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그때 청신사 위사카는 담마딘나 비구니를 만나러 갔다.
가서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절을 올리고 한곁에 앉았다.
한곁에 앉아서 청신사 위사카는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 비구니 담마딘나는 출가전에 위사카의 아내였다.
출가하여 각고의 정진끝에 아라한이 되었다.
이 소방등경을 통해서 여장부인 그분의 출중한 통찰지를 알 수 있다.
출가전 부부지간이었던 위사카와 담마딘나의 이 대화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2.
"스님, 자기 몸[有身], 자기 몸이라고들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자기 몸이라고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들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을 자기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色取蘊]과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와
취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取蘊]와
취착하는 상카라들의 무더기[行取蘊]와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들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을 자기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장하십니다, 스님."이라고 청신사 위사카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설명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드리고 담마디나 비구니에게 다음 질문을 했다.
3.
"스님, 자기 몸의 일어남, 자기 몸의 일어남이라고들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자기 몸의 일어남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 저기서 즐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2)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3)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를 일러 자기 몸의 일어남이라 하셨습니다."
4.
"스님, 자기몸의 소멸, 자기몸의 소멸이라고들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자기 몸의 소멸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 갈애가 남김없이 빛 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없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를 일러 자기 몸의 소멸이라 하셨습니다."
5.
"스님, 자기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자기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고들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자기 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
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를 일러 자기 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 하셨습니다."
6.
"스님, 그러면
이 취착이 바로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입니까,
아니면 취착하는 무더기들과 이 취착은 다른 것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 취착은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이 아니기도 하고,
취착하는 무더기들과 이 취착은 다르지 않기도 합니다.
도반 위사카여,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에 대한 열렬한 탐욕(chandaraaga)이
거기에 대한 취착입니다."
7.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유신견(有身見, 자기 몸이 있다는 견해)은 있게 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지 못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隨觀],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느낌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인식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인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상카라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상카라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상카라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상카라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도반 위사카 여,
이와 같이 유신견이 있게 됩니다."
8.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유신견(有身見)이 없게 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친견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며, 성스러운 법에 잘 인도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여서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느낌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지 않습니다.
인식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인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상카라를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상카라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상카라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상카라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와 같이 유신견은 없게 됩니다."
9.
"스님, 그러면 무엇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八支聖道]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것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10.
"스님, 그러면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는 형성되었습니까[有爲],
아니면 형성되지 않았습니까[無爲]?"
"도반 위사카여,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는 형성되었습니다."
11.
"스님, 삼학(三學)이 (원문은 tayo khandhaa = 三蘊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학으로 옮겼다.)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 안에 포함됩니까,
아니면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가 삼학 안에 포함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삼학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 안에 포함되지 않고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가 삼학 안에 포함됩니다.
도반 위사카여,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의 이 [세 가지] 법은
계온(戒蘊, siila-kkhandha)에 포함됩니다.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의 이 [세 가지] 법은
정온(定蘊, samaadhi-kkhandha)에 포함됩니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의 이 [두 가지] 법은
혜온(慧蘊, pan∼n∼aa-kkhandha)에 포함됩니다."
12.
"스님, 그러면
무엇이 삼매[定]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에 [드는] 표상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에 [드는] 장비이고
어떤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마음을 한 끝에 [두는] 것[心一境] 이 삼매입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 삼매에 [드는] 표상입니다.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이 삼매에 [드는] 장비입니다.
여기서 이런 법을 받들어 행하고 닦고 많이 짓는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13.
"스님, 그러면, 얼마나 많은 상카라들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 가지 상카라들이 있으니,
몸의 상카라[身行], 말의 상카라[口行], 마음의 상카라[心行]입니다."
14.
"스님, 그러면
무엇이 몸의 상카라[身行]이고,
무엇이 말의 상카라[口行]이고,
무엇이 마음의 상카라[心行]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이 몸의 상카라이고,
생각일으킴[尋]과 추론적 사유 [伺]가 말의 상카라이고,
인식[想]과 느낌[受]이 마음의 상카라입니다."
15.
"스님, 그러면
왜 들숨과 날숨이 몸의 상카라이고,
생각일으킴[尋]과 추론적 사유[伺]가 말의 상 카라이고,
인식[想]과 느낌[受]이 마음의 상카라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며 이들 현상은 몸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상카라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尋] 추론하여 사유[伺]하고 나서 말을 내뱉습니다.
그래서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는 말의 상카라입니다.
인식과 느낌은 마음의 부수물[心所]입니다.
이들 현상은 마음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식과 느낌은 마음의 상카라입니다."
16.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 도달하게[等持] 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에 도달한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에 도달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에 들고 있다.' 라거나
'나는 상수멸에 [이미] 들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렇게 마음을 먹은 (원문은 bhaavita, 닦은 것이란 뜻이다.) 것이
그를 그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17.
"스님, 그러면
상수멸에 도달한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먼저 소멸합니까?
몸의 상카라[身行]입니까 , 아니면 말의 상카라[口行]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상카라[心行]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에 도달한 비구에게
먼저 말의 상카라가 소멸하고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고)
그 다음이 몸의 상카라이고 (들숨과 날숨)
그 다음이 마음의 상카라입니다." (인식과 느낌)
18.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서 일어나게 됩니까?"
