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감의 비유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숲의 아나타삔디끼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마음을 옷감에 비유하여 설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
옷감이 더럽고 때가 묻어 있으면 잘 염색이 되지 않고, 희고 깨끗하면 물이 잘 들고 색이 선명한 것처럼
마음이 오염되면 악처(惡處)기 예싱되고, 마음이 오염되지 않으면 선처(善處)가 예상된다고
설하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냐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르쳐 주시는 소중한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세존께서는 원래 그 마음은 청정한 것이라는 류(類)의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오염되기도 하고, 닦아서 지극한 청정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니
실제 이것이 실상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청정히 하여 머문다고 할 때, 그 이치를 잘 꿰뚫어서 알고 실현하여야 그럴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한 때 청정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오염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이치에 맞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한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관대 그렇게도 중요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움직여서 그 존재의 정체성(identity)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그렇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상이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들었습니다.
또한 해탈과 관련된 정형구의 가르침에서 해탈의 주어는 '마음'입니다.
즉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에서,,,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며,
마음이 번뇌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마음의 취착이 없어지는 것이며,
마음이 오온을 바로 보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하지 않았던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그 마음이라는 것이 항속성을 가지는 실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순간적 실체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간주한다면, 그 존재의 그때의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오히려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시점의 어떤 작용 내지 기능으로서의 실체성만을
가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 예를 들면 께왓다경(D11)에서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여기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
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구경에 있어서 마음은 그 대상인 정신·물질과 함께
그 마음 자체가 혹은 그 마음이라는 작용이 소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자체가 소멸하거늘 그를 두고 실체라든가, 항속성이라든가, 그 실체의 본성이라든가,
진면목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2.
위에서 세존께서는 '오염된' 마음,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말씀하신 바
다음으로 세존께서는 마음이 무엇에 의해서 오염되는지 즉 마음의 오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욕심과 그릇된 탐욕, 악의, 분노, 적의, 모욕, 얕봄, 질투, 인색, 속임, 사기, 완고함, 뻔뻔함, 자만, 거만,
허영, 방일의 16가지가 '마음의 오염원'임을 설하시고,
(법의 상속자 경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설하실 때 위의 '악의'는 '성냄'이라고 하셨습니다.)
비구는 이들 16가지가 '마음의 오염원'임을 자각하여, 이를 '버린다'라고 설하셨습니다.
3.
이 다음 '마음의 오염원'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은 몇 가지 곡절을 거쳐 한층 더 심오해 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러한 마음의 오염원들을 버릴 때, 부처님, 법, 승가에대한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닌다라고 설하시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부처님의 제자임을 자칭하더라도 만일 그러한 16가지의 마음의 오염원을 움켜쥐고 버리지 못한 자라면 그는 삼보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개끗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마음의 오염원들을 어떻게 하여서라도 버리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는 삼보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로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4.
그 두 번째 곡절은 이어지는 법문에서 나타납니다.
- 그가 (각각의 오염원을 완전히 남김없이 버릴 수 있는) 그 각각의 도로써
- (그 오염원을) 1) 포기하고, 2) 토해내고, 3) 풀어주고, 4) 버리고, 5) 완전히 놓아버릴 때
- '나는 부처님께, 법에, 승가에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녔다라고 생각하면서'
- 결과에서 영감을 앋고, 원인에서 영감을 앋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희열을, 몸의 경안을, 행복을 얻고
마음이 삼매에 든다
고 설하시는 부분입니다.
- 그뿐 아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마음의 오염원들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것을 '반조하면서' 역시
결과에서 영감을 앋고, 원인에서 영감을 앋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희열을, 몸의 경안을, 행복을 얻고
마음이 삼매에 든다
는 것을 설하고 계십니다, 마치 해탈을 얻은 자가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와 같은
구조로 설하시는 것입니다.
