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44.교리문답의짧은경-아나함의 물음

※後記: 교리문답의 짧은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7. 3. 29. 16:40


교리문답의 짧은 경은


세존께서 라자가하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실 때

위사카 청신사가 담마딘나 비구니를 찾아가서 교리문답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문답의 내용을 위사카 청신사가 세존을 뵙고 다시 확인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가 출가하기 전 그녀의 남편이었던 바,  주석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 둘의 대화는 담마딘나 비구니가 수행을 통해 무애해를 깆춘 아라한이 되었으며,

그녀가 아라한이 된 후 라자가하에 머물렀던 세존을 뵈러 갔을 때 남편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위사카는 아내가 출가하기 전 아나함 즉 불환자가 되었던 바, 이 교리문답은 어떤 아나함과 아라한의 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문답은 '어떤 아나함의 끝나지 않은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1. '존재더미'에 대해서


'존재더미'는 sakkaya(St. sakaya)를 옮긴 것인데 대림스님께서는 상윳따 니까야와 앙굿따라 니까야

에서는 '자기 존재'로 옮기셨고, 복주서는 이를 '존재하는 법의 적집(dhamma-samuha)'으로 

설명하는 바, 대림스님께서는 이를 존중하여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이를 '존재더미'로 옮기셨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첫 부분에서 위사카 청신사는 무엇을 두고 '존재더미'라고 하는지, 그 '존재더미'가 어떻게 일어나고,

소멸하는지, '존재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여 그 '존재더미가 있다.'라는

소위 '유신견(有身見)'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지에 대하여 차례로 묻는데,


담마딘나 비구니는 먼저 이 '존재더미'가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대해서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의 무더기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취온이 바로 그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함을 볼 때 이 '존재더미'란 바로 오취온을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더미'_'일체 존재'


'존재더미'도, '자기 존재'도, '존재하는 법의 적집'이라는 말도 어렵습니다.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이미 구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고기가 물고기인 이상

이미 물에 구속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은 이 '존재'라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존재를 풀어서(解) 벗어나는(脫) 법을 가르치고 계신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 바, 

아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실 수가 없습니다.


'존재더미'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취온이라는 정의를 생각하면,

'존재더미'란 '어떤 존재가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그 내용의 무더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다른 말은 없는 것일까요?



'존재의 구성요소', '존재형식', '존재방식'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봐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무더기라는 의미, 그리고 실상 그 내용이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들과 그에 따른 내용물들을 통칭한다는 의미를 같이 살리려할 때 형식 혹은 방식이라는 표현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나,


- '존재'라는 말 자체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이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전제 없이는 '존재'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


- 그리고 '나'라함도 결국 나 등으로 취착하는 오온의 집적 내지 무더기에 대한 인습적인 표현이며,

   내 앞에 펼쳐지는 일체 세상도 결국 그러한 알음알이의 천명이며 무더기의 혙태라는 점,


- 또한 '어떤 존재가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들과 그 내용'을 세존의 가르침에 따라

   면밀히 관찰했을 때 결국 그 '존재'는 조건을 따라 형성된 것이어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어서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불변하거나 영원한 '존재'라는 것은 없다는 점,


- 결국 '존재'라 함은 존재의 그물을 풀지 못했을 때는 엄연 생멸하는 존재로서 '존재'하지만,

  그러한 존재의 그물을 벗었을 때에는 그는 다시는 그러한 일어남·사라짐의 영역에 들지 않고,

  '일체 존재'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맑은 호수에 고기들이나 조약돌을 갈애없는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어서


   이미 '그'라 할 존재도 소멸해 버렸지만 그런 '그'는 이제 생겨나지도 죽지도않으며, 혹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 하여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것도 아닌,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궁극의 존재론에 르게 됨을 

   볼 때,



'존재더미'라는 말은 위와 같은 근본을 두고 성립하는 '말'이므로그냥 '일체 존재'라고 함이

결국 그 의미와 표현을 살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를 설하시면서

"요컨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라고 천명하시는 바,

이 말씀은 "요컨대 '일체 존재'가 괴로움이다."라고 선언하셨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가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는 메카니즘과 그 내용의 무더기'라는 것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취온 즉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이라는 것 말고는

없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혹은 더욱 줄여서 '물질(色)과 정신현상(名)말고는 없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가까운 축생들이나 벌레들을 보아도 모두 이러한 오취온의

형식을 빌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천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읍니다.

