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의 분석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비구들이 어떤 것을 점검할 때 그의 일음알이(vinnana)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하신 경입니다.
세존께서는 본 경에서
"비구들이여,
그의 알음알이가
1) 밖으로 흩어지거나 산만하지 않고 또한
2) 안으로 들러붙지 않고
3) 취착하지 않아서 동요하지 않으면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설하십니다.
이 간단한 '요약의 분석' 법문은 깨달음 즉 해탈·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법문이라고 새겨집니다.
■ '마음'이란 무엇인가?
1] '알음알이'
1) '알음알이'라는 말
-'알음알이(識)'이라는 단어, 누구에게라도 생소한 말입니다. 잘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구기동 매표소로 북한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 절 입구에 "여기 들어오는 자는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들어오라."는 말이 입구에 적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는 것
자체로도 불문(佛門)에서는 잘못이구나.'라는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 혹은 종종 "알음알이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지식(知識, knowledge)로만 알뿐, 수행을 통해 그 가르침의 참 뜻을 알고 보고 체득한 것이 아님을
경계하는 의도로 종종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알음알이의 소멸'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러나 위 두 가지 어느 경우도 세존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는 것도 바른 방법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1> '알음알이의 소멸'은 열반과 동의어
- 물론 '알음알이의 소멸'은 '열반'과 동의어로 쓰입니다.
세존께서는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정신과 물질도 남김없이 소멸함을 설하시면서 열반을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 께왓다 경, D11, http://blog.daum.net/ibakdal/17370107)
- 이는 세존께서 9지로 연기(緣起)를 설하실 때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생겨나고
(識緣明色), 다시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생겨난다(名色緣識)고 설하신 바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대인연경, D15, http://blog.daum.net/ibakdal/17370183)
* 대전기경, D14,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1)
2> '알음알이의 소멸'에 대한 잘못된 이해
- '알음알이의 소멸'과 관련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세존께서 '구경의 열반',
즉 '존재의 소멸' 내지 '알음알이의 소멸'을 설하신 것은 '오온을 바로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결과를 설하시는 것입니다.
(* 대전기경, D14,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3)
- 여기서 '오온을 바로 봄'이란 바른 지혜를 통해 오온을 꿰뚫어 앎을, '마음이 해탈'한다 함은
그릇된 앎으로부터 바로 앎을 통하여 그 '알음알이'가 해탈한다 혹은 '알음알이를 거머쥠'으로부터
벗어난다 함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알음알이의 소멸'은 알음알이라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라든가, 알음알이가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둔다든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생명작용이 있고 여섯 감각가능과 인식(지각)과
오온을 더불은 유여열반인 아라한, 예를 들면 재세시의 세존과 같은 경우 '알음알이'가 없이
머무셨다 함은 큰 오해입니다. 그 반대로 일체 오온, 정신·물질을 '꿰뚫어 알면서' 머무신 것입니다.
다만 범부들과 같이 그 '알음알이'를 '나' 등으로 취착하거나 거머쥐지 않고 그에 매이지 않고
머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여열반인 경우 그는 '알음알이가 있다, 없다, 있기도 없기도 하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알음알이'를 조건한, 의지한,
반연한 어떤 세상에도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같이 그의 알음알이가 소멸하였으므로 그 앞에
어떤 정신·물질(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존재'의 경계를 벗어났습니다.
그를 두고 '무여열반' 혹은 '불사(不死)'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ㅇ 깨달음은 '알음알이가 없다'라는 오류
- 이같은 '알음알이의 소멸'을 잘못 이해하여 '알음알이가 없다.'라고 오해하는 데서 많은 오류가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마하연 화상과 산타락시타의 제자인 까말라쉴라의 교의논쟁으로 알려진 '라사의 종론' 혹은
'심예의 종론'에서도 이같은 일단을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자성의 밝음을 강조하여 어떠한
분별작용이나 의식작용조차 없는 불사불관(不思不觀)의 상태, 관찰작용이 없는 무분별지의
상태야말로 깨달음의 경지임을 말하는 마하연 화상의 주장에 대하여, 까말라쉴라는 그렇다면
기절한 사람이나 술에 취한 사람의 상태가 세존께서 설하시는 깨달음의 상태란 말인가고
대론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세존께서는 그런 이상한 깨달음을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 삼예사 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그 내용, http://blog.daum.net/ibakdal/17369749)
ㅇ 깨달음은 '어린아이와 같다'라는 오류
- 또 다른 형태의 오류로는 '알음알이의 소멸'과 관련하여 깨달음의 상태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고 선악에 대한 분별심조차도
없고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해도 거리낌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를 두고 '깨달음'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오하분결)'를 설하면서 어린아이는
1) 유신견이 없다_ 존재더미라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에,
2) 의심이 없다 _ 법이라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에,
3)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이 없다 _ 계율이라는 생각조차 않기 때문에,
4) 감각적 욕망이 없다 _ 감각적 욕망이라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에,
5) 중생들에 대한 악의가 없다 _ 중생이라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에
라고 설하십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렇다고 하여 그 어린아이가 다섯 가지 족쇄를 푼 성자는 아님을 설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아이에게는 유신견, 의심, 계금취, 감각적 욕망, 악의에 대한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설하십니다.