욕심과 그릇된 탐욕, 악의(성냄), 분노, 적의,
모욕, 얕봄, 질투, 인색,
속임, 사기, 완고함, 뻔뻔함,
자만, 거만, 허영, 방일
의 오염원을 버릴 수 있는 '그 각각의 도'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해 볼 때
그 각각의 오염원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 그러한 오염원들의 본질은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인 오온(五蘊)을 지혜가 없어(무명)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하여 그것들이 항상 하지 않은 것(無常)인 줄, 괴로움(苦)인 줄, 그것에 내라
할 것인 없는(無我)인 줄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그것을 '나' 혹은 '나의 것'으로 거머쥠(사견)으로
인해,
- 갈애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욕심과 그릇된 탐욕, 속임, 사기라는 오염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 내라함(자만) 혹은 유신견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인 어떤 대상을 거머쥐고,
악의,(성냄), 분노, 적의, 자만, 거만라는 오염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 갈애와 자만이 더하여져 모욕, 얕봄, 질투, 인색, 완고함, 뻔뻔함, 허영이라는 오염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임을 볼 때, '그 각각의 도'라 함은 바로
무명을 벗어나는 사성제의 진리, 오온을 바로 보아 마음이 갈애와 취착에 벗어나게 하는 연기와
위빳사나의 도(무상, 고, 무아, 염오, 이욕, 소멸, 출리의 7가지 수관의 구족), 그리하여 '나'라는 족쇄를 풂인 유신견에서 벗어남, 그리고 그러한 실상을 꿰뚫어 앎에 머물 수 있는 삼매와 선정의 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오염원을 '포기하고, 토해내고, 풀어주고, 버리고, 완전히 놓아버렸다'는 세존의
설하심도 응당하거니와, 어떤 자가 그와 같은 도를 구족하여 마음의 오염원들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비로소 나는 삼보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개끗한 믿음을 지녔다라고 '생각하면서' 즉 새삼 자각하면서,
그러한 결과에서 영감을 얻고, 그러한 결과를 가능하게 했던 원인인 그 각각의 도에서 다시 영감을
얻을 뿐 아니라,
법과 관계된 환의, 희열 즉 출세간의 기쁨인 기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희각지)를 얻고, 경안각지를
얻어서, 족쇄에서 풀린 행복을 경험하고,
그 족쇄와 장애에서 풀린 그 마음은 순전하고 묶이거나 덮히거나 걸린 것이 없어
비로소 그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삼매) 할 수 있게 된다는 세존의 가르침은 다른 곳에서 설하심과
똑 같기도 하며 지당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음의 오염원에서 벗어나 이들을 완전히 놓아버린다는 것은 계(戒)를 구족한다는 것과도 동의어일
것인 바, 이 부분 가르침을 마무리 하시면서 세존께서는 '이같이 계(戒)를 지니고, 이같이 (삼매의) 법을 지니고, 이같이 통찰지를 구족'하는 비구는 흰쌀밥과 여러 가지 반찬을 먹더라도 그에게 장애가
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에서도 결국 '그 각각의 도'라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더럽고 때묻은 옷감이 맑은 물을 만났듯이, 금이 용광로를 만나 청정해지고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는 세존의 비유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두타행 자체보다는 그 두타행이 지향하는 지극한
청정을 향하는 그 마음이 있느냐가 더욱 소중한 것이다라고 새겨지게 됩니다.
5.
세번째의 곡절은 그와 같이 그 각각의 도로써 마음의 오염원을 완전히 놓아 버려,
영감과 법열과 환희와 몸의 경안과 행복과 마음이 삼매에 들 준비가 된 자는
그 다음에는 어떤 것을 하는가에 대한 세존의 법문입니다.
그것은 사범주(四梵住), 혹은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알려진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수행
입니다.
자애(慈), 연민(悲), 함께 기뻐함(喜), 평온(捨)의 마음가짐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고통 없는,
자애(慈), 연민(悲), 함께 기뻐함(喜), 평온(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무는'
그 수행임을 세존께서는 설하고 계십니다.
이 부분 가르침을 접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저들이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등을 생각할 때, 이 걸림과 경계가 없는 무한한 사랑(慈),
불쌍하게 여김(悲), 그들의 행복과 발전을 함께 기뻐함(喜), 갈애를 일체를 여읜 평온과 평화(捨)라는 세존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애경(metta sutta)에서 세존께서는 '어머니가 하나 뿐인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 다해 구하고
보호하듯, 모든 세상 모든 중생 나같이 여겨 한없는 자애를 베풀고 닦나니'라고 설하시는 것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범주를 닦는 자는 범천의 일원이 된다고 하거니와, 실제 이러한 마음가짐을 구족하고
사는 자라면 그는 신(神)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눈물나도록 고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욕계 천상 위에 더욱 고귀한 세상에 살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의 제자라면 그는 이같은 가르침에 따라 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온이라는
덕목과 결코 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에 따르면 삼매나 선정이나 통찰지
(panna)는 이러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보다 더 높은 수승한 배움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삼매나
선정이나 위빳사나를 통한 통찰지를 얻었다고 하는 자가 이 거룩한 네 가지 마음가짐과는 거리가 먼
태도나 눈빛이나 말과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얻음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사랑, 불쌍히 여김, 함께 기뻐함, 평화를 소중히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고,
말과 행동이 그에 상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나 그에 따른 희생정신 내지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수반되지 않을 수 없는 인욕바라밀을 제쳐 둔 채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제자됨을 논한다는 것을 그 근본부터가 아예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제 세존께서는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각각 자심해탈(慈心解脫), 비심해탈(悲心解脫),
희심해탈(喜心解脫), 사심해탈((捨心解脫)이라고 하시어, 비록 이것이 구경의 해탈인 vimutti는 아닐지라도 vimokkha라고 일컬어지는 해탈이며, 이러한 삶을 사는 자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
이 다음 세존의 가르침은 간명함에도 위에서 설하신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으로부터
한 단계를 더 위로 올라가 구경의 해탈과 열반을 설하시며 비약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이 있다.
