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63.말룽꺄짧은경-십사무기

※後記: 말룽꺄 짧은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7. 8. 14. 18:48


말륭꺄 짧은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말룽꺄뿟따 존자가 세존을 칮아뵈고  소위 '십사무기(十事無記)' 즉 세존께서 설명하시지 않은

10가지 질문에 대해, 세존께서 자신에게 이를 설명하시면 세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고,

설명하시지 않으면 환속하겠다고 말씀드리면서, 모르면 모르신다고 정직하게 말씀해달라고 청하는

것을 계기로 세존께서 그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말룽꺄뿟따 존자는 꼬살라 왕의 보좌관의 아들이었으며, 나이가 들어서 외도 유행승이 되었다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상윳따니까야 「말룽꺄뿟따 경」(S35:95)를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분입니다.



1. 세존께서 설명하시지 않은 10가지 질문(십사무기/十事無記)


    ① '세상은 영원하다.'

    ②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③ '세상은 유한하다.'

    ④ '세상은 무한하다.'


    ⑤ '생명이 바로 몸이다.'

    ⑥ '생명은 몸과 다른 것이다.'


    ⑦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를

궁금해 합니다. 말룽꺄뿟따 존자도 '궁극의 답'을 세존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 답을 구하려

했습니다. 세존께서 이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제쳐두고, 거부하시는 것'을 '기껍지

않고, 묵인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심지어 여기에 대해서 답변하시지 않으면 환속하겠다는

말룽꺄뿟따 존자의 결의를 밝히는 바, 그의 그러한 질문에 대한 간절함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고, 그렇다면 세존은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이 아닌 것이며, 그렇다면 나는 세존 밑에서 배움을 계속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논리적인 귀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존께 이를 여쭐 때 모르면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정직한 것'이라고 도발적이기까지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 질문이 당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기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오늘날에라 할지라도 무리한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2. '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 영원, 무한, 나, 존재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열 가지 질문들은 질문 그대로도 질문이 되는 것이지만, 바꾸어서 보면,


1)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 혹은 반대로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

2) 무한한 것에 대한 동경, 혹은 반대로 유한한 것에 대한 동경

3) 이 몸이 죽으면 존재로서의 나의 생명은 끝나는 것인지, 혹은 사대(四大)가 모인 이 몸이

    내가 아니라 '나'라는 실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


또한 여기서 '여래(tathagata)'라 함은 '중생(satta)'을 말한다 즉, '중생은 과거 생에서 업과 오염원에

의해서 태어났듯이, 지금도 그와 같이 왔다고 해서 여래라 한다. 혹은 업을 지은 대로 자기 존재가 

생긴다고 해서 여래라 한다.'는 '여래(tathagata)'에 대한 다소 수긍하고 싶지 않은 복주석서의 설명을 따르든 않든 간에,


4) 중생 혹은 어떤 존재란 사후에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인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인지 즉, '존재'의 존재성이라 할 수 있는 궁극적 '존재론'에 대한 의문


과 같은 4가지 양상에 대한 의문이 그 본질이라고 생각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궁극적인 지혜가 있어야만 답할 수 있는 '궁극적인 질문'이라고 할 질문들인 것이고 본질적인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저와 같이 사변적(思辨的)인 사람일수록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바꿔서 말하면 '이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 '나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세존께서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지 읺으셨고', 또한 말룽꺄뿟따의 경우와 같이 누가 물어 오더라도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동안 그 사람은 죽게 될 것이다.'라고까지 천명하십니다.


세존께서는 다른 이들이 무엇을 여쭈면 더할 나위 없이 그 뿌리가 드러나도록 상세하게 설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의미와 표현을 구족해서입니다. 또한 '이익을 주지 못함 등'을 이유로

평소에 설하시지 많는 것이라 하더라도, 필요하거나 제자들이 '지금이 그것을 설하실 때입니다'라고 조르거나 세 번이상 청하면 연민의 마음으로 그것을 설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열 가지 질문들에 대하여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으신다'하심이

그야말로 은산철벽(銀山鐵壁)과도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그것을

설하시지 않음은 언뜻 보면 마치 이것에 대해서만은 마치 고집을 부리시듯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밝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 밝히신 이유를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모르시기 때문에

설명을 하지 않는 것 아닌가, 혹은 세존의 가르침은 결국 전부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일부의

영역에 국한해서만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그분의 가르침은 '일부의 가르침'이며

세상에 있는 많은 좋은 견해들 중에 하나일 뿐인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분명히 그랬습니다.



