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12. 제식주의와 불교 - 세속적 욕망 좇는 의식으로서 제사 vs 참된 제사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3. 11. 07:51

 

제사란 불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불교가 출현할 무렵 고대 바라문교는 인도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라문교의 실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의례이다.

제사는 신(神) 혹은 초월적 존재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리거나 은총을 구하고자 행해졌다.

 

당시 사람들은 제사가 자연계의 운행과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엄격한 절차의 제사를 인간의 운명이라든가 길흉화복에 연결시켰다.

제사의 실천은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담당하는 바라문은 최고 지배계급의 지위를 누렸다.

 

 


제식주의란 제사에 대해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경향을 가리킨다.

바라문들은 일정한 절차에 따라 의례를 행하면서 그것이 반드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제사는

 

미래의 삶에서 원하는 열매를 싹트게 하는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고는 제사를 통해 우주의 흐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게 된다.

바라문교의 성전인 『브라흐마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인간은 물론 신까지도 제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존재는 제사에 의해 현재의 위치를 얻는다.”

 

 


이러한 제식주의는 차츰 인격신(人格神)에 대한 냉담한 태도로 발전하게 된다.

원래 제사란 신에 대한 귀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제사만 잘 지내면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들이

점점 우세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초월적인 권능으로 인간들에게 복과 은혜를 베풀던 신은 차츰 잊혀지고,

제사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신 관념이 고착화된다.

 인간 위에 군림하던 신이 오히려 인간의 아래에 놓이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제식주의에서는 제사야말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고의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붓다는 이와 같은 제식주의가 한창 유행하던 무렵에 등장했다.

인도철학의 여정에서 제식주의적 사고가 반드시 부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식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신들의 영역에 가담하여 우주의 운행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신의 지배 아래에 종속되어 있던 존재에서 신을 부릴 수 있는 존재로 그 위치가 격상된다.

 더불어 제사의 실천이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관념은 인과율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정착시켰다. 이것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다”는 업 개념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제식주의의 제사는 오로지 세속적인 욕구를 성취하려는 목적에서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을 내면의 탐욕이라는 새로운 굴레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라문교의 제식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내면에 대한 성찰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그리하여 신성해야 할 종교적 의식마저 세속적인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제식주의는 난해한 절차들로 위장된 교활한 바라문 사제들의 생활 수단으로 전락한다.

 

 

 


‘구라단두경’에서 붓다는 참된 제사에 관해 가르친다.

 

그에 따르면 바른 제사란 바른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각자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 품행이 방정하며,

베푸는 마음 등을 갖추게 될 때 비로소 올바른 제사가 가능하다고 이른다.

또한 붓다는 덜 번거로우면서도 더 많은 과보와 이익을 주는 새로운 제사법을 소개한다.


승가를 위한 거처를 보시하고, 삼보에 귀의하며,

계·정·혜를 닦아 일체의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을 실현하는 바로 그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제사보다 더 높고 수승한 다른 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그는 제사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혁신적인 해석을 통해 올바른 종교 생활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제사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례의 하나로 자리 잡은 듯하다.

제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붓다의 가르침처럼

그것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