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야시경은
각묵스님의 주석에 따르면 「천궁사주석서」에 본경은 세존께서 입멸하신 後에 설해진 것이라
하며, 아라한으로 알려진 꾸마라깟사빠 존자가 세따바라는 꼬살라들의 도시에 머물 때
그곳의 태수인 빠야시와의 대론을 전하고 있습니다.
빠야시 태수는
1) (죽고난 다음) 저 세상 같은 것은 없다.
2) 화생(化生)하는 중생 같은 것은 없다.
3) 선행이나 악행의 업(業)에 따른 열매나 과보(果報) 같은 것은 없다.
와 같은 소위 '삿된 견해'(邪見)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빠야시 태수의 견해에 관하여
빠야시 태수가 가진 '삿된 견해(邪見)'은 소위 '믿음'이라는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보거나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의
문제인데,,,
저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을 보면, 빠야시 태수가 별난 사람이라서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깥으로는 '믿는다'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기 눈으로 보고 들은 적이 없기에 저 세상, 화생, 과보 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이 불가피하게 일어나지만 그것을 개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의 결과인 '믿음'이라는 것으로
덮어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1) 저 세상이란 없다. 2) 화생하는 중생이란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으로 끝이며
3) 선행이나 악행의 업에 따른 열매나 과보도 없다와 같은 견해는
우리 옆에 흔히 있는 보편적인 견해 중의 하나이고, 그렇게 생각하든 아니면 그런 것들이 실제한다고
믿든 안믿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삼마삼붓도(알아야할 모든 법을 스스로 깨달으신 분)이신 세존과 같으신 분이
여러 법문을 통해서 수없이 저 세상, 화생, 업의 과보가 있다라고 하셨고, 그와 다른 견해애 대해서는
이를 '삿된 견해'라고 천명하신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거짓이 없고 사소한 것이라도 허언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런 견해도 취할 수 있고 저런 견해흘 취할 수도 있다는 선택이나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즉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믿고 안 믿고는
그 다음의 문제이며 사실임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생(化生)에 관하여는 세존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의 긴 경'(M12. 33)에서 사리뿟따에게 4가지 태생을 설하시면서
"사리뿟따여,
무엇이 화생인가?
사리뿟따여,
1) 신들, 2) 지옥에 태어난 자들, 3) 몇몇 인간들, 4)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을
화생(化生)이라 한다."
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찌보면 기이하기조차 합니다.
1) 욕계천상이나 색계 혹은 무색계의 '신들'(존재들)을 신이라고 하는 바 그들은
거친 물질의 세계(欲界), 혹은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 내지 물질을 초월한 세계(無色界)의 존재
들이며, 경을 보면 욕계천상의 경우 그들도 먹고 마시며 여자를 얻고 맺어지고 자식이 있고,
그들의 세상에도 코끼리, 새와 같은 축생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세상의 신들이 화생(化生)이다,,,,,
2) 흔히 들어온 '지옥에 태어난 자들'이 화생이라는 것도 의아합니다.
지옥에서 갖가지 고통받는 여러 중생들이 사람과 같이 실체적인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실상은 화생이라는 것입니다.
3) '몇몇 사람들'은 화생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드마삼바바가 연꽃 위에서 아이로
화생(蓮化生)하여 났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만,,, 몇몇 사람은 화생이라면,,,
그렇다면 그 화생으로 태어난 자는 부모가 없이 어머니의 태를 빌리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4) 또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이라 할 때 그 몇몇 악처는 우리가 보고 있는 축생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아귀계나 아수라계가 될 터인데, 그리하면 이 인간계 말고는 전부 화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검색을 해보니 아난타님의 '담마의 향기'라는 블로그에
마하시 사야도의 관련 법문이 있어 옮겨봅니다. ( http://blog.naver.com/ananta2841/191451737 )
"사대왕천과 기타 천신들은
재탄생 의식이 일어남과 동시에 70가지 물질들로서 7개의 다른 깔라빠(kalapa) 즉,
눈, 귀, 코, 혀, 몸(kayadasaka), 성(bhavadasaka), 토대의 십 원소(vatthudasaka)들과
일제히 나타난다. 천신들의 눈과 귀 등의 크기에 따라 같은 종류의 깔라빠가 무수히 많다.
