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22.뱀의 비유 경-건너고자 하는가?

※後記: 뱀의 비유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6. 7. 24. 18:44

 

뱀의 비유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출가하기 전에 독수리 사냥꾼이었던 아릿타라는 비구에게 사견이 생긴 것을 계기로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1. 사견(邪見)

 

아릿타 비구는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설하신 것을 수용해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는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불자라고 자칭하지만, 부처님의 법은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바는

아니나(혹자는 알고 모르는 경계를 떠난 것이라 하겠습니다만) 진속(眞俗)간에 걸리는 것이 없이 막식막행에 이르더라도 마음에 매임이 없어야 세존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전하신 바 대자유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세존의 면전에서도 그렇게 자기의 견해를 말하는 아릿타 비구에게

 

   "쓸모없는 자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쓸모없는 자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장애가 되는 법들을 설했고, 

    그것을 수용하면 반드시 장애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감각적 욕망


    1) 달콤함은 적고 

    2) 많은 괴로움과 많은 절망을 주 

    3) 거기에는 재난이 도사리고 있다


    말했다."

 

라고 천명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위에 예를 든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부처님의

사자후입니다. 세존께서 45년간 설하신 법을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그가 아라한 즉

열반을 증득하여 머무는 자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經)에 나오는 그 어떤 아라한도, 예를 들면 사리뿟따 존자, 목갈라나 존자, 앙굴리말라 존자 등, 구경의 지헤로 해탈, 열반을 증득한 후 대자유를 얻은 후에는 계(戒)를 수지하지 않고 막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일의적으로 이릿타 비구의 경우 '그대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의

길로 접어든 것이라고 언명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사견(邪見)의 원인_감각적 욕망

 

여기 일의적이라함은 세존께서 이 법문을 설하시면서 위와 같은 사소한 경우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에 이르기까지 심오한 법문을 전개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릿타 비구가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설하신 것을 수용해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는 견해에 대해 세존이나 다른 비구들이 '감각적 욕망'을 화두로 설하신

것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그런 사견에 이르게 된 이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의가 결국 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무더기의 긴 경(M13)에서

 

1) 5가지 얽매는 감각적 욕망 즉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1>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 2>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 3>코로 인식되는 냄새들,

    4> 혀로 인식되는 맛들, 5>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거움과 기쁨을

    획득하기 위하여,

 

2) 1>생계를 획득하고 유지하려면 괴로움을 감내할 수밖에 없고, 2> 애를 써도 재물을 얻지 못하면

    괴로워 하고, 3> 재물을 얻으면 지키기 위해서 괴로움을 겪고, 4> 감감적인 욕망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5>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전쟁을 하고, 6>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전장에서 고통받고

    죽고, 7>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죄를 범하고 벌받는 고통을 당하는 7가지 목전의 인간세에 벌어지는

    일체 재난, 그리고 8>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하여 몸이

    무너져서는 악처에 태어나는 바 내생에까지 이르는 재난을 설하시는 바,

 

감각적 욕망을 원인으로 감각적 욕망을 근원으로 감각적 욕망을 기반으로

단지 감각적 욕망이라는 원인 때문에 이 모든 현실의 엄청난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날 뿐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세존께서 이 다음 법문으로 넘어가시기 전에 그러한 이릿타 비구에 대하여

 

   "'그가 감각적 욕망 없이, 감각적 욕망의 인식 없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일으킨 생각 없이,

     감각적 욕망에 탐닉할 것이다.'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

 

라고 설하시는 것은,  결국 아릿타 비구가 세존께서 장애가 된디고 설하신 법을 수용하더라도 아무

장애가 없다라는 사견에 이르게 뿌리는 그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고,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일으킨 생각이 있고, 그것에 탐닉하기 때문일 뿐이라는 것을 꿰뚫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후 이어지는 모든 법문의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3.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또 다른 감각적 욕망을 위해) 법을 배우는 자

                                            - 뱀의 꼬리를 잡은 자/법을 잘못 파악한 자

 

세존께서는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법을 배우는 미혹한 자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배우더라도 그 법을 지혜로써 자세히 살펴 보고,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고 확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잘못 꼬리를 잡은 뱀이 그 머리를 돌려서 땅꾼을 물어버리듯,잘못 파악한 그 법들은 그를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게 된다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가르침을 배운 후 지혜로써 그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는 자들은

다른 이를 논박하고 자기의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므로,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게 되고 잘 파악한 그 법들은 그를 긴 세월 이익과 행복으로 이끌게 된다고

설하셨습니다. 이는 땅꾼이 뱀의 머리를 잘 눌러 잡은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나온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을 배우는 자'라는 세존의 가르침을 실로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세존을 따르고 세존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지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기때문일 것입니다.