저열한 것이 있다.
수승한 것이 있다.
이런 인식에 의지한 것보다 더 높은 벗어남이 있다.'
라고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1)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2) 존재의 번뇌(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3) 무명의 번뇌(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각주 주석서(MA.i. 176)의 인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감각적 욕망과 악의를 버림으로써 반대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가까운 원인을 얻은 그 불환자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의 상태를 보여주고,
이제는 그가 아라한과를 얻기 위한 위빳사나 수행을 먼저 보여준 뒤,
다음에는 아라한과의 증득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이 있다(atthi idam).'라고 시작하셨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그 불환자가 이렇게 거룩한 마음을 닦아서 그 거룩한 마음가짐에서 출정한 뒤,
그 거룩한 마음가짐의 법들을 정신(名, nama)으로 정의하고,
그들의 의지처는 심장토대(hadaya-vatthu)이고,
이것의 의지처는 근본물질들(bhutani)이라고
이러한 방식으로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의 법들(bhut-upadaya-dhamma)을 물질(色, rupa)로
정의하면서,
'이것이 있다(atthi idam).'라고 꿰뚫어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진리(苦諦, dukkha-sacca)를 정의한 것이다.
그 다음에 괴로움의 발생을 통찰하면서
'저열한 것이 있다.(atthi-hinam)'라고 꿰뚫어 안다.
이것은 일어남의 진리(集諦, samudaya-sacca)를 정의한 것이다.
그 다음에 버리는 수단을 숙고하면서
'수승한 것이 있다(atthi-panitam).'라고 꿰뚫어 안다.
이것은 도의 진리(道諦, magga-sacca)를 정의한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도로써 얻어야 할 경지(adhigantabba-tthana)를 숙고하면서
'이런 인식의 영역에 의지한 것보다도 더 높은 벗어남이 있다.(atthi uttari imassa sannagattasa
nissaranarh)'라고 꿰뚫어 안다.
이것은 내가 증득한(adhigata) 거룩한 마음가짐의 인식의 영역이라는 이것보다 더 높은 벗어남
(nissarana)인 열반이 있다고 꿰뚫어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소멸의 진리(滅諦, nirodha-sacca)를 정의한 것이다."
이 주석서의 주석은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존께서 다른 곳에서와는 다른 방법으로 아주 간략하고도 비약적인 방법으로 설하신 바,
그 뜻을 명확히 꿰뚫고 있다는 면에서, 또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의 해탈 내지 삼매를
증득한 자가 어떻게 거기로부터 다시 벗어나 이 모든 것 즉 정신·물질(名色)의 인지와
괴로움의 진리(苦諦)에 이르는 지 상세히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존의 설하신 바를 보면 이와는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이것이 있다.'는 이러한 사범주의 증득, 삼매, 해탈, 머묾이 있다로.
'저열한 것이 있다.'는 이러한 사범주의 머묾에서 다시 왜 이러한 머묾이 있는가? 혹은
이러한 머묾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으로 들어가서, 그러한 사범주의 머묾 역시
존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궁극의 것은 아니라는 관점에 이르러, 이것이 고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궁극의 관점에서는 '저열한 것이다.'라고 성찰하고,
생로병사의 출구 즉 '괴로움의 출구'가 있어야만 한다라는 관점에서
사범주의 머묾보다 더 '수승한 것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라고 성찰하고,
그리하여 연기법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지혜 즉 위빳사나의 지혜를 증득하여
그로써 오온(정신·물질)을 바로 보니, 이 모든 것, 혹은 오온, 혹은 이 모든 정신·물질은 괴로움이며,
그것이 일어나는 도리와, 그것이 소멸하는 도리와, 그것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리를 깨달았으며
그리하여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함을 증득하였다 즉,
'이러한 인식에 의지한 것보다 더 높은 벗어남이 있다.'라고 꿰뚫어 알았으며,
그리고 실제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 아래에 설하신 바와 같이 괴로움의 출구를, 윤회의 끝을,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을,
일어나고 사라짐의 소멸을, 적정을, 열반을 얻게 되는 것임을 설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이같은 열반의 증득을 '내면의 목욕으로 목욕했다.'라고 표현하시는 바,
위없는 목욕이요 때없는 목욕이요 완전한 목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31겁 전 웻사부 부처님을 '씻어낸 분'이라고 칭하심은 수사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7.
