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사리뿟따 이야기

17.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의 사리에 관한 기록

이르머꼬어리서근 2011. 7. 18. 11:53

 

 

보팔의 산치 언덕에는 10기()의 사리탑이 있는데

그것은 아직까지 인도에 남아있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탑들은 그 축조 형태나 조각 양식으로 보아 불교 예술 전성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인정되며

탑의 이곳 저곳에 쓰여진 글자로 미루어 그 시기는

아쇼카 왕 시대인 기원전 삼 세기 중반쯤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중에는 보존상태가 좋은 것도 있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흙무더기나 돌무더기로 되어버린 것도 있다.

 

 

 

1851년에 알렉산더 커닝햄 경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의 성스러운 유골을 발굴한 것은

바로 이들 탑 중의 하나인 그 유명한 제 삼 사리탑에서였다.

 

비슷한 시기에 산치에서 10km쯤 떨어진 사타다라에 있는 사리탑에서도

이 두 훌륭한 아라한의 사리가 더 발굴되었다.

 

 

 

커닝햄은 산치 언덕의 사리탑 한가운데에 버팀목을 박다가

길이 150cm가 넘는 넓은 석판이 남북으로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석판 밑에는 회색 사암으로 된 두 개의 상자가 있었는데

그 뚜껑에 각각 브라흐미 문자로 된 짧은 명문이 있었다.

 

남쪽의 상자 뚜껑에는 '사리뿟따의 사리(Saariputtasa)'라는 뜻의 글이 있었고

북쪽의 것에는 '마하목갈라나의 사리(Mahaa-Mogallaanasa)'라고 되어 있었다.

 

남쪽의 상자 안에는 넓이가 15cm에 높이가 7cm가 좀 넘는 동석(凍石)으로 된

넓고 납작한 함이 들어있었다.

겉면은 단단하고 반들반들 닦여 있었고 선반작업으로 세공한 그 함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

 

함의 둘레에는 다비식에 쓰였던 것 같은 백단향 나무조각이 놓여있었고

함 속에는 유골 하나와 여러 가지 보석들이 함께 있었다.

이 사리뿟따 존자의 유골은 길이가 3cm가 채 안되었다.

 

북쪽 상자 안에도 동석으로 된 함이 있었는데 사리뿟따의 것보다 약간 작았고

겉면도 덜 단단했다.

그 안에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사리가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큰 것은 길이가 1.5cm가 채 못되었다.

 

 

동석으로 된 두 개의 이들 함 뚜껑 안쪽에는 먹물로 글자가 하나씩 써 있는데

남쪽 것에는 사리뿟따를 가리키는 'Sa'가, 북쪽 것에는 마하목갈라나를 가리키는 'Ma'가

써있었다.

 

커닝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는 부처님의 상수제자로서

흔히 그분의 오른쪽 제자, 왼쪽 제자라고 불리었다.

 

그들이 죽은 후 그 유골도 생전에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대로

부처님의 오른쪽과 왼쪽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관례상 부처님께서 동쪽을 향하여 앉으셨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이 말은 옳다.

 

 

 

커닝햄은 사타다라에서 '불교 기념물(Buddha Bhita)'이라 불리던 탑들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서 엷은색 반점 무늬의 동석함 두 개를 발굴했다.

산치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함에는 각각 '사리뿟따의 것', '마하목갈라나의 것'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사리탑은 도굴되었던 흔적이 있으나 유골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아주 유능한 고고학자였던 커닝햄은 그가 발굴했던 모든 사리탑에 관하여 세밀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커닝햄에게 특히 감사할 일은 이 사리의 주인을 확실하게 밝혀주었다는 점이다.

 

 

이 두 군데 사리탑에서 나온 사리들은 영국으로 옮겨져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커닝햄이 서술해 놓은 함의 생김새와 현재 사리들이 모셔져있는 함의 생김새가

다소 일치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커닝햄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산치의 사리를 사타다라에서 발굴된 함 속에 옮겨 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치에서 발굴된 동석함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 성스러운 사리들은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왔는데

1939년 마하보디협회(Maha-Bodhi Society)가 그것을 인도에 돌려달라고 영국정부에

요청했다.