■ '그것에 대한 설명'이란 '무엇에 대한 설명'이 되는가?


1) 이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 질문은 1) 이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2) 이 세상은 왜 생겨났고, 어떻게 유지되는

것인가, 3) 그러기에 이 세상의 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혹은 끝은 없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세존의 가르침은 업을 지은 대로 태어난 '나'로 인해 그 '세상'은 펼쳐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세상'을 얘기하자면 '나'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알음알이(識)'가 '세상이라는

정신물질(名色)'과 갈애와 취착으로 인해 상호작용하며 이를 넘어서지 못해 윤회가 끝없이 계속된다고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이기에 세상이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는 중요한 것도 아니거니와, 그 이전에 그것은 '나'라고 이야기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 '나'에 딜려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나'가 혹은 '세상'이 무상함 즉 영원하지 않음으로 인해 괴로움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의문 중에 하나가 세상이 영원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세존께서는 그것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를 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상에 대한 '갈애가 빛바래어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집착없음, 벗어남'을 설하십니다. '세상'이 아니라 먼저

'나'를 설하십니다. 하여 그러한 '나'로부터의 벗어남을, 그리하여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바로 눈, 귀, 코, 혀, 몸, 마노(마음)의 감각기능(根), 감각대상(境), 거기서 생겨난 알음알이(識),

감각접촉(觸), 감각접촉에서 생겨난 느낌(受), 거기서 일어나 인식(想), 거기서 일어난 의도와 지음(行), 그들의 갈애(愛), 그들로 인해 일으킨 생각(尋), 그들에 의한 지속적인 고찰(伺)의

6가지 감각기관에 대해서 각각 10가지씩 모두 60가지에서 그렇게 합니다.

                                                         (* D22, 대념처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4)


그렇게 '벗어난' 그에게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질문은 꿈을 꾸고 있는 자가 꿈에서 보고 듣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영원한 것인가 아닌가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계속 꿈을 꾸는 그에게 꿈은 현실처럼 느껴질 것이고 꿈에서도 끝없이 정신물질은 펼쳐집니다. '현실과도 같은 꿈을 꿀 때 그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그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그에게 누가 가서 꿈에서 본 그 현실이 영원한가 아닌가를 그에게 실로

진지하게 몇 번이고 물어 온다면, 그는 그렇게 물어 오는 자를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나무에 올라와

물고기를 구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그 이전에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된 '나'라는 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합니다. 그와 더불어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합니다.


그에게는 세상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영원하기도 영원하지 않기도 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세상은 다섯 무더기라는 형식을 빌어 드러났을 때 느끼는 것이고 '세상'이라는 이름을 가질 뿐입니다. 세상은 그냥 세상이며, 바로 '나'로 인해 세상이라는 이름과 모습으로 드러났다가 변화하고 소멸할 뿐입니다.



2) 세상은 무한한가 유한한가?


이와 같은 그에게 세상이 무한한가 유한한가라는 질문은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이전에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된 '나'라는 것의 무한과 유한을 통찰합니다.

그와 더불어 세상의 무한과 유한도 따라갑니다.


그에게 세상은 무한한 것도 아니고,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하기도 한 것도 아니고,

무한하지도 않고 유한하지 않기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슬픔과 기쁨을 버렸기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지극히 청정한

상태에서 마음이 일념이 되어 부딪힘의 세계를 초월하여 '무한한 공간, 무한한 알음음알이, 있는 것이

없음, 인식하는 것도 인식하지 않는 것도 아님', 그리고 마침내는 인식과 느낌을 완전히 소멸하여

머물러 6가지 감각기관 만이 있고 일체가 공(空)한 삼매에 머물렀다가, 그로부터 출정하여 '이 모든 것'이 오직 괴로움임을, 그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을, 그 괴로움의 소멸을, 어떻게 하여 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렀는지를 분명히 통찰합니다.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설 곳이 없는 그에게 세상이 무한한가 유한한가라는 질문은 그야말로

토끼의 뿔이며 거북의 털과도 같은 이야기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3) 이 몸이 나의 생명인가?


