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가지의 팔정도? _ 닦는 자의 도닦음 & 성취한 자의 도에 머묾/
팔정도라는 나무에 핀 열반이라는 꽃
■ 팔정도를 두 가지로 설하심
- 본 경 「위대한 마흔 가지 경」(M117)에서 세존께서는 예를 들면 '바른 견해'에 대하여,
1)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와
2)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의
두 가지 바른 견해를 설하십니다.
"나는 바른 견해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라고 분명히 설하고 계십니다.
(* 위대한 마흔 가지 경, M117, http://blog.daum.net/ibakdal/17372832)
- 세존께서는 본 경에서 이어지는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에 있어서도
그것들이 두 가지라고 설하시며, 팔정도 전체에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을 더하여 십정도를
설하시면서,,, 열반을 향해 닦는 자인 유학(有學)은 팔정도를 구족하고, 성취한 자인
아라한(無學)은 십정도를 구족한다고 구분하여 설하고 계십니다.
(* 위대한 마흔 가지 경, M117, http://blog.daum.net/ibakdal/17372837)
- 경을 번역하신 대림스님께서는 주석에서 '바른 견해'에 대한 주석을 하시면서, 이 두 가지에 대한
주석을 하고 계신데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니까야에서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는 항상 사성제에 대한 지혜로 정의된다.
(M141 진리의 분석 경, S45:78 §3 상윳따 니까야 분석 경 등)
·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은 니까야와 주석서에서 '세간적인 것'과 '출세간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 이것을 첫 번째 견해인 바른 견해에 적용시키면,
사성제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는 세간적인 바른 견해이고,
열반을 실현하여 사성제를 통찰해서 생긴 바른 견해는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가 된다.
이러한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가 여기서 말하는 성스러운 바른 견해일 것이다."
■ 팔정도라는 다리 _ 다리는 양쪽에 걸칠 수밖에 없다
- 팔정도는 세존의 가르침 그대로 '출가자가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을 여읜
방법이므로 중도(中道)이며 (초전법륜경, S56:11, http://blog.daum.net/ibakdal/17370886),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서 마지막으로 설하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닦음의 진리(苦滅道聖諦)가 바로 팔정도(八支聖道)입니다.
- 세존께서 본 경에서 팔정도를 설하시면서 "나는 바른 견해(바른 사유, 말, 행동, 생계 등)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라고 설하심은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팔정도 즉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닦음(苦道聖諦)를 닦아
괴로움의 소멸(苦滅聖諦)을 실현하는 것이기에 팔정도는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저 언덕으로 가는 다리가 팔정도라면,,, 저 언덕은 열반이며,
그때 다리와 저 언덕은 분명 다른 것이기 때문이기에 '두 가지'라고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팔정도가 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 다리가 양쪽 언덕에 모두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이
팔정도도 양면을 가질 수박에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1)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쪽의 닦는 자의 본질과, 그 닦음을 완성하여
저 언덕에 이르러 2)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본질을
모두 가지는 것이 도리에 닿는 것입니다.
■ 한 갈래의 법 _ 팔정도라는 나무 위에 피는 열반이라는 꽃
- 여기 세존께서 바른 견해 등에 대하여 1)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와 2)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른 견해를 설하신다고 하여, 이 두 가지 법이 하나는
호박이요 다른 하나는 수박이다와 같이 두 갈래의 법이라고 해서는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이를 두고 첫 번째의 바른 견해를 '성문(聲問)' 혹은 '연각(緣覺)'의 법 혹은 근기가 낮은 자에게
설하는 법이고, 두 번째의 바른 견해는 '보살(菩薩)'의 법이라 하여 두 갈래의 법을 설하신 것으로
말한다든가, 혹은 저 언덕으로 가는 데에 두 개의 다리가 있는 것으로 설하여 그 씨가 아예 다른
것으로 얘기하는 것은 세존의 법을 크게 훼손하고 훼방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왜 그렇습니까? '바른 견해'의 경우를 예로 들면,
첫 번째의 바른 견해를 바르게 닦았을 때 두 번째의 바른 견해가 그 닦음 위에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팔정도의 다른 구성요소들도 그와 같은 도리입니다.
