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먼저,,,
매번 한 개 경(經)의 사경을 마칠 때 마다 후기(後記)를 쓰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한 것은 아닙니다만, 거듭하면서는 아예 다시 처음부터 돌이켜서 낱낱이 후기를 쓰게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하신 말씀은 거듭하여 읽어 보면 아무리 간단히 설하신 것이라 해도 그것은 무슨 소설이나 이야기 같은 류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요긴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 본 후에도 그 경의 가르침의 의미를 꿰뚫어 알기 위하여는 그 경이 어떤 흐름
으로, 어떤 구조로, 어떤 주제를, 어떤 방법으로 설해졌는지까지를 꼼꼼히 따져 보고 정리해 보지
않고는 무슨 가르침를 설하신 것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점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방법으로 어디에 이 가르침의 방점이 있는 지를 잘 정리해 두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다시
그 경을 대할 때라도 다시 그 경의 가르침을 얻어 가지기 위해서는 마치 그 경을 처음 보는 것처럼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는 안되게 되는데, 이런 비효율을 피하기 위하여도 처음 그 경을 대했을 때
생각난 것을 잘 정리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후기를 쓰면서 그 경의 뜻을 꿰뚫어 알고자 하면, 반드시 '왜 부처님은 이런 가르침을
설하셨을까?'라는 의문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 가르침의 뜻을,
그 궁극이나 지향하는 바를 알기가 어렵고, 그러한 성찰이 없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 식의 많은 가르침의 나열이라는 방일한 인식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 '가르침의 공덕' 중의 첫 번째가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라는 점, 그리고 여섯 번째는 '지자라면 각자 일 수
있는 것이다.'라는 점을 숙고하여 보더라도 비록 자신의 깨우침과 공부가 응당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왜 세존께서는 이런 가르침을 말씀을 하셨을까?'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고 경을 대하게 될 것인 바, 후기를 쓰다 보면 이런 점을 상기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후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부 경장, 혹은 5부 경장의 모든 경, 혹은 경·율·론 삼장 전체를 낱낱히 손가락만 까딱하여도 다 접할
수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행복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아비담마는 커녕,
책이라는 것도 없고, 문자로 기록된 것도 없고, 오직 어떤 자리에 정말 다행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단 하나의 가르침을 듣고도 그것을 부여 잡고 숙고하고, 성찰하고, 그에 따라 수행하여 수 많은
성자들이 나왔던 그 시절을 우리는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경을 다 알고 지녀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과를 얻으신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사치스럴 정도의 너무나 많은 가르침에 묻혀 있는 것 아닌가고 겸손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2. 모든 번뇌의 소멸 즉,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하시다.
본 「모든 번뇌 경」 후기의 사설이 이렇게 길어지는 것은 본 경이이야말로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는 저의 생각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앞서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이 '열반경'이라고 이름하여 좋을 '열반'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이라고 한다면.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며, 더 줄이면 '갈애의 소멸'이며, '괴로움의 종식'인 바,
이와 관련한 부처님의 정형구화된 법문을 상기하면,
"그는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1)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2)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3)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4)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1)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2)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3)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4)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1)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2) 존재의 번뇌(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3) 무명의 번뇌(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예를 들면 초기불전연구원역 디가니까야 「사문과경」(D2) 97절)
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해탈 혹은 열반에 이르름이란 '괴로움의 소멸'이고, 이는 '번뇌의 소멸'에 다름아니며
'괴로움'과 '번뇌'는 등가(等價)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본 경을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그대들에게 모든 번뇌를 단속하는 법문을 설하리니,,,"
번뇌의 범주에 대하여는 '모든 번뇌'라고 하셨고, 그것을 '단속'하는 법을 설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은 봄(見)으로써, 단속함으로써, 수용함으로써, 감내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버림으로써, 수행으로써 '없애야'할 번뇌들을 설하시는 바, 결국 위의 '단속'이라함은 그냥 단속하여
제어하는 방법일 뿐만아니라, 결국 그 궁극의 목적은 번뇌를 '없앰' 혹은 번뇌의 '멸진(滅盡)'에 있음을
분명히 하시고,
그러나 그 마지막 즉, 본 경의 마지막에서 세존께서는
"이를 일러
'비구가
1] 모든 번뇌를 단속하며 머물고, → 모든 번뇌의 소멸, 모든 번뇌의 여읨. '번뇌가 다했고'(아라한)
2] 갈애를 끊어버렸고, → 갈애의 소멸
3] 족쇄를 풀어버렸고, →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아라한)
4] 자만을 바르게 꿰뚫었고,
5]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버렸다.' → 괴로움의 종식
고 한다."
