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16. 숙명론과 불교 - 업에 따른 운명 비판…노력에 의한 변화 강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3. 11. 19:36

 

 

 

불교는 숙명론인가.

 

불교에 대한 초보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숙명론이 아닐까 싶다.

“뿌린 대로 거둔다”, “전생의 업보다”, “팔자는 못 속인다”는 따위의 말들이 이러한 오해를 부추긴다.

 

 


그러나 불교는 숙명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숙명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에 주력한다.

불교의 궁극 목적인 해탈과 열반은 바로 그것을 벗어날 때 얻어지는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이다.

 

따라서 숙명론은 초기불교 이래로 극복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앞서의 속담들은 더 나은 삶을 개척하기 위해 주변의 환경이라든가 태생에 따른 성향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이해해야 한다.

 

 

 


인도철학의 무대에서 숙명론을 표방했던 대표적인 학파로

아지비까(ājīvika) 혹은 사명외도(邪命外道)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 자체가 결정된 법칙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누군가가 착한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착한 행위를 하도록 정해진 운명에 따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착한 행위에 대해 특별히 칭찬하거나 기뻐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나쁜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아지비까는 모든 행위에 대해

좋다거나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지비까에 의하면 운명(niyati)이라든가 천성(bhāva)은 현재의 자신이 있게 된 이유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고 자기만으로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도 운명이다.

 따라서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지비까는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이와 같은 숙명론적 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사주나 관상 따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숙명론적 사고의 잔재를 보게 된다.

 

그런데 아지비까는 자유의지를 부정했지만 자유의 가능성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자연적인 과정을 겪다 보면

언젠가는 자유롭고 청정한 상태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것을 산꼭대기에서 던져진 실타래에 비유한다.

정상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한 실타래는 차츰 작아지면서 그 크기만큼 아래쪽으로 죽 늘어진다.


그러다가 완전히 풀린 상태가 되면 멈춰 선다.

다른 어떤 노력이나 외부적인 개입도 실의 길이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이렇듯이 모든 사물은 정해진 역할대로 움직이다가 그것이 다하면 멈춘다.

바로 이것이 아지비까가 생각했던 부자유한 삶으로부터의 벗어남 즉 해탈이었다.

 

 

 


아지비까의 숙명론은 인간의 삶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요인들에 대한

경각심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의의가 인정된다.

 

대부분의 인간은 타고난 천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주변의 환경으로부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아지비까는 우리가 이러한 요인들에 대해 전적으로 무기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주어진 실타래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얼마든지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점에서 아지비까의 숙명론은 그 한계를 여실히 노출한다.

 

 

 

 

붓다는 아지비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대들이여, 만일 그렇다면

 

 생명을 죽이더라도 이전에 정해진 원인에 의해서일 것이고,

 도둑질을 하더라도 이전에 정해진 원인에 의해서일 것이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이전에 정해진 원인에 의해서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전에 정해진다고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는

  도무지 의욕이나 열의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하고 확고하게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