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야(Vinaya) 비구 227계목을 일견하게 된 이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봐야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는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보시, 지계, 수행을 아야기 하는데, 보시는 계(戒)를 지키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보시는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권력이든, 지혜든 베풀면 됩니다.
그러나 계를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재가신자이므로 오계를 지키면 됩니다. 그러나 그 오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윤 것인지
매일 실감합니다. 재가신자의 다섯 가지 계만 지켜져도 이 인간세는 천상의 셰계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승가라 할지라도, 나라를 불문하고, 한때 상당한 명성과 존경이 뒤따르던 스님이 나중에
들려오는 이야기를 보면 계를 지키지 못햇다라던가, 사실은 계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추문과 함께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재가자든 출가자든 계를 수지하고 지킨다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더욱 근본적인 것으로 그러한 계는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에 이르르게 되면
계는 지키면 유익하므로 지켜야 할 것이라는 것 이외에도
그 자체로 심오한 통찰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심오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반열반경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계(戒)를
깨닫지 못히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5)
이 부분은 제게 깊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존께서는 4아승지 10만겁을 정각(正覺)을 이루시기 위해 십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당신은 계(戒) 정도는 기본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예외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것도 반열반하시기 얼마 전에 비구들을 다 모으신 자리에서 당신 자신을 포함해서
'계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어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윤회하였음을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계(戒)는 지켜져야 할 것이이지만, 지켜지기 이전에 '깨달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또한 이어서.
"이제 성스러운 계를 깨닫고 꿰뚫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잘라졌고,
존재로 인도함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천명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 앞뒤를 읽어보면,
계(戒)는 삼매(定)과 통찰지(慧)와 해탈(解脫)과 그 반열을 똑 같이하여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의 요소로 부처님은 말씀하고 가르치시고 천명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를 깨닫고, 꿰뚫는 것'이라고 표현됩니다.
따라서 그 계(戒)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경장의 결집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세존께서 반열반하신 뒤, 오백 아라한이 모여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할 때
마하깟사빠 장로는 비구들에게 묻는 장면입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합송해야 합니까?'
법입니까 율입니까?'
비구들은 대답하였다.
'마하깟사빠 존자시여,
율은 부처님 교법의 생명(ayu)입니다.
율이 확립될 때 교법도 확립됩니다.
그러므로 율을 첫 번째로 합송해야 합니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452)
라고 문답하는 것입니다.
오백 명의 아라한들은 모두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신 분들이고, 일체 갈애를 멸진하신 분들이며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한 분도 예외없이 '율은 부처님 가르침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때 합송된 그 율(律)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대전기경을 보면서 떠올랐던 생각입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 이 91겁 전 위빳시 부처님의 이야가는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전해 줍니다.
그 중에서 매년마다 신들이 소리를 내어 '존자들이여, 이제 몇 년이 지났습니다.이제 계목을 배우기
위하여 수도 반두마띠로 가야합니다.'라고 비구들에게 알리고, 그래서 매 6년째가 되면
어떤 자들은 자신의 신통의 힘으로, 어떤 자들은 신들의 신통의 힘으로
같은 날에 계목을 배우기 위해서 수도 반두마띠로 모였다는 것이며,
이때 위빳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계목을 가르쳤다리고 하시는 부분입니다.
'1) 관용이 (그 특징인) 인욕은 최상의 고행이고
2) 열반은 최상이라고
부처님들은 설하신다.
3) 남을 해치는 자는 출가자가 아니며
4) 남을 괴롭히는 자는 사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5) 모든 악을 행하지 않고 (諸惡莫作)
6) 유익함을 구족하며 (衆善奉行)
7)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교법이다.(是諸佛敎)
8) 비방하지 않고
9) 해치지 않고
10) 계목으로 단속하며
11) 음식에서 적당함을 알고
12) 외딴 거처에 머물며
13) 높은 마음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교법이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160)
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부분은 이 자체로도 이같이 게목을 가르쳤다고 하시는데, 그 중에서도 다시
'계목으로 단속한다.'라고 되어있어 이 빠띠목카의 가르침은 전체적인 계목의 개요이며,
그 세세한 '계목'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구나라고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달리 게목이라는 것이 있을 법한데 과연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알게 된 것입니다만 이 위빳시 부터님의 계목을 위한 게송은 Ovada Patimokkha라고 하여,
빠띠목카입니다만 매일마다 잘로 스님들께서 스님들에게 하는 계목의 근본을 전하고 합송하여
교계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네 번째로는 맛지마니까야를 사경하면서 「원한다면 경」(M6)를 사경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세존께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바,
" 계를 잘 지키며 머물러라.