라고 천명하시어, 본 경 「모든 번뇌 경」의 설하신 바 지향은 결국 해탈·열반에 있음을 알 수 있고
해탈·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하신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앞서 「뿌리에 대한 법문」 즉, 모든 법의
뿌리인 열반을 마치 어떤 것을 마치 벼락을 치듯이 정수리에서 아래로 가르는 방법으로 설하신
것이라면, 본 경 「모든 번뇌 경」은 그 발바닥부터를 상세하여 아래로부터 위로 갈라서 해탈·열반을 설하신 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보면 본「모든 번뇌 경」은 얼핏 보면 각각 다른 여러 종류의 번뇌를 그에 따라 그 대처나
방법을 달리하면서 단속하고 없애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기실 본 가르침의
함의는 훨씬 심오하고 중차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디가니까야에서 심심미묘한 「범망경」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로 그 뒤를 그 구체요 상세라고도
할 수 있는「사문과경」이 장엄하고 있듯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뿌리의 법문 경」에 이어
「모든 번뇌 경」을 배치함으로써 맛지마니까야도 장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고, 경를 결집할 때
이같은 오백 아라한들의 배려가 있음을 또한 알아차려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3. 일곱 가지를 관통하는 원리: 알고 봄(知見), 지혜로운 통찰(yoniso manasikara)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본 경에서 세존께서는 7가지 방법으로 없애야 할 번뇌를 말씀하시되
과연 그로써 '모든' 번뇌를 다 말씀하셨는가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본 경의 이름인
「모든 번뇌 경」(Sabbasava Sutta)이 합당한 이름이 될 것이고, 또한 '모든' 번뇌를 여의는 법을
설하셨어어야만 본 경을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하신 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 경의 7가지 종류의 번뇌를 단속하고 없애는 법을 보면서 잊지 말고 끝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7가지를 마치 머리 꼭대기에서 지휘하듯이 일관하는 두 가지 가르침입니다.
그 첫 번째는
"알고 보는 자의
번뇌들이 소멸한다고 말하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의
번뇌들이 소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라는 서언(序言)의 가르침입니다.
즉 번뇌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번뇌이든 '알고', '보아'서 그 번뇌들을 소멸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번뇌들을 알고 보지 못하면서는 그러한 번뇌들을 소멸할 수는 없다는 천명을 하신 것이라
생각되고,
기실 알고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번뇌의 소멸이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여 그 번뇌의 궁극을,
심연을 꿰뚫어서 알고 보지 못한 번뇌의 단속이란 감정이나 느낌에 그치는 것이어서
언제든 그 번뇌는 재발하고 돌출할 수 있는 것이기에 참으로 요긴하고 심오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는 그렇다면 어떻게 위와 같이 번뇌를 '알고, 보게' 되느냐 하는 방법론의 문제입니다.
세존께서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의 번뇌들이 소멸하는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과
지혜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라고 천명하시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으로써 '알고 보게'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결국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으로써, 모든 번뇌를 '알고 보게'됨으로써, 그러한 번뇌들을
단속하고 없앨 수 있음으로 인하여, 열반에 이르름을 천명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으로 옮겨진 'yoniso manasikara'라는 빨리어가 과연 우리말로
어떻게 옮겨져야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들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만,,, 이치에 맞게 혹은
사성제의 진리에 맞게 숙고한다 하자니 숙고하여 진리를 알기 전에 이미 '이치' 혹은 '진리'라 있어어
모순이 되고, 숙고한다 하자니 숙고의 주체가 무엇이관대 숙고한다는 지도 의문스럽고,
그러나 그것이 마음이 방일한 것이 아니라 잡은 것을 놓지 않고 잡고 있는 상태로 도리에 맞게 잘
궁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잡도리한다는 표현도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인 바,
그리하여 결국 '지혜롭게 통찰한다.'는 정도의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4.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설해졌는가?
다시 과연 '모든' 번뇌를 설하신 것인가로 돌아가서 그러한 관점에서 본 경의 가르침을 순서대로
리뷰하면서 본 경 요지를 요약해보려 합니다.