이것은 팔정도라는 나무에서 열반이라는 꽃이 피는 것과 같은 도리입니다.
나무는 나무이고 꽃은 꽃이기에 두 가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팔정도라는 나무 위에서만
열반이라는 꽃은 피는 것입니다. 이 팔정도라는 다리말고 저기 다른 다리가 있어 그 다리로
가는 것이 세존의 진실한 뜻이이라는 그런 법을 세존께서는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하는' 법이 아닌 것입니다.
(* 법 실천의 긴 경, M46, http://blog.daum.net/ibakdal/17372158)
- 세존께서 법을 설하실 때 듣는 이의 그릇됨을 따라서 설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 경에서 설하시듯 첫 번째의 바른 견해가 그릇된 견해가 아니라 '바른 견해'이며, 두 번째의 바른
견해도 '바른 견해'라고 천명하시는 것, 어떤 이들에게만 무슨 비밀하고 수승한 법을 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둘 다를 설하시면서 그 앞의 것을 '바른 견해'라고 설하시고, 바로 그 법을 닦아
완성된 뒤의 것을 '성스러운 바른 견해'라 히시는 뜻을 삿되이 왜곡해서는 안될 일인 것입니다.
'남산의 옥돌을 갈아서 옥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를 설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는
'바른 해탈' 前의 바른 견해인가, '바른 해탈' 後의 바른 견해인가?
- 팔정도에서 1) 바른 말과 바른 행동과 바른 생계는 계(戒)를, 2) 바른 정진과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삼매는 정(定)을, 3)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는 혜(慧)를 설하신 것이어서,
팔정도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라는 세존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본 경을 대하기 전에 제가 가졌던 의문 중에 하나는 팔정도에서의 '바른 견해(正見)'가
'해탈(vimutti)'까지를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림스님의 주석과 같이
니까야의 많은 부분에서 '바른 견해'는 바로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지혜'로 풀이되고, 또한
'사성제를 꿰뚫어 앎'이라 함은 바로 궁극적인 해탈(vimutti)과 열반의 증득과 거의 동의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 본 경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팔정도에서의 '바른 견해'는 닦는 자의 바른 견해와
성취한 자의 바른 견해 모두가 팔정도의 바른 견해에 들어가 있는 것이기에,,
세존께서 설하신 팔정도의 바른 견해는 당연히 궁국적인 해탈(vimutti)의 입구로서의 바른 견해와,
해탈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성취한 자의 바른 견해인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팔정도에서의 '바른 견해'는
'바른 해탈' 전(前)과 후(後)의 바른 견해를 모두 담고 있는 것입니다. 또 팔정도의 '바른 견해'가
'바른 해탈' 후(後)의 '바른 견해'를 담고 있는 한 팔정도 자체는 이미 '바른 해탈'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른 견해'가 바로 '바른 해탈'과 동의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둘 다 성취한 자의 것이고 해탈·열반이라는 사건을 겪은 후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 각각으로 보아서는 별도의 도의 구성요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왜 그렇습니까? 그는 팔정도를 닦아 점차적으로
사성제를 보아 '성스러운 바른 견해'에 가까워져
갑니다. 그러나 그가 아직 해탈에는 이르지는 못한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바른 해탈(samma-vimutti)'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발자국'을 더 나아가,,
'바른 해탈(samma-vimutti)'이라는 일대사 관문을 관통한 연후에야 그의 '바른 견해(samma
-ditthi)'는 비로소 '성스러운 바른 견해(ariya-samma-ditthi)'가 되는 것이기때문입니다.
