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다여,
'감각적인 느낌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감각적인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 그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것을 당신의 자아라고 여기겠는가?'
이 세 가지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경험하고 있을 때는 다른 두 가지 느낌은 없다.
세 가지의 감각적인 느낌은 변하기 쉽고(無常),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되어 파괴되기 쉽고, 시들어버려 단절되기 쉽다.
이 세 가지의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하나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 느낌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느낌이 사라진 후에는 자신의 자아도 사라져버렸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삶에서 자신의 자아가 변해버리기 쉽고,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뒤범벅되어 있으며,
생겨났다가는 소멸해버리는 것으로 이미 간주해 버린 것이 된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사람이
'감각적인 느낌은 자신의 자아가 아니며,
감각적인 느낌에 의해서는 자신의 자아에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자 그럼 당신에게서 감각적인 느낌이 없는 곳이 있다면,
그때 당신은 이것이 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지도 모른다.
'감각적인 느낌은 정말로 나의 자아는 아니다.
하지만 감각적인 느낌에 의해서 자아에 다가갈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느끼는 주체는 나의 자아이며,
나의 자아가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감각적인 느낌이 모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자 느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후, 어떤 느낌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말할 수 없습니다.'"
'눈(眼根)이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눈에는 생겨남도 소멸함도 있음이 확인된다.
(눈이 자아라고 주장한다면) 자아에는 생겨남도 소멸함도 있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눈(眼)이 자아이다'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요컨대 눈은 무아(無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형태나 색깔(色, 境)은 무아이며,
눈의 의식(眼識)은 무아이며,
눈의 접촉(眼觸)은 무아이며,
(눈의 접촉에 의해 생긴) 느낌(受)은 무아이며,
(느낌에 의해 생긴) 갈애(渴愛)는 무아이며,
내지,
마음(意根)은 무아이며,
마음의 대상(法,境)은 무아이며,
마음의 의식(意識)은 무아이며,
마음의 접촉(意觸)은 무아이며,
(마음의 접촉에 의해 생긴) 느낌(受)은 무아이며,
(마음에 의해 생긴) 갈애(渴愛)은 무아이다."
<역주 :
이 경전은 이른바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감각대상(六境), 여섯 가지 의식(六識)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접촉(六觸), 감각적 느낌(六受), 갈망(六愛)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기법(緣起法)의 체계가 생멸 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에는 자아가 없다는 무아의 입장을 밝힌 경전이다.>
"비구들이여,
배움이 없는[無聞] 범부는
(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四大]에 의해 이루어진 육신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마음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육신은
1년 동안 지탱되며, 2년 동안 지탱되며, 3년, 4년 5년, 또는 10년,
길게는 100년 이상이나 지탱된다.
하지만 마음(心), 의(意), 의식(識)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루 밤, 하루 낮 동안에도 하나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끊임없는 생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순간 순간 변화하는 마음보다 육체를 자기라고 보는 것이 낫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결국 이 육신도 끊임없이 생멸 하는 것을 파악하면,
육신이 자아라는 견해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 어떤 물질적인 현상(色)이라도,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내적인 것이건 외적인 것이건,
거치른 것이건 미세한 것이건,
저열한 것이건 뛰어난 것이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이 물질적 현상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
[오온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앎이 있을 때,
'자아'이니 '나의 것'이니 하는 견해가 없어진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괴로움이 있을 뿐, 괴로움을 받는 자는 없다.
행위(業)가 있을 뿐, 행위를 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
道가 있을 뿐, 그 道를 가는 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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