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니까야(長部)/D6.마할리경-이 몸이 자아인가?

後記: 마할리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2. 2. 25. 15:11

 

마할리경은

 

한 때 세존께서 웨살리의 큰 숲에 있는 중각강당에 머무실 때

마할리(릿차위의 웃탓다) 바라문이 그 무리들과 함께

그리고 그 무렵 어떤 일로 웨살리에 와 있던 꼬살라의 바라문 전령들과 마가다의 바라문 전령들이

세존을 친견하기를 청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마할리는 3년을 비구로 있다가 며칠 전 횐속한 수낙캇따의 예를 들어

삼매에 들어 천상의 모습은 보았지만 천상의 소리를 듣지는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세존께 여쭙니다.

 

세존께서는 수낙캇따가 천상의 모습은 보지만, 소리는 듣지 못하는

그런 원인과 조건을 갖추어서, 즉 그러한 삼매에 들었기 때문에 때문에  그런 것이고

천상의 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며,

보기도 보고 듣기도 듣는 양면 삼매를 닦은 자는 천상의 모습도 보고 소리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할리는 세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는 비구들이

이러한 삼매의 증득을  위해서 수행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삼매의 증득을 위해서 세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수승한 법, 4 가지 성자(聖者)의 과위 즉, 

1) 예류자(豫流者), 2) 일래자(一來者), 3) 불환자(不還者), 4) 아라한.(阿羅漢) 

의 도과(道果)를 실현하기 위하여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천명하십니다.

  

마할리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도과를 이루게 되는지 세존께 묻습니다.

 

세존께서는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 八正道)가

바로 그 도(道)요 도닦음이라고 천명하십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마할리가 청하여 묻지 않았음에도

한 때 유행승 만딧사와 목발우를 지닌 자의 제자인 잘리야라는 두 유행승이 세존을 찾아와

'자아는 이 몸입니까?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릅니까?'라고 물었던 이야기를 마할리에게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만딧사와 잘리야의 질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1) 43가지의 계를 구족

2)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단속의 구족

3) 마음챙기고 알아차림

4) 필수품만으로 만족함

5)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함

6)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벗어남

 

을 닦고 구족한 자가

 

1) 초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2) 제2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3)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4)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각각 그러한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이 타당한가라고

두 유행승에게 물어 보십니다.

 

두 유행승은 그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답합니다.

 

세존께서는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다시 세존께서는

 

1) 이 알음알이가 이 몸에 묶여있음을 꿰뚫어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

2)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들어내는 신통

3) 신통변화의 지혜(神足通)

4) 신성한 귀의 지혜(天耳通)

5) 다른 중생과 다른 인간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

6)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7)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

 

을 구족하여 머무는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이 타당한가라고

두 유행승에게 물어보십니다.

 

두 유행승은 그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답합니다.

 

세존께서는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그러나  

8)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에 이르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아는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이 타당한가라고

두 유행승에게 물어 보십니다.

 

두 유행승은 여기에 이르러서

그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적당하지 않다고 답합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세존께서는 유행승 만딧사와 목발우를 지닌 자의 제자 잘리야에게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마할리(릿차위의 웃탓다)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라고 하면서

이 경은 어찌보면 갑자기 싱겁게 끝이 나는 것입니다.

 

 

마할리경은 청정범행의 목적이 삼매(초선∼사선)의 증득이 아니며,

그 목적은 사쌍팔배(四雙八輩)로 일컬어지는

예류자(수다원, 소타판나 Sotaapanna), 사다함(사다함, 사카다가미 Sakadaagaami),

불환자(아나함, 아나가미 Anaagaami), 아라한(Arahat)의 道와 果를 실현하고 성취하기 위함임을

천명하신다는 점에서,

 

또한 그 방법은 八支聖道(八正道)임을 천명하신다는 점에서 큰 뜻이 있습니다.

 

 

 

의문은 이것입니다.

왜 세존께서는 마할리에게 마할리가 청하지도 않은 질문 즉,

'자아는 이 몸입니까?, 아니면 자아는 이 몸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꺼내서

마할리에게 설하셨는가입니다.