이것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란 나의 몸인가?, 나의 몸이 무너지면 나란 소멸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영혼 혹은 인식과 같은 '나'라는 정체성이 따로 있어 죽은 다음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혹은 오온이 나다, 오온을 가진 것이 나다, 나는 오온 안에 있다, 혹은 오온 안에 내가 있다 등으로

'나' 혹은 '내가 있다'라는 소견을 취착하는 여러 견해에서 비롯된 의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M44, 교리문답의 짧은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2142)


뽓타빠다경(D9)에서 뽓타빠다 유행승이 '인식이 자아입니까, 아니면 인식은 자아와 다른 것입니까?'

라고, 세존께 여쭈었을 때 세존께서는 '그런데 그대는 무엇을 두고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으십니다.

                                            (* D9, 뽓타빠다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618)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아는 지혜가 없는 자아에 대한 추구가 마치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미녀를 갈망함' 혹은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누각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만듦'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나'라는 그물을 벗어나기란  이같이 어렵습니다. '세상'과 '나'의 실상이란 물속의 물고기가

자신이 물속에 사는지 모르고, 자신이 물고기인 줄 모르는 것과도 같이 그렇게 서로 붙어있고, 그렇게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존재에 대한 외도의 62견, 즉 존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설파하신 범망경(D1)에서

과거로 모색하는 18가지 견해(영속론 4, 일부영속 일부비영속론 4, 유한과 무한을 설하는 자들 4,

애매모호한 자들 4, 우연발생론자들 2가지)와, 미래로 모색하는 44가지 견해(사후에 자아는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 16, 사후에 자아는 인식없이 존재한다 6, 사후에 자아는 인식이 있기도하고 없기도

하다 8, 단멸론 7, 지금여기 궁극의 열반을 실현한다는 견해 5가지)에 대해서,


이들은 모두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빠진 자들의 느낀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느낌이 갈애와 견해에 의해 동요된 것, 취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천명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이들 모두가 연기(緣起)를 알지 못하고, 연기의 사슬을 끊어버리지 못한 것을 이유로

그런 견해를 취착하는 것이며, 이들은 결국 괴로움을 생기게 한다고 천명하시며,

'여섯 가지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감각장소들의 일어남, 사라짐, 달콤함, 위험, 벗어남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아' 이러한 '나' 혹은 '존재'에 대한 질못된 견해들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또한 천명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이 범망경에서 당신께서는 '여래의 몸은 존재에 묶어두는 그물을 끊어버린 채 머물고 있다.'라고 설하시는 바, 이러한 도리를 설하신 후, 이 가르침을 '뜻의 그물(意網), 법의 그물(法網),

범천의 그물(梵網), 견해의 그물(見網)' 그리고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無上戰勝)'이라고 받아지니라고 설하십니다. '나', '자아', '존재'에 대한 그물을 벗어남이란 이렇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을 벗어나고 바로 보기 시작하는 것은 말씀 그대로 '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로의 첫걸음입니다.



  ◎ '나'란 무엇인가?(D9,뽓타빠다경)



   도대체 '나'란 무엇인가를 설하신 뽓타빠다경(D9)에서 세존께서는 '나'를 이렇게 설파하십니다.

   뽓타빠다경은 인식과 자아의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마는 그 핵심은 결국 '자아' 혹은 '나'란

   무엇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를 여기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인식(sanna, 想)이란 보통의 사람이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가장 쉬운 오온의 한

   형태입니다.


   뽓타빠다 유행승의 첫 번째 질문은

   1) 인간의 인식은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일어나고 소멸한다, 

       인식이 일어나면 인식하는 자가. 인식이 소멸하면 인식이 없는 자가 된다.

   2) 인간의 인식이야말로 자아인 바,

       인식이 오면 인식이 인식하는 자가되고, 인식이 물러가면 인식이 없는 자가 된다,

   3) 큰 신통을 가진 사문·바라문, 4) 혹은 신들은 사람의 인식을 집어 넣기도 빼기도 하는데

       집어 넣으면 인식하는 자가, 빼면 인식이 없는 자가 된다.

   그런데 이 중 어떻게 하여 인간의 인식은 소멸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원인과 더불어 조건과 더불어 인간의 인식은 일어나기도 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인식이 생멸한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틀린 것이라 설하시고,

   어떤 인식은 공부지음에 따라서 일어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라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부지음과 인식의 일어남과 소멸의 예로써 초선∼4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의 7가지와 같이, 그 각각에 있어 그러한 미묘하고 참되고 그러한 인식을 가진 자 만이

   있게 되고, 결국 무소유처라는 인식의 구경에 이르러,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고 어떤 형성(行)도 하지 않으리라라고 결의하여 상수멸(想受滅)을 증득

   하므로, 이같이 알아차리는 서로 다른 인식이 일어났다가 차례대로 소멸함이 있음을,

   또한 인식의 구경인 무소유처로부터 출정하여 상수멸에 들어 인식의 완전한 소멸이 있음을 

   설하십니다. 인식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뽓타빠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황당한

   설명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께

  '인식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뽓타빠다에게

  '그런데 무엇을 두고 그대는 자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으십니다.


