 때리고
제지하고 단속할 이유가 없어져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면서 '여기 소떼가 있구나'라고
알고 보기만 하면 되듯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꿰둟어 보면서 '이런 마음의 현상들(法)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만 하면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감각적 욕망을 비롯한 해로운 법들의 족쇄에 다시는 묶이는 일 없고 더 이상 검증할 일도
없는 그의 마음은 비로소
"1)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2)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고,
3) 몸이 경안하여 교란하지 않고,
4)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이 되었다."
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의 마음이 소위 삼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계(戒)를 수지하지 못하는 자가, 마음의 오염원들과 장애들과 족쇄들을 끊어버리지 못한 자의 마음이
조복되어 한 끝에 일념이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거되지 않으면 그것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그러한 마음의 지경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2.)선정(禪定, jhana)의 증득
위와 같은 자는 초선∼제4선에 이르는 네 가지 선정 즉, 바른 삼매(正定)을 증득합니다.
3) 명지((明知, vijja)의 증득
위와 같은 자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과 같은 인간의 한계를 넘은 지혜를 증득합니다.
이와 같은 명지의 증득을 말씀하실 때 항상
그의 마음이
1) 집중되고,
2) 청정하고, 3) 깨끗하고, 4) 흠이 없고, 5) 오염원이 사라지고,
6) 부드럽고, 7) 활발발하고,
9) 안정되고, 10)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마음을 그러한 지혜로 향하게 하여 명지를 증득한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반복되는 가르침은 수식이 아니라 분명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의 마음이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그러한 신통이 가능하겠지만
일시적으로 그랬다하더라도 나중에 그 마음이 확고하지 못하여 그러한 원인과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된디면 그러한 명치를 일으킬 수 없게 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과연 사람의 마음이란 어떠한 것이길래 이러한 조화가 가능한 것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4. 사슴의 무리의 비유와 결언
1] 깊은 숲 속의 큰 호수는 감각적 욕망을
2] 큰 사슴의 무리는 중생들을
3] 그들의 이로움을,복리를, 안전을 바라지 않는 어떤 사람이란 마라를
4] 나쁜 길이란 여덟 가지 그릇된 일 즉
1) 그릇된 견해, 2) 그릇된 사유, 3) 그릇된 말, 4) 그릇된 행위, 5) 그릇된 생계,
6) 그릇된 정진, 7) 그릇된 마음챙김, 8) 그릇된 삼매를
5] 유인하기 위한 미끼란 향락과 탐욕을 두고 한 말이다.
6] 꼭두각시란 무명을
7] 그들의 이로움을, 복리를, 안전을 바라는 어떤 사람이란 여래·아라한·정등각자를
8] 평화롭고 안전하고 기쁨을 주는 길은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를 두고 한 말이니, 즉
1) 바른 견해, 2) 바른 사유,3) 바른 말, 4) 바른 행위, 5) 바른 생계, 6) 바른 정진,
7) 바른 마음챙김, 8) 바른 삼매를
각각 비유하셨습니다. 참으로 눈 멀고 귀먹을 가르침이 아닐 수 없읍니다.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린 거룩하신 그분께 예경합니다.
이어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1) 평화롭고 안전하고 기쁨을 주는 길을 열었고,
2) 나쁜 길(八邪道)을 막아버렸고
3) 미끼(향락과 탐욕)를 없앴고
4) 꼭두각시(無明)를 제거했다."
라고 '당신께서는 과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천명.
그리고
"비구들이여,
항상 제자들의 이익을 기원하며 제자들을 연민하는 스승이 연민으로 해야 할 바를
나는 연민으로 했다.
비구들이여,
여기 나무 밑이 있다.
여기 빈 집이 있다.
참선을 하라.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라고 제자들을 연민하시고 교계하시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저 할 말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이같이 상세한 가르침을 주신 그분께 두 손 높이 모아 예경합니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이와 같이 받아 지녔습니다.
이 두 가지 사유 경을 사경한 공덕으로
행복하고 위험없는 열반으로 장애없이 도착하기를
수 많은 생 윤회할 때 고통 위험 원수들과 나쁜 것들 안 만나고
모든 행복 축복들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오늘 지금 행한 공덕 몫을
부모 스승 친척 친구 자신보호
천신들을 시작으로 삼십일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
닙바나 성취하기 바라면서 회향합니다.
또한 거룩하신 승가에
이 방과 인근에 거하시는 모든 천신들과 비인간들,
기흥의 보라산과 장유 반룡산과 지리산 실상사를 지키는 도덕 높으신 모든 천신들과 비인간들,
곤경에 처했을 때 떠나지 않고 도움을 주신 진실하신 친구와 도반들께서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장애없이 닙바나에 이르시기를 기원하면서,,,,
회향합니다.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201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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