순다리까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순다리까 강에서 목욕한 사람의 악업이 소멸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순다리까 강의 언덕에서 불에 헌공하는' 자였는데,
그는 어떤 강에서의 목욕이 해탈을 주고, 공덕을 주고, 악업을 씻어내는 것이라고 믿는 바
세존께서는 바후까 강으로 목욕을 가지 않으시냐고 세존께 묻습니다.
이 장면은 인도 여행 자료에서 많은 사람들이 갠지즈 강이나 다른 강에서 목욕을 하는 불멸 2,559년이 지난 현재의 광경과도 오버랩되어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이같은 순다리가 바라드와자 바라문의 질문에 아래의 게송으로 답하시는 바,
너무나 아름답고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어 그대로 인용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바후까, 아디깍까, 순다리까
사릿사띠, 빠야까, 바후마띠 강에
어리석은 자 항상 뛰어들지만
검은 업은 맑히지 못한다네.
순다리까 강이 무엇을 하며
빠야까 강이 무엇을 하며
바후까 강이 무엇을 하겠는가?
(살생 등) 나쁜 업을 지었고,
잔혹한 행위를 했으며
악업을 지은 그를
(이 강들이) 맑히지 못한다네.
청정한 자에게는 나날이
팍구나의 보름날이요, 포살일이니
마음이 청정하고 몸의 행위 등이 깨끗한 자는
항상 서계를 구족한 것이라네.
바라문이여, 그대는 여기서 목욕을 하라.
모든 존재들에게 안은(安隱)함을 베풀라.
만일 그대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생명을 해치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고
믿음있고, 인색하지 않으면
가야 강에 갈 필요가 뭐 있겠는가?
우물도 그대에게 가야 강이 되리."
이 게송에서 제 마음을 울린 부분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악업은 언급하시면서 '잔혹한 행위'를 같은 반열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악하지 않은 저는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총명이 없는 저는 아닙니다만
왜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까라는데 생각이 이르면 전생의 과업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잔혹한 행위'는 악업으로, 어떤 이유로 화가 났더라도 그렇다고 하여 다른 이들을 잔혹하게 다루는
것은 그것이 마음이든, 말이든, 행동이든 그 자체로서 악업을 짓는 것이며 결코 좋은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기 전에 시비선악을 가리는 일에는 능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잔혹했던 인간의 역사나 잔혹한 일에 거리끼지 않는 혹은 점점 더 잔혹해져가는
세태를 보면서 잔혹하지 않음은 얼마나 큰 덕목인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악업을 씻어내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악업은 비록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그 과보를 다 받아야 끝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렇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세존께서는 이 「옷감의 비유 경」에서 그 방법을 명확하게 설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에게 안은함을 베푸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안은함을 베푸는' 그 구체는 무엇입니까?
바로 계(戒)를 자키고, 베푸는 것(보시)입니다.
즉 '생명을 해치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으며, 거짓말 하지 않고,
(유익한 법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인색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계(持戒)와 보시(布施)로
모든 존재에게 안은(安隱)함을 베푸는 것에 의해서
악업은 씻어진다고 세존께서는 설하신 것입니다.
주석서(MA.i.179)는 '안은함(khemata)'이란
두려움 없음(abhya), 이로움(hita-bhava), 자애로움(metta)를 말한다고 합니다.
다른 존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고, 그에게 이익되게 하고, 잔혹함이 아닌 자애로움에 바탕하여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이 그 존재에게 안은함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받아 지녔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법문을 해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
이 옷감의 비유 경을 사경한 공덕으로
제가 일체의 잔혹함을 면하고, 자애의 마음을 더하고,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의 해탈을 이루게 되기를,
모든 존재에 안은함을 베푸는 자가 되기를,
행복하고 위험없는 열반으로 장애없이 도착하기를.
수많은 생 윤회할 때
고통 위험 원수들과 나쁜 것들 안 만나고
모든 행복 축복둘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이 사경 공덕으로
부모, 스승, 친척, 친구, 자신보호
천신들을 시작으로 삼십일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
성취하길 원하면서 회향합니다.
또한 특별한 의미를 담아
보라산과 불모산과 반룡산의 천신들과 비인간들에게 회향합니다.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2015.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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