   이것은 아주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에 뽓타빠다는 거친 자아의 획득(욕게의 존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색게의 존재),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무새계의 존재) 3가지의 경우가 각각 자아라고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어떤 존재가 그러한 경계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그와 다른 인식이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되고 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존의 말씀을 따르면

   인식은 자아가 아닌 것이고, 인식이 자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자아인 것인가라는 의문에

   뽓타빠다는 부딪히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인식이 자아인지, 인식이 자아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까?'라고.

   세존께서는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알기 어렵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뽓타빠다는 세존의 이같은 답변과 또한 이어지는 십사무기(十事無記)에 대한 세존의 답변을 듣고

   며칠 후에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다와 함께 찾아와서 세존께서는 '하나로 확정된 법을 설하시지

   않는다'고 다른 유행승들이 비난한다고 에둘러 세존을 논박합니다.


   세존께서는 하다못해 색계 천상의 존재를 알고 보면서 머무는 자가 있는지, 어떻게 도를 닦아

   그러한 세상을 얻었다라고 하는 자가 과연 있는지를 물으시고 다른 가르침들과 그를 따른 자들의

   허황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세존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자아'에 대한

   뽓타빠다의 의문을 상세하게 풀어주십니다.


   - 거친 자아의 획득(욕게의 존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색게의 존재),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무새계의 존재) 3가지의 자아의 획득이 있다.


   - 그러나 세존께서는 위 3가지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하신다.


   - 그런 자아의 획득을 버려버린 머묾이 괴로움이라고 생각해서 결코 안된다.

      환희와 희열과 경안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는 그런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 그런 3가지 자아의 획득이 무엇인지 꿰뚫어 알고,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하고 멋있는 것이다.



   이때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다는 '자아'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전에 7번이나 환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자가 어떤 자아를 획득했을 때,

      그때 그에게는 그러한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찟다에게


     '어떤 자가 어떤 자아를 획득했을 때,

      그때 그는 오직 그때의 그이며

      그때 그러한 자아의 명칭만을 얻게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침을 확실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아' 혹은 '나'라는 명칭을 가지는 자아 혹은 나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안개가 걷히듯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어지는 세존의 법문은 참으로 심심미묘하며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찟다에게

   이와 같은 자아의 증득이란 마치

   소로부터 우유가 나와, 우유가 응유가 되고, 응유가 생버터가 되고, 생버터가 정제된 버터가 되고,

   정제된 버터가 최상의 버터가 되는 것과 같고, 그때 각각 우우, 응유, 생버터, 정제된 버터,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만을 가지게 되듯이,

 

   자아의 증득이란 자아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 맞는 이름만을 얻을 뿐이며

 

   거친 자아의 획득(색계의 자아),  마음으로된 자아의 획득(무색계의 자아),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무색계의 자아)와 같은 세 가지 자아의 획득도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며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어서

   각각 그때에 거기에 해당하는 명칭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우유를 버터라고 하지 않고, 버터를 소나 우유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아' 혹은 '나'란 그 이름이 '자아'요 '나'입니다. 그것은 궁극에 그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되었다가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아라한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되지 않도다."

                                                    (* S5.10, 와지라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029)



'나'란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통찰은 이와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원인을 조건으로

사대(四大)가 허공에 모여 드러난 이 몸이 '나'인가라는 질문은 질문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콩밭에 들어가 콩를 집어들고 이것이야말로 소금이 아닌가라고

묻는 사람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4) 존재론_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기도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것은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존재'를 입고 태어난 자에게 1)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2) 무한한가 유한한가?, 3)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운명적인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4) 도대체 '이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위 1) ∼ 3)의 질문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질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존재'로 태어난 이상은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떤 도를 닦아

그러한 굴레로부터 벗어났을 때 그 '궁극적 존재'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인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게 된 것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게 된 것인가

라는 질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그에게는 과연 이 모든 드러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존재의 실상'에 질문이기도 합니다.