선정(Jhana)의 성취 정도에 따라 세 가지 1선정의 영역, 세 가지 2선정의 영역,
세 가지 3선정의 영역, 광과천(vehapphala ), 정거천(suddhavasa)에 태어나는 범천들에게는
코,혀,몸 그리고 성의 십 원소는 없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 십 원소 물질 깔라빠(눈,귀,토대)와 한 가지 구 원소 깔라빠(navaka kalapa),
이 네 가지 다른 깔라빠, 즉 39가지 물질이 재탄생 의식과 함께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한 네 종류의 깔라빠가 몸의 십 원소(kayadasaka)의 성질을 띤다.
범천의 몸 역시 천신의 몸에 몸의 십 원소 깔라빠(kayadasakakalapa)가 퍼져 있듯이,
생명과 9가지 물질이 퍼져 있다.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Asanna satta)에 태어나는 범천은
재탄생의 순간부터 마음이 없다.
그들은 오직 범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생명의 구 원소 깔라빠(jivitanavakakalapa)만 있다.
마음과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upa)이 없기에,
그러한 범천은 아무것도 모르고,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나무로 만든 입상과 같다.
이러한 범천보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무색계 범천이다.
그들은 아무런 물질도 없이 연속적으로 새롭게 되는 마음과 마음요소들로서
무색계에서수 천 겁을 산다.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고,
오직 신통력을 지닌 붓다와 고귀한 자들만이 이해하는 것들이다.
항상 불타고 있는 지옥에 있는 자들과 굶주리고 있는 귀신들은
모태나 썩은 곳에서도 태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업으로 인하여 화생(化生)으로 나타난다.
앞서 이야기한 천신들처럼, 그들은 7개의 깔라빠인 70 가지 물질을 일제히 만들어 낸다.
통상적으로 그들은 불완전한 시력이나 청각 등을 지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나쁜 감각대상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괴로움을 받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이 법문을 보면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는 알 수 없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눈에 보듯이 알 수 있으며, 저렇게 상세하게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듭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緣起)의 법을 따르면 중생이 죽더라도 그 앞에 끝없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은
정신·물질은 알음알이(識)를 조건으로 있고, 다시 그 알음알이는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있게되어
이와 같이 '알음알이는 다시 정신·물질에 되돌아 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르면 그것이 사람이든, 화생이든 무엇이던 간에
어떤 존재가 만나게 되는 세상 혹은 그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것이 거친 물질의 세상_욕계이던,
미세한 물질의 세상_색계이던, 물질의 경계를 넘어선 세상_무색계이던 간에)
그가 '존재의 근거를 부수어 해탈'한 자가 아니므로 아직 그의 윤회가 계속되므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지극한 청정(열반)에 이르지 못하여 아직 그의 알음알이가 멸(滅)하지 않았고,
그 알음알이(mano, 心, 意, 識, consciousness)가 남아 있으므로 인해 그 알음알이로 인한
정신·물질의 세계가 그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라고 밖에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그의 업(業)에 따라 그 부류의 무리들을 따라 어떤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그 세상에서
그 세상에 존재하는 무리가 갖추는 존재의 구성요소(오온, 蘊)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라 함은 이미 어떤 세상(界)를 상정하는 것이고,
어떤 세상(界)를 상정한다함은 바로 그 세상에 걸맞는 오온(蘊), 혹은 감각기관(感官)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의미히고, 거꾸로 이야기하면 어떤 존재는 그 세상에 걸맞는 온, 혹은 감각가관을
(업의 결과물로써)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그는 그 온, 혹은 감각기관으로
그 세상을 감득(感得)하면서 '아, 이것이 세상이구나.'라고 혹은 '이것만이 세상이며 내가 감득하지
못하는 다른 세상이란 허황된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같은 세상을 살더라도 박쥐는 박쥐로서 보는 세상이 있고, 지렁이는 지렁이가 감득하는 세상이
있고, 연어에게는 연어의 세상이 있으나 사람이 그 세상을 알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들에게는 자기에게 감득되는 세상만이 세상이지 다른 세상을 볼 수도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한국마하시선원장이신 우 또다나 사야도께서는 아비담마 강론을
하시면서 높은 세상의 존재들은 낮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만 낮은 세상의 존재들은 더 높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떤 존재 앞의 세상(界)란,
오직 그에게 주어진(혹은 타고난 오온 내지 감관으로)관측, 감득하는 함으로써만 존재하는
한 개의 질서계이며, 그러한 관측이나 감득이 있음으로써만 그 세상이나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지
만일 그러한 관측이나 감득이 없다면 그 세상이나 세계도 존재할 수가 없고, 설사 있더라도
그 존재에게는 무의미하다 할 것입니다.