1]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다른 단속함으로써, 수용함으로써, 감내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버림으로써, 수행함으로써
없애야 할 6종류의 번뇌들과는 달리 세존께서는 이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힘써 설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1) 세존께서는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을 발제하신 후
먼저 범부들의 번뇌가 왜 일어나고 증가하는지를 먼저 설하십니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 존재에 기인한 번뇌,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일어나고 증가하는
그러한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이라고 논파하십니다.
2) 그렇다면 위의 그러한 법들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아래와 같이 직접 예시하시는데 이것은
2,559년전이나 지금에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을까? 아니면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에 어떠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었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에 존재할까? 아니면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에 어떻게 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할까?
지금 현재에 대해서도 안으로 의심한다.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와 같은 과거, 미래, 현재의 존재 등과 관련한 15가지의 법들이 바로 그러한 법들
즉, 감각적 욕망, 존재, 무명에 기인한 번뇌들을 일어나게 하고 증가하게 하는 법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로 그 범부에게는 다음과 같은 6가지의 견해가 '진실로 확실하게' 생기게 되는 바,
그것은
1> '나에게 자아가 있다.'
2> '나에게 자아란 없다.'
3> '나는 자아로서 자아를 인식한다.'
4> '나는 자아로서 무아를 인식한다.'
5> '나는 무아로서 자아를 인식한다.'
6>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며,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
그런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라는 6가지의 견해로써 범부가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는 것을
1> 견해에 빠짐, 2> 견해의 밀림, 3> 견해의 황무지, 4> 견해의 뒤틀림, 5> 견해의 요동,
6> 견해의 족쇄라고 천명하시며,
이러한 '견해의 족쇄'에 계박된 배우지 못한 범부는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또한 천명하시는 바 참으로 심오하고 요긴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어서 세존께서는 그렇다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어떻게 번뇌들을 일어나고 증가하지
않게 마음에 잡도리하는가에 대해서 설하십니다.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 존재에 기인한 번놔,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없어지는' 그러한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십니다.
한 마디로 범부들과 다른 법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즉 지혜롭게 법을 간택하여 통찰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4) 이어서 세존께서는 그런데 그런 법이 무엇인가를 바로 설하십니다,
그러한 그 법은 바로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의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의 법임을 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줄여서 보면 사성제의 진리를 항상 지혜롭게 마음에 통찰함(마음에 잡도리함)으로써,
그러한 진리를 통찰하여 생겨난 '앎'과 '봄'으로써,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을 없애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5) 세존께서는 이 부분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여
"그가 이와 같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면 세 가지 족쇄들이 제거되나니
1>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와
2> 의심(疑)과,
3> 계행과 허례허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라 한다."
와 같이 마무리를 하여, 결국 세 가지의 번놔 혹은 족쇄는 위의 3가지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런데 위의 3가지 족쇄는 바로 유신견, 의심, 게급취로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결코 사악처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많아도 8번째 태어남은 받지 않는 예류자의 도과를 앋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기도 합니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사성제를 지혜롭게 마음에 통찰함에 따라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에 대한 바른 견해, 바른 존재론, 여실한 존재론과,
그러한 통찰에 이르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선업, 보시, 지계, 수행, 자애, 연민, 인욕 등 모든 유익한 법은 오직 유익할 뿐이고, 그 반대인 해로운 법은 오직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법에 대한 의심없음. 즉 유익한 법이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라던가, 해로운 법도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심과의 완전한 결별, 내지 참된 도닦음을 접어두고 상론 혹은 단론에 빠져 계나 허례의식만을 통해지속적으로 선처에 태어나려는 번뇌 혹은 족쇄의 소멸을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의심이나 계금취는 위의 범부들의 '견해에 빠짐'과 같이 바른 존재론 즉 유신견에서의 벗어남이 확립
되지 않아서 생긴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어서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의 핵심은
'존재에 대한 바른 견해' 즉 '유신견에서 벗어남'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성제에 대한 지혜로운 마음의 통찰을 통해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로서
번뇌의 소멸, 내지 열반에 이르름, 혹은 해탈의 첫 단계인 바,
세존께서 이같이 다른 번뇌들보다도 더욱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정성스럽고도 간곡하게
설하신 이유를 잘 새겨야 하겠습니다.