무색계의 존재들은 이 중 물질을 벗어났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만,,, 

이 이상한 공통점이야말로 사람을 경악하게 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로의 구성, 이 정신,물질과 감각기관이 부딪혀 진행되는 오온이라는 존재 인식방식,

이것말고 존재를 구성하거나 이러한 방법말고 존재를 천명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혹은 왜 모든 존재들이 이러한 공통의 메카니즘을 가지게 된 것일까라는 끔찍한 질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여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존재'인 이상은 세존의 가르침말고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있을까요?,,,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신 분, 일체지자이자 모든 천신들과 인간들의 참된 스승이신 그분 세존께서는

정신· 물질(名色)을, 그리고 삼계(三界)를, 존재의 거주처 31처(處)를, 오온을 천명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천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10억의 아비부 세계 즉 삼천대천세계를 말씀하셨습니다만

그 구조는 같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깊이와 심연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나함의 남아있는 의문


위사카 청신사는 이 교리문답을 할 때 이미 불환자였습니다.

예류자 이상의 도과를 증득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유신견'에서 벗어났음을 말하고,

유신견에서 벗어났다함은 '존재더미'를 바로 보아 영원불멸하는 자아라는 없다는 앎과 봄을 얻었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교리문답에서 '존재더미'와 '유신견'을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가 담마딘나 비구의 깨달음을 시험하려 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환자를 성취한 공덕이 있는 분이 부처님의 출가 제자에게

그런 무례를 범할 리가 없고, 이어지는 질문을 보았을 때도 그는 그가 궁금한 것을 물었던 것으로 생각

됩니다.


단지 그가 유신견을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반조하면서 명확한 지혜가 필요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이「교리 문답의 짧은 경」은 불환자, 혹은 아나함의 도과를 증득한 분이 아직 어떤 의문들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1) '존재더미'(일체 존재)란 무엇입니까?

 

    -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의 무더기

       즉,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가 '존재더미'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2) 무엇을 두고 '존재더미(일체 존재)의 일어남이라고 합니까?


    -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니,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가

      '존재더미(일체 존재)의 일어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3) 무엇을 두고 '존재더미(일체 존재)의 소멸'이라고 합니까?


    - 그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없음이

      '존재더미(일체 존재)의 소멸'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4) 무엇을 두고 '존재더미(일체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고 합니까?


    - 성스러운 팔지성도가 그것이라고 세존께서 설하셨다고 합니다.



5) 취착과 오취온은 같은 것입니까?


    -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취착의 대상인 다섯 무더기('존재더미', '일체 존재')에 대한 열망과 탐욕이 취착입니다.



6) 어떻게 해서 '존재더미'(일체 존재)가 있다는 견해(유신견)이 일어납니까?


    - 성자들을 친견하여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라는 다섯 무더기('존재더미', '일체 존재', 혹은

       존재를 인식하는 메카니즘들과 그 메카니즘을 따라 일어난 내용물들의 무더기들을


       그것들을 자아라고 관찰하거나

       그것들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거나

       자아 안에 그것들이 있다고 관찰하거나,

       그것들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여,


       그렇게 '존재더미', '일체 존재', 혹은 '존재'가, 혹은 '중생'이, 혹은 내'가 있다라는 견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7) 어떻게 해서 '존재더미(일체 존재)가 있다라는 견해(유신견)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 성자들을 친견하고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어,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라는 다섯 무더기('존재더미', '일체 존재', 혹은

