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21. 제식주의의 업(業)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3. 12. 18:27

 

 

제식주의에서는 업을 어떻게 보는가.

 

초기불교가 출현하기 이전 고대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바라문교에서는 제사의 실천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바라문교에서는 격식에 따라 잘 치른 제사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합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제사는 인간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효력을 지닌 것으로 믿어졌다.

 

세습적인 제관이었던 바라문교의 사제들은 엄격한 절차의 제사의례를 주관하였다.

그들은 제사의 집행을 통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제사는 원래 신에 대한 공경과 숭배에서 기원하였다.

신의 은총을 통해 소원을 성취하려는 의도가 제사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제사 관념이 정교해지기 이전에 신봉되었던 신들은 제사의 형식에 묶인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인간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 수 있었다. 따라서 설령 훌륭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더라도 제사 자체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은 언제나 제사의례 너머에 머무는 초월적 존재였다. 신은 인간 위에 군림하였고,

인간으로서는 그의 능력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그러나 제사의 의례가 전문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신 관념에 변화가 발생한다.

정교한 절차에 따라 바르게 치러진 제사는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생각이 우세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신은 제사의례에 종속되고 만다.

이제 신이라는 존재는 제사의 효력을 보존하였다가 미래의 어느 때에 그 영향력을 전달해주는 비인격적·중성적 원리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세계의 운행에는 초월적인 인격신이 개입될 여지가 없게 되었으며,

제사라는 행위에 의한 결과만이 법칙적으로 뒤따를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인도철학에서 나타난 최초의 업의 관념이다.

 

 

 


이러한 제식주의의 업 관념은 초기불교가 출현하기 직전에 등장했던 ‘우빠니샤드’ 문헌에 의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다듬어진다.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제사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육체적·정신적 행위가 우주의 운행에 관여된다고 보았다.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과 개체적 자아인 아뜨만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의 교설이 그 근거가 되었다.

 

범아일여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의 행위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반영하며 또한 그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굳이 제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행위는 자연의 운행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빠니샤드’의 가르침은 제사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위가 미래의 삶을 규정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예컨대 “이 세상에서 좋은 행위를 행한 자들은 바라문이나 끄샤뜨리야나 바이샤의 모태와 같은 좋은 모태에 들어갈 것이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의 행위는 미래의 태생과 가문을 결정한다고 믿어졌다.

 

이와 같이 ‘우빠니샤드’에 이르러 업 관념은 더욱 분명해졌고, 또한 윤회사상과도 밀접히 결부되었다. 바로 이것이 보다 정교한 형태로 나타난 바라문교의 두 번째 업 관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업 관념들은 행위의 형식적 측면에 치우치는 약점을 보인다.

형식주의적 업 해석에 따르면 과거에 지은 업은 현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삶 전체를 규정한다.

 

이것은 제사를 통한 것이든 제사라는 형식을 벗어난 일상의 행위이든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과거 업의 결과를 수용하는 것뿐이다. 이점은 고대 바라문교와 그 전통을 계승하는 힌두교가 카스트제도에 의한 신분의 차별을 용인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형식주의적 업 관념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의도(思, cetan-a  )  를 업이라고 말하나니,

 

 의도하고 난 연후에

 신체언어마음에 의한 업을 짓는다.”

 


붓다는 우리가 지닌 내면의 의도를 일깨움으로써

우리의 삶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