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75.마간디야 경-육문을 길들임

※後記: 마간디야 경을 마치며 (1),,,

이르머꼬어리서근 2017. 11. 14. 19:44


마간디야 경은


세존께서 꾸루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있는 바라드와자 족성을 가진 바라문의

불을 모신 사당에서 풀로 만든 자리에 머무실 때,


이를 두고 마간디야 유행승이 그들의 경전을 따르면, 사문 고따마는 '존재를 파괴하는 자'이며

'성장을 파괴하는 자'인데, 그들이 성스럽게 생각하는 자리를 세존께 잠자리로 내준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들에게 '못 볼 것을 보았다.'라고 비난하는 것을 계기로 그같이 비난하는 그에게

세존께서 설하신 경입니다.


이 마간디야 유행승은 절세미녀인 자신의 딸을 세존께 아내로 드리려했던 마간디야 바라문의

조카입니다. 그는 본경을 듣고 출가하여 나중에 아라한이 됩니다.



■ 존재를 파괴하고, 성장을 망치는 자

                               

주석을 따르면, '존재의 파괴자'는 '성장을 파괴하는 자, 철저한 규칙을 만드는 자',

'존재의 파괴자, 증장을 망치는 자'라는 뜻이라 합니다.


또한 주석을 따르면 '눈, 귀 등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발전시키고 성장시켜서, 보지 못했고

듣지 못한 것 등을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고, 이미 보았거나 들은 것은 그냥 지나가도록 두어서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섯 감각의 문에서 성장을 천명한다.'라는 신조를

그들 유행승의 무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반대로 여섯 감각의 문에서 이를 단속(samvara)할 것을 천명하시는 분입니다.

마음챙겨 오온을 물질정신을 바로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들은 영원하지 않고, 그러하기에

실상이 괴로움이며, 내가 아니며 그 안에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바로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실상이 그러하기에 그것을 바로 보기 위해서 육내외처(六內外處)에서 접촉을 통해

끝없이 정신뭃질이 펼쳐지는 것을, 오온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을 마음챙겨 바로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법을 가르치시는 그들의 눈으로 보면 세존은

참으로 '존재를 파괴하고, 성장을 망치는' 그런 분이었을 것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은 그같이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마래에도

세존의 가르침은 그들이 하던 비난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문명의 발달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물질의 풍요와 정신의 풍요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한 풍요는

우리에게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즐거움을 더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세게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그렇게 펼쳐질 물질정신의 신세계가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탐욕, 인색, 악의, 어리석음,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러한 풍요의 즐거움은 일부 사람에 국한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 받을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는 분배의 분제요, 궁극은 인색이라는 마음의 오염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러한 감각적 욕망에 따른 즐거움의 충족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최소한의 먹고, 입고, 거하는 것이 충족된다면,

그 사람의 행복은 그러한 물질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여 그를 멀리하고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대한 갈증에서 벗어나,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랗게 갈구하는 물질정신세계는 물론이고, 그것을 갈구하는 '나'마저도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되어 드러난 것이고, 그것들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며 '괴로움'이라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리보면 우리가 갈구해 마지않는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물질정신세계란 그야말로 '한갓' 

물질정신의 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으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이하기까지 한 가르침입니다.



무엇이 맞는 길인지,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결국 내가 알 수 있습니다.

머나먼 과정를 거쳐 사람들은 무엇이 행복인지 발견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병상에 누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면,

 경제적인 부와는 상관없는 자신을 개발하는 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휴식도 없이 벌어들인 경제적인 부로 인해 처럼 뒤틀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에 의해 만들어진 추억들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삶의 어느 단계에 있든, 결국 언젠가는 커튼이 드리워지는 시기가 올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십시오.”라고.




마간디아 유행승과 바라드와자 족성의 바라문과의 대화를 이미 천이통(天耳通)으로 알고 게신

세존께서는 찾아온 마간디야 존자에게 당신께서는 '여섯 가지 감각가능을 길들이고, 지키고,보호하고,

단속했음'을 그리고 '그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단속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고 설하십니다.

그런데 그대는 그런 나를 두고 '성장을 파괴하는 자'라고 말하는가? 라고 묻습니다.


참으로 한 치의 타협함이나 물러섬이 없는 세존·아라한·정등각자의 사자후라고 생각됩니다.

알고, 보는 그분께서는 중생을 연민하여 법을 설하시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닌 것을 그렇다고 혹은

그런 것을 아닐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법을 듣는 이와 타협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본 경에서 세존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성장'이나 '존재'의 구경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다음의 순서로 직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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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에 탐닉하였다가,               → 그대는 무엇을 두고 '성장'이라고 하는가?

    그들의 일어남, 사라짐, 달콤함, 재난, 벗어남을              의지하거나 바라는 바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                                                        안으로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것 말고.

    그러한 즐거움에 대한 갈애, 열병, 갈증이 사라져

    안으로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자에게

    그대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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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 역시 재가자였을 때                                              → 나 역시 그대들의'성장'을 따라갔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완비하여 즐겼다.,                    그러나 그것은 저열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런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을 바로 보고              그것이 참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가?

    더 이상 그런 저열한 것을 부러워 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감각적 욕망과도 다르고,

    해로운 법들과도 다르며, 천상의 즐거움조차도 능가하는 

    그런 기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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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생들이 감각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 그것은 참으로 일시적이고

    감각기능이 손상되어                                                     매여있음을 전제로 하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어서                               조그만 위로와 위안이 아닌가?

    감각적 욕망이 주는

    일시적인 조그만 위안과 위로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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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감각적 욕망이 주는 즐거움을 바로 보아                      →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고 매여있는 한

    그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대는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를 수

    그는 안으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를 수 없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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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생들은 오랜 세월 동안                                            → 그대는 오랜 세월 그렇게 속아 왔다.

    이 마음에 의해 속고 기만당하고 현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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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른 사람을 섬기고, 바른 법을 듣고,                           → 닦아서 이 모든 것을 바로 보라.

    바른 법을 닦아라.                                                          이것이 '성장'과 '존재'의 구경이다.

    그대 스스로 알고 보게 될 것이다.                                   그 첫걸음은 육문(六門)을 길들임이다.

    존재의 소멸을. 이 전체 괴로움의 소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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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마간다야 유행승의 견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세존께서

'나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노를 길들이고, 지키고, 보호하고, 단속했다.'고  설하시는 것은

심심미묘한 법의 요체로 바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마간디야 유행승은 자신의 지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형색, 소리, 냄새, 맛, 김촉에 탐닉하였다가

거기서 벗어나 '안으로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자'라고 세존께서 설하셨을 때,

그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선근이 없는 범부였다면,,, 그게 이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발하거나 그러기에 당신은 '성장을 파괴하는 자'라고 세존을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실로 그렇다면,,,,  세존의 가르침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생사여탈(生死與奪)의 자리요,,,   천길 낭떠러지의 자리라 함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원효대사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涯人 一道出生死)'라는 말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길들여서, 육내외처(六內外處)에서 접촉(觸)틀 통해 일어나는

물질, 느낌, 인식, 형성, 알음알이의 실상를 꿰뚫어 알아, 다시는 그 일어남·사라짐에 매여

갈증를 일으키지 않고, 어디에도 의지하는 바 없이 '안으로 마음 고요히 머무는 자',,,,

'업이 자신'임을 알아 수순하여 평온에 머무는 자,,,

그리하여 일체 물질정신의 펼쳐짐과 '나'을 벗어버린 자,,,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涯人 一道出生死)'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할 때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진실로,,, 생사(生死)를 벗어버린 '불사(不死)'를 얻은 자의 모습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