'바른 해탈'이라는 요소를 통하여 그의 견해가 비로소 '성스러운 바른 견해'가 되는 것이기에
바른 견해와 바른 해탈은 이 두 가지는 별도의 도의 구성요소 이루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 주석에서,,, 두 가지 '바른 견해'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 먼저오는 바른 견해 즉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는 '위빳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a-sammaditthi)'라 하고,
· 나중에 오는 바른 견해 즉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를 도의 바른 견해(magga-sammaditthi)'라고 하는 것,
· 그리고 이때 '위빳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a-sammaditthi)'란 삼계의 형성된 것들을 무상
등으로 검증하는 바른 견해이며,
· '도의 바른 견해(magga-sammaditthi)'란 검증을 마친 뒤 자신의 상속에서 긴 세월 잠재해온
오염원의 윤회를 끝장내면서 가라앉히면서 일어나는 바른 견해(MA.iv.131)라 함은
지극히 바른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 이와 같이 보면 설사 그것이 '나중에 오는 바른 견해' 즉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 혹은 '도의 바른 견해'라 할지라도,,,
'바른 해탈'이 원인이 되고 '바른 견해'는 결과가 되는 두 가지의 다른 요소라고 이해됩니다.
■ 건너가기 위한 '마지막 한 발자국'
- 그와 같이 닦는 자의 팔정도와 성취한 자의 팔정도 사이에는 '바른 해탈'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닦는 자가 닦아서 나아갈 때 '바른 해탈'이라는 과정이 있는 바, 이 두 가지 법 사이에
그 무엇이 있어서 이 두 가지 법을 구분하게 하는 것일까라는데 생각이 이르게 됩니다.
- 기실
1) 닦는 자의 팔정도와 성취한 자의 팔정도라는 두 가지의 법,
2) 팔정도와 십정도라는 두 가지로 설하신 법,
3) 팔정도라는 고도성제(苦道聖諦)와 그 성취인 열반 혹은 고멸성제(苦滅聖諦)라는 두 가지 법
을 생각할 때. 이 두 가지 법 사이에 무엇이 있어서 이 두 가지 법을 구분하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그가 팔정도에서 '닦는 자로서의' 바른 견해, 사유, 말, 행동, 생계, 정진, 마음챙김, 삼매를 구족한
자라 하더라도, 그가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치 다리의 끝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나아가야
'바른 해탈'이라는 경계선을 지나 마침내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이, 그에게 결코 쉽지
않은 '마지막 한 발자국'이 있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건너감으로써 그의 팔정도는 '성취한
자로서의' 팔정도가 되는 것일 것입니다.
- 이 '마지막 한 발자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 대전기경, D14,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3)
라고 하실 때 바로 1) 오온을 바로 보는 과정, 그리고 2) 취착이 없어짐' 의 과정의 두 가지 과정에
해당한다고 생각됩니다.
- 세존께서는 분명히 본 경에서 '바른 견해'를 설하시면서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까지를 설하시고난 다음에도, 십정도를 설하시면서
'바른 지혜(samma-nana)'와 '바른 해탈(samma- vimutti)'를 별도로 설하시는 바, 이 두 가지는
각각 바로 1) 오온을 바로 보는 과정, 2) 취착이 없어짐' 의 과정의 두 가지 과정에 해당한다고
생각됩니다.
【 '마지막 한 발자국'에 대한 추론】
1] 팔정도를 닦아감
- 팔정도의 비른 견해 中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 즉 닦는 자의 바른 견해를 기초로 하여 어떤 이는 팔정도를 바르게 닦습니다.
- 그는 점점 더 성취한 자에 가까워져 갑니다. 위빳사나를 통해 그의 바른 견해는 점점 더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에 가까워져
갑니다. 그는 사성제를 늘 반추하고 마음에 새기므로 그가 사성제를 알고 봄도 점점 완성된
그것에 가까워집니다. 그는 말, 행동, 생계, 정진에 있어서도, 그 마음챙김과 마음의 조복인
삼매에 있어서도 거의 완성에 이르렀다고 가정합니다.
2] 바른 지혜(samma-nana)를 증득함 _ 오온을 바로 봄
- 오온을 바로 본다 함은 오온이라는 존재의 구성요소들을 미혹되지 않고 바른 지혜로써
바로 본다'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른 지혜'없이 오온을 바로 본다함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따라 여기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1) 위빳사나의 지혜로써 오온을 바로 봄
_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로 나아감
- 지혜로써 오온을 바로 봄이라 함은 세존께서 수도 없이 설하신 바,
예를 들면 「보름밤의 긴 경」(M109)에서 설하신 바와 같이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알음알이) 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1)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2)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3) 거칠든 섬세하든,
4) 저열하든 수승하든,
5)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panna)로 본다."