 

세존께서는 마할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에게 적절한 설법을 하신 것이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행승 만딧사와 목발우를 지닌 자의 제자 잘리야는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를 구족한 비구 즉, 아라한에 이르러서야 그 前과는 달리

그와 같은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적당하지 않습니다라고 세존께 답합니다.


두 유행승에게 처음에는 '자아가 이 몸이다.'라는 견해도, '자아는 이 몸이 아니다.'라는 견해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아는 이 몸이다.'라는 견해도

'자아가 이 몸이 아니다.'라는 견해도 타당하지 않은 것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할리는 무엇을 깨달았길래 마음이 흡족해져서 크게 기뻐한 것일까요? 



 

두 유행승이 세존께서 해탈·열반을 설하신 마지막에 이르러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대답하였을 때도

세존께서는 두 유행승에게 '잘 대답하였도다.'라고 하시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그 前과 같이 설하십니다.

  

요지는 그와 같은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적당하지 않다'라는 것이고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디가니까야 제9경 뽓타빠다경에서

 

 "세존이시여, 그러면

  인식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

 

라고 뽓타빠다가 세존께 여쭈었을 때, 세존께서는


 

  "뽓타빠다여,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두고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

 

라고 되묻고 계십니다.



'자아'라는 것을 정의하기 이전에 '자아는 이 몸이다.' 혹은 '자아는 이 몸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해탈·열반에 이르러 존재를 벗어버린 자에게 '자아'란 그 인습적인

표현이 '자아'일 뿐이어서, 그 어디에도 '자아'라 할 것이 없는 것이 실상이요 세존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이 몸이다.' 혹은 '자아는 이 몸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자아'라는 인습적인 표현의

범주에서는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할 수도 있는 주장이요 견해입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그러한 주장이요 견해는 그러한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혹은 존재를 벗어나 버렸으므로

'있다, 없다.함도 허망한 일이거니와, 하물며 '자아는 이 몸이다.' 혹은 '자아는 이 몸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나 견해는 아예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마할리는 이 세존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기뻐한 것입니다.

     

        


청정범행의 목적, 괴로움의 끝을 이루는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선정(禪定)에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첫 번째 반드시 '내가 있다.' 혹은 '나는 없다.'라는 유신견(有身見)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류자(수다원, 소타판나 Sotaapanna)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이치에 맞는) 사유에 의해서

     세 가지 족쇄(分結)가 사라진다.

 

     1) 오온을 영원한 자아라고 보는 자아에 대한 환상(有身見),

     2) 회의적인 의심(),

     3) 단순한 의례나 금기에 대한 집착(戒禁取見)"


                                                                            『中部』 2 『一切漏經』 MN I, 9.

 

  
   " 이러한 세 가지 족쇄가 사라져버린 비구들을  

     수다원(소타판나 Sotaapanna, 豫流者) - 

     성인의 흐름에 들어선 이, 파멸되지 않는 이, 결정된 이, 깨달음에 이르는 이라고 한다."


                                                                            『中部』 22 『蛇喩經』 MN I, 141-2.

  

 

마할리가 세존께

청정범행의 목적인 사향사과(四向四果) 혹은 사쌍팔배(四雙八輩)의 도과(道果)를 여쭈었고,

그 방법인 팔정도(八支聖道,八正道)를 여쭌 이상,

  

세존께서 마할리에게

도과를 이루기 위한 그 첫 단추인  '나' 혹은 '자아(自我)'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마할리가 부딪힐 첫 관문인 '유신견(有身見)'을 타파할 수 있도록  

유행승 만딧사와 목발우를 지닌 자의 제자 잘리야의 예를 들어 발제하고 가르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습니다. 

  

   "사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법들을 모르고

    사유할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모르는 사람은,

 

    사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법들을 사유하지 않고,

    사유할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사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를 한다.

   '나는 과거생(前生)에 존재했었을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었을까?

    나는 과거생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생에 어떻게 존재했었을까?

    나는 과거생에 무엇이었고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나는 미래생(來生)에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미래생에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

    나는 미래생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나는 미래생에 어떻게 존재하며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또한 바로 현재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도대체 나는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존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中部』 2,『一切漏經』 MN I, 7.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저는

내가 '나'라고 할 때마다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두고 '나'라고 하는가?"라고.

  

 

이와 같이 받아지녔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

  

201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