 

아릿타 비구가 그랬을 수 있습니다. 독수리 사냥꾼이었던 그가 출가자들의 지혜가 궁금하여 출가했으나 가르침을 배우되 그 지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괴로움의 소멸에는 관심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그는 그 배운 지혜를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고 희론하고 논리로써 남들을 제압하는데

사용할 것이라 예싱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만한 지적유희를 저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에 대한 혹은 그 분해와

분석과 관련하여 그분의 가르침만큼 심심미묘하고 실로 그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저로서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으로써 제압하지 못할 상대는 그가 마라나 범천이라 하더라도

삼천대천세계에 없을 것입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제압했다라는 기쁨과 그러므로 네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지배한다는 자부와 기쁨이 생겨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꿀 덩어리 경(M18)에서 당신을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 가운데서,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고

머무는 그런 가르침을 설합니다." 라고 표현하신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참되게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그는 결코 시끄럽지 않은 분일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그는 말그대로 '침묵의 성자'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는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습니다.

논쟁할 이유도, 논쟁할 대상도 없기 때문이며, 그 이전에 논쟁하고자하는 주체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 한없이 악한 자가 있나니,

      그와 다투지 말라.'

 

라고  새겨봅니다.

 

 

 

4. 법을 왜 배우는가?_괴로움을 건너기 위해서/뗏목의 비유

 

세존께서는 뗏목에 비유하여 법을 설하시면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기 위해서 뗏목을 엮어서 강을 건넌 후

그 뗏목에 대해서 내게 많은 것을 해주었고 그로 인해 안전하게 강을 건넜으므로

이제 그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갈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은 그 뗏목에 대해

할 바를 다하는 것이 아니며,

 

그 뗏목을 땅에 내려 놓거나 물에 띄워 놓고 가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 할 바를 다하는 것이라고

비유하시면서,

 

이와 같이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함이지, 움켜쥐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설하시고

이와 같이 뗏목에 비유하여 그대들에게 설한 법을 이해하는 자들은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고 설하셨습니다.
 

 

 

이 뗏목의 비유는 많이 인용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세존께서 이 법을 설하신 참된 뜻과는

달리 사용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세존께서 이 법문을 하신 것은 뱀의 꼬리를 잡은 자의 비유를 하시면서 법을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배우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설하신 연장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릿타 비구가 사견을 가지게 된 이유가 궁극적으로 감각적인 욕망에 탐닉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법을 배우는 것은 '지적유희', '희론', '자만' 혹은

'지배'라는 또 다른 형태의 '나 자신' 혹은 감각적 욕망이나 열의를 탐닉하고 거머쥐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이 법문을 통하여, 법 즉 세존의 가르침은 그것을 배우는 목적이

오직 강을 건너는 것, 즉 괴로움의 종식에 있는 것이어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 목적을 달성한

자라면 법이라도 계속 거머쥐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하물며 논쟁에서 이기기 위함 등의 목적 등

법답지 않은 것을 거머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임을 가르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5. 왜 질못 거머쥐게 되는가?

     _ 여섯 가지 잘못된 견해의 토대 위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안달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왜 이런 잘못된 거머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지, 혹은 왜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게 되는

것인지, 혹은 왜 법을 잘못 파악하게 되는 것인지를 설하십니다. 흐름을 보았을 때 이렇게 보아야

여기서 여섯 가지 잘못된 견해의 토대를 설하시는 것과 그 다음의 내용들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1) 물질을 두고, 2) 느낌을 두고, 3) 인식을 두고, 4) 심리현상들을 두고, 5) 알음알이 즉,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意]으로 고찰한 것을 두고[識], 6) 다시 이와 더불어서

6) '이것이 세계요, 이것이 나다.'라고 여겨,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와

같은 여섯 가지 잘못된 견해의 토대를 가지지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위와 같은 잘못된 견해의 토대를 여의었으므로

위와 같은 존재의 다섯 형식(오온)이나 그에 근거한 전도된 세계관이나 자아관을 벗어나,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번민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십니다.