(* 보름밤의 긴 경, M109, http://blog.daum.net/ibakdal/17372765)
라고 설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며, 그와 같이 사성제를 꿰뚫어 알고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새겨집니다. 이른바 '마른 위빳사나'를 닦아서 성취를 하는 자의 경우인
'통찰지에 의한 해탈(혜해탈,慧解脫)은 이를 두고 이르는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2) 잠재성향을 따라 팔해탈(vimokkha)의 증득을 더하여
_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까지
- 세존께서는 이 혜해탈(慧解脫)에 마음의 조복이요, 마음집중인 삼매의 자유로운 증득까지를
더한 '마음의 해탈(심해탈, 心解脫)까지 더하여 양면해탈(兩面解脫, ubhatobhāgavimutti)을
하게 되는 경우를 최상이라고 설하십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위 위빳사나의 지혜를 통한
'오온을 바로 봄'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해탈(vimutti)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해탈(心解脫)이라는 말 자체가 혜해탈(慧解脫)까지를 포함한 양면해탈(兩面解脫)을
의미하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왜 어떤 비구는 혜해탈을 증득하고 어떤 비구는 심해탈을 증득하는가에 대하여
'그것은 그들이 기능(根, indriya)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하십니다. 그가 지은 업,
그리고 잠재성향에 따른 그의 근기(根機)에 따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 말룽꺄 긴 경, M64, http://blog.daum.net/ibakdal/17372328)
- 세존께서는 초선∼상수멸까지의 구차제주등지를 통한 해탈과 열반을 설하십니다.
심해탈(心解脫)이란 이 구차제주등지 혹은 팔해탈에 자재로운 마음의 힘을 증득함에
오온을 바로 보는 지혜까지 더하여 해탈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 띠뿟사 경, A9:41, http://blog.daum.net/ibakdal/17370453
* 끼따기리 경, M70, http://blog.daum.net/ibakdal/17371182
* 양면해탈 경, A9:45: http://blog.daum.net/ibakdal/17371196)
세존의 이같은 마음의 자재로운 증득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강조는 반열반하시기 직전에도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반열반경에서,
· 팔해탈(*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1)과
· 팔승처(*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0)의 가르침을 통해서
입니다.
- 그 중 팔승처에 대한 가르침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서 '바른 지혜(nana)'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팔승처(八勝處)와 팔신통(八神通)
- 세존께서는
· 안으로 물질을 인식하면서 밖으로 제한된 물질을, 무량한 물질을 봄의 2가지,
· 안으로 물질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제한된 물질, 무량한 물질을 봄의 2가지,
· 안으로 물질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밖으로 청, 황, 적, 백의 물질을 봄의 4가지를
도합 8가지를 '여덟 가지 지배의 경지(팔승처)'로 설하시면서,
이들 모두에 대하여 "이것들을 지배하면서 '나는 알고 본다'라고 이렇게 인식한다."라고
그 의미에 대해서 설하십니다.
(*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0)
- 세존을 '아시는 분, 보시는 분'이라고 흔히 이릅니다.
'알고 본다.'라는 것의 의미는 개념적인 추론에 따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의미에는 실질적인 지배라는 의미가 동반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것에는 그렇게
인식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내가 원한다면 내 마음대로 변하게 혹은 변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대상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와 닿습니다.
