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정각지 (定覺支 samādhi)
여섯 번째의 깨달음 인자는 집중[定 samādhi]이다.
고요해진 마음만이 명상주제에 쉽게 집중할 수 있다.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집중통일된 마음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 nīvaranāni]를 정복해낸다.
정(定)은 마음의 안정이 강화된 상태로,
비유하자면 바람 없는 장소에 놓인 등잔의 불꽃이 전혀 깜박거리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을 올바로 고정시켜 동요나 교란됨이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정(定)인 것이다.
올바른 정 수행은 마치 꼼짝 않고 저울대의 균형점을 잡고 있는 손과 같아서
마음과 그에 부수하는 정신작용들을 균형 잡힌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정정(正定)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번뇌를 몰아내고 마음의 청정과 온화함을 가져다준다.
집중된 마음은 감각대상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는다.
가장 높은 경지의 집중은 아무리 불리한 조건 아래에서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정(定)을 제대로 닦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계(戒)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부터 키워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생활에 자양분을 공급하여
그것을 한결같고 고요하고 균등하며 풍요한 만족감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계이기 때문이다.
반면, 제어되지 않은 마음은 보잘 것 없는 사소한 활동으로 자신을 소진시켜버리고 만다.
깨달음을 열심히 추구하는 수행자(yogī)에게 닥치는 장애가 물론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집중적 사고譯22) 곧 ‘사마디[定]’를 방해하고 해탈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들이 있다.
그것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 nīvaraṇa]譯23)라 부른다.
빠알리어로 ‘니와라나’는 정신적 발전[修行 bhāvanā]을 방해하거나 막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철저히 가두고 가로막고 방해하기 때문에 장애라 불리는 것이다.
이들은 해탈로 가는 문을 닫아버린다.
다섯 가지 장애는 다음과 같다.
1. 관능적 욕망 (kāmacchanda)
2. 염오 또는 악의 (vyāpāda)
3. 마음과 그 부수적 정신작용들의 혼미 또는 완미 (頑迷) (thīnamiddha)
4. 들뜸과 회한 또는 동요와 걱정 (uddhaccakukkucca)
5. 의심 또는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관능적 욕망(kāmacchanda), 다시 말해
원초적인 욕망의 충족이나 소유를 향한 강한 갈증은
사람을 끝없는 윤회에 묶는 첫 번째 사슬이자 궁극의 해탈로 가는 문을 닫는 무서운 장애
이다.
관능적 욕망이란 무엇인가?
이 갈애(taṇhā)는 어디서 생겨나고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 것인가?
「염처경」(Satipaṭṭhāna Sutta)에 따르면
“기쁘고 즐거운 것이 있는 거기에 이 갈애는 생겨나고 뿌리내린다.”
형태[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관념[法]은 기쁘고 즐겁다.
거기에서 이 갈애가 생겨나고 뿌리를 내린다.
갈애가 어떤 연유로든 방해를 받으면 욕구불만과 분노로 바뀐다.
『법구경』을 보자.
"갈애에서 슬픔이 생기고
갈애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갈애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도 두려움도 없도다."26)
* 『법구경』 게송 216
두 번째 장애는 염오, 증오, 악의라고 옮길 수 있는 ‘위야빠다(vyāpāda)’이다.
사람은 즐겁지 않은 것과 불쾌한 것에 대해 자연히 반감을 갖게 되고
또 그것들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게 되면 괴롭고,
미워하는 이와 함께 있게 되어도 마찬가지로 괴롭다.
먹고 마실 것이 입에 맞지 않거나 맘에 안들 때,
보기 싫은 행실을 접했을 때 등 수많은 사소한 것들까지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잘못된 생각, 체계적이지 못한 사고가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증오는 증오를 낳고 시야를 가린다.
그것은 마음과 그에 부수하는 정신적 작용들을 온통 왜곡시켜서
진리에 눈뜨는 것을 방해하고 자유를 향한 길을 막는다.
우리가 짓는 그 모든 전도몽상의 으뜸가는 원인은 무명이다.
이 무명에 근원하는 탐욕과 진심(瞋心)이
바로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에 투쟁과 불화를 야기하는 원인인 것이다.
세 번째 장애는 한 쌍의 불선, 즉 티나(thīna)와 밋다(middha)로 이루어진다.
티나는 마음이 깨나른하거나(lassitude) 음울한(morbid) 상태이고,
밋다는 부수적 정신 작용들의 음울한 상태이다.
(이하 이 둘을 한역에 따라 혼침(昏沈)이라 부르기로 한다 - 역자)
이 혼침을 어떤 이들은 육신의 나태함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쌍을 이룬 불선에서 자유로운 아라한들, 저 완벽한 분들도
육체적 피로는 역시 겪기 때문이다.
이 혼침은 정신적 발전을 지체시킨다.
그것이 영향을 끼치면 마음은 너무 굳어서 바를 수 없는 버터나
숟가락에 들어붙는 당밀처럼 굼떠진다.
정신적 발전을 가로막는 해로운 요소가 바로 이 해이함이다.
해이함은 점점 더 심해지다가 끝내는 무감각한 무관심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 무기력한 성격은 도덕적 올바름과 자유로움을 치명적으로 가로막는다.
이 짝을 이루는 불선을 극복하려면 정신적 노력, 즉 ‘위리야(viriya)’를 통해야 한다.
