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뿌리에 대한 법문 경」으로써 맛지마니까야를 장엄하시다.
디가나까야 주석서 서문을 보면,
세존께서 웨사카 달의 보름날 새벽에 반열반하신 후 21일째 되던 날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치고
500명의 장로들은 대합송을 하기 위한 갈마를 진행합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40일 이후에 라자가하에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하게 됩니다.
율장을 결집하신 후 경장을 결집하는 바, 마하깟사빠 존자의 이끎으로
디가니까야는 아난다 존자와 그 제자들에게 부촉되고,
맛지마니까야는 사리뿟따 장로의 제자들에게 부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장을 결집함에 있어 어떤 경부터 합송할 지를 의논하게 되는 바,
어떤 경부터 합송해야 하는가에 대한 마하깟사빠 존자의 물음에 아난다 존자는
장로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존자시여,
「범망경」은
세 가지로 계를 장엄하고
9가지로 그릇된 생계와 속이는 말 등을 분쇄하고
62가지 사견의 그물을 풀어내어
십만의 세계를 진동하게 합니다.
이것을 첫 번째로 합송해야 합니다.'라고.
「범망경」(D1)은 어떤 경입니까?
소위 외도의 62견 즉, 62가지 잘못된 견해(邪見)인
과거로 모색하는 자들의 18가지 견해(영속 4, 일부 영속/일부 비영속 4, 유한과 무한의 설 4, 애매모호 4,
우연발생 2가지)와,
미래로 모색하는 자들의 44가지 견해(사후에 인식과 함께 존재 16, 사후에 인식없이 존재 8,
사후에 인식이 있기도 없기도 8, 단멸론 7, 지금여기 궁극의 열반론 5가지)의
합 62가지 견해를 논파하시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어떻게 논파하십니까?
그러한 62견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빠진 자들이 느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느낌이 견해와 갈애에 의해서 동요되고 취착된 것이며,
그러한 느낌은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는 것인데,
이는 연기를 꿰뚫어 알지 못한 것에 따라 성립된 견해이며,
결국 괴로움을 생기게 할 뿐이라고 천명하시는 것으로
실로 십만의 세계가 진동하지 않을 수 없는 사자후로 이들 삿된 견해를 파하시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감각장소(處)의 일어남·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아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넘어선다고 설하시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중생은 '견해의 그물'에 걸린 것이 되어
마치 그물에 갇혀서 오르는 고기와도 같다고 천명하십니다.
이 「범망경」(梵網經)을 호지함에 있어서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이름으로 호지하라고 하신 바,
각각 「뜻의 그물」,「법의 그물」,「범천의 그물」,「견해의 그물」,「전쟁에서의 위없는 승리」
입니다. 세존의 제자들이 이 경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세존께서 직접 이런 특별한 이름을 붙이신 걸로 보아서도 이 경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맛지마니까야의 첫 번째 경인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의 후기를 쓰면서
디가니까야의 첫 번째 경인「범망경」을 이같이 상기하는 것은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의 심오함과 중요성 때문입니다.
'외도의 62견'이라는 말은 들어 보았으나 「범망경」을 대하여
그 낱낱에 대한 세존의 설하신 바를 처음 보았을 때, 도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러한 법문은 어디에 소용이 있어서 설하신 것인지, 또 당신 스스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여하신
이 경에 대한 높은 의미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아, 보고 또 보아도 생경했던 기억이 납니다.
외도의 62견에 대한 천명이라고 할 수 있는「범망경」은 결국 무엇에 대한 법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 즉 '나는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천명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나와 나 아닌 것들 즉 '존재'란 무엇인가? 혹은 더 나아가 그 존재가 몸담은
혹은 그 존재 앞에 펼쳐지는 '세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또한 연기의 법에 따라 그 실상을 여실히 보아야만 비로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임을
천명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오백 아라한들께서 경을 결집함에 있어서,
디가니까야의 처음을 이같이 「범망경」의 심오함과 그 무게로 장엄하셨듯이
맛지마니까야 역시 같은 방법으로 「뿌리에 대한 법문 경」으로 그 처음을 특별히 장엄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 모든 법들의 뿌리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은 무엇에 대한 법문입니까?