빠띠목카(戒目)를 지키고, 빠띠목카의 단속으로 단속하여 머물러라.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추고,
조그만 허물에도 두려움을 보며,
학습계목을 잘 받아지녀 공부지어라."
(초기불전연구원 맛지마니까야「원한다면 경」(M6) 2절)
라고 하시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도대체 그 '빠띠목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는 이 경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번역하신 대림스님의 주석에 의하면
"'빠띠목카(계목, 戒目)'는 patimokkha를 음역한 것이다.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상좌부의 비구계목은 모두 227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로 되어 있어
관련자료를 찾아서 일견하게 된 것입니다.
위나야(Vinaya) 비구 227계목을 일견하고 난 저의 소회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솔직히 위나야는 율장으로 알고 있고, 경장에 못지 않은 심오한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기도 한 면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재가신자들의 오계와 그 뿌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
비구들의 생활, 그리고 승단을 청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규율을 다루고 있다는 것,
각각의 계율들은 모두 그때마다 어떤 사건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제정되었다는 것,
스님들의 생활과 밀접한 가사, 발우, 거처, 탁발공양, 행동 등에 대해서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성행위나 여성들과 접촉에 있어 아주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바라이죄로 일컬어지는 빠라지까의 죄 즉 성행위, 도둑질, 살인, 거짓으로 도과를 얻었다고 하는 죄는
다시 비구가 될 수 없음을,
또한 상가디세사 13계와 같이 20명이상의 대중공사에 의해서만 비구의 자격이 회복되는 등,
범계외 출죄의 여러 가지 규정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포살과 자자가 실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일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장과는 별도의 또 다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청정함에 마음챙기는 자라면, 이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도닦음의 길에
들어선 자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설하신 것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사실 이것말고 더 무엇을 설하셔야 하셨겠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놀라고 마는 것입니다.
2559년전 그때는 TV도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바뀐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를 계율도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디가니까야 계온품에 또 다른
니까야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1) 짧은 길이의 계 26가지, 중긴 길이의 계 10가지, 깅 길이의 계 7가지
도합 43가지 계의 뜻과 정신으로 계를 구족하고, 2) 감각기능의 단속을 구족하고, 3)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구족하고, 4) 필수품만으로 만족하며, 5)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에 전념하고,
6) 다섯 가지 장애를 통찰하고 벗어나며, 7)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고,,, 정도만의 가르침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다음 바른 삼매, 바른 통찰지의 가르침까지 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소나단다 경에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십니다.
"계를 통해서 청정하게 되는 것이 통찰지이고
통찰지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것이 계입니다.
계가 있는 곳에 통찰지가 있고
통찰지가 있는 곳에 계가 있습니다.
계를 가진 자에게 통찰지가 있고
통찰지를 가진 자에게 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계와 통찰지를 제일로 한다고 일컫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손으로 손을 씻고, 발로 발을 씻는 것과 같이"
(http://blog.daum.net/ibakdal/17369937)
계목(戒目)을 일람한 저의 마음은 한결 가볍습니다.
미뤄논 숙제를 한 마음이요,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을 세세히 잘 새겼기에 부담을 덜은 마음입니다.
이 위나야 227계는 그 원문을 '실론섬'님이 운영하시는 다음 블로그 '붓다의 옛길'에서 받아왔습니다.
귀한 자료를 올려주신 실론섬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문 출처: http://blog.daum.net/gikoship/15782218)
또한 실론섬님께서 자료를 올리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비구계율 227을 보시게 되는 분들은 결코 이것을 다른 스님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비방하지 말라.'라고 하셨고 이것도 빠리목카입니다.
또한 번역된 내용을 고치시는 분들은 임의로 고쳐서 사용하시지 말고 인도에서
공부히고 계사는 디라왐사 스님께 먼저 상의하라는 것입니다. 디라왐사 스님은 과천 보리수선원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마하시 선원의 원본을 번역해 주신 디라왐사 스님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공덕으로 디라왐사 스님께서 평안하시기를,,, ((()))
거룩한 계(戒)
일체가 눈멀다.
이같이 거룩한 계에 귀의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
2015. 8. 17
'Vinaya-비구 227계(戒) > 출죄(出罪)와 포살 外'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살과 자자 (0) | 2015.08.16 |
---|---|
ĀPATTI DESANĀ (Confession) (0) | 2015.08.16 |
오와다 빠리목카 (Ovada Patimokkha)- Daily advice to bhikkhus (0) | 2015.08.16 |
포살(布薩) PATTHANĀ(祈願文) (0) | 2015.08.16 |
범계(犯戒)의 형태와 출죄(出罪)방법 (0) | 2015.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