세존께서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正等覺)을 이루시고 맨처음 읊으신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한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짓는 자가 누군지 알기위해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괴로움이었네.

 

아! 집 짓는 자여! 나 이제 그댈 보았나니,

       그대 더 이상 집 짓지 못하리. 

       이제 그대의 모든 서까래는 부셔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러

       갈애의 부숴짐을 성취하였다."

                           (법구경 153~154)



바로 그분 세존께서도 4아승지 10만 대겁을 십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으시며 꿰뚫어 알고자 하셨던

것이 비로 '집짓는 자가 누군지 알기 위해' 즉, 이 모든 '존재'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나도 역시 깨닫기 전, 아직 정등각을 얻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1) 내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했다.

    2) 내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구했다.

    3) 내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구했다.

    4) 내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구했다.

 

    5) 내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구했다.

    6) 내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구했다.'


고 솔직하게 말씀하시며, 이러한 자신을 반추하시어 '태어남이 없는, 늙음이 없는, 병듦이 없는,

죽음이 없는', 그리고 '슬픔이 없는,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위해 마지막으로

태어나신 이 세상에서 출가하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무엇을 구하여 줄가하신 것입니까? '일체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을 위해서 입니다.

다른 말로 '궁극적 존재'를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 M26, 성스러운 구함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40)



또한 위빳시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구나.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늙음 · 죽음이라는 이 괴로움의 출구를 꿰뚫어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디서

      늙음 · 죽음(老死)라는 이 괴로움의 출구 꿰뚫어 알 것인가?'

                                                    

                                                          (* D14, 대전기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0)


라고 궁구하셨음을 세존께서는 설하셔서, 모든 여래님들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의 출구'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존재로부터의 출구'에

다름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존재란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삼계(三界)를 뒤흔드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뒤흔드는, 천지일대사(天地一大事)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체 세상, 일체 중생이 오직 이 한 가지 물음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이치에 맞는 통찰(如理作意, yoniso manasikara)를 통하여,

                        

1) 일어남의 지혜(연기의 순광), 2) 소멸의 지혜(연기의 역관)을 통하여 일체 괴로움, 일체 존재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꿰뚫어 아는 것,

                        

2) 이어서 그러한 지혜로 (나 등으로 취착한) 존재, 존재로 취착한 구성요소 내지 그 형식인 

    다섯 무더기(오온)를 알고 각각으로 쪼개서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꿰뚫어 통찰합니다.

                           

3) 그는 일체 존재라고 할 오온이 단지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되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어서

    무상할 뿐이며, 그러기에 그것을 거머쥐었을 때 괴로움은 불가피한 것이며, 실로 그안에

    '나'라고 거머쥘 것이 없음을 통찰합니다.

                          

4) 그렇게 그는 '일체 존재(괴로움)가 괴로움임을', '일체 존재(괴로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일체 존재(괴로움)의 소멸이 있음을', '어떻게 하여 일체 존재(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되는지'를

    꿰뚫어 알고 보게 됩니다. '그'는 '그'로부터 허물을 벗듯 벗어납니다.

                     

5) 그렇게 그는 어떤 나와 어떤 세상등을 포함한 일체 존재(괴로움, 오온, 일체 정신물질)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그는 그렇게 '일체 존재(괴로움)'를 벗어버립

    니다.

                        

                             

이같은 그에게 '존재'는

1) 존재하거나, 2) 존재하지 않거나, 3)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거나, 4)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 어떤 말로도 형용되지 않습니다.

그는 존재라는 그물도, 비존재라는 그물도 벗어버렸습니다.


일체라는 그물로도, 열반이라는 그물로도 그를 포획할 수는 없습니다.

열반은 그 이름이 열반일 뿐입니다.


이같은 것이 세존께서 설하신 '존재론'입니다.

전인미답의 길이요, 천지일대사(天地一大事)를 푸심이요,

'모든 괴로움을 몰아내심'이요, 참된 행복의 길을 여심이요,

삼계(三界)와 일체 중생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았음입니다.