관측, 감득함으로써만 (부딪힘에 의해서) 물질은 존재하며 관측, 감득함으로써만 (이름지음에
의해서) 정신은 존재합니다. 존재의 오온이나 감관을 반연하여 세상(정신·물질)은 존재하며,
세상(정신·물질)은 어떤 오온이나 감관을 반연하여 존재할 뿐이니
세존께서 대인연경(D15.22)에서와 같이
"이러한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1) 이름짓는 토대가 생기고,
2)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3)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
4) 통찰지의 영역이 생기며,
5) 이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정신·물질은
이 알음알이와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와 같이 어떤 세상 즉, 정신·물질이란 어떤 존재의 알음알이(mano, 心, 意, 識, consciousness)와
더불어 그 존재가 가진 오온의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세상(정신·물질), 알음알이, (감관의 관측이나 감득에 따른)오온을 한 물건처럼 꿰뚫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전해지는 말씀 그대로 이러한 연기의 법에 의해서 '세상의 장막을 장막을 벗겨 버리신' 것에
(대전기경 D14. 1.31) 다름아니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어떤 원인을 결과로 태생적으로 존재하게 된 한 개의 존재가 '나'(나의 태생적 오온)라는 것과
바로 그 '나'있음을 전제로 펼쳐지는 세상을 분리하여 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동전의 앞뒤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을 나는 원인을 결과로하여 동전으로 태어났는데
동전의 앞면이 오온이라면 동전의 뒷면이 내 앞의 세상이구나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도약입니다.
세존께서는 이 둘은 모두 괴로음을 끝내지 못한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응당 이들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오직 괴로음이 일어나고 오직 괴로움이 소멸한다.'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며, 다른 견해를 가졌디면 그것은 사성제를 바로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잘못된 견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므로 세존께서 눈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中]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깟짜나곳따경 S12:15)
와 같이 설하시는 것은 희론이 아닌 것이며,
어떤 존재를 가정했을 때 자신을 포함한 그 앞의 모든 세상(reality)이란 것은
오로지 그의 감각기관 내지 오온의 관측, 감득을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그에 관계없이 객체적·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만일 그에게
그러한 감각기관 내지 오온을 일어나게 한 그의 알음알이가 멸하면 그 세상 혹은 그 정신·물질계까지
멸하므로 세상(reality)이 (객체적·독립적으로) '있다'고 할 수 없으며,
그러나 그 존재가 관측, 감득하는 한 그 존재에게는 (비록 그로 인해 관측, 감득되는 것이지만)
엄연히 그 정신·물질계는 그에게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는 바로 그 세상에서 명(命)이 다하도록
그 감관과 그 오온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된 것이어서 이를 두고 없다고 해서도 안되며,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응당 이와 같이 있다·없다라는 양극단을 여의는 것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며,
만일 다른 견해를 가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라 하심은 응당하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빠야시 태수가 가진 견해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마음 속을 뒤집어 봅니다.
저 세상이, 화생, 선행과 악행에 따른 과보가 있다고 판단하는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지?
모든 부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대는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가?'라고 아난다 존자에 물으신 것과 같이(대반열반경 3.39)와 같이
물으신다면 저는 선택적이라 할 수도 있는 종교적인 믿음을 떠나서 제가 지금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공부와 제 자신의 통찰력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고, 저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바 그분의 깨달음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분 세존의 말씀과 가르침에 반할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 세상과, 화생과, 선행과 악행의 과보에 대해서
그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 빠야시 태수와 꾸마라깟사빠 존자의 대론(對論)
1) 달과 태양의 신은 이 세상의 존재인가 저 세상의 존재인가?
→ 저 세상의 존재이다.
2) 부탁을 해도 악처에 떨어진 자 中 누구도 돌아와서 알려주는 자가 없지 않은가?
→ 지옥지기들로부터 돌아와 알려줄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다.
3) 부탁을 해도 선처에 태어난 자 중 누구도 돌아와서 알려주는 자가 없지 않은가?
→ 누구도 선처에서 분뇨구덩이와 같은 인간계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
4) 삼십삼천에신으로 태어난 자 중 누구도 돌아와서 알려주는 자가 없지 않은가?
→ 돌아와서 알려주려해도 인간의 수명이 달라 이미 죽는다.
그대는 이를 믿지 못한다고 하지만 눈 먼 자가 형상이나 색깔을 보지 못하는 자와 같이
보지 못할 뿐인 것이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청정한 하늘눈(天眼)으로는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5) 죽어서 더 졿다면 왜사문들은 자살하지 않는가?
