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문경(帝釋問經, Sakkapanha Sutta)은
세존께서 라자가하 웨디야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무실 때
삼심삼천(도리천) 신들의 왕인 삭까(인드라)가 '오랫동안 가졌던 의심과 의문의 쇠살들'을
세존께 묻고 답을 구하여 예류자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묵스님의 주해를 따르면,
본 제석문경은 상좌부 전통에서는 수행과 관련된 중요한 경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경을 통해서 삭까가 예류자가 된 것으로 나타나 있고,
불교에서 설하는 예류자와 같이 사쌍팔배에 속하는 성자(ariya)가 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본경이 심도있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본경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삭까에 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기이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삭까는 신들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부처님을 뵈어오던 자이며 보시자이며 외호하는 자였는데
본경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삭까가 마치 이전에는 부처님을 친견하지 않은 것처럼
큰 염원으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주석서(DA.iii.697∼98)를 따르면
삭까가 그의 수명이 다해가는 전조를 보았으며, 놀랍고 두려워서 세존을 찾아뵙고
세존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존의 설법을 듣고 예류과를 얻고서,
그 자리에서 죽어서 즉시에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데 아래와 같이 전해집니다.
"삭까는 예류자가 된 후 세존의 앞에서 죽은 뒤, 어린 삭까가 되어 다시 태어났다.
신들이 죽을 때는 (화현을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가고 오는 경우를 남들이 알지 못한다.
마치 등불의 불꽃과도 같다. 그래서 다른 신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삭까는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알았고,
세존께서는 지혜를 잃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셨나니
이처럼 두 사람만이 알았다."(DAT.iii.732)
라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석서의 설명은 이 경의 마지막, 삭까가 세존의 설법으로 인해 자신이 얻은
여섯 가지 이익을 게송으로 읊으면서 그 첫 번째 이익으로서
"저는 여기 이곳 인다살라 동굴에서
신의 상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삭까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는 첫 질문을 할 때만 하더라도 세존을 '존자시여'(marisa)라고 부르다가
세존의 법문을 듣고 확신이 생기고 예류자가 된 다음에는 그 호칭을 '반떼(bhaate)'라고 합니다.
또한 그 자신은 그의 게송을 따르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의심과 의문을 품고, 오랜 세월 동안 여래를 칮으며 방랑하였'고
전생의 공덕으로 인해 심십삼천 신들의 왕으로 태어났지만 예류도를 성취한 자도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세존의 법문을 듣고 그 감격과 기쁨으로 부처님을 징송하는데,
세존께서 그대가 어떤 이익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느냐고 묻자 그는 여섯 가지 이익을 보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하면서
1) 그 자리에서 죽어서 다시 삭까로 태어난 것,
2) 그리하여 이번 삭까로서 죽을 때가 되면 미혹하지 않고 모태를 찾게 된 것,
3) 그리하여 사람으로 태어나면,부처님의 교법을 좋아하며 마음챙기고 알아치리면서 머물게 된 것,
4) 그리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면,더욱 완전한 지혜를 원하면서 인간으로는 마지막 생을 마칠 것,
5) 그리하여 다음 생을 인간으로 마치면, 다시 삼십삼천 신들의 왕인 삭까로 태어날 것,
6) 그리하여 삭까의 상태에서 죽어서는 정거천에 태어나서
무번천에서 천 겁, 무열천에서 2천 겁, 선현천에서 4천 겁을, 선견천에서 8천 것,
마지막으로 색구경천에서 1만6천 겁을 머물게 된 것
의 여섯 가지 이익이 그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저뿐 아니라 누구라도 삭까는 세존께 도대체 무엇을 물었는가 혹은
도대체 그가 '오랫동안 가졌던 의심과 의문의 쇠살들'이란, 내지 그를 그렇게 '목적을 달성
하지 못한 채 방랑'하게 했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라는 의문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내용을 돌이켜보면, 다른 경에서 보듯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법이 드러난 것도 아닌 것처럼,,
어찌보면 평범하기도 한 질문들인데,, 왜 그러한 것들이 삭까에게는 그렇게도 큰 의문이요
의심이었던가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의 질문들은 무엇이었던가?
1) 왜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용들과 간답바들과 그 이외의 모든 무리들은
마음이나 말로는 '원망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머무르리라.'고 하지만 실제는 그렇게 지내게 되는 것인가?
→ 그것은 '질투와 인색에 속박되어서' 이다
2) '질투와 인색'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 질투와 인색은 좋아하고 싫어함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함은 열의(慾) 때문에
열의는 일으킨 생각(尋) 때문에
일으킨 생각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 때문에
3) 그렇다면 어떻게 도닦아야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을 소멸할 수 있습니까?
→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평온이 그것이다.