       존재를 인식하는 메카니즘들과 그 메카니즘을 따라 일어난 내용물들의 무더기들을


       그것들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그것들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그것들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그것들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아,


       그렇게 '존재더미', '일체 존재', 혹은 '존재'가, 혹은 '중생'이, 혹은 ''가 있다라는 견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존재'가 '있다'라는 소견(유신견)을 완전히 부숴버린 거룩한 님들


이 유신견에 대한 담마딘나 존자의 섫하심을 듣고 그것이 실로 어떠한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분들은 실로 어떠한 말을 하며, 실로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보여주는 경들이 생각나서,,, 그분들께 예경하면서 여기에 다시 옮겨봅니다.


ㅇ 소마 존자


 - 마라 빠삐만                                                    

 

    "선인들이 도달한 경지는

     성취하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여인의 두 손가락만큼의 통찰지로는

     도저히 그것을 얻을 수 없도다."


 - 소마 존자

 

    "마음이 삼매에 잘 들고

     지혜가 이미 현전하고

     바르게 법을 꿰뚫어 보는데

     여자의 존재가 도대체 무슨 문제랴.


     만일 어떤 사람에게

    '나는 여자'라거나 '나는 남자'라거나

    '나는 무엇'이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면

     전적으로 그것은 마라에게나 어울리도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0019)


                                                  

ㅇ 셀라 존자

                                     

 - 마라 빠삐만

                                                     

    "누가 이 꼭두각시를 만들었는가?

     꼭두각시를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 셀라 존자


    "꼭두각시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요

     이 불쌍한 것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잘 자라기 위해서는 

     땅의 영양분수분

     둘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도다. 

 

     그와 같이

     무더기들(蘊)요소들(界)과 여섯 감각장소들(處)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0027)



ㅇ 와지라 존자


 - 마라 빠삐만


    "누가 중생을 창조하였는가?

     중생을 창조한 자는 어디 있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중생은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 와지라 존자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行)들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도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0029)



'여자'도 '남자'도 '그 무엇'도,,, 

하면 무슨 꼭두각시가 있는 것 같지만,,, '꼭두각시'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하여 무슨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든 것 아닙니다,,, 누가 만들거나 장조한 것 아닙니다,,,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된 '나'와 '세상'이,,, 형성된 결과가,,,, 끝없이 펼쳐질 뿐입니다,,,,

'세상'이라할 5온(蘊), 12처(處), 18계(界)도,,,,  원인이, 갈애가 부숴지면 소멸합니다,,,,

하여,,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합니다,,,,


하여,,,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든 '존재'는,,, 오직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은 슬픔입니다.

'존재'란 오직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지는 모습'이니,,,,

괴로움 외애 어떤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오! 오!  벗어나신 거룩하신 분들께 예경합니다.   ((()))

오! 오! '존재'들에게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설해주신 대자대비하신 모든 부처님들께

예경합니다. ((()))

오! 오!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리고 무명을 눈멀게 하신 거룩하신 그분의 가르침에 예경합니다. ((()))




2. 성스러운 팔정도에 대해서


1) 무엇이 팔정도입니까?


    -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2) 팔정도는 형성된 것입니까? 아니면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까?


    - 팔정도는 형성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언젠가는 누구에게는 소멸합니다.



3) 팔정도가 삼학에 포함됩니까? 아니면 삼학이 팔정도에 포함됩빈까?


    - 팔정도가 삼학에 포함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는 통찰지의 무더기(慧蘊)에,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는 계의 무더기(戒蘊)에,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는 삼매의 무더기(定蘊)에 포함됩니다.




3. 삼매에 대하여


    무엇이 삼매[定]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의 표상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의 필수품이고,

    어떤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까?


     -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삼매입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삼매의 표상입니다.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삼매의 필수품입니다. 

