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바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또데야의 아들 수바 바라문 학도가 세존을 찾아뵙고, 세존의 지혜를 시험하고 논박하려다가
결국 세존께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묻고 귀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또데야의 아들 수바 바라문 학도
대림스님의 주석을 따르면, 이 수바 바라문 학도는
디가니까야 수바경(D10, http://blog.daum.net/ibakdal/17370082)의 그 수바 바라문 학도와 동일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 또데야 바라문은 사왓티 근교 뚜디 마을의 수장이고 아주 부유했다고
하며 여러 경에서 유명한 바라문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는 세존께서 오셨을 때도 죽 한 국자, 밥 한 주걱도 드리지 않을 정도로 인색했고, 그렇게 살다가
죽어서 그 집의 개로 태어납니다. 그 개는 세존을 보고 짖었던 바, 세존께서는 전생에도 그가
세존을 경멸하여 개로 태어났는데, 또 그렇게 짖어서 내생에는 지옥(niraya)에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합니다.
수바는 자기 아버지가 죽어서 범천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바, 절대로 이 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세존을 헐뜯기 시작했습니다. 세존께서는 당신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수바의 아버지가 전생에 죽기 전에 숨겨논 재물을 개에게 파오도록 하셨고, 수바에게 '업이 바로
중생들의 주인'이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수바는 그렇게도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M135, 업 분석의 짧은 경, §2의 주석 참조)
■ 세존을 논란거리로 시험함
본경을 보면 재가자는 성취하지만 출가자는 성위하지 못한다든가, 재가자는 여러 가지 일이 많아
결실이 많지만 출가지는 별다른 일이나 노력이 없으므로 결실이 적다든가 하는 그럴듯한 언사로
세존의 견해를 묻고 시험합니다.
세존께서는 재가자든 출가자든 '바르게 도닦는 자는 그 바른 도닥음으로 인해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재가자는 농사와 같이 일이 많고 출가자는 상업과 같이 일이 적은 편이지만 농사짓는 자나 상업을
하는 자나 모두가 실패로 적은 결실을 얻을 수도 성공하여 많은 결실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
수바가 제시하는 논란의 핵심을 분석하여 섫하십니다.
세존께서 이러한 희론에 대해 '분석하여 말씀하시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말씀하시지 않으셔서'
중도의 입장에서 오히려 논란의 본질과 핵심을 짚으시는 것은 쓸데없는 희론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그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오래된 전승? vs 그것의 의미, 처음 중간 끝을 아는가? '장님 줄서기'일 뿐
그러한 희론(戱論)으로 세존을 공박하지 못하자, 수바 바라문 학도는 1) 진실한 말을 함, 2) 고행,
3) 음행을 금하는 것(청정범행), 4) 만뜨라를 외우는 것(성전을 공부함), 5) 베풂이라는 바라문들의
'공덕을 쌓고 유익함을 성취하기 위한 다섯 가지 법'을 말하면서 세존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묻습니다.
세존께서는 단 한 명의 바라문, 단 한 명의 스승, 단 한 명의 스승들의 스승, 혹은 일곱 선대에 스승에
이르기까지, 혹은 그 만뜨라를 만들고 설한 바라문들의 원조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이라도
'이 다섯 가지 법들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며, 그 결과를 명언하는 자'가 없음을 통박하십니다.
이 뜻은 무엇입니까?,,,,
1) 진실한 말을 함, 2) 고행, 3) 음행을 금하는 것(청정범행), 4) 만뜨라를 외우는 것(성전을 공부함),
5) 베풂이라는 바라문들의 5가지 법이 비록 도닦음에 있어서 한가닥의 의미가 있다손치더라도
그것들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그 시작, 그것들의 진실한 의미,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내지
그러한 법들의 끝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오래된 전승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존께서는 그 법들에 대하여,
"마치 서로를 잡고 줄을 서 있는 장님과 같아서
맨 앞에 선 사람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사람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고 선언하십니다. 참으로 '완전하게 바르게 깨달으신 분'의 사자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문의 전승이나 힌두의 전승, 혹은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 혹은 세존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떠나버린 '대승의 전승'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어떤 이유로든 그렇게
오랫동안 전숭된 것이고 비록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고 잇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이미 설하신 세존의 가르침에 비한다면,,,
결국 '줄을 서있는 장님'들이 줄을 잡고 있는 것과 같아서,,,
맨 앞의 사람도, 가운데 사람도, 지막 사람도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믿음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 인간의 법을 초월한다는 허망한 이야기 vs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
세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자 수바 바라문 학도는 '인간의 법을 초월하고, 상자들에게 적합한 지(知/앎)
와 견(봄/見)의 특별함'을 증득한다는 세존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러한 것은 ' 1) 웃음거리이며, 단지
2) 말에 지나지 않으며, 3) 허망한 것이며, 4) 공허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세존과 세존의 가르침을 공박
하기에 이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앞으로도,,,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세존의 가르침?, 그건 당신의 믿음일 뿐이고,,, 당신의 믿음과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뭐가 있는가?,, 다른 전승이 '장님 줄서기;리면 당신의 믿음도 '장님 줄서기'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인간의 법을 초월한다'는데 그것을 눈앞에 증명해 보라,,, 못하지 않는가?,,, 당신이 말하는
부처님의 교설이야말로 참으로 1) 웃기는 얘기일 뿐이며, 2) 어차피 말장난에 불과하고, 3) 허망하고,
4) 공허할 뿐 아닌가?,,'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께왓다경(D11)에서 세존께서는 세존과 같이 신통에 능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신족통(神足通) 등에
있는 이러한 위험들 때문에', '신통의 기적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멀리하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http://blog.daum.net/ibakdal/17370089)
그러므로 그러한 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계정혜(戒定慧)를 닦아 해탈하여 괴로움을 종식하는 것이야말로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이라 하시고, 이보다 더 수승한 기적이란 없음을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