 

이것은 유신견(有身見)을 벗어난 자들이 어떻게 나와 세상을 보게 되는지를 천명하신 소중한 법문이라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유신견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제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번민하지 않는다.'라는

소중한 법문에 대하여 때마침 어떤 비구는 이를 안팎으로 나누어 세존께 질문하는 바 소중한

보족적인 문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밖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번민하지 않음

                                     _밖의 물질이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힐 만한 것에 대해서 


   1>'오, 내게 그것이 있었는데, 더 이상 내게 없다. 

        내가 그것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그러나 나는 얻지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2> 그는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는다.

 

   3> 이와 같이 밖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2)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번민하지 않음

                                       - '' 혹은 '나의 자아'라고 거머쥔 것의 소멸에 대해서

 

    1> 어떤 자는

       '이것이 세계요, 이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도 항상할 것이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여여하게 머물 것이다.'라는 견해

        즉 유신견을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2>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모든 견해들의 토대,

        결심, 편견, 고집, 잠재성향들을 근절시키고,

        모든 형성된 것들[行]을 가라앉히고,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고[放棄],

        갈애를 멸진하고, 탐욕을 빛바래고[離慾], 소멸하고[滅],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것과 같은

        세존의 가르침을 들은 후 


   3>'나는 단멸해버리겠구나. 참으로 나는 파멸해버리겠구나. 

       참으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겠구나.'라고

       그는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는 반면,


 

       어떤 자는 그와 같은 유신견을 벗어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이와 같이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안달복달하지 않는다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세존의 상세한 가르침을 따르면,

 

1) 일반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밖의 물질 혹은 나의 것, 나의 소유물이라고 할만한 것은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2) 법을 배우는 자라 하더라도 끊어내기 어려운 '나'. 혹은 '나의 자아'라는 것도

    실상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어서, 그것이 소멸 혹은 단멸한다함도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6. 진실로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위와 같이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설하시고,

이것을 꿰뚫어 알지 못하므로 법을 잘못 파악하고, 법을 배우더라도 다시 감각적인 욕망을 열망하고

혹은 겨우 논쟁에서 이기려고나 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거머쥐려 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하신 바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은 당연히 나는 이와 같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 것'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러한가라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당신의 가르침의 당위성과 사실에 대한 검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존께서는 아래와 같이 4가지로 이를 검증하고 반증하십니다.

 

1)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아니하여 영원토록 여여하게 머물게 되는

    그런 소유물을 본 적이 없다

 

2)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기지 않는 그런 자아에 대한 교리에 취착함을

    본 적이 없다.

 

3) 그 견해를 의지할 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견해에 의지함을 본 적이 없다.

 

4) 자아가 있다면 나의 자아에 속한 것도 있고, 자아에 속한 것이 있다면 자아도 있을 것이거니와

    자아자아에 속하는 것진실로 사실로 얻을 수가 없다.

 

 

- '나의 것'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상할 뿐인 것임을,

- 어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교리, 어떤 나' 혹은 '세계'를 바라보는 견해에 대한 취착이나 의지라도

   그것이 오직 괴로움이 생기게 할 뿐이라는 것을,

- 자아도 자아에 속한 것이라는 것도 '진실로, 사실로' 얻을 수가 없음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서는 천명하십니다.

 

 

 

7. 왜 '진실로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_ 존재라고 거머쥐는 것들(오온)을 바로 보라.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은 위 6에서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검증하고 반증하신 바, 이제 그러한 반증에 그치지 않고 '나'를 포함하여 '존재'라 불리워 지고

취착되는 것들, 존재의 근거로 불리워 지는 것들(오온)에 대하여 그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正見)인지 정면으로 마치 대나무를 쪼개듯이, 가리워진 장막을 거둬내

버리듯이 논파하십니다.

 

이것은 초전법륜경(S22:59) 등에서 설하신 바와 같은 내용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대전기경(D14)와 같이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여' 구경의 지혜를 완성하시는 그 도라인 바, 그 '오온을 바로 봄'의 구체가 무엇인지를

상술하시는 것입니다. 