(* 말룽꺄 긴 경, M64, http://blog.daum.net/ibakdal/17372324)
- 또한 세존께서는 사람의 일생에서 수유기. 유년기, 청장년기를 지나면서 그가 지혜없음(무명)으로
인해 감각기능들이 완숙해지면서, 다섯 가닥의 얽매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비하고 즐기며 점점
느낌을 즐기고 욕망과 성냄에 구속되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알어나는 모습을 설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아직 오염원에 덜 오몀되어 있을 때에 그 모습은 분명 깨끗하고 아름답고 그러기에
오염되지 않은 모습의 즐거움을 줍니다. 그점에서 어른들이 배워야 할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가 인생유전을 거치면서 범부의 그러한 과정을 겪어갈 것이기에 세존께서는
수행자에게 어린아이를 닮으라고 설하시지 않습니다.
(* 갈애 멸진의 긴 경, M38, http://blog.daum.net/ibakdal/17372052)
- 세존께서는 비구들이 '항상 미소짓고 즐겁고 기쁨에 차있고 감각기능들이 청정하고 담담하고
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시주로 살고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머무는 것을 봅니다.'라는 말을
인정하십니다. (* 법탑 경, M89, http://blog.daum.net/ibakdal/17372555)
또한 사리뿟따 존자를 칭하시면서 '의지가지 없는 아이처럼 겸허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하실 때도 아이를 비유하십니다. (* 쭌다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434)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어린아이가 지혜를 구족했다든가, 깨달음을 구족했다라는 가르침을 펴신
적은 없습니다. 아이는 아이일 뿐인 것입니다.
3> '철저히 앎'을 통해 깨달음을 이룬다
- 세존께서는 '알음알이가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도, 여래도 '철저히 알았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름을 천명하십니다.
(* 뿌리의 법문 경, M1, http://blog.daum.net/ibakdal/17371521
http://blog.daum.net/ibakdal/17371532)
1) 지·수·화·풍(地·水·火·風): 근본물질인 4대(四大)이므로 '물질'에 대해서
2) 존재, 신들, 빠자빠띠, 브라흐마: 삼계(三界)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
3)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승자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삼계의 존재가
거하는 모든 '세상(界)'에 대해서
4) 본 것, 들은 것, 감지한 것, 안 것: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入)의 대상인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를 통해 일어난 일체의 '오온(五蘊)' 내지 일체의 '알음알이(六識)',
혹은 '일체의 감득(感得)한 것'에 대해서
5) 동일한 것, 다른 것: '나'가 있음으로 인한 일체의 판별이나 '사량분별'에 대해서
6) 일체: 수행자의 인식이 더욱 높아져 나와 나 아닌 것 일체가 융섭된 경지에 대해서
7) 열반: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즉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
실상을 바로 알고 바로 보는, 즉 나고죽음을 여읨(寂靜)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1) 일체의 물질(현상), 2) 일체 '존재' 혹은 '중생', 3) 잁체의 '세상', 4) 육내외처, 오온,
일체의 알음알이 즉 1)∼3)이 일어나는 '메카니즘', 5) 그들 일체의 동일함과 다름을 아는 일체의
판별이나 사량분별, 5) 그야말로 이 모든 '일체', 6) 그 일체를 넘어선 '열반'에 대해서
_ 달리 말하면 이 모든 것에 대한 '철저히 앎'을 통해서 '열반'에 이름을 세존께서는 천명하십니다.
- 또한 그 '철저히 앎'에 대해서
1) 자신을 그 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2) 그 안 것에서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3) 그 안 것으로부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4) 그 안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안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설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는
1) 즐김이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을 알았으며,
2) 존재(有)로 인해 태어남(生)이 있고, 중생들의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 여래는
갈애들을 모두 끊고,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놓아버려
위없는 정등각을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나는 말한다."
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4> '알음알이의 소멸'의 바른 사용
- 만일 '여기 들어오는 자는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들어오라.'라고 한다면 그 참된 의미는
해탈·열반을 증득한 자만 들어오라는 이야기가 될 뿐이니 법을 구하는 이들이 들어갈 수 없는 바가
되고맙니다.
세존께서는 법을 구하는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바로 그들을 연민하여 법을 설하셨으며,
깨달음에 이른 자들과만 만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 들어 오는 자는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들어오라.'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바로 알려하는 자는 누구든 들어오라.'라고
해야 도리에 맞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라고 설하십니다.
-'알음알이의 소멸'을 '알음알이가 없다.'라는 말로 이해한다면,,,
그야말로 기절한 자나, 술에 취한 자나, 치매에 걸린 자나, 실성하여 미친 자거나, 넋이 나간 자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세존께서 설하신 깨달음에 이른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런 깨달음을 세존께서는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몸, 느낌, 마음, 법에 마음챙김'을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방일하지 말고 성취하라."라고 설하십니다.
-'알음알이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안다.'라는 말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정되어야할 말이라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모욕'과 '얕봄'은 오염원이라고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잘못 아는 것은
잘못 알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다고 '장하구나.'라고 격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칭송도 하지 않고 비난도 하지 않고, 오직 법을 설하라." 라고 설하십니다.