그리하여 사함빠디 범천께서 청하신 바와 같이 '세상이 망하고, 세상은 파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사∼두∼'로 칭송할 단 하나의 일이 있다면 바로 이 일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 '심오하여 깨닫기 어렵고, 보기 어렵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무한한가 유한한가, 나의 몸이 생명인가 아닌가,

궁극적 존재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문제는,


그때 '나'의 알음알이와 그 알음알이로 인해 펼쳐진 세상이라는 정신물질과의 끝없는 상호작용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그 이전에 '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통찰,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통찰의 문제 전부를 다 끌어 안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전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그 질문들이 질문 안에 제시하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으며,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그 질문들이 질문으로서 성립조차 되지 않는 곳에,


'무한하고 볼 수 없으나,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지고',

                                               (* D11, 께왓다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107)

그러하기에 '일체가 청정한' 채로

                                               (* D24, 빠띠까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421)


시공과 유무를 초월하여 지금여기 처처에서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질문들은 그야말로 대낮에 토끼뿔이나 거북털을 찾음이요,

콩밭에 가서 소금을 찾는 일이요,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일이 되고 맙니다.




세존의 가르침은 이와 같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물에 걸려있음을 자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현자들만이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물질(오온)이라는 소스코드로 만들어진,

거대하고 틈이러고는 없는 정교한 매트릭스(matrix, 자궁)에서,

그것도 타인이 아닌 자신 스스로 '나'를 프로그래밍(programming)하여,

태어난 나는 언제든 지워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한 개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 '나'는 나의 '노예'라는 것을 자각하여,

자유를 얻기 위해 대발심을 일으켜 매트릭스(정신물질, 혹은 오온)로 들어가서

그것은 오직 프로그램이라는, 노예라는 괴로움임을 만들어 낼 뿐임을,

나의 갈애가 그 프로그래머(programmer)라는 것을,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갈애의 소멸이 있음을,

어떻게 하여 거기에 이르는지를 낱낱이 꿰둟어 알아,


그 어둠의 무더기(蘊)를 낱낱이 부숴버리고, 다시는 매트릭스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자들의 이야기가

그분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결코 쉽지 않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설하십니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1) 심오하여 

      2) 보기 어렵고

      3) 깨닫기 어렵고

      4) 고요하고

      5) 수승하고 

      6) 사유의 영역을 넘어섰고

      7) 미묘하여

      8)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긴다.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런 경지, 즉 


      1)'이것에게 조건이 됨'인 연기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2)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음,

      3) 모든 재생의 근거를 완전히 놓아버림

      4) 갈애의 멸진,

      5) 탐욕의 빛바램,

      6) 소멸,

      7) 열반을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를 피로하게 만들 뿐이고, 나를 성가시게 할 뿐이다.

 

      그때 나에게 이런에 들어보지 못한 게송이 즉흥적으로 떠올랐다. 

 

           '내가 어렵게 증득한 법을

            과연 설할 필요가 있을까?

 

            탐욕성냄으로 가득한 자들이 이 법을 깨닫기란 실로 어렵다.

 

            1) 흐름을 거스르고,

            2) 미묘하고,

            3) 심오하고,

            4) 보기 어렵고,

            5) 미세하여,

 

            어둠의 무더기에 덮여 있고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숙고할 때 내 마음은 법을 설하기보다는 무관심으로 기울었다."라고.




3. 독이 잔뜩 묻은 화살을 맞아 죽어가는 이는 먼저 화살을 뽑아야 한다.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질문들은 사변적인 지자들이라면 누구라도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성격이나 본질 혹은 세존의 가르침과 동떨어짐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없이 그것을 물어옵나다, 심지어는 그것에 대해 단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는다면 세존의 가르침은 배룰 만한 것이 못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왜 이것을 설명하지 않는가?'를 아래와 같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 1) 이익을 주지 못하고,

    2) 청정범행의 시작과 관련이 없고

    3)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4)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5)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6)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7)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8)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9)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 그대로이며, 실제 그렇습니다.



세존께서는 이같은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으면 세존의 밑에서 수행을 그만 두고 환속하겠다는

말울꺄뿟따 존자의 자세를,

 

'독이 잔뜩 묻은 화살을 맞아 죽어가는 이'가

화살을 쏜 자의 출신을, 이름과 성을, 키가 큰지 작은지를, 피부색을, 어디에 사는 지를,

그 활이 어떤 활인지를, 활줄이 무엇으로 만등어졌는지를, 화살대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화살대의 깃털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화살대를 묶고 있는 힘줄은 어떤 짐승의 것인지를,

화살촉은 어떤 모양의 것인지를


내가 알기 전에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설하십니다.