세존께서는 이렇게 이 경을 시작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모든 법들(諸法)의 뿌리에 대한 법문(sabba-dhamma-mula-pariyaya을 설하리니,,,,"
'모든 법들의 뿌리'를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1) 지·수·화·풍(地·水·火·風)에 대하여 (4가지)
2) 존재, 신들, 빠자빠띠, 브라흐마에 대하여 (4가지)
3)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승자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에 대하여 (8가지)
4) 본 것, 들은 것, 감지한 것, 안 것에 대하여 (4가지)
5) 동일한 것, 다른 것에 대하여 (2가지)
6) 일체에 대하여 (1가지)
7) 열반에 대하여 (1가지)
각각을 대상으로 보면 이 24가지에 대하여
범부인 경우, 유학(有學)인 경우, 아라한(無學)인 경우, 여래(如來, tathagata)인
4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이들이 각각
1) 위와 같은 24가지을 대상을 어떻게 아는지,
2) 그러한 인지로부터 시작하여 자신과 그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3) 그러한 대상들을 기뻐하는지,
4) 그 다음으로 그들은 왜 각각 그러한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설하고 계십니다.
이들 대상은 각각의 24가지의 대상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무리를 지을 수 있을 뿐아니라 그 함의(含意)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 지·수·화·풍(地·水·火·風): 근본물질인 4대(四大)이므로 '물질'에 대해서로
2) 존재, 신들, 빠자빠띠, 브라흐마: 삼계(三界)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로
3) 광음천, 변정천, 광과천, 승자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삼계의 존재가
거하는 모든 '세상(界)'에 대해서로(비록 색계2∼4선천, 무색계 4처만이 언급되엇으나, 그 이전에 존재를
언급하실 때 욕계와 초선천은 이미 언급하셨으므로)
4) 본 것, 들은 것, 감지한 것, 안 것: 여섯 가지 감각기능(六入)의 대상인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를 통해 일어난 일체의 '오온(五蘊)' 내지 일체의 '알음알이(六識)'으로
혹은 '일체의 감득(感得)한 것'에 대해서로
5) 동일한 것, 다른 것: '나'가 있음으로 인한 일체의 판별이나 '사량분별'에 대해서로
6) 일체: 수행자의 인식이 더욱 높아져 나와 나 아닌 것 일체가 융섭된 경지에 대해서로
7) 열반: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즉 '구경의 지혜로 해탈'
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 실상을 바로 알고 바로 보는,
즉 나고죽음을 여읨(寂靜)에 대해서로
바꾸어 말하면,
물질(현상), 존재, 세상(界), 일체의 감득(感得), 일체의 사량분별, 일체, 열반의 7가지에 대하여
1) 이들 대상을 어떻게 아는지, 2) 그러한 인지로부터 시작하여 자신과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3) 이들 대상을 즐기고 기뻐하는지, 4) 그 다음으로 각각 그들이 왜 그러한지에그 이유에 대해서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7가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존재, 그 존재 앞에 폂쳐지는 물질·정신현상(名色),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界),
그곳에서 그들이 감득하는 일체와 그 알음알이(識), 그 알음알이로부터의 일체의 사량분별,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아(個我, 아트만, atman)를 초월한 전체(梵, 브라만, brahman)로의
범아일여(梵我一如), 그리고 그 모두를 바로 보아(正見) 초월한 열반이라는 개념의 7가지이니,
이것은 각각으로 혹은 연하여 전부라는 것이 있다면 그 전부를 넘어선 것까지의 전부라고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대상으로하여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 범부
배우지 못한 범부는
- 이러한 것들을 사성제 내지 연기법에 따라 있는 그대로 실상을 보지 못하고
감관되는 대로 인식하여,
- 자신을 이러한 대상이리고, 혹은 이러한 대상에서, 혹은 이러한 대상으로부터,
혹은 이러한 대상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 이러한 것들을 즐기고 기뻐하는 바,
- 그 이유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하십니다.
