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와다하 경은
세존께서 삭까의 데와다하라는 삭까족의 성읍에 머무실 때,
비구들에게 니간타 나따뿟따의 '업이 다하면 괴로움이 다한다.'라는 교설에 대해서 설하신 경입니다.
본경을 사경하기 위해 일람하고 정리하면서 그 요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간단치 않음을 알았습니다.
■ 니간타의 교설
1) 인간이 느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전에 지은 업에 기인한 것이다.
2) 오래된 업들은 고행으로 끝을 내고,
새로운 업들은 더 이상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더 이상 결과를 주지 않는다.
3) 업이 다하면 괴로움이 다한다. 괴로움이 다하므로 느낌도 다한다.
느낌이 다하므로 모든 괴로움에서 풀려나게 된다.
위와 같은 니간타 나따뿟따를 종조로 하는 자이나교의 교설은 어찌 보면 부처님의 해당 부분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여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 업과 관련한 세존의 가르침
1) 행복의 조건으로써 전생의 공덕
세존께서는 망갈라숫따(길상경, 숫타니빠따 게송 222∼286))에서
38가지 '행복의 조건'을 설하시면서, 그 5번째로 '전생에 쌓아둔 선업이 있는 것'을 설하십니다.
어떤 이가 행복한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그 원인 중에 하나는 그가 '전생에 쌓아둔 선업이
있는 것'입니다.
(* 길상경, 망갈라숫따: http://blog.daum.net/ibakdal/17371085)
2) 죽은 뒤 선처에 태어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선업
세존께서는 천안통(天眼通) 등을 설하시면서도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 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善處)에 가고
나쁜 곳(惡處)에 가는 것을 보고,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가는 것을 꿰뚫어 안다.'라고
설하십니다.
어떤 이가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죽은 뒤의 생(生)이 결정되는 것을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본경 데와다하경, M101, http://blog.daum.net/ibakdal/17372676)
3) 중생의 주인으로서의 업
세존께서는 여러 곳에서 '업이 그 중생의 주인'이라고 설하십니다.
또 아래와 같이 업과 중생의 관계를 설하십니다.
"'나는
1) 업만을 재산으로 하고,
2) 업의 상속자이고,
3) 업이 근본원인이고,
4) 업의 권속이고,
5) 업이 귀의처이다.
좋은 일을 행하든 나쁜 일을 행하든 나는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여자든 남자든 자주 반조해야 한다."
(* 앙굿따라니까야, 다섯 가지 모음, 57번째 경: 아빈하빳짜웨키땁바타나숫따 웃데사
「자주 반조해야 할 점들 경」 서문)
이같이 세존의 업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 현생에 행복의 조건으로, 내생의 행복의 조건으로,
또한 그 '존재'의 정체성 내지 고유성(identification)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많은
경우 스님들로부터 혹은 영화나 TV 소설 등을 통해 어떤 사람이나 무리들의 행불행의 원인에 대해
'그것은 업 때문이다.', '내가 전생에 무선 죄를 지었기에,,' 혹은 '업을 지었으니 과보가 있을 것이다.'
등의 말을 경험해 왔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괴로움의 다함'에 대해서도 '업이 다해야만 괴로움이 끝난다.'라는 인식과
함께, 내가 불행을 겪고 있으면 '언제 이 업의 과보가 다 끝날 것인가?'라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이같은 견해를 논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본경의 요의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본경을 꼼꼼히 보고, 저는 그런 견해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거나 절반의 이해에 불과한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단 한마디도 허언이 없으시기에, 말끝이 갈라지는 분이 아니시기에, 쉬운 것을
어렵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명확한 것을 애매모호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위에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있는 그대로를 밝히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본경을 통해서 '업이 다해서 괴로움의 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업의 과보가 진앵 중이라 할지라도, 그와 관계없이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완전한 종식을 성취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오히려 업의 과보가 진행 중이라 할지라도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독려하여',
'노력과 정진으로 괴로움이 다함'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도 참으로 놀랍고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예시한 업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은 그 가르치시는 의도와 내용의 절반에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 '업이 다해야 괴로움이 다한다.'는 교설이 잘못된 이유
세존께서는 '업이 다해야 괴로움이 다한다.'라는 교설이 '무명과 미혹에서 기인한 것으로,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아래와 같이 풀어서 설하십니다.
1) 전생이나 업을 모르면서 '업이 다해야 괴로움이 다한다.'고 말하고 따르는 것이 타당한가?