이들은 각각 그것을 행할 때
해로운 법이 증장하는 것, 유익한 법이 증장하는 것들이 있어, 그러한 것을 알게 되면
해로운 법이 증장하면 행하지 말고, 유익한 법이 증장하면 받들어 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있으면서 하는 것보다 더욱 수승한 것이다.
4) 그렇다면 어떻게 도닦아야 '계목의 단속'을 위해서 도닦는 것입니까?
→ 몸으로 짓는 행위, 말로 짓는 행위, 마음으로 짓는 추구가 있는 바,
이들은 각각 그것을 행할 때
해로운 법이 증장하는 것, 유익한 법이 증장하는 것들이 있어, 그러한 것을 알게 되면
해로운 법이 증장하면 행하지 말고, 유익한 법이 증장하면 받들어 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5) 그렇다면 어떻게 도닦아야 '감각기능의 단속'을 하는 것이 됩니까?
→ 눈이, 귀가, 코가, 혀가, 몸이, 마노가
각각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이 증장하는 것, 유익한 법이 증장하는 것들이 있어, 그러한 것을 알게 되면
해로운 법이 증장하면 받아들이지 말고 , 유익한 법이 증장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다.
6) 왜 사문들의 교설은 서로 다르고, 어떤 사문·바라문이 구경의 목적을 성취합니까?
→ 세상은 여러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바,
중생들은 그 요소가 어떤 것이든지 아무거나 천착한 후
그것만을 완강히 움켜쥐고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한 비구들만이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얻으며, 구경의 목적을 얻는 것이다.
가 바로 그 질문들과 답입니다.
여기에는 사성제의 깊은 도리나, 윤회의 도리나 그것을 꾾어내는 연기의 깊은 도리나,
오온을 바로 보아 자아인가 아닌가의 자아론이나, 존재론이나, 인식론이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4선4처 삼매의 증득이나 통찰지의 증득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칠각지나 사념처가 혹은
37보리분법 중의 어느 하나가 깊이 있게 설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삭까는 예류도를 증득하고 큰 감격과 기쁨과 앞으로의 성취를 보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의 존재로서 긴 윤회의 끝에서
종국적으로 큰 방향을 틀어잡았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쌓은 공덕과 보시로써 삼심삼천 신들의 왕이라는 영광을 가지게 된 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을 좋아하고 부처님과 승가를 지키고 보시하는 일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디고 하여 그 마음에 부처님에 대해서나 법에 대해서 마음에 결코 지울 수 없게
그 무엇이 결졍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죽음을 보고 급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되었을 때
그는 위와 같은 질문들을 하고 마음에 결정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짚고 넘어가야 할 일화는 바로 이 경의 앞 부분에 소개되는 '고빠까의 일화'가 그것입니다.
재가 청신녀였던 고삐까가 죽은 뒤 삭까의 아들 고빠까로 태어난 바, 사대왕천의 약카로 태어난
세 비구를 경책하여 그 중 두 비구가 크게 반성하고 '감각적 욕망의 위험'을 보고 '마음챙김을 다시
가져' 정진한 결과 범천의 몸을 얻은 것을 보고 절박한 마음이 생긴 바가 있고, 삭까가 인다살라
동굴에 나타났을 때 그는 '우리도 그런 법을 얻기 위해서 왔다.'고 세존께 고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먼저 그는 긴 윤회와 영광의 끝에서 도대체 세상은 왜 이런 것일까라는 것에 대한 답을 얻습니다.
질투와 인색이라는 것으로부터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에 의해서 그러한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이 그 질문의 끝인 마지막 답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일으킨 생각, 열의, 좋아하고 싫어함, 질투와 인색이
그리하여 원망과 싸움과 적대가 어느 세상이든지 펼쳐진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대인연경에서 9가지 갈애의 실상 즉,
갈애로부터 추구가, 얻음이, 판별이, 욕망이, 탐착이, 거머쥠이, 인색이, 수호가, 모든 사악한 법들이
펼쳐지는 바, 갈애, 추구, 얻음은 별론으로 하고 1) 판별은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과
일으킨 생각에, 2) 욕망은 열의에, 3) 좋아하고 싫어함은 탐착에, 4) 질투와 인색은 거머쥠과 인색에 각각 짝지어 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다음은 한 개의 도약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소멸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 주석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은
papanca(사량분별) + sanna(인식) + sankha(헤아림) 으로 분석해서 옮긴 것으로
주석서는 이것을 .
'취하고(matta) 방일한(pamatta) 모습에(akara) 다다른다는(papana)' 뜻에서
사량분별(papanca)이라고 하며,
희론(戱論)이라고 한역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량분별이 확장되고 전이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는 불교술어이며.