2) 유학(有學)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은
- 이러한 것들을 최상의 지혜로 잘 알지만,
(알기는 알지만 아직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므로 수행을 통해
철저히 알지는 못함)
- 자신을 이러한 대상이라고, 혹은 이러한 대상에서, 혹은 이러한 대상으로부터, 혹은 이러한 대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기에 부단한 정진과 수행을 통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데에 이르러야 하고)
- 그러한 대상들을 즐기거나 기뻐하지 않아야 하고,
(즉, 그러한 대상들에 빠져 그것을 즐기거나 기뻐함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렇게 즐거거나 기뻐하지
않음에 이르러야 하고)
- 그 이유는 그것을 철저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하십니다.
3) 아라한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하였고, 할 바를 다했으며, 짐을 내려 놓았고, 참된 이상을 실현하였고,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은
- 이러한 것들을 최상의 지혜로 잘 알고,
- 자신을 이러한 대상이라고, 혹은 이러한 대상에서, 혹은 이러한 대상으로부터, 혹은 이러한 대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 그러한 대상들을 즐기거나 기뻐하지 않고,
- 그 이유는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하십니다.
아라한에 대하여는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도
3가지의 이유를 더 말씀하십니다.
비록 이유의 형태로 이 3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인해 3가지의 결과가 이루어지는 바, 이 3가지 결과 내지 성취가 다시 이유가 되어
위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 탐욕을 끊어, 탐욕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며,
- 성냄을 끊어, 성냄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며,
- 어리석음을 끊어,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3가지의 이유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상기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첫 번째는 '그것을 철저히 알있기 때문'이라고 하실 때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대전기경」(D14) 2.22에서 세존께서 천명하신 바와 같은 '오온을 바로 봄'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는
것인 바, 해탈·열반에 대한 세존의 가르핌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을 하면서 머물자, 오래지 않아
1) 취착이 없어져서
2) 번뇌들로부터
3) 마음이
4) 해탈하였다."
위빳시 부처님을 비롯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과거 일곱 부처님이 모두 그러하셨고
그 가르침을 따라 열반에 이른 모든 아라한들이 그러하듯이
본 경 「뿌리에 대한 법문 경」에서의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바로 24가지 대상
혹은 전부를 넘어선 전부인 존재의 다섯 구성요소인 오온(五蘊)을 그 일어남·사라짐을 관찰하여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내가 아님을 그리하여 그들을 바로 봄으로써 그 실상을 사무치게 알았기 때문
이라는 말씀과 같은 뜻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해탈의 결과인 열반(nibbana)에 대해서 인데
상윳따니까야 38주제 잠부카다까 상윳따의 「열반 경」(S38:1)에서와 같이
" 도반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이라고들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 도반이여,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 - 이를 일러 열반이라 합니다."
혹은 그 다음 「아라한됨 경」(S38:2)의
" 도반 사리뿟따여, '아라한됨, 아라한 됨'이라고들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아라한됨입니까?"
" 도반이여,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 - 이를 일러 아라한됨이라 합니다."
과 같이 위의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즉, 오온을 바로 봄)의 결과는
위 「대전기경」의 인용과 같이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함'인데,
이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상태가 '열반'인 바
열반 혹은 이를 성취한 아라한과란 인용한 「열반 경」(S38:1), 「아라한됨 경」(S38:2)에서와
같이 바로 '탐·진·치의 소멸'을 성취한 것이라고 볼 때,
세존께서 아라한들에 대하여 24가지 대상에 대하여 그러한 인식, 생각 등에 이르른 이유에 대해서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는 이유 外에도 3가지 이유인 '탐·진·치의 소멸'을 또 다른 이유로
설하신 것은 아라한들이 '열반'을 성취한 분들이라는 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유로서의
설함이라 보아진다라는 점입니다.