"도반 위 사카여,
상수멸에 도달한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에서 일어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에서 일어나고 있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에서 [이미] 일어났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이 그를 그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19.
"스님, 그러면
상수멸에서 일어나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먼저 일어납니까?
몸의 상카라[身行]입 니까, 아니면 말의 상카라[口行]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상카라[心行]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에서 일어나는 비구에게
먼저 마음의 상카라가 일어나고 (인식과 느낌)
그 다음이 몸의 상카라이고 (들숨과 날숨)
그 다음이 말의 상카라입니다."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고)
20.
"스님, 그러면
상수멸에서 일어나는 비구를 몇 가지 감각접촉[觸]이 닿게 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에서 일어나는 비구를 세가지 감각접촉이 닿게 되는데
공한 감각접촉과, 표상이 없는 감각접촉과, 의향이 없는 감각접촉입니다."
21.
"스님, 그러면
상수멸에서 일어나는 비구에게 마음은 기울고 기대고 향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에서 일어나는 비구에게
마음은
벗어남(viveka)으로 기울고 (주석서에서는 이 viveka는 바로 열반이라고 설명함)
벗어남을 기대고
벗어남을 향합니다."
22.
"스님, 몇 가지 느낌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23.
"스님, 그러면
어떤 것이 즐거운 느낌이며,
어떤 것이 괴로운 느낌이며,
어떤 것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몸이나 마음에 속하는
즐겁고 좋게 느껴진 것이 즐거운 느낌 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몸이나 마음에 속하고
괴롭고 좋지 않게 느껴진 것이 괴로운 느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몸이나 마음에 속하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게 느껴진 것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24.
"스님, 그러면
즐거운 느낌은 무엇이 즐거움이며 무엇이 괴로움입니까?
괴로운 느낌은 무엇이 즐거움이며 무엇이 괴로움입니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엇이 즐거움이며 무엇이 괴로움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은
머무르면 즐거움이요 변하면 괴로움입니다.
괴로운 느낌은
머무르면 괴로움이요 변하면 즐거움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지혜가 있으면 즐거움이요 지혜가 없으면 괴로움입니다."
25.
"스님, 그러면
즐거운 느낌에는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까?
괴로운 느낌에는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는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에는 욕망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다.
괴로운 느낌에는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 해있습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다."
26.
"스님,
모든 즐거운 느낌에는 욕망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까?
모든 괴로운 느낌에는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까?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욕망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괴로운 느 낌에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지는 않습니다."
27.
"스님, 그러면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무엇을 버려야합니까?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무엇을 버려야합니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는 무엇을 버려야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욕망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합니다.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합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는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합니다."
28.
"스님,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욕망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합니까?.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혐오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합니까?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욕망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혐오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 pii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것으로서 욕망을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욕망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이렇게 반조합니다.
'성자들이 증득하여 머무는 그런 경지(aayatana)를
언제나 나는 참으로 증득하여 머물게 될 것인가?'라고.
이처럼 위없는 해탈들에 대한 염원(piha)을 일으킨 그에게
염원을 조건으로 정신적 고통이 일어납니다.
이것으로서 그는 적의를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捨念淸淨]
제4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이것으로서 그는 무명을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29.
"스님, 그러면 무엇이 즐거운 느낌의 짝(pat*ibhaaga)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괴로운 느낌이 즐거운 느낌의 짝입니다."
"스님, 그러면 무엇이 괴로운 느낌의 짝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이 괴로운 느낌의 짝입니다."
"스님, 그러면 무엇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짝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무명(avijjaa)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짝입니다."
"스님, 그러면 무엇이 무명의 짝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영지(靈知, vijjaa)가 무명의 짝입니다."
"스님, 그러면 무엇이 영지의 짝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해탈이 영지의 짝입니다."
"스님, 그러면 무엇이 해탈의 짝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열반이 해탈의 짝입니다."
"스님, 그러면 무엇이 열반의 짝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 질문은 도가 지나친 것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한계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왜냐하면
청정범행은 열반으로 스며들고, 열반을 구극으로하고
열반을 그 끝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그대가 원한다면 세존을 뵈러가서 세존께 이 뜻을 여쭈어보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설명해주시는대로 그대로 호지하십시오."
30.
그러자 청신사 위사카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말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절을 올리고 오른 쪽으로 돌고서 세존을 뵈러갔다.
세존을 뵙고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곁에 앉았다.
한곁에 앉아서 청신사 위사카는 담마딘나 비구니와 대화했던 것을 모두 있는 그대로
세존께 아뢰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청신사 위사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1.
"위사카여, 담마딘나 비구니는 현자이다.
위사카여, 담마딘나 비구니는 큰 통찰지를 가졌다.
위사카여 ,
그대가 만일 나에게 이 뜻을 물었더라면
나 역시 이와 같이 담마디나 비구니가 설명한대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로 호지하라."
* 출처: '무명에서 지혜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virtual-eye/8505064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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