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붓다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

냐나틸로카 스님 이야기 (1)

이르머꼬어리서근 2012. 2. 19. 17:25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불교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 경전의 역경과 출판을 통해서였다.

불교인들의 목숨을 건 전법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말로 번역된 서적을 통해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명기가 지나자 서구 불교에 새로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시아 불교국가, 그리고 불교인들과의 접촉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서구 불교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서구 불교의 첫 장을 열었던 저명한 불교인들은 아시아의 불교국가를 찾아 직접 불교 수행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학문과 수행을 겸비한 훌륭한 스승으로 불모지 서구에 불교의 싹을 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남방 불교국가인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이었다.

특히 태국은 미얀마 혁명으로 세계불교평의회(WBF)의 본부가

미얀마의 랑군에서 태국의 방콕으로 불가피하게 이전하게 된 후부터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됐다.

 

 


가톨릭 학교서 바이올린 연주

서구 불교를 이야기 할 때 1901년은 상당히 중요한 날이다.

유럽인이 최초로 사미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테이프를 끊은 인물은 바로 영국 출신 화학자인 알란 배네트 맥그레고르(Allan Bennett Mcgregor, 1872-1923)

그는 다음해인 1902년 미얀마 아캅(Akyab)에서 비구계를 받고,

유럽을 통 털어 최초의 비구가 됐다. 이때 그가 받은 법명은 아난다 메떼(Ananda Metteya)였다.

2년 후인, 1903년 9월, 이런 드문 예가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독일인 안톤 궤트(Anton W. F. Gueth). 가톨릭 학교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던

그가 미얀마에서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고 정식 불교 수행자가 된 것이다.

그의 1878년 독일의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지만 입적은 1957년 스리랑카에서 맞이했다.

어쩌면 그의 전생의 고향은 바로 스리랑카였을 것이다.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21세 한창 나이였던 1899년의 일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인간을 해탈시켜 신과 합일한다는 신지학 강의를 듣고 불교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신지학 수학 후 불교에 입문

그러나 그의 이런 변화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프리카로 선교활동을 떠나겠다는 꿈을 품었을 만큼 종교적이었던 그에게 불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또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 공부를 하며 수 차례 아시아 지역으로 연주회를 다녀온 것을 기회는 그는 적지 않게 불교를 접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의 출가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이뤄졌다. 1902년 그는 평생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았던 음악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불교 공부를 목표로 꿈을 안고 인도로 떠났다.

그러나 인도의 불교는 이미 사그라들어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친 것은 스리랑카에서였다.

스리랑카를 방문한 그는 유럽 최초의 비구인 영국 출신의 스님인 아난다 메떼야의 소식을 접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얀마로 떠났다.

그리로 마침내 1904년 2월 비구계를 수지하고 독일인으로는 처음으로 불교 수행자가 됐다.

그의 법명은 냐나틸로카(Nyanatiloka). '세 세계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팔리어를 열심히 공부했으며,

1905년에는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된 불경의 그의 손에 의해 출판됐다.

그리고 1906년에는 유명한 『부처님이 말씀』이 출판됐다.

그의 육성을 담은 첫 번째 출판물이었다. 이 책은 영국인 제자 실라카라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고, 이어서 러시아에서도 번역돼 출판됐다.

 

 


그는 1910년 유럽에 불교 사원을 건립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다시 돌아왔다.

9년만의 귀향이었다. 그첫 번째 전법지로 정했던 곳은 스위스 남부 루가노 지방.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스위스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다.

유럽에서의 불교 사원 건립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그는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 불교도들의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는 수행처가 마련됐는데 바로 뽈가스두바(Polgasduwa) 섬이다.

 

는 이곳을 섬 토굴(Island Hermitage)이라 명명했는데, 15개의 수행 토굴을 갖추고 있으며,

프랑스 엔지니어 베르기어(R.A. Bergier)가 기증한 것이다. 베르기어는 그 후에도 인접한 작은 섬인 메티두바도 보시했다.

평화스럽게 수행에 전념하고 후학을 키우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14년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한 것이다. 인도양 해변에 가까운 도단두바 마을 부근에 15채의 스님용 토굴이 차근차근 들어서 있던 평화스러운 섬에 암운이 깔렸다.

 

 



인도양 해변에 스님용 토굴 조성

전쟁으로 인해 뽈가스투바에서 생활하던 독일인들이 모두 철조망에 갇히게 됐고,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로 강제 송환돼 전쟁 포로의 고통을 겪게 됐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그에게 고통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시련은 있었지만, 그는 남방 불교와 전혀 다른 불교 체계를 갖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이다.

수행자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에게 다행히 중립국으로의 여행이 허용됐다.

그는 1916년 중국으로 가서 중경의 한 절에 머물면서 앙윳따라 니까야의 번역을 계속했다.

그러나 얼마있지 않아 중국도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그는 한카우에서 반() 포로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역경 작업에 매진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그는 일본의 저명한 교학자 와타나베 교수를 만나게 됐고

다이쇼 대학교에서 팔리 경전 강의를 맡게 됐다. 그 후 그는 일본에서 수년간 강의와 역경 작업을 계속하면서 정진에 몰두했다.

 

 


1957년 가을 실론서 입적

1926년 그는 일본 생활을 끝내고 태국을 거쳐 다시 실론으로 돌아갔다. 12년 간 비웠던 토굴에 비로소 다시 귀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이곳에서 수행과 역경작업을 이어 갔으나 그리 오래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39년 유럽에서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스런 섬'의 수행처를 뒤로 한 채 또 다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히말라야 기슭의 데하라 둔에서 24명의 독일인,

그러니까 냐나틸로카, 그의 수제자 냐나뽀니카(Nyanaponika), 라마 고빈다(Lama Govinda), 달라이 라마의 가정교사로 7년 간이나 티베트에 살았던 하인리히 하레(Heinrich Harrer) 등이 함께 살게 된.

이번에는 성직자로서는 인정되지 않았으나 강제 노동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들과 함께 하면서 냐나틸로카는 역경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실론의 세나나야케 수상이 1946년 그와 제자 모두를 폴가스두바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냐나틸로카 스님은 실론 시민권자로, 1957년 가을 입적했다. 실론 정부는 국장으로 성대한 예를 표했다.


1979년 그의 제자 냐나뽀니카와 뷔예세케라 교수(prof. Wijesekera)는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냐나틸로카 100년사』를 발간했다. 그가 설립한 '섬 토굴'은 수 십 년 동안 계속 독일과 유럽출신 불교도들의 성지가 됐다. 지금도 서구인들에게 불교 수행의 좋은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스위스인 파울 뷔르츠(Paul Wirz)라는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인접한 파라뿌두바섬에 살며

1984년 비구니 선원을 설립했다. 섬 3개가 유럽인들의 불교 수행처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동호 박사(발틱연구소 소장)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view.html?no=5668§ion=1

 

      2004.08.10 16:00 입력이동호 박사 발행호수 : 683 호 / 발행일 : 2002-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