- 그런데 이 팔승처를 살펴보면, 그가 안으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물질을 인식하는가 아닌가를
별도로 보면 그 지배의 대상이 유한하건 무한하건 모두 '물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팔승처는 해탈의 자재와 그렇게 닦은 마음의 힘을 통한 물질(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앎에
따른 물질에 대한 지배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 이 부분 디가니까야 주석을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여덟 가지의 경지를
터득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이 수명의 상카라를 놓으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여덟 가지 지배의 경지를 설하셨다(DA.ii.563)"라고 설명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승처가 실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는 찾아보아도 정확한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부도 수행도 부족한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위와 같이 보면
팔승처는 팔해탈에 따른 결실로서 생기는 지배의 경지임에 분명하지만, 그뿐 아니라 아래의
팔신통에서 위빳사나의 지혜로부터 신족통(神足通), 천이통(天耳通)까지에 이르는
물질(현상)과 관련된 처음의 4가지 신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전(失傳) 되어버린 마음의 증득을 따른 신통력의 증득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 팔신통(八神通) _ 8가지의 지혜(nana)
- 세존께서는 사문과경(D2)에서 사문의 12가지 결실을 설하시면서
1) 초선∼4선의 4가지 바른 삼매, 2) 그리고 나의 알음알이는 이 몸에 매여있음을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누진통까지 8가지의 지혜(nana)가 바로 그 12가지의 결실이라고
설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십정도에서 '바른 지혜(samma-nana)'를 설하시는 그 구체도 이 8가지 지혜(nana)와
다르지 않거나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ㅇ 여기에서 4가지의 '바른 삼매'에 대하여는
"자신에게서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겨납니다.
환희로운 자에게는 희열이 생깁니다.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은 경안(輕安)합니다.
몸이 경안한 자는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듭니다."
(* 사문과경, D2, http://blog.daum.net/ibakdal/17370498)
와 같이 설하시어 그가 '다섯 가지 장애(五蓋)'로부터 벗어나 청정함을 얻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바른 삼매'에 들 수 있는 조건임을 설하십니다.
ㅇ 8가지 '지혜(nana)'에 대하여는
"그는 이와 같이
1) 삼매에 들고, 2) 청정하고, 3) 깨끗하고, 4) 흠이 없고, 5) 오염원이 사라지고,
6) 부드럽고, 7) 활발발하고, 8) 안정되고, 9) 흔들림이 없을 때,
1] 지(知)와 견(見)으로(vipassana-nana)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2]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3] 신통변화(神足通, iddhividha- nana)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4] 신성한 귀의 요소(天耳界, dibbasota-nana)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5]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 cetopariya-nana)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6]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pubbennivasanussati-nana)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7]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 dibbacakkhu-nana)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8]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 asavakkhaya-nana)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 사문과경, D2, http://blog.daum.net/ibakdal/17370502 이하)
와 같이 설하시어 '지혜(nana)'를 증득하는 조건이
1) 마음이 삼매에 들 것과 2)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이는 것(manasikara)이
그 조건임을 설하고 켸십니다.
- 여기서 1] 이 알음알이가 이 몸에 매여있는 것을 꿰뚫어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 ∼
4] 신성한 귀의 요소(天耳通의 4가지 지혜(nana, 신통)은 물질(현상, 色)과 관계된
것이고, 5] 타심통 ∼ 8] 누진통의 4가지 지혜(nana, 신통)은 마음(현상, 名)과 관련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위에서 팔승처(여덟 가지 지배의 경지)에서 그 지배의 대상이 모두 물질(현상)을 가르킨다는
추론을 했는데,, 성스러운 연기(緣起) 의 법을 따르더라도 물질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드러나는) 것이기에 성스러운 마음을 증득하여 물질(현상)을 대상으로
1] ∼ 4]의 물질(현상)에 대한 신통을 드러낸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 여기에 더하여 10가지 까시나를 이야기할 때 땅의 요소(地), 물의 요소(水), 불의 요소(火),
바람의 요소(風)을 각각 물질(현상)이 드러날 때 견고함, 결합, 온도, 움직임(전달)이라는
물질(현상)이 '드러나는' 4가지의 큰 요소(四大)라고 보면,
그 다음의 청(靑), 황(黃), 적(赤), 백(白)의 4가지 요소는 여전히 물질(현상)과
관련된 것인 바, 이는 먼저의 물질(현상)의 '드러남의 사대 구성요소' 이전에
그 물질(현상)이 그렇게 드러나기 위한 그 이전의 그 동인(動因)이 되는, 물질(현상)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인 에너지(파동 혹은 질량)에 관한 관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보면 팔승처의 8가지 요소는 모두 물질(현상)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10가지 까시나 중 남아있는 2가지는 광명(aloka)와 허공(공간)인 바, 이 중
광명은 빛과 어둠 혹은 빛과 어둠 모두의 근본이요 물질(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근본(field)이요, 허공(공간)은 물질(현상)이 인과에 따라 드러나기 위한 기제(機制)가
되는 것이니, 명상주제를 이루는 10가지 까시나가 모두가 물질(현상)에 관한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릅니다.