네 번째 장애 역시 ‘웃다짜(uddhacca)’와 ‘꾹꾸짜(kukkucca)’란
두 결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들뜸과 회한 또는 동요와 걱정으로 옮길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흥분되어 있고 들떠 있다.
죄를 범하거나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 이 장애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다.
들뜨고 불안정한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뒤흔들린 벌통 속에서 정신 못 차리는 벌떼와 같다.
이런 정신적 뒤흔들림은 수행을 방해하고 향상의 길을 막는다.
속태움 역시 해롭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범한 나쁜 행위에 대해 계속 후회만 한다.
이런 일은 부처님께서 잘한다 하시지 않을 일이다.
우유를 엎지르고 나서 아무리 한탄해야 소용없는 일이니까.
그런 실수를 계속 후회만 하고 있느니
차라리 그런 불선한 행위를 반복하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좋은 일을 빠뜨리고 못했다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해서 계속 상심한다.
이 또한 쓸데없는 일이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건널 생각은 안하고
저 건너편 강둑 보고 이리로 오라는 것만큼이나 헛되다."譯24)
* 『장부』13「떼윗자경」Ⅰ권, 244쪽
선행을 미처 못 한 것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느니
오히려 선한 행위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뒤숭숭함 역시 정신적 향상을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장애는 ‘위찌끼차(vicikicchā)’, 곧 의심이다.
접두어 ‘위(vi)’가 ‘찌끼차’에 붙어서 이루어진 빠알리어 ‘위찌끼차’는
문자 그대로 ‘고칠 약이 없음’을 의미한다.
어쩔 줄 몰라서 곤혹을 겪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것이며
그 의심을 떨쳐내기 전에는 계속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이런 정신적 가려움증에 걸려 있을 동안은
내내 냉소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이는 향상에 가장 해로운 일이다.
주석가들은 이 장애를 ‘분명하게 결심하지 못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장애에는 선정(jhāna)에 들 수 있는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의심도 포함된다.
여기서 특히 우리는 불법이나 승가와 전혀 무관한
비불자나 요가 수행자들까지도 의심이라는 장애를 억누르고 선정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부언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선정을 성취하는 수행자는
다섯 가지 선지[五禪支- 선정의 요소, 특성]로
그 다섯 장애를 모두 제쳐낸다. 즉
관능적 욕망은 마음을 한 곳에 모음[心一傾性 ekaggatā]으로써,
염오는 기쁨(pīti)으로써,
혼침은 생각을 어떤 대상에 향하게 함[尋 vitakka]으로써,
들뜸과 회한은 즐거움[樂 sukha]으로써,
의심은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로써 젖혀 버린다.
그러나 선정을 성취하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선정은 직관적 통찰(vipassanā)로 이어져야 한다.
수행자가 잠재적 번뇌(anusaya kilesa)를 뿌리 뽑고 완전한 청정을 얻게 되는 것은
이 통찰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더러움이랄까 번뇌의 때(kilesa)가 잠재하여 있는 한
그 사람에게 악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통찰력을 얻는 것이 목적인 선정 수행자는
장애들을 제쳐냈기에 악행을 범하지는 않겠지만
그의 기질 속에 마음의 때가 잠재해 있어서 아직까지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분, 아라한은
잠재하는 마음의 때와 그 조그마한 얼룩까지도 모두 씻어냄으로써 윤회를 정지시킨다.
그 분은 자신의 윤회를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끝내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스러운 삶을 완성하였고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니까.
이제 그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다.27)
* 『중부』 27, I권, 184쪽
열심히 공부하는 진지한 학생은 감각적 유혹을 끊고 적절한 환경 속으로 물러나 공부에 전념한다.
그렇게 해서 온갖 방해하는 요소들을 헤쳐 나가 성공적으로 시험을 통과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광란적인 군중들의 야비한 다툼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외진 토굴이나 수행하기 알맞은 곳에 앉아서
마음을 수행의 주제[業處 kammaṭṭhāna]에 고정시키고,
분투와 지속적 노력으로 다섯 가지 장애를 제쳐내고
마음의 흐름[遷流]이 빚어내는 때를 씻어내어 감으로써
그는 순차적으로 초선(初禪), 이선, 삼선, 그리고 사선에 이른다.
그러고선
이렇게 얻은 정[삼매]의 힘,
즉 집중적 사고의 힘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최고의 의미에서의 실재[열반]를 이해하는 데로 돌린다.
수행자가
위빠싸나(vipassanā)라고 하는 직관적 통찰력을 계발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단계에서이다.
이 위빠싸나를 통해
그는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과 모든 구성 성분들의 참된 성질을 알게 된다.
위빠싸나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고
현상계의 온갖 음색은 삶 전반을 관통하여 울리는 단 한 줄의 현,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ā)로 엮여 만들어진
그 한 줄 현의 울림의 여러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자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집착해온 세상이라는 것의 진정한 성질을 통찰하게 된다.
그는 무지라는 달걀껍질을 깨고 광대무변한 초월의 세계로 뛰쳐나온다.
그 마지막 순화로서 그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고요, 즉
부동의 심해탈(akuppā cetovimutti)28)인 열반의 광명이 동트는 곳에 도달한다.
* 『중부』 30, I권, 205쪽
이제 세상사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법구경』게송 373을 보자.
"한적한 곳에 머물며,
마음이 고요해지고,
제 법을 명확하게 식별하는 비구,
그에게 인간의 기쁨을 넘어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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