참으로 '비유의 달인'이십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화살을 뽑기 전에는 적어도 그 화살촉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는 세존의 말씀처럼 '그것을 알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죽음을 면하려면 그러한 것들을 아는 것보다도, 먼저 그 화살을 뽑아야 합니다.

그 화살을 뽑고 죽음을 면한 다음에 그가 궁금한 세세한 것들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 여기서 '화살을 뽑음'이란 무엇을 비유한 것입니까?,,,,,,



다리를 건너기 위해 한 발자국을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 세존께서는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정신물질과 알음알이의 상호작용이라는 괴로움(존재)이라는 이 언덕에서,

열반이라 이름하는 저 언덕으로 가는 다리를 말함입니다.


세존께서 세상을 연민하여 만들고 천명하신 그 다리 말고 저 언덕으로 갈 수 있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 강(江)은 그 다리말고는 건널 수 없는 네 가지의 폭류가 소용돌이치며 흐릅니다.

무엇이 그 넷입니까? '1) 감각적 욕망의 폭류, 2) 존재의 폭류, 3) 견해의 폭류, 4) 무명의 폭류'가

그것입니다.(* S55:77, 폭류 경)


그 다리는 '떨쳐버림을, 탐욕의 빛바램을, 소멸을,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1) 열의, 2) 정진, 3) 마음,

4) 검증(관찰)을 바탕으로 한 삼매의도된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성취수단을 닦음이라는 금강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분명히 '열반'을, 저 언덕을 설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인욕은 최상의 고행이요,

열반은 최상'이라고 설하십니다.(* D14, 대전기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160)

그러나 어떤 아라한도 여래도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아래와 같이 또한 천명하십니다.


     "그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안다.  

 

      열반을 열반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알아

 

      1) (자신을) 열반이라 생각하지 않고,

      2) (자신을) 열반에서 생각하지 않고,

      3) (자신을) 열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4) 열반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 M1, 뿌리에 대한 법문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532)


세존께서는 당신께서 열반에 이른 자라고 자랑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깨달았다고, 혹은 비구들에게조차도 나를 존경하고 예배하라고 하신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대반열반경을 보면 세존께서는 반열반하실 때까지도 80의 고령이 되셔서도 법을 전하기 위해

유행하셨으며 한 벌의 가사와 탁발로 지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열반'보다도 훨씬 더 많이 설하신 것은 바로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참으로 대영웅(大英雄)다우신 단호함입니다.



감각적 욕망, 존재, 견해, 무명의 4가지 폭류를 건너 저 언덕으로 간 자만이

이 언덕을 천천히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일체 존재(괴로움), 일체 정신물질, '나'를 포함한 '세상',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을 '바로 보고', '꿰뚫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이 언덕에 사로잡혀 있는 왜곡되고 잘못된 질문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잎으로도 설명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설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설명했는가?


      말룽꺄뿟따여,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그러면 나는 왜 이것을 설명했는가?


      말룽꺄뿟따여, 이것은 참으로


      1) 이익을 주고,

      2) 청정범행의 시작과 관련되며

      3) 염오로 인도하고, 

      4)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5) 소멸로 인도하고,

      6)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7)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8)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9)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설명했다."라고.

                 

                    

4. 지금여기에서 바로 괴로움이 소멸한 채 머무는 법을 나는 가르친다.


세존께서는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질문과 같은 영원, 무한, 나, 존재에 대한 어떤 견해도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는 '청정범행을 닦을 수 없다. '라고 설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존의 가르침은 그러한 견해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이미 견해의 그물이 걸려있는 것이며, 그러한 견해를 취착하고는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열반으로의 길' 즉 청정범행을 시작할 수 없고그 길을 계속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견해가 있으면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있을 뿐이다."


라고 단언하십니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견해를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질문이 성립되지도 이익이 되지도 않기에

그러한 견해의 시비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일체 견해가 그물인 실상을 보라고

항상 가르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견해의 그물(見網)'을 설하시고


   "그들은 위로 오르고자 하나

    그물에 걸린 채 오르게 된다.

    그들은 참으로 그물에 완전히 갇혀서 오를 뿐이다."

                                                         (* D1, 범망경: http://blog.daum.net/ibakdal/17369847)


그것이 어떤 견해든 견해를 취착하는 자를 이미 그물에 갇혀서 오르는 물고기에 비유하십니다.