→ 익지 않은 것을 설익게 하지 않으며 익기를 기다린다. 이는 다른 중생과 세상에 이익이 된다.
6) 통에 가둬서 구워서 죽여보면 목숨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지 않는가?
→ 그대가 잠자며 꿈을 꾸면서 다른 세상에 머물 때
옆에서 지키는 자들이 그대의 목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는가?
7) 숨을 못 쉬게 죽여놓고 그를 저울에 달아보면 더 무겁고 뻣뻣하지 읺은가?
→ 이 몸은 바람과 온기와 알음알이와 함께 살아 있을 때 더 가볍고 유연한 것이다.
8) 사람을 아무런 상처를 내지 않고 죽여놓고 보면 목숨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도
그는 다섯 감관과 그 대상이 있어도 감각장소를 경험하지 못하지 않는가?
→ 고동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고동을 부는 사람이 있어야 소리를 내는 것처럼
이 몸은 살아있을 때 여섯 감관으로 감각기능을 한다.
9) 사람을 산 채로 해부해서 죽여보면 목숨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지 않는가?
→ 부시막대를 해체한다고 해서 불을 얻지 못하고 불을 지펴야 불이 붙는 것과 같다.
10) 지금에 와서 견해를 바꾸면 여태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나쁜 평판이 생길테니
삿된 견해를 고수하겠습니다.
→ 약카의 이야기를 믿은 대상(隊商)처럼 어리석거나 들은 것을 그대로 믿는 자는 참변을 당한다.
→ 비가 오는데 돼지밥을 얻었다고 똥을 머리에 이고 가려는가?
→ 어리석은 노름꾼과 같이 독이 발린 패를 계속해서 먹으려는가?
→ 같은 길을 떠나서 삼껍질을 지고 오는 자와 금을 지고 오는 자가 있듯이
어리석음을 버리지 않고 고수하는 자는 좋은 기회가 와도 삼껍질을 계속 지고 다니는 자와
같다.
이와 같은 대론을 통해 빠야시 태수는 삿된 견해를 버리고 삼보에 귀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큰 제사를 지내려 하며 어떻게 지내야 하느냐고 꾸마라깟사빠 존자에게 묻습니다.
꾸마라깟사빠 존자는 생명들을 죽이지 않고 제사에 동참하는 자들도 팔정도를 지키는 사람들이어야
결실과 이익이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3. 보시에 대한 가르침
이에 빠야시 태수는 사문, 바라문, 탄원자, 여행자, 가난한 자, 거지들을 위해 보시를 베풀지만
1) 마지 못해서 보시를 베풀고, 2)자기 손으로 직접 건네지 않고, 3) 충분히 배려하지 않고,
4) 내버리듯이 보시를 행하여
죽은 뒤 사대왕천의 동료로 태어나 (하잘 것없는) 텅 빈 세리사까 궁전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 보시를 행하게 된 웃따라 바라문 학도는
1) 정성들여 보시를 행하고, 2) 자기 손으로 직접 직접 보시를 베풀고, 3) 충분히 배려하면서 보시를
베풀고, 4) 소중히 여기면서 보시를 베풀어
죽은 뒤 삼십삼천 신의 동료로 태어나게 됩니다.
가왐빠디 존자는 득도 後에도 이전의 습관으로 세리사까 궁전에서 한낮의 머묾을 하셨던 바
거기서 빠야시 태수를 만나 그의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또한 빠야시 태수로부터 세상에 돌아가면
보시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전해달라는 청을 받고 그 이야기를 세상에 돌아와 전하였다는 내용이
이 경의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받아 지녔습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모든 세상 모든 중생 행복하기를,,,,,닙바나 성취하시기를,,,,,
나무석가모니불 ((()))
2013. 12. 9
'디가니까야(長部) > D23.빠야시경-삿된 견해·바른 보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가왐빠디 존자의 전언 (0) | 2010.12.05 |
---|---|
18. 빠야시 태수의 보시 vs 웃따라 학도의 보시 (0) | 2010.12.05 |
17. 바른 제사 - 좋은 땅에 씨를 심고 제때 비가 와야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 (0) | 2010.12.05 |
16. 빠야시 태수의 귀의 (0) | 2010.12.05 |
15-2. 지고왔다하여 삼껍질을 지고가는 자와 금으로 바꿔서 지고가는 자: 4) 두 동료의 비유 (0) | 2010.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