3] '갈애가 빛바래어 남김없이 소멸함'으로의 마음 기울임(manasikara)
- 세존께서 8가지 지혜(nana)를 설하시면서 여덟 번째에 '누진통(漏盡通, asavakkhaya
-nana)'를 설하시므로 계정혜(戒定慧)로 가르침 전체를 설하실 때 그 안에는 해탈·열반까지가
포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또한 주목해야 할 요소는 바로 '마음 기울임(manasikara)라는 생각입니다. 세존께서는 위
사문과경에서와 같이 출가의 결실인 8가지 지혜(nana)를 설하실 때 그 조건이 삼매를
구족하는 것과 더불어 그의 마음이 그러한 지혜로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는 것'이라고
천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누진통(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 漏盡通, asavakkhaya-nana)를 증득할 때도
똑같은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가 '바른 지혜' 중에서 앞의 7가지를 증득했다고
하더라도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집착없음'으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한, 즉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는 한, 그는 해탈(vimutti)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 기울임이라는 마음부수가 해탈·열반의 입구까지 함께하는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지혜에 있어서도 '바른 지혜'와 '그릇된 지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해탈에 있어서도 '바른 해탈'과 '그릇된 해탈'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그릇된 해탈'이 있다면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해탈은
이미 해탈(vimutti)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으나, 바로 그런 의미에서 '바른 해탈(samma
-vimutti)'이 아닌데도 해탈한 양하며 그것이 해탈임을 주장하는 '그릇된 해탈'도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이유로 세존께서는 '바른 지혜', '바른 해탈'이라고 설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세존께서는 본 경에서 '그릇된 지혜'와 '그릇된 해탈'에 대해서 설하십니다.
(* 위대한 마흔 가지 경, M117, http://blog.daum.net/ibakdal/17372838)
- 또한 마지막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으로 '마음 기울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에 있어서도
1)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
2)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지혜와 성스러운 바른 해탈
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왜 그렇습니까?
'해탈'의 경우 궁극적인 해탈(vimutti/위무띠))가 위 2)의 것이라면, 그가 수행을 함에 따라
점차로 미혹을 벗어나며 얻게 되는 마음의 증득도 해탈(vimokkha/위목카)이라고 하는 바
위 1)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혜'의 경우 그가 궁극적인 해탈(vimutti)를 증득하여 허락된 경우에 펼치는 신통 등은
위 2)에 해당하는 지혜라면, 그가 궁극적인 해탈에 이른 것이 아니라 외도들도 가능한 바
삼매의 증득만을 통해 전개하는 신통 등은 위 1)에 해당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극명한 사례는 아래 사리뿟따 존자의 확신경(D28) 법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존께서는 신통변화를 자유로이 부리는 신족통(神足通)을 '번뇌가 있고, 취착이 있으며,
성스럽지 못한' 신통이라고 설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세존이 계시는 곳에서 설한 신족통(神足通)에 대한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
"세존이시여, 나아가서
세존께서 해 주신 신통변화(神足通)에 대한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두 가지 신통변화가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1) 번뇌가 있고, 취착이 있으며, 성스럽지 못한 것이라 불리는 신통이 있고,
2) 번뇌가 없고, 취착이 없으며, 성스러운 것이라 불리는 신통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번뇌가 있고 취착이 있으며 성스럽지 못한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까?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을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나툽니다.
1)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2)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3)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4)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합니다.
5) 땅에서도 떠올랐다 잠겼다 하기를 물속에서처럼 합니다.
6)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걸어가기를 땅 위에서처럼 합니다.
7) 가부좌한 채 허공을 날아가기를 날개 달린 새처럼 합니다.
8)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9)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상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번뇌가 있고 취착이 있으며 성스럽지 못한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번뇌가 없고 취착이 없고 성스러운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까?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가
1) 만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하여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2) 만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하여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라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3) 만일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하여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4) 만일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하여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그는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뭅니다.