4) 여래(tathagata)
'아라한이고, 정등각자인 여래도 역시'로 시작하는 이 여래인 경우에 대한 부처임의 가르침은
놀랍게도 범부, 유학, 아라한인 경우가 각각 그러하다면,
세존이신 당신 자신과 과거 일곱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여래들께서는 어떠한 경우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베푸시되 어떤 부분은 감추고 결코 드러내지 않는
'스승의 주먹'과 같은 가르침이 아닌 가슴을 다 열어 놓으시고 '와서 보라'는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에 참으로 부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래들께서도 역시 아라한들이신 바, 역시 위 아라한의 경우와 같이
- 이러한 것들을 최상의 지혜로 잘 알고,
- 자신을 이러한 대상이라고, 혹은 이러한 대상에서, 혹은 이러한 대상으로부터, 혹은 이러한 대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 그러한 대상들을 즐기거나 기뻐하지 않고,
- 그 이유는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하십니다.
그런데 위 아라한인 경우에는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
그것의 결과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끊어 그들로부터 벗어남'을 다시 3가지의 다른 이유로
세존께서는 설하신 바, 여기 여래들의 경우에는
그와 같은 언급의 중복을 피하시고 다른 이유를 설하십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1) 즐김이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을 알았으며,
2) 존재(有)로 인해 태어남(生)이 있고, 중생들의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 여래는
갈애들을 모두 끊고,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놓아버려
위없는 정등각을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나는 말한다."
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여래들께서만 가지는 특별한 이유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래가 아닌 아라한들께서는 여래들의 가르침을 받들고 수행하여 열반에 이른 것이라면
여래들께서는 스스로 4 아승지겁을 십바라밀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시고, 세상을 연민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을 중생들에게 펴신 것이므로,
이 부분은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여래가 아닌 아라한들께는 헌사되지 않고
오직 여래들께만 헌사되어야 할 이유라고 해야 오히려 마땅할 것입니다.
여기서 '1) 즐김이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을 알았으며'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달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간명한 축약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념처경」(D22) 19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에서와 같이 세존께서는
즐김이 괴로움의 뿌리이며, 근, 경, 식, 촉, 수, 상, 행, 애, 심, 사의 10가지가 즐겁고 기분좋은 것이고
갈애는 여기서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라고 천명하십니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3)
여기서 '2) 존재(有)로 인해 태어남(生)이 있고, 중생들의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
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연기(緣起)의 법을 깨달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간명하게 축약하여 설하신 것에
다름아니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여래들의 깨달음의 목적이 바로 태어남,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의 출구를 찾으시는 것이었다는 것이었다는 점, 또한 태어났기 때문에 있다는 전도된 몽상이 아니라 있기 때문에 태어났다는 실상을 보는 것이 연기의 중요한 곡절임을 생각할 때
참으로 연기에 대한 부처님의 간명한 축약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여래들께서는 여래가 아닌 아라한들이 가지는 이유가 아닌 그분들만의 오리지날리티(Originality)
로서의 이유인 '사성제(四聖諦)와 그 동전의 뒷면과 같다라고 할 수 있는 연기(緣起)를 알았기 때문'에
24가지 대상 혹은 전부에 대하여 그러한 앎과 봄에에 이르렀다고 세존께서는 구분하여 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다른 면을 보면 '즐김이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은 해탈·열반에 이른 이유의 설명으로,
'존재(有)로 인해 태어남(生)이 있고, 중생들의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알았기 때문'이라는 설함은
그러하면 어떻게 열반에 이르는지 그 방법에 대한 설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반의 이유와 그 열반에 이르는 길을 이와 같이 간명히 다 설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세존께서는 어떻게 여래들께서는 '정등각'을 이루셨는지까지를 설하셔서
가르침의 끝을 설하고 계십니다. 바로
" 그러므로 여기 여래는
갈애들을 모두 끊고,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놓아버려
위없는 정등각을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나는 말한다."
라고 천명하시는 부분입니다.