2]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이제 유신견에서 벗어남 즉, 자아에 대한 바른 성찰을 확립한 후, 혹은 그 전이라도
수행자가 평상시의 삶을 산다는 측면에서 차원을 달리하여, 그리고 또 평상시 삶의 기본으로서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로 바로 여섯 가지 감각기능에 대한 단속을 설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눈의 감각기능(眼根), 눈의 감각기능(耳根), 코의 감각기능(鼻根), 혀의 감각기능(舌根),
몸의 감각기능(身根),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노의 감각기능(意根)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根)을 '지혜롭게 통찰'하여 잘 '단속'함으호써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없애는 바, 이를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제어하고 단속한다함은 무엇을 단속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닿고, 아는 것을 단속한다는 것으로 그러한 감관(感官)들이
기능할 때 그것을 지혜롭게 통찰함으로써 그러한 감관들의 대상인 정신·물질을, 혹은 그러한 대상을
접촉하여 일어나는 오온을 연기(緣起)로써 보아 그 일어남·사라짐을,
그리하여 그것이 예외없이 처절하게 눈물나게 무상한 것임을, 그것이 오직 괴로움일 뿐임을,
그것에 참으로 내라 할 것이 없음을 여실히 통찰하여 즉, 이와 같음을 '알고, '보아' 전도된 망상을
부여잡아 갈애나 취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단속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수용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세존께서는 중도(中道) 즉, 팔정도를 고멸성제 내지 괴로움의 소멸에 도닦음의 길을 천명하셨습니다.
위와 같이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단속하여 쾌락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시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극단의 고행에 흐르는 것 또한 유익하지 않음을 천명하신 바입니다.
음식, 옷, 거처,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지혜롭게 통찰하여 수용함으로써
몸을 지탱하고, 잔인함을 쉬고, 청정범행을 잘 지키기 위해서,
추위, 더위를 물리치고, 날파리, 모기, 바람, 뙤약볕, 파충류에 닿음을 물리치고,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기후변화에서 생기는 위험을 없애고, 한거를 편안하게 하며,
병으로 인해 일어난 고통스런 느낌을 물리치고, 병 없음을 최상으로 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수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없엘 것을
설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수용하라고 하신 것은 '마치 새가 어디를 가나 그 두 날개에만 의지하듯이'
최소한의 필수품으로 만족하고 사는 것이어서 '두타행(頭陀行)' 즉 고행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실제 세존께서는 마하 깟사빠 존자와 같은 제자들의 두타행을 칭송하시는
것을 보아서도 자명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4]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이 부분에서 세존께서는
1> 추위와 더움과
2> 배고픔과 목마름과
3> 날파리, 모기, 바람, 뙤약볕, 파충류에 닿음,
4> 고약하고 언짢은 말들
5> 몸에서 생겨난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찌르고, 불쾌하고,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느낌을
지혜롭게 통찰하여 감내함으로써
이들을 감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없앨 것을
설하십니다.
수행자가 자애와 인욕이라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대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제 「톱의 비유 경」(M21)에서는 "양쪽에 날이 달린 톱으로 사지를 마디마디 잘라낸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해 마음을 더럽힌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라고 설하시는 것이
생각납니다.
1) 자아를 바로 보고, 2)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3) 최소한의 필수품은 수용하지만,
만일 최소한의 필수품인 음식, 옷, 거처, 약품을 때로는 공양받지 못하거나
혹은 뜻하지 않은 지경에 처하여 몸의 고통이나 생명이 위험에 처하는 지경에 이른다 할지라도
세존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들 즉 고통스러움을 감내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고통을 4)'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할 것을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기 힘든 불편과 고통을 죽음까지를 '지혜로써 통찰'하여 '감내'하면서 마음을 오염원에서
지켜 청정함을 향한다는 측면에서 말로는 쉬우나 그 행함에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음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5] 피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이어서 세존께서는 피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을 설하십니다.
1> 사나운 코끼리, 말, 소, 개, 뱀 등 위험한 짐승이나 상대
2> 나무등걸, 가시덤불, 협곡, 낭떠러지, 더러운 물구덩이, 웅덩이이와 같은 위험한 장소
3> 작절하지 않은 자리, 갈 곳이 아닌 곳, 저열하고 적합하지 않은 자리, 영역이 아닌 곳,
4> 저열한 도반들
을 지혜롭게 통찰하여 피할 것을 설하셨습니다.