- 전생에 내가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 전생에 악업을 저질렀는지 안 저질렀는지?,
악업을 지었으면 어떤 악업을 지었는지?, 그렇게 하여 얼마만큼의 괴로움이 남았는지?,
어떻게 하면 악업을 제거하고 선업을 얻는 것인지?,
이러한 것들을 모르면서 그러한 교설을 말하고 따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지 않은가?
- 또한 그러한 것을 알더라도 업이 다하여 괴로움의 끝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2) 고된 노력과 정진을 선택할 때 생겨나서 겪는 괴로움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고된 노력과 정진을 할 때 괴로움을 겪게되고,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을 때 괴로움을 겪지 않는다.
- 그대들의 말대로 전생의 업 때문에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이 전부라면,
지금 현재 나의 선택에 따라 생겨나고 겪게 되는 괴로움은 무엇이란 말인가?
3) 모든 것이 전생의 업의 과보 때문이라면 노력과 정진으로 업의 과보를 바꿀 수 없는 바,
그렇다면 그대들의 노력과 정진은 결실이 없는 것이 아닌가?
- 1> 금생에 그 과보를 받을 업을 내생에 경험하도록, 내생에 경험할 업의 과보를 금생에 받도록,
2> 즐거움을 경험할 업을 괴로움을 경험할 업으로, 괴로움을 경험할 업을 즐거움을 경험하게,
3> 즉시에 그 과보를 경험할 업을 즉시에 받지 않도록, 즉시에 그 과보를 받지 않을 업을 즉시에,
4> 많은 과보를 받을 업을 적은 과보를 받도록, 적은 과보를 받을 업을 많은 과보를 받도록,
5> 과보를 경험할 업을 과보를 받지 않도록, 과보를 벋지 않을 업을 과보를 경험하도록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전생의 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내가 어떤 노력과 정진을 하더라도
위와 같은 것들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노력과 정진과 수행은 결실이 없는 것이
아닌가?
- 업의 과보는 누구도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바른 노력과 정진에 의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4) 지금의 노력과 정진이 결실이 없는 것이라면, 노력과 정진하는 자들은
느낌의 원인이 무엇이건 비난받을 수벆에 없지 않은가?
- 니간타들은 오래된 업들을 끝내기 위해 고행하므로,
· 이전에 지은 업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전생에 나쁜 업을 지은 자요
· 중생들이 자재천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사악한 신들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 운명과 우연의 일치에 의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나쁜 운명을 가진 것이요
· 여섯 부류의 탄생에 의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면,
악한 부류의 태생이라 그런 것이며,
· 금생의 노력에 의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는 것이라면, 금생에서 사악하게 노력했기 때문이며,
혹은 위 다섯 가지의 경우의 반대인 경우라면 각각
이전의 업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는 교설이 틀린 것이요, 자신으로 인해 그런 것이요,
또한 자신이 원인이거나, 자신이 선택하였거나, 자신의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노력과
정진으로 얻으려는 것이니,, 즐거움과 괴로움이 원인이 그 어떤 것이든 비난 받을 수 밖에 없다.
- 그같은 견해 내지 노력과 정진(고행)으로는 현재의 괴로움을 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괴로움을 끝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의 근본원인이 그 무엇이던 간에
비난을 면할 수 앖다.
■ 업이 다해서가 아니라, 노력과 정진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다하는 것
이다. 그래서 노력과 정진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1) 괴로움에 속박되지 않은 자신을 괴로움에 속박되게 하지 않고
2) 법다운 즐거움을 버리지 않고, 그렇다고 하여 그 즐거움에 빠지지도 않는다
라고 설하신 이러한 방법으로 노력과 정진이 결실을 맺는다고 설하십니다.
고행에 의한 업의 제거 등과 같은 '무명과 미혹에 기인한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에 빠져서
고행을 자처하여 괴로움으로 자신을 속박하고 학대하는 방법을 여의고,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등 바른 방법을 따라 도를 닦아 생기는 법다운 즐거움을 따라 수행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주는 즐거움에 함몰되어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바로 중도(中道) 즉
팔지성도(八正道) 내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苦滅道聖諦)'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그렇게 '노력을 기울여서', '평온을 닦아서',,,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여'
그렇게 하여 '괴로움이 다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이렇게 히여 그의 노력과 정진이 결실이 있게 된다고 설하셨습니다.
마치 어떤 남자가 어떤 여인에 대한 욕망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그 여인에 대한 욕망이라는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고 나면 그것을 이유로 더 이상 그 여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고 설하셨습니다.
■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독려하여 성취한다.
