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23. 초기불교의 업(業)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3. 13. 13:06

 

초기불교에서는 업을 어떻게 보았는가.

 

인도철학사에 등장했던 다른 종교적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초기불교 또한 업과 윤회를 인정했다.

 

사실 업과 윤회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업이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를 일컫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미래의 삶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상속자이며,

 업을 모태로 삼아 태어나며,

 또한 업을 의지처로 삼는다.”

 

이렇듯 업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업과 윤회는 괴로움에 노출된 현실의 세계를 대변하는 두 용어이다.

한편 해탈과 열반이란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에 다름이 아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업과 윤회에 의해 속박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해탈·열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데 목적을 둔다. 초기불교는 이러한 기본 입장에 근거하여 숙명론과 대조를 이루는 방식으로 업에 대한 가르침을 구체화한다.

 

과거에 지어 놓은 업을 인정하되 오히려 그것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는 업의 과보를 부인할 수 없는 윤회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만,

그것을 넘어선 해탈·열반의 경지를 희망할 수 있게 된다.

 

 

 


‘마하깜마비브항가숫따’는 초기불교의 업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가르침을 전한다.

 

거기에서 붓다는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좋거나 나쁜 세상에 ‘이미 태어났다(upapanna)’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업에 의해 현재나 미래에 어떻게 ‘태어난다(uppajāti)’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특정한 결과를 이미 낳은 업만을 확정된 사실로 인정할 뿐,

미래나 현재의 삶까지 그것에 의해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되,

조금이라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설령 잘못된 행위를 했더라도 스스로를 방기해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아직 결정되지 않은 현재와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업을 하나의 조건으로 이해하게 되고, 또한 미래의 삶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는 계기를 마련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분수와 역량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곧 업의 결과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 안주하라거나 혹은 미래에 대한 꿈을 접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현실 여건을 잘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살아나가라는 뜻이다.

 

 

 


한편 붓다의 업 해석은 내면적인 의도를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예컨대 불건전한 의도를 가졌다면 아직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업이 발생한다고 가르쳤다.

 

이점은 구체적인 행위가 있어야만 업의 과보가 뒤따른다고 보았던

바라문교라든가 자이나교의 형식주의적 업 해석과는 전혀 다르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내면의 의도(思, cetanā) 자체를 업으로 규정하였다.

의도를 지님으로써 신체와 언어와 마음에 의한 업이 발생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업 관념은

외부의 형식적인 행위만이 아닌 내면의 심리까지를 포함하는 내용적 전환을 이루게 된다.

 

 

 

 

내면의 의도를 중요시한 붓다의 업 해석은

‘베다’의 제식주의라든가 자이나교의 금욕주의가 갖는 형식주의적 업 해석과 분명한 차별성을 지닌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밖으로 드러난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부여받는다.

 

내면의 속삭임은 본능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이상적 삶의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의도로서의 업은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분명히 해주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닦음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또한 이것은 어떠한 여건에도 굴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