        여기서 이런 법을 받들어 행하고 닦고 많이 짓는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4) 작용(行, sankara)에 대하여

                                                        

1) 얼마나 많은 지음(형성)들이 있습니까?

    - 몸을 지음(身行), 말을 지음(口行), 마음을 지음(心行)이 있습니다.



2) 무엇이 그 각각의 지음입니까?


    - 들숨과 날숨이 몸을 짓고,

       일으킨 생각과 고찰이 말을 짓고,

       인식과 느낌이 마음을 짓습니다.



3) 무슨 이유로 그들이 그 각각의 지음이라 합니까?


    -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며, 몸에 묶여있기 때문이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난 다음에 말을 하기 때문이요,

       느낌(受)와 인식(想)은 마음부수(心所, cetasika)이니, 그들은 마음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5. 상수멸에 대하여


1) 어떻게 상수멸을 증득합니까?


    -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할 때에

      '나는 상수멸을 증득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한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의 마음을 닦은 그대로 그것이 그를 인도합니다



2)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먼저 소멸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 말의 작용, 몸의 작용, 마음의 작용의 순입니다.



3) 어떻게 상수멸에서 출정합니까?


    - 비구가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할 때에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의 마음을 닦은 그대로 그것이 그를 인도합니다.



4) 상수멸에서 출정할 때 어떤 법들이 먼저 일어납니까?


    - 마음의 작용, 몸의 작용, 말의 작용의 순입니다.



5)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몇 가지 감각접촉이 있습니까?


    - 세 가지 감각접촉이 있으니,

      공(空)한 감각접촉, 표상없는 감각접촉, 원함없는 감각접촉입니다.


      → 이것은 차례대로의 감각접촉이니 아래와 같이 생각됩니다.

          · 공(空)하다 함은 표상없음도 형성된 것이어서 그조차도 버렸던 진공(眞空)의 그것이요

          · 그로부터 일체의 표상없음의 마음으로 나오고

          · 다시 그로부터 나와 이제 정신·물질에 대한 느낌(受)와 상(想)이 현전하더라도

            갈애가 소멸하였으므로 일체 바램이나 기다림이 없는 즉 원함이 없는 감각접촉으로.



6) 상수멸에서 출정한 비구의 마음은 무엇을 향하고, 무엇을 기울고, 무엇을 의지합니까?


    - 멀리 여읨을 향하고,

       멀리 여읨으로 기울고,

       멀리 여읨을 의지합니다.




6. 느낌에 대하여


1) 몇 가지 느낌이 있습니까?

    -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3가지가 있습니다.



2) 어떤 것이 즐거운 느낌이고, 어떤 것이 괴로운 느낌이고, 어떤 것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입니까?


    -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즐겁고 유쾌한 느낌,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괴롭고 불쾌한 느낌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불쾌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느낌



3) 그 각 느낌들은 무엇이 즐거움이고 무엇이 괴로움입니까? 


    - 즐거운 느낌은 현존하면 즐겁고, 없으면 괴로운 것이고,

       괴로운 느낌은 현존하면 괴롭고, 없으면 즐거움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알면 즐거움이고, 알지 못하면 괴로움입니다.



4) 그 각 느낌들은 어떤 잠재성향이 잇습니까?


    -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고,

       괴로운 느낌에는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다.



5) 모든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는 그런 잠재성향이 있습니까?


    - 아닙니다.



6) 그러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는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 즐거운 느낌에서는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서는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는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합니다.



7) 모든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 그래야 합니까?


    - 아닙니다.


     · 탐욕의 잠재성향이 없는 즐거운 느낌이 있으니,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것으로 탐욕을 제거합니다.



     ·  적의의 잠재성향이 없는 괴로움이 있으니,


       '성자들이 증득하여 머무는 그런 경지를 언제 나는 증득하여 머물게 될 것인가?'라고. 

        이처럼 위없는 해탈들에 대한 염원 일으키기 때문에 

        그에게 그 염원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이 생깁니다. 


