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35. 어리석음 - 멍한 상태, 잘못된 견해, 사성제에 어두움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4. 14. 16:13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슬기롭지 못한 둔한 마음을 가리킨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아둔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집착하고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부정하려 든다.

 

그 결과 꿀 속에 빠져드는 파리처럼 혹은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탐냄과 성냄의 덫에 걸리고 만다.

 

탐냄과 성냄이 발생하는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3가지 독(三毒)’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띠붓따까’에서는 어리석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어리석음은 불행을 만든다.

 어리석음은 마음을 교란시킨다.

 

 사람들은 이것이 안으로부터 발생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리석음에 빠진 이는 이로움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음에 빠진 이는 법을 보지 못한다.

 

 어리석음에 지배된 사람에게는 어두움과 암흑만이 있게 된다.

 

 어리석음을 제거한 사람은 어리석음에 빠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러한 사람은 떠오르는 태양이 암흑을 제거하듯이 모든 어리석음을 제거한다.”

 

 

 


어리석음이란 빨리어(Pāli)모하(moha)라고 한다. 이것은 ‘멍한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어리석음의 원래 용도는 정서적·감정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주변의 현상에 대해 무감각하기 십상이다. 심지어는 스스로의 행동이나 처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정서적 차원에서 출발하여 인지적 측면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실제로 이것은 무지(aññāṇa)와 동일시되며, 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 혹은 무명(avijjā)과 혼용되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잘못된 견해로서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 보시의 공덕도 없고,

 2) 공양의 공덕도 없고,

 3) 제사의 공덕도 없고,

 4) 선행이나 악행의 결과도 없고,

 5)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6)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고,

 7) 윤회도 없고,

 8) 뛰어난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말하는 훌륭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도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견해는 단순히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며 바른 가치를 저버리게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패륜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능동적인 힘을 지닌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편 무명과 동일시되는 어리석음사성제(四聖諦)에 어두운 경우를 말한다.

 

 

1) 괴로움에 대해 무지하고,

 2)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고,

 3)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무지하고,

 4)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에 대해 무지하고,

 

 5) 과거에 대해 무지하고,

 6) 미래에 대해 무지하고,

 7) 과거와 미래에 대해 무지하고,

 8) 연기(緣起)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한 것,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우리를 괴로움의 현실에 머물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붓다는 이처럼 치명적인 덫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괴로움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에게 괴로움 제거를 위한 처방은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을 인식하는 이는 언젠가는 그것의 소멸을 향해 나서게 될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의 극복은 스스로의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이켜 반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사슬로부터 빠져 나가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으로 이야기되는 열반(nibbāna) 또한 이것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리불(Sārīputta)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벗이여,

 탐냄의 소멸성냄의 소멸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