 

이 청원이 즉각 받아들여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사리의 안전수송이 어려워 연기되어 오다가 1947년 2월 24일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서 사리들은 마하 보디협회 대표들의 손에

전해져 본디 묻혀있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사리들은 인도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스리랑카로 보내졌다.

스리랑카 국민들은 기쁨에 넘쳐 지극한 공경심으로 사리를 친견하였다.

 

1947년에 콜롬보 박물관에서 두 달 반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었는데

2백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불자들은 물론 힌두교도, 기독교도, 회교도들도 이 사리 친견의 행렬에 참석했다.

 

 

이 사리를 산치에 재봉안하기 위해 조성되는 예배처에 안치하기 전에

사리가 두번째 옮겨진 곳은 캘커타였다.

 

인도 마하보디협회 본부가 있는 캘커타 다르마라지까 사원에서 대중들의 친견행사가 있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은 신심 어린 경배의 장면이 벌어졌다.

두 주일 동안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도록 길게 늘어선 친견 행렬이 끊일 줄을 몰랐다.

친견에 참여한 사람 대부분은 힌두교도였지만 그 중에는 회교도들도 꽤 많았다.

공경심 어린 그들의 지극한 경배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인도가 낳은 이 위대한 두 아들의 사리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지방에서도 찾아왔던 것이다.

 

 

그 다음 미얀마 정부로부터 사리친견 행사를 열고 싶다는 청원이 들어왔고

그 요청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사리친견 행사는 미얀마 고대의 종교적 열정과 온갖 화려함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국민에게 사리친견의 기회를 고루 베풀기 위해서

이 행사는 만달레이로부터 양곤에 이르기까지 이라와디 강을 따라 내려오는 강변축제의 형식으로

행해졌다.

 

사리를 봉송하는 배는 미얀마 전통 방식으로 장식된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의 호위를 받았다.

사리가 강가의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은 행렬을 지어

그 마을의 가장 중요한 탑으로 사리를 옮겨 모시고 친견행사를 가졌다.

 

이와 동시에 법회도 열어 이웃 마을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설법과 독경을 들으러 모여들었고

이 의식은 대개 밤을 지새우며 계속되곤 했다.

 

 

 

이어서 사리는 네팔라다크 정부의 요청으로 친견행사를 위해 또다시 옮겨졌다.

사리가 다시 인도로 돌아온 후, 미얀마 정부는 이 성스러운 사리의 일부를 모셔가야겠다고

청원했다.

인도 마하보디협회는 이에 동의했고 미얀마의 총리가 직접 사리를 받으러 캘커타로 갔다.

 

 

1950년 10월 20일 사리의 일부가 성대한 의식과 함께 총리에게 전해졌다.

미얀마로 가져온 사리는 후에 양곤 근처 제6차 불전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세계 평화탑 속에 봉안되었다.

 

사리를 봉안하고 탑의 상륜부를 얹는 다양한 의식절차가

1952년 3월 5일부터 11일까지 정성스럽게 진행되었다.

 

 

다른 일부의 사리는 스리랑카에 전해졌는데

그곳 마하보디협회는 그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새로운 탑을 건립하였다.

필자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사리는 그 탑이 완성될 때까지

콜롬보의 마하 보디협회 사원에 모셔져 있었다.

 

 

남은 사리는 1952년 11월 30일에 산치에 새로 축조한 쩨띠야기리 예배처에

여법한 절차를 거쳐 봉안되었다.

 

 

 

신심 깊은 순례자들이 세계 곳곳으로부터 찾아와 경배하는 이 사리는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훌륭하게 열매를 맺었던

이 두 분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영원히 일깨워주고 있다.

 

 

 

 

 

 

(냐나뽀니까 스님이 지으시고

 이승님이 옯기신

 사리뿟따 이야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