혹여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경우,,, 세존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세존께서는 "나는 까시의 성으로 가서 법륜을 굴리리라. 어두운 이 세상에서 불사(不死)의 뷱을
울릴 것이다."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렇게 질문해서는 안된다. 비구여, 그대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실지언정,
(* 께왓다 경, D11, http://blog.daum.net/ibakdal/17370107)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실지언정,
(* 대인연경, D15, http://blog.daum.net/ibakdal/17370162)
법을 묻고 구하는 이에게 비록 그의 닦음이 아직 부족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앎을 비하하거나
"모른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장에 설해진 거의 모든 경들은 바로 그 부족한 이들을
위해서 설하신 바입니다.
- 세존께서는 '열반'에 대해서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열반'보다도 더, 아니 훨씬 더 많이, '열반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설하셨습니다.
그 길로만 가면 열반에 이르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열반에 이르는 길'이 '사성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세존께서는 깨달으신 후 입적하실 때까지 바로 사성제를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 '열반'보다도 '사성제'에 대해서 더 많이 설하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 날라까빠나경, M68, http://blog.daum.net/ibakdal/17372364)
2] '마음(心)'이란 '알음알이(앎, 識)'다
- 경을 번역하신 대림스님께서는 주석에서
"본경에서 '마음'은 'citta'를 옮긴 것이고, '알음알이(識)'는 'vinnana'를 옮긴 것이다.
이처럼 '마음'과 '알음알이' 즉 'citta'와 'vinnana'는 동의어로 구분 없이 쓰인다.
그리고 「청정도론」등의 주석서 문헌에서 심·의·식(心·義·識, citta, mano, vinnana)은 동의어라고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초기불교이해」130쪽 이하를 참조할 것"이라고
상세하고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arammanam cinteti _ DhsA.63)입니다.
마음이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마음부수와
더불어 그 작용이나 기능이 다양하기에 과연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아비담마는 일체 혹은 이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물질의 구체를 밝혀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1) 마음, 2) 마음부수, 3) 물질, 4) 열반의 4가지를 설합니다. 마음은 'citta'로 1가지입니다.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cetasika, 心所)는 52가지, 물질(rupa)는 28가지로, 열반(nibbana)
1가지의 총 82가지 법을 구경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법을 설하신 것이 집을 지으신
것이라면 그 집을 지은 벽돌은 이 82가지라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도 마음(citta)는 오직 한 가지요 그것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이 없으면 마음도
일어나지(生)하지 않는 것입니다.
- 세존의 가르침에서 '나의 마음이 나다.'라고 하는 말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나의 알음알이가 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는 대상을 따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따라 변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두고 '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띠 비구가 '이 알음알이(마음)이 윤회한다'는 잘못된 견해에 빠졌을 때 세존께서는
"쓸모없는 자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쓸모없는 자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따라 일어난다고 설했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 갈애 멸진의 긴 경, M38, http://blog.daum.net/ibakdal/17372045)
라고 설하시며,
"알음알이는 조건을 반연하여 생기는데,
그 각각의 조건에 따라 알음알이는 이름을 얻는다.
1) 알음알이가 눈과 형색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눈의 알음알이[眼識]라고 한다.
2) 알음알이가 귀와 소리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귀의 알음알이[耳識]라고 한다.
3) 알음알이가 코와 냄새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코의 알음알이[鼻識]라고 한다.
4) 알음알이가 혀와 맛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혀의 알음알이[舌識]라고 한다.
5) 알음알이가 몸과 감촉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몸의 알음알이[身識]라고 한다.
6) 알음알이가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라고
한다."
(* 갈애 멸진의 긴 경, M38, http://blog.daum.net/ibakdal/17372046)
라고 설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음알이'라는 다소 생경한 말로 번역되고 표현되어 있어서 그럴 뿐이지,,,,
이는 '마음은 조건 따라 일어난다. 조건이 없어지면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설하신 것이며,
우리가 이야기하는 마음에는 그것이 일어난 조건들을 따라 모두 6가지의 마음의 무더기가 있다라고
설하심에 한 치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 세존께서는 '나의 마음이 내가 아니다.'라고,,, '나의 알음알이가 내가 아니다.'라고 수도 없이
천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리고, 미혹에 빠져있는 삼계를 뒤흔드는 큰 북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 무아의 특징 경, S22:59, http://blog.daum.net/ibakdal/17371041)
- 세존의 가르침에서 다섯 무더기, 오온(五蘊)을 이야기합니다.
1) 물질무더기(色蘊, form)은 '물질(rupa)'에,
2) 느낌무더기(受蘊, feel), 지각무더기(想蘊, perception), 형성무더기(行蘊, formation, sankhara)
는 '마음부수(心所, cetasika)'에,
3) 알음알이무더기(識蘊, consciousness)은 '마음(心, citta)'에 각각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물질, 마음과 마음부수는 정신, 이 둘을 떠난 것이 열반이므로
아비담마는 네 가지로 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 4가지로 '모든 것'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
새겨집니다.
- 후기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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