        그는 이것으로 적의를 제거합니다.



     ·  무명의 잠재성향이 없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으니,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이것으로 그는 무명을 제거합니다.


        


7. 이면을 여읨


1) 즐거운 느낌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괴오운 느낌입니다.

2) 괴로운 느낌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즐거운 느낌입니다.

3)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무명(無明)입니다.

4) 무명(無明)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명지(明知)입니다.

5) 명지(明知)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해탈(解脫)입니다.

6) 해탈(解脫)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열반입니다.

7) 열반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버렸습니다. 그런 질문은 답의 한계를 넘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정범행은 열반을 궁극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원하신다면 세존께 이 뜻을 물어보십시오.




8. 세존께 직접 여쭈다.


위사카 청신사는 그길로 세존을 찾아가서 담마딘나 비구니와의 문답한 내용을 말씀드립니다.


세존께서는 담마딘나 비구니는 현자이며, 큰 통찰지를 가졌다고 칭송하시며,


   "그대가 만일 내게 이 뜻을 물었더라도

    나 역시 담마딘나 비구니가 설명한 대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로 호지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왜 담마딘나 비구니는 '열반의 이면은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위사카 청신사의 마지막 물음인 '열반의 이면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담마딘나 비구니는 그대의 질문은 답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이 뜻을 세존을 뵙고 여쭈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마지막 질문에 의문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는 데에 촛점이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왜 담마딘나 비구니는 '열반의 이면은 없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답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없다'라고 하면 '없다'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없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여 있지 않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없는 것에도 속하지 않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런 있고없음의 영역을 아예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그 이름이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담마딘나 비구니의 답변은 적절하고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과거의 남편에

대한 자애가 담긴 답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세존께서는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을 더 상세히 밝히시지 않고 내가 설해도 똑같이 설했을

것이므로 '그대로 호지하라.'라고 하셨을까요? 위사카 존자는 더 이상의 의문을 일으키고

그것을 세존께 여쭙지 않고 '크게 흡족하여' 기뻐했다라고 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다나(Udana, 自說經)의 빠딸리가마의 품「열반의 경」에서 세존께서는 아래와 같이 설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0609)

                                                           

그것은 의지하는 바를 여의었고, 무엇을 대상으로 함을 여의었고, 이면을 여의었읍니다.

그것은 거머쥠을 여의었고, 반연함을 여의었고, 유무(有無)를 여의었고,

여읜 자를 여의었습니다.

                                         

                                           

세존께서는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 http://blog.daum.net/ibakdal/17370609)

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존재더미, 성스러운 팔정도, 삼매, 샹카라, 상수멸, 느낌, 반연을 여읨에 대해서 위와 같이

차례대로 물었습니다.


아라한이신 담마딘나 비구의 답변은 간결하지만 수행의 끝마치고 무애해를 얻은 분은

이러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표를 시원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법문을 남기신 위사카, 담마딘나 두 분의 성자께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






이 경을 사경한 공덕으로

행복하고 위험없는 열반으로 장애없이 도착하기를

 

수 많은 생 윤회할 때

고통 위험 원수들과 나쁜 것들 안 만나고

모든 행복 축복들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오늘 지금 행한 공덕 몫을

부모 스승 친척 친구 자신보호

어려울 때 연민과 도움을 주신 도반들

천신들을 시작으로 삼십일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

성취하길 바라면서 회향합니다.

 

경을 번역하여 알리느라 노고를 마다 않으신 대림스님과 각묵스님 건강하시기를,,,

 

이 방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집과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김해 장유 반룡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지리산 실상사와 지리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보라산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

 

또한 그에게 회향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자애와 연민이 강물처럼 흐르기를,,,

                                                 

모두 이 회향을 받아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명지로써 한없는 사악함이라는 이 강을 건너게 되시기를,,,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 ∼ 두 ∼  사 ∼ 두 ∼ 사 ∼ 두 ∼




2017.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