이 부분 또한 중도(中道)의 측면에서 보지 않을 수 없는 가르침이라 생각됩니다.
비록 위 4)와 같이 때로는 닥쳐오는 불편과 고통을 감내하라고 하셨지만 그헣다고 하여
바보같이 일부러 뻔한 위험을 자초한다던가, 도닦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한 장소나 상대들을
접함으로써 번뇌를 일으킬 것이 아니라,
이들은 미연에 피함으로써 일어날 수도 잇는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를 없애야 한다고 설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6] 버림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1) 자아를 바로 보고, 2)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3) 최소한의 필수품은 수용하고, 4) 그리고 일어나는
불편이나 고통은 감내하고, 5) 그리고 일부러 위험한 것은 초래하지 않고 피하고
이어서 세존께서는 6) 버림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를 설하십니다.
왜냐하면 1) ∼ 5) 까지 그렇게 하더리도 삶을 영위하면서 수행자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아래의 것들은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닦음이 다할 때까지, 하여 그 갈애가 다할 때까지,
그 심연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기에 이의 단속을 설하신 것으로 사료되는 바, 그것은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
2> 악의에 찬 생각
3> 해코지하려는 생각
4>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삿되고 해로운 법들
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네 가지를 '지혜롭게 통찰'하여
품지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애야한다고 천명하십니다.
이것이 버림으로써 없애야 하는 번뇌들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삿되고 해로운 법들'에 이르러서는 중생들이 비록 닦음이 있다하더라도
그러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부처님의 이같은 깊은 통찰과 가르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7] 수행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1) 자아를 바로 보고,
2)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3) 최소한의 필수품은 수용하고,
4) 그리고 일어나는 불편이나 고통은 감내해야 하고,
5) 그렇다고 하여 위험한 것은 일부러 초래하지 않고 현명하게 피하고
6) 그래도 지속적으로 일어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은 품지 않고 버리고 끝내고
그리고 무엇이 남았습니까?
그것이 수행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입니다.
그것은 수행하지 않으면 일어날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수행함으로써 없앤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깨달음의 일곱 가지의 구성요소 내지
해탈에 이르는 7가지 필수요소라도 해도 좋을 칠각지(七覺支)의 수행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닉다.
1>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
2>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刻支)
3> 정진의 깨달의 구성요소(精進覺支)
4>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
5> 경안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
6>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
7> 평안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
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7가지 필수요소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이를 수행하는 그 지향과 방법에 대해서 반복하여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1> 떨쳐버림을 의지하고,
2> (탐욕의) 빛바램을 의지하고,
3> 소멸을 의지하고,
4> 철저한 버림으로 기우는
것이 그 칠각지 수행의 지향이고, '지혜롭게 통찰'함이 그 방법임을 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찰해 보건대,
마음챙김의 깨달음을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에 아예 임할 수 없을 것이어서 이에 따른 번뇌가,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의 대상이 모호함으로 인한 번뇌가,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수행하지 않으면 방일에 따른 번뇌가,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을 해도 그 수행의 참됨이 결여됨으로 인한
출세간의 희열이 따르지 않음에 따른 번뇌가,
경안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을 해도 그 수행의 참됨이 결여됨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가벼움이 없는 것에 따른 번뇌가,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수행하지 않으면 마음 다스림을 통한 실상에의 도달이나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에 달할 수 없는 번뇌가,
평안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수행하지 않으면 갈애를 꿰뚫어 일체를 여읜 평안, 적정, 열반에
이를 수 없음에 따른 번뇌가,
각각 일어나고 증가할 것인 바 ,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지혜롭게 통찰'하여 칠각지를 수행함으로써 '알고', '보아' 없애야 할 번뇌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번뇌들은 결국 감각적 욕망에 기안한 번뇌, 존재에 기인한 번뇌, 무명에 기인한 번뇌들
로서 맨 처음으로 돌아가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를 설하실 때 마음에 어떤 법을 잡도리할
것인가에 있어서 그 법의 기준과도 일치하고,
만일 어떤 수행자가 있어서 그 법의 기준과 일치하는 즉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들, 존재에 기인한 번뇌들, 무명에 기인한 번뇌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없어지게 하는 그
사성제의 법을 항상 마음에 지혜롭게 통찰하는 자가 위와 같이 칠각지의 수행을 통하여 그 도닦음을 완성하는 것, 즉 열반의 증득, 즉 그 '사성제를 봄'을 완성하는 데까지를 설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5. 結
세존께서는 이 법문을 마무리하시면서
"1)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은 봄으로써 없애야 한다.