한편 '사량분별 없음 (nippapanca)'은
열반의 여러 동의어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는 것이며,
아비담마의 가르침에 따르면
빠빤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갈애, 자만, 사견으로부터 벗어남을 말하는 것이며,(VbhA.508)
사량분별은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1) 갈애(tanha)에 의한 사량분별과,
2) 자만(mana)에 의한 사량분별과,
3) 사견(ditthji)에 의한 사량분별이다.(DA.iii.721)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까가 세상의 모순에 대한 질문을 끝낸 뒤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소멸을 물은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바
하나는 그러한 세상에 대하여 드디어 염오를 느꼈다는 것이고
둘은 드디어 그러한 세상을 끝내기 위한 도(道)을 물은 것이 됩니다.
그는 그 질문으로 처음으로 진지하게 도를 묻게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삭까의 첫 번째 질문 끝에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이라는 답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삭까의 가슴에는 큰 울림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세존께서 삭까에게
'그대는 전에도 이러한 만족과 기쁨을 얻은 경우가 있는가?'라고 삭까에게 상기시켰을 때
그는 전에도 그러한 적이 있었다고, 그것은 아수라와의 전쟁에서 이겼을 때이며,
그러나 그것은 폭력과 무력을 수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정한 기쁨으로 인도하지 못했지만
이제 세존의 말씀을 듣고 출세간의 즉 1)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 2) 욕망이 및바램, 3) 소멸
4) 고요함, 5) 최상의 지혜, 6) 바른 깨달음, 7) 열반으로 인도하는 기쁨을 얻었다고 말하는 장면
입니다.
그는 말하자면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을 가진 자로서는 최고의 자였다가
절박한 의문의 끝에서 그것이 아닌 세상에 비로소 결정하여 눈을 뜬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부분이 하나의 도약이며 곡절이라고 봐도 좋은 이유는
그 출세간의 도(道)닦음에 대한 부처님의 첫 번째 대답이 바로 '느낌에 마음챙김'(受隨念)이라는
것입니다. 그 질문과 대답에 의해서 도닦음이라는 큰 문에 비로소 문을 연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정신적인 즐거움, 괴로움, 평온에 대하여 그것들이
해로운 법 즉, 재가에 바탕을 둔 것은 받를어 행하지 않고
유익한 법 즉, 출리(出離)에 바탕을 준 것이면 받들어 행한다는
큰 원칙과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가 그러한 큰 원리를 배우고 '제대로 도닦고자'하는 마음이 일었을 때
(그가 전에도 들었음직한) '계목의 단속'과 '감각기능의 단속'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묻는 것은
당연한 흐름으로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항상 1) 계의 구족, 2) 감각기능 단속의 구족, 3)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구족, 4) 필수품만으로 만족, 5)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함, 6)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벗어남이
그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즉 '계목의 단속'과 '감각기능의 단속'에 있어서도 세존께서는 그 상세가 아니라
큰 원칙과 원리로써 삭까를 쉽게 가르치고 계심을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해로운 법이 증장하면 행하지 말고, 유익한 법이 증장하면 받들어 행하라는 큰 원칙입니다.
그는 마지막 질문에 의해서 그가 지향해야할 끝을 얻게되고 혼란을 제거합니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이 구경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한' 자만이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얻으며, 구경의 목적을 얻는 것이라는
세존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삭까는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고, 그는 그로써 질문했으며,
비로소 도(道)닦음의 문에 확고하게 들어서서 그 감격과 환희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생뚱맞은 것이 아니었고 예류자의 기쁨이란 그렇게 큰 것이고 광휘로운 것임을
또한 공감하게 됩니다.
세존께서 대인연경에서와 같이 '자아의 관찰'을 설하실 때도
(예를 들면 http://blog.daum.net/ibakdal/17371169 과 같이)
혹은 본경에서처럼 도닦음의 문(門)을 말씀하실 때, 부차적인 설명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곧 바로 '느낌에 마음챙김'을 말씀하고 계신 것을 마음에 담습니다.
몸(身)에, 느낌(受)에, 마음(心)에, 법(法)에 다 마음챙겨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지만
느낌에 마음챙김이야말로 가장 쉬운 것이요, 가장 가까운 길이요, 그 모든 것의 첫 단추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소위 '나'라고 하는 것이 '대상'을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세상이라면
근(根, 여섯 감각기관)이 경(境, 여섯 대상)을 만나서(觸) 식(識, 알음알이)가 지어지는 삼사(三事)의 화합(觸)이 바로 그것이며, 그 중 처음은 바로 '느낌(受)'이니까 말입니다.
제석문경 사경을 마치면서,,,
큰 것을 하나 얻어 가졌습니다.
이 사경을 한 공덕 몫을
이런 좋은 가르침의 계기를 만들어주신
삭까를 우두머리로 하는 삼십일천의 모든 신들에게 회향합니다.
그리고 삭까의 아들 고빠까님과
마음챙김과 정진으로 삼십일천에서 범보천의 몸을 받으신 두 분 비구께 회향합니다.
'삭까의 질문'을 잊지 마시고
모든 분들이 닙바나 성취하시기를,,,,,,
나무 석가모니불 ((()))
201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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