그러나 성취한 후에까지 스스로 독려하는 것은 아니다
세존께서는 그가 감각적 욕망 등 즐거움에 머물 때 해로운 법들이 증가하고 유익한 법들이 감소하지만
그런 것을 제어하고 여의고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독려'할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하는 것을 숙고하고 성찰하여 그것을 이유로 '나는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독려하리라.'라고
노력하고 정진함을 설하십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실천의 법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취한 후에는 더 이상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독려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화살을 만드는 자가 두 개의 불을 지펴 놓고 화살대를 곧게 만들다가,
화살대를 곧게 편 후에는 화살대에 열을 가하고 달구어 곧게 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화살대는 곧게 되었고,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종종 아라한은 어떠힌 경우에도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지, 혹은 갈애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벗어나는 것인지 논란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벗어나 성취를 지향으로
수행하는 자는 자는 이런 의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희론입니다. 이 질문은 부처님께
성취하신 후에도 갈애가 계속 일어나는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 화살대의 비유가 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 탄 재는 다시는 탈 수 없습니다.'
갈애를 완전히 소멸한 분을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길들인 분이요,
자신을 남김없이 정복한 분입니다. 그는 삼명(三明)을 체득하여 '나'와 '남'과 '이 모든 것'의
실상을 꿰뚫어 봅니다. 그는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분입니다. 그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존재·비존재로부터, 일어남사라짐을 모르는 무명을 원인으로
하는 일체 번뇌를 풀어서 벗어난 분입니다. 그는 한 순간이라도 존재를 입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유여열반에 머물든 무여열반이든 똑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완전히' 소멸한 분입니다. 그에게는 그 뿌리가 되는 갈애, 자만, 사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바램도 슬픔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지을 공덕이나 선업에 대한 의도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건넜고, 이미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스스로 독려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미 성취했음을 이유로 다시 감각적 욕망에
얽매여 그것을 즐기거나, 성을 내고 칼과 몽둥이를 든다든가, 다시 무명에 빠져 일어남·사라짐에 드는 일은 없습니다. 그 뿌리를 잘라내어 다시는 자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이 속행하는 단 한
순간에라도 미혹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갈애를 일으키는 일은 없습니다.
아라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이제 계로 자신을 단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계를 범하는 일은 없습니다.
성내는 일도 탐욕하는 일도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거머쥐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 것 없이도
그는 흠없는 행복에 머뭅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여읜 참된 행복입니다. 만일 성취했음을 이유로
다시 계를 벗어나고, 거친 말을 하고, 탐닉하고, 거머쥔다면 부처님은 법은 성립하지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수순할 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가 이제 벗어남을 이유로 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이', 혹은 '인과에 매임이 없이',,,
죽이고, 빼앗고, 음행하고, 속이고, 중상모략하고, 욕설하고 거친 말을 거리끼지 않고. 잡담하고,
탐욕하고, 악의를 품고, 사견을 임의로 취한다면,,, 그와 같은 자를 두고 세존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바 그 정수(精髓)를 체득한 자라고 해야할까요? 이 마라의 요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세존을 근원으로, 세존을 길잡이로,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 * 법 실천의 긴 경, M46: http://blog.daum.net/ibakdal/17372158
검증자 경, M47: http://blog.daum.net/ibakdal/17372169)
세존이 그러한 행위를 하신 바가 없고, 세존의 법다운 제자들도 그러한 바가 없고, 세존의 어떤
제자도 그렇게 행함을 허여받은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같은 주장을 하는 자가 있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세존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라고.
각자의 업과 잠재성향을 따라 다른 길을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허스님이나 원효대사와 같은 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을 행로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 계실 때도 환속하는
승려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세존께서 가르치신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단히 심히 욕보이는 일입니다. 소위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라 하여 남들이 보든
보지 않는 곳에서든 막행막식하는 것이 근본도리를 깨우친 자의 모습인 양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그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세존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그의 갈애를 따라 그의 길을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의 마음 속 아직 다하지 못한 갈애가 남아았어 그것을 따라 가거나, 미혹에 취하여
마음챙김을 놓아버린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의 법이 무섭기도 한 것은 그것이 감추어져 있거나 비밀스러운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햇살 아래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드러나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적어도 지금은
드러나 있기 때문에 공부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그가 율장과 경장과 논장을
꿰뚫어 아는 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 안 연후에 그의 마음이 그것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삼장법사라 할지라도, 니까야를 호지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행동과 말과 마음은 가르침의 정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알고도 그 길을 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갈애에 매여 그것을 추구하면서, 있지도 않은 세존의 법을 거짓으로 만들어 핑계삼고 혹세무민하며, 진실한 주인의 농가진(弄假眞) 운운하며 세존의 가르침을 희롱하고 훼방하는 것이야말로 오랜 옛날로부터 있어온 사악한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