 

 

즉, 물질(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行), 알음알이(識)의 각각에 대해서 이들은

 

1) 무상하고 영원하지 않으며,

2) 무상한 것이기에 즉 원인을 조건으로 일어났다가 사리지는 것이기에 괴로움이며,

3) 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5가지 취착하는 무더기에 대해서

 

1) 그것이 그 어떤 것이든, 시공을 불문하고 일체 존재로 취착하는 것들 즉

 

    -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을 불문하고

    -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을 불문하고

    - 거친 세계에 속하든 미세한 세계에 속하든을 물문하고

    - 저열하든 수승하든을 불문하고

    -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을 불문하고

 

2) 그 모든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에 대하여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통찰하여야 한다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보는 자는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를

염오하게 되고, 탐욕이 빚바래어, 해탈하게 되는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8. 아라한_그리하여 구경(究竟)이란 무엇인기?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오온을 바로 보아 해탈한 비구 즉 아라한을 아래와 같이 5가지로

비유하여 설하십니다. 이 상세한 비유와 법문은 과연 부처님의 법을 배워 그 끝에 이른 자란

어떤 상태에 이른 것인지, 혹은 '삶의 완성'이란, 혹은 일컬어지는 '불사(不死)'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1) 빗장을 밀어제친 자: 무명을 제거한 자

2) 도랑을 가득 채운자: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업형성력을 제거한 자

3) 기둥을 뽑아버린 자: 갈애를 제거한 자

4) 걸쇠를 푼 자: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제거한 자

5) 깃발을 거두었고/짐을 내려 놓고/족쇄에서 벗어난 자: 자만을 제거한 자

 

무명과, 업형성력과, 갈애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유신견, 계금취, 의심, 감각적 욕망, 악의),

그리고 자만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멸절시키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된 자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비유는 참으로 입이 벌어질 만큼 심심미묘하고 전율이 일어납니다.

무명이라는 빗장을 밀어제쳤으니 그것이 세상이든 세상이 아닌 것이든 참으로 닫혀있고 막힌 것이

없이 낱낱이 명명백백하고, 업형성력을 제거하여 도랑을 가득 채웠으니 더 이상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되지 못할 것도 없어 더 이상 도랑 채울 일이 없고, 갈애라는 기둥을 뽑아 버렸으니 더 이상 집도 없고집 지을 일도 없으며, 오하분결이라는 걸쇠를 풀었으니 청정히 다니지 못할 데가 없고, 나라는 자만을

내려 놓았으니 깃발을 높히 쳐들 일도 다시 짐을 짊어질 일도 족쇄가 차일 일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은 그 정점(頂點)을 천명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한 비구를 

    인드라나 브라흐마나 쁘라자빠띠를 포함한 신들이 찾으려고 해도 

   '여래의 알음알이는 이것에 의지해 있다.'라고 파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여래를 지금‧여기에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라고 설하시는 부분입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함은 이를 두고 맣하는 것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이 부분 법문은 우다나(Udana) 빠딸리가마의 품 열반의 경에서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0609)

 

를 연상하게 됩니다.

 

 

 

9. 바른 가르침에 대한 헛된 비난

                            _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아릿타 비구의 사견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초래할 재난과 그렇지 않음,

그러한 사견의  원인, 그것으로부터의 벗어남, 그리하여 구경의 지경까지 법문을 다 마치셨습니다.

 

 

이러한 법문을 들으면 께왓다 경(D11에서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0107)

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한 비구의 사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시작하더라도 그것은 열반이라는 궁극 그리고 일체

정신·물질의 전개라는 현상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세존께서 이같은 가르침을 펴시는 것을 알고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중생의 단멸과 파멸과 허무를 선언한다."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근거없고 헛된 것이며 사실과 다르고, 세존께서는 그렇게 하지도 그렇게 설하시지도 않으며,

 

세존께서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하실 뿐이며,

 

다른 이들이 여래를그렇게 헐뜯고 비난하더라도 성가셔하거나 낙담하거나 마음으로 싫어하지

않으시며,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여래를 존경하고 숭배하더라도 그로 인해 기뻐하거나 마음으로

득의양양하시는 일이 없으시며, 이런 경우 그들이 내가 '철저히 안 오온을 두고, 거기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구나라고 여기실 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세존의 말씀은 두리뭉실한 것이 없으십니다. 만일 오늘날에도 어떤 비구가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오온에 대해 철저히 앎'으로 인해서

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10. 입이 쓰시도록 다시 한 번

                                    -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 즉 오온을 버려라.