5) 만일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 둘 다를 제거한 뒤
평온한 자가 되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머무르리라.'고 원하면
거기서 평온한 자가 되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번뇌가 없고 취착이 없으며 성스러운 것이라 불리는 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신통변화(神足通)에 대한 이 (법문)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남김없이 초월해서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신통변화에 관한 한 이것을 능가하여
세존보다 더 초월해서 안다고 주장할 다른 (법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확신경, D28, http://blog.daum.net/ibakdal/17371348)
[※ 바른 지혜, 바른 해탈에 대한 주석에 대하여]
- 주석은 본 경에서 '유학들의 도닦음은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구족하고, 아라한은 열 가지
구성요소를 구족한다.'라고 설하심과 같이 십정도를 설하심에 이르러,
'아나타삔디까 경(S55:26) §10에 의하면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 두 가지는 급고독 장자도 갖춘
것으로 나타나고, 쭌다 경(S47:13) §6과 주해에 의하면 아직 예류자인 아난다 존자도 계·정·혜
뿐만 아니라 아라한만이 갖춘다는 해탈과 해탈지견까지 다 갖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니까야에 의하면 십정도는 꼭 아라한만이 갖추는 것은 아닌 듯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 저는 위의 견해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 경에서 바른 견해, 사유, 말, 행동,
생계 등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세존께서 설하신 것처럼, 또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에 있어서도 그가 마지막 한 발자국을 통해 궁극적인 해탈(vimutti)을
통해 '갈애의 부숴짐을 성취'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1)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지혜, 바른 해탈과, 2)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지혜, 바른 해탈의 두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본다면,
주석에서 예를 든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을 갖추었다 하심, 아난다 존자가
해탈과 해탈지견을 갖추었다 함은 모두 위 1)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지혜, 바른 해탈, 해탈지견을 갖추었음을 설하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둘로 갈라진 애매한 말'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삼십이상경, D30, http://blog.daum.net/ibakdal/17371402)
4] 바른 해탈(samma-vimutti) _ 갈애가 빛바래어 남김없이 소멸함/마지박 한 발자국
- 세존께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라고 설하십니다. (* 대전기경, D14,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3)
'바른 지혜'로써 일체 정신·물질 즉 오온을 바로 보아 해탈함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고성제), 왜 생겨났는지(고집성제), 어디서 소멸하는지 즉 어디가 끝인지
(고멸성제), 어떻게 해서 그 끝에 도달하는지(고멸도성제),,, 바로 사성제를 꿰뚫어 알고 보아
해탈에 이름을 설하신 것입니다.
- 어떻게 취착이 없어집니까? '갈애'가 다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갈애가 다합니까?
대념처경에서 사성제를 설하실 때와 같이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이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심리현상의 여섯 가지 감각대상(六境)을 감득(觸)하여 일어나는
근(根), 경(境), 식(識), 촉(觸), 수(受), 상(想), 행(行), 애(愛), 심(尋), 사(伺)의 10가지 장소에서
일어나는 갈애를, 바로 그곳에서 무상(無常)하고, 괴로움(苦)이며, 내가 아님(無我)을 바로 보아
'갈애가 빛바래고 남김없이 소멸' 합니다.
이것을 두고 '1)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2) 버림, 3) 놓아버림, 4) 집착없음'이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다함'이요, 인습적인 표현을 빌어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 대념처경, D22,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4)
- 아무리 닦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자재한 지혜(nana)를 증득한 자라 하더라도,,,
어떤 명성과 존경이 따르는 자라 하더라도,,, 그 '마음 속 한 점의 갈애'가 다하지 않는 한,,,,
그의 윤회는, 그의 괴로움은, 그와 그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금강(金剛)의 환상(幻想)'처럼
끝없이 펼쳐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여기에 결국 그 '마지막 한 발자국'은,,, 결국 그의 '마음'이요 '마음 기울임(向)'입니다.