2) 단속함으로써 없애애 할 번뇌들은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한다.
3) 수용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은 수용함으로써 없애야 한다.
4)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은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한다.
5) 피함으로써 없애야 항 번뇌들은 피함으로써 없애야 한다.
6) 버림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은 버림으로써 없애야 한다.
7) 수행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은 수행으로써 없애야 한다."
라는 얼핏 보면 종류를 달리하는 번뇌들에 대하여 이를 대처하는 방법을 열거하는 방법으로
설하십니다.
그러나 그 함의를 들여다 보면
1) 사성제를 항상 마음에 잡도리하여 지혜롭게 통찰하여 자아 혹은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고 알아
유신견에 벗어나고,
2)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제어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갈애들을 지혜롭게 통찰하여 보고 알아 단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3) 그러나 극단의 고행으로 흘러서는 안되므로 이를 지혜롭게 통찰하여 보고 알아 최소한의 필수품은
수용하고,
4) 그런 정도의 수용이므로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불편과 고통과 혹은 죽음이라 할지라도
지혜롭게 통찰하여 그 본질을 보고 알아 수행으로 삼고 이를 감내하고,
5) 감내한다 하더라도 위험을 자초함에 따른 어리석음은 지혜롭게 통찰하여 그 위험을 보고 알아
이들은 피해야 하며,
6) 위와 같은 자세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욕망, 악의, 해코지의 생각 및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삿되고 해로운 법은 이를 지혜로운 통찰로 보고 알아 이를 품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애야 하는 것이며,
7) 위 6가지와 같은 수행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마음챙김, 법의 간택, 정진, 희열, 경안, 삼매, 평안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지 않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지혜롭게 통찰하여 이들을
보고 알아 떨쳐버림을, 빛바램을, 소멸을, 철저한 버림을 지향하면서 7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수행함으로써 단속하고 없애어 열반에 이르는 것임을
설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설하심에 위에 설해진 것 이외에 다른 번뇌는 없는 것이어서
과연 이와 같이만 한다면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것인가 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라는 세존의 말씀을 상기하게 됩니다.
과연 '모든' 번뇌가 설하여졌고 다른 번뇌라는 것은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하여 세존께서 이 경의 마지막에 아래와 같이 설하신 것은 당연한 귀결이고 비약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가
1] 모든 번뇌를 단속하며 머물고,
2] 갈애를 끊어버렸고,
3] 족쇄를 풀어버렸고,
4] 자만을 바르게 꿰뚫었고,
5]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버렸다.'
고 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번뇌를 단속하고 없애는 법을,
모든 번뇌를 단속하여 머무는 법을,
모든 갈애를 멸진하는 법을,
모든 족쇄를 풀어버리는 법을,
자만을 바르게 꿰뚫어 존재와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법을,
마침내 괴로움울 끝내버리는 법을,
열반에 이르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받아 지녓습니다.
이같이 위없는 법을 설해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옵고 예경드립니다. ((()))
이 모든 번뇌 경을 사경한 공덕으로
행복하고 위험없는 열반으로 장애없이 도착하길.
수많은 생 윤회할 때
고통 위험 원수들과 나쁜 것들 안 만나고
모든 행복 축복둘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이 사경 공덕으로
부모 스승 친척 친구 자신보호
천신들을 시작으로 삼십일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 성취하길 원하면서
회향합니다.
특히 이 경을 사경하면서 많은 장애가 있었던 시간들을 도와주고 함께해 주신
보라신의 천신들께,
또한 간답바들을 거느리신 다따랏따 대천왕, 꿈반다들을 거느리신 위룰하까 대천왕,
용들을 거느리신 위루빡까 대천왕, 약카들을 거느리신 꾸웨라 대천왕과 같이 부처님의 법과
제자들을 지키시는 사대천왕들께,
또한 삼십삼천 신들의 왕이신 삭까께,
또한 김해 장유 반룡산의 천신들께,
특별한 의미를 담아 회향합니다.
회향을 받아 행복하시기를, 평안하시기를,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부처님의 법을 만나 닙바나 성취하시기를,,,,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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