 

 

이와 같이 설하시고 대웅(大雄)이시며,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본 가르침의 핵심을 다시 한 번 요약 정리하여 강조하십니다 

참으로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신 천번만번의 가르침과 당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물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2)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3) 인식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4) 심리현상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5) 알음알이는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그대들이 그것을 버리면 오랜 새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비유는 실제 이러한 오온을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전해줍니다.

 

여기 제따 숲에

어떤 이가 풀, 나무토막, 나뭇가지, 나뭇잎을 가져가거나 태우거나 하고 싶은대로 한다면

그대들은 그것을 두고 그 사람이

우리를 가져간다거나, 우리를 태운다거나, 우리를 가지고 그가 하고 싶은대로 한다고 생각할 것인가?

라고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 등으로 취착하는 오온내 자신도 아니고, 내게 속한 것도 아니라

다시금 설하셨습니다.

 

 

 

11. 바른 가르침과 그 열매

 

세존께서는 다시 한 번 이와 같이 가르침의 요의를 설하시고,

이와 같은 당신의 가르침은 '잘 설해진 것'이라고 천명하십니다.

 

담마의 공덕 9가지 중에서 그 첫 번째는 '스왁-카-또' 즉 잘 설해진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본경의 이 부분을 대하기 전까지는 그 상세한 뜻을 잘 몰랐습니다.

 

 

세존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와 같이 내가 잘 설한 법

 

    1) 분명하고

    2) 열려있고

    3) 하고

    4) 군더더기가 없다."

 

라고 천명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 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께서는 이 같이 잘 설해진 법을 따라서 아라한, 불환자, 일래자, 예류자라는 도과와 참된 행복이

얻어진다고 설하셨습니다.

 

본경에서 이 네 가지 도과의 증득 이외에 다른 두 가지도 설하셨음을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소득입니다.

 

1) 법을 따르고 믿음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것,

2) 내게 믿음이 있고 나를 좋아하는 그들 모두는 천상으로 향한다.

 

라는 다른 두 가지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고 가만히 흡족하여 웃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계를 온전히 수지하지 못합니다.

제 배움은 미천하고 마음으로 입으로만 가르침을 따르지 수행으로 행동으로는 하나도 제 것으로

성취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생계조차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곤궁합니다.

저는 전생으로나 과거로나 많은 업을 지었고 그 괴보를 다 닦지 못하였음을 자각합니다.

저는 세간에도 출세간에도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처님의 법을 알게되엇으므로 수미산과 같은 선업공덕을 쌓고자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배워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고 성취하지 못한 것이 없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런 제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저는 세존께 믿음이 있고, 세존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저는 아직 존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몸이 무너진 뒤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이 생에서 배운 부처님의 법을 하나도 잊지 않고 태어나고

그 공부가 거기에서도 더 증진되기를 바랍니다.

차제천상으로 차례로 태어나서 구경의 지경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대한 청정한 믿음에 의지하여 거짓이 없으신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서원합니다.

 

 

 

이같이 받아 지녔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가르침을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

 

 

 

 

본경을 사경한 공덕 몫을

초기불전연구원 대림스님과 각묵스님께 회향합니다.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김해 장유 반룡산의 용이신 천신과 실상사를 지키는 천신들과 비인간들에게 회향합니다.

안양 마하시선원에 거하시는 우 또다나 사야도님과 일창스님께 회향합니다.

한국마하시선원과 그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께 회향합니다.

많은 중생들을 섭수하시는 도덕 높으신 보라신의 천신들께 회향합니다.

이 방과 이 인근에 거하는 천신들과 비인간들에게 회향합니다.

아버님과 어머님 제 가족들과 찬척들에게 회향합니다.

광주의 광제사를 지키는 천신들과 비인간들에게

곤궁에 처했을 때 떠나지 않으신 광제사 거사님과 홍로일점설님께 회향합니다.

또한 31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께 회향합니다.

 

평안하시기를,,, 행복하시기를,,,

장애없이 닙바나에 이르시기를,,,,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2016.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