심지어는 역마차 교대 경(M24)에서 칠청정(七淸淨)을 설하시면서 '마음의 청정, 견(見)의 청정'에

이어 '지견(知見)의 청정'에 이르러서도


   "도반이여, 

    지견에 의한 청정을 취착 없는 완전한 열반이라고 천명하셨다면, 

    취착이 있는 것도 취착 없는 완전한 열반이라고 천명하신 것이 되고 맙니다.


    도반이여,

    그러나 만일 이 법들이 없이도 취착없는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면 

    범부도 완전한 열반을 성취할 것입니다."

                                    (* M24, 역마차 교대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1921)


라고 설하시어, '지견의 청정'과 같은 지극한  법들의 성취 없이 '취착없는 완전한 열반'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지견의 청정' 조차도 취착하지 않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도리임을

아라한들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음을 분명히 알리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나는 지금 ‧ 여기에서 바로 

    태어남 ‧ 늙음 ‧ 죽음 ‧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하는 것을 가르친다."


라고 천명하십니다. 세존의 모든 가르침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한 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여기에서 바로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한 채로 머무는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열반'의 다른 이름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설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룽꺄뿟따 존자의 질문이 너무나 먼 곳에 있는 질문이기에 본경에서 세존의 이 가르침은

도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러한 질문들의 정반대에 서있는 이 간명한 가르침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겟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에게 물이 무엇이며, 왜 물이 생겨났는지 설함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는 물에서 일단 나와야 합니다.

                         

불이 난 집에 들어앉은 자에게 불이 무엇이며, 이 불이 왜 생겨났는지 설함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달빛조차 없고 온통 절벽인 곳을 헤매이는 자에게 그 어둠이 무엇인지, 그 어둠이 어째서 생겨났는지,

그가 왜 거기에 이르렀는지, 또한 그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이전에 사방을 비춰보고 길을 찾을 수 있게하는 한 개의 등불입니다.

세존께서는 말룽꺄뿟따 존자에게 이같은 도리를 설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물이 무엇인지, 불이 무엇인지, 혹은 어둠이 무엇인지 꿰뚫어 알기 위해서

그는 먼저 물에서 나오고, 불 난 집에서 나오고, 등불을 찾아 집어드는 것이 먼저입니다.

팔지성도(八支聖道)의 길을 따라 실마리들을 하나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언젠가 그는 그가 알고

싶어햇던 그 모든 것을 비로소 꿰뚫어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온다고 세존께서는 천명하셨습니다.

                                   

팔정도의 그 길은 외길이요, 한 갈래 길입니다. 그것말고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모두 알게 되는

방법이란 실로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경우 결국 그는 '그것을 알기 전에 죽을 것이고', 그 다음다음

생도 끝없이 답을 구하지 못하고 헤맬 것이며 괴로움에 시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말룽꺄뿟따 존자가 묻는 심사무기(十事無記)의 질문을 설명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대하셨지만, 그가 그 답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말룽꺄뿟따 존자는 현자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세존의 이러한 짧은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중생의 생사와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 달려있는 엄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고 호지하라. 

       내가 설명한 것은 설명했다고 호지하라."

                                       

라는 부처님이 가르침은 참으로 긴 여운을 남깁니다.

                      

                     

                   

                          

이같이 새겼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게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

                       

                   

                        

이 경을 사경한 공덕이 있다면,,,

참으로 못난 짓인지 모르겠으나 온전히 저 자신에게 회향코자 합니다.

전생에 공덕지음이 없었기로 지혜가 없기로 참으로 혹독한 일들을 겪었고

아직도 어려움에 처해있고,, 이제 큰 곡절을 다시 맞았기 때문입니다.

                              

시작을 모르는 과거로부터 윤회하면서 지금 생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가르침, 승가,

부모님, 스승님,

저보다 공덕이나 나이가 많은 분들께

제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여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예경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다른 이들이

나에게 범한 잘못들도

선한 이들의 마음으로 다 용서합니다.

적대와 악의와 잔인할 수 있음과 과 비난 모두 버렸습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공덕을

온전히 제 자신에게 회향하오니

이 회향을 받아 혹독함을 면하기를,,, 잔인함을 면하게 되기를,,,

원수들과 위험과 나쁜 것들 이제 그만 만나고

자애할 줄 아는 자들과 연민을 아는 자들과 지혜있는 자들을 만나게 되고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가 청정하고,

세간과 출세간의 빚 모두 갚는 자가 되게 하여지이다,,,,

                        

사∼두∼  사∼두∼  사∼두∼

                            

                          

2017.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