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15. 쾌락주의와 불교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3. 11. 19:28

 

쾌락주의란 무엇인가.

 

쾌락을 인간 행위의 궁극 목적이자 도덕의 기준으로 삼는 사상적 경향을 가리킨다.

불교가 출현할 당시 일부 사상가들은 잘 먹고 잘 노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짜르와까(Cārvāka) 혹은 로까야따(Lokāyata) 등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은

현상계 너머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고서

감각적 경험만을 앎의 유일한 원천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죽고 이후 다른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날 목적으로 현재의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신이라든가, 영혼, 천국과 지옥 따위는

바라문교의 사제들이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해 고안해 낸 거짓에 불과하다.

 

 


쾌락주의에서는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은 허구로서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상을 구성하는 유일한 실재는 물질이며, 물질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이 발생한다.

 

발효된 누룩으로부터 술의 취기가 나오는 것과 같이

의식 또한 육체의 조화에 의해 발생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의식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우주의 창조자 혹은 유지자로 간주하지만

신은 지각되거나 경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신은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경험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쾌락주의자들은 죽음을 절대적 소멸로 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죽기 이전에 최대한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고행을 하거나 금욕을 하는 것은 불필요한 자기 학대이자 망상의 소치라고 가르쳤다.

또한 재물을 모으는 행위 역시 재물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쾌락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고통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가져오는 행위는 선이고, 즐거움보다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악으로 규정하였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가급적 모든 고통을 피하거나 혹은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최대한의 쾌락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쾌락주의는 당시 인도 사회를 지배했던 바라문교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경험 세계를 초월한 무언가를 가르치는 모든 유형의 교리들에 대해 맞섰다.

예컨대 브라흐만과 아뜨만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교리는 현실의 부조리와 불공평을 은폐하기 위해 바라문 사제들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비바라문 계급에게 자신을 둘러 싼 세계의 실상을 공정히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더욱이 일부 세련된 쾌락주의자들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이웃과 나눌 필요성도 인정했다.

 

 

 


따라서 쾌락주의에 대해 무작정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교양 있는 쾌락주의의 신봉자들은 자제력과 분별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세련된 취미와 순수한 우정 따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철학적 사고의 진전과 더불어 출현한 자유분방한 진보적 지식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쾌락주의는 불교의 출현에도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바라문교의 계급제도에 맞서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일깨운 붓다의 행적은

일정 부분 쾌락주의와 입장을 공유한다. 또한 현상계를 넘어선 궁극적 실재에 대한 부정 역시 무아설(無我說)에 대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쾌락주의는 감각적 경험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자체적인 교리적 모순에 봉착하고 만다. 예컨대 “경험 가능한 지식만이 타당하다”는 스스로의 주장 자체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는 난점이 지적된다.

 

또한 쾌락에 대한 의존은 권태와 허무의 감정만을 낳을 뿐이고,

더욱 강력한 새로운 쾌락을 부추긴다는 자각과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붓다는 쾌락에 몰두하는 짓을 천하고 범속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쾌락의 추구가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하여 쾌락주의도 버리고 고행주의도 떠한 중도(中道)로써 실천해 나갈 것을 권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