그것은 결국 일체 정신·물질에 대한 염오요, 탐욕의 빛바램이요, 일체 갈애의 끊어짐이며,
버림이요, 놓음이요, 집착없음이요, 그리로의 마음 기울임입니다. 바로 이를 두고,,,
·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 심재 비유의 긴 경, M29, http://blog.daum.net/ibakdal/17371979)
· '취착없는 완전한 해탈'(* 역마차 교대 경, M24, http://blog.daum.net/ibakdal/17371923)
이라 설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91겁 전 위빳시 세존께서
"모든 악을 행하지 않고 (諸惡莫作)
유익함을 구족하며 (衆善奉行)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교법이다.(是諸佛敎)"
(* 대전기경, D14, http://blog.daum.net/ibakdal/17371160)
라 하심은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
5] 계, 삼매, 지혜, 해탈로 나누어서 설하심
- 본 경「위대한 마흔 가지 경」(M117)에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유학들의 닦음은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구족하고,
아라한은 열 가지 구성요소를 구족한다."
라고 설하시면서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의 두 가지의 요소를 팔정도와 나누어서 설하시는 점,
또한 '바른 견해'등의 팔정도의 요소를 설하시면서 1)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와 2)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며,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하실 때 그가 성취한 자인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설하시는 점은 사실 의외의 것이나 낮선 것이 아닙니다.
- 세존께서는 마지막 가르침인 대반열반경(D16)에서 참으로 당신 자신까지를 포함하여
"비구들이여,
네 가지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1) 성스러운 계(戒)를 깨닫지 못히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2) 성스러운 삼매(定)를 깨닫지 못히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3) 성스러운 통찰지(慧)를 깨닫지 못히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4) 성스러운 해탈(解脫)을 깨닫지 못히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각각에 대해서)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5)
라고 설하시어 당신 가르침의 곡절을 계, 삼매, 지혜, 해탈의 4가지로 나누어서 설하십니다.
- 세존께서는 심재 비유의 긴 경(M29)에서
그가 방일하지 않아서 1) 이득과 존경과 명성, 2) 계의 구족, 3) 삼매의 구족, 4) 앎(知)과 봄(見)의
구족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구족에 취하고 방일하여 방일에 빠짐을 설하십니다.
더구나 그가 앎(知)와 봄(見)을 구족하더라도 그에 취하여 방일하지 않는 경우 그가 '일시적이지
않은 (완전한) 해탈'을 성취한다고 설하십니다. 이것을 세존께서는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
이라고 설하십니다.
(* 심재 비유의 긴 경, M29, http://blog.daum.net/ibakdal/17371979)
이같은 가르침을 보더라도 설사 그가 앎과 봄을 구족했다 하더라도 그가 마지막 한 발자국인
갈애의 소멸에 이르기 전에는 그는 성취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리뿟따 존자와 우리에게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로 알려진 만다니뿟따 존자, 두 분 아라한의
대화를 담고 있는 역마차 교대경(M24)에서는 칠청정을 설하시면서,
"도반이여, 그와 같이
1) 계의 청정은 마음의 청정을 위한 것입니다.
2) 마음의 청정은 견의 청정을 위한 것입니다.
3) 견의 청정은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을 위한 것입니다.
4)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은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견 청정을 위한 것입니다.
5)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견에 의한 청정은 도닦음에 대한 지견에 의한 청정을 위한 것입니다.
6) 도닦음에 대한 지견에 의한 청정은 지견에 의한 청정을 위한 것입니다.
7) 지견에 의한 청정은 취착 없는 완전한 열반을 위한 것입니다.
도반이여,
이 취착 없는 완전한 열반을 위해 세존의 문하에서 청정범행을 닦는 것입니다."
(* 역마차 교대 경, M24, http://blog.daum.net/ibakdal/17371923)
같이 설하시어 계의 청정, 마음의 청정, 견의 청정, 의심의 청정, 도와 도아님, 도닦음에 대한 청정,
지견에 의한 청정의 7청정을 구족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 발자국인
'취착이 남김 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라는 '갈애의 소멸'에 이르러야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음을
설하고 게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법문 또한 세존께서 팔정도에 더하여 '바른 지혜', '바른 해탈'을 별도의 구성요소로
설하시고, 또 위 인용한 대반열반경에서와 같이 계, 삼매, 지혜, 해탈로 가르침의 곡절을 나누어
설하심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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