누구라도 정등각자(samma-sambuddho) 즉, 붓다를 이루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이 가르침을 근본삼아 4 아승지겁 십바라밀을 닦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진 배 없는 사자후라
생각됩니다. '탐·진·치의 소멸' 즉 열반을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것은 바로 '갈애의 소멸'이라는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이기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3. '열반'과 수행에 관한 단상
1) 열반에 대해서
본 경의 후기를 쓰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본 경을 보면서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열반'에 대해서 입니다.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 저 같은 사람이 '열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만
적어도 범부는 나름대로의 전도된 인식으로 '열반을 기뻐한다.'라고 하더라도
또한 아라한과를 아직 얻지 못한 예류도, 예류과, 일래도, 일래과, 불환도, 불환과, 아라한도로 분류
되는 7부류의 분들을 세존께서도 '성자'라고 칭하시는 바 이들도 아직 구경의 지혜로 해탈을
이루지는 못했으므로 하여 '열반을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부분에서나
아라한들이나 여래들께서 해탈하여 '열반'을 증득하시는 것은 삶의 완성 내지 괴로움의 종식,
윤회의 종식을 뜻하는 구경의 경지인 '열반'을 증득인 바, 이러한 구경 내지 목적을 달성하고도
아라한들이나 여래들께서는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라는 부처님의 천명은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언설로 표현하지 못할 소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계가 있다면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번뇌가 다 하였고, 싦의 완성하였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 놓았고,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후에도 이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위해 억겁의 윤회, 만난(萬亂)을 거쳐 열반에 이르러야 하는가가
문제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용할 만한 기록이 있습니다
「청정도론」(Visuddhimagga)에서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괴로움이 있을 뿐, 괴로움을 받는 자는 없다.
행위(業)가 있을 뿐, 행위를 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
道가 있을 뿐, 그 道를 가는 자는 없다."
『淸淨道論』 XVI, Vism 513
세존께서는 본 경에서 '모든 법의 뿌리'를 설하신다고 하신 바
그 이름이나 개념으로 접근되는 '열반'이 아니라
세존의 가르침과 같이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자의 경지,
즉 실제 열반의 경지 내지 구경법으로서의 열반에 있어서는 탐진치 혹은 갈애의 완전한 소멸로 인해
더 이상 갈애로 인한 정신·물질현상 내지 오온 내지 존재 내지 세상(界) 내지 일체의 감득 내지
일체의 사량분별 내지 일체 내지 이름으로의 열반 등과 같은 대상의 생멸이 끊어지는 바,
설사 그것이 유여열반이어서 아직 오온이 있는 채로 열반에 든 것이라면
탐진치 혹은 갈애가 소멸한 채 앞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 내지 '대상'의 '실상'을 여실히 알고 볼(如實知見) 뿐으로
이같은 알고 봄(如實知見)은 그렇게 알고 보는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관찰자라 해야 할 '나'가 어디에도 없는 바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라는 붓다고사 스님의 견해는
적어도 열반에 대하여는 그 표현이나 의미에 있어서 정수를 꿰뚫은 견해라 하겠고,
이와 같은 지경에서 보면 세존께서 본 경에서 설하신 바
아라한들이나 여래들께서는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라거나 유학의 경우에는 '열반을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가르침은 궁극에 도달해야만 할 열반 혹은 아라한과의 증득에 대한
지극하고 심오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상기해야 할 점이라 생각됩니다.
2) 수행에 대해서
두 번째로는 범부는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유학은 '철저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아라한은 '철저히 알았기 때문에'로 대별되는 이 앎의 정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떤 경에 세존께서는 어디에 가면 우물이 있는지 아는 사람과 실제 그 우물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마신 사람의 차이를 설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우물이 어딘지 알기만 하는 사람은 물을
마신 것이 아니며, 제 발로 가서 물을 길어 마신 사람만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세존께서는 우물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물로 걸어 가서 물을 길어 마시는 것은 온전히 각각의 자신의 몫일 뿐이고,
그렇지 않고 나도 우물이 어디 있는지 안다든가, 마셔보지도 않은 물맛을 아는 것처럼 해보았자
목마름을 해결할 수도 물맛이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보시를 베풀고, 계를 지키고, 자애하고, 연민하고, 인욕히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과 같은 다섯 장애를 벗어나고,
삼매를 증득하고 위빳사나의 도를 철저히 수행하여 삼명(三明)을 얻은 아라한에 도달하는 것을
세존께서나 그 제자들인 아라한, 장로들께서는 수도 없이 설하고 계신 바입니다.
수행 없이 증득은 없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에는 교학과 수행이 있다고도 합니다.
수행 전에 알아야 할 것을 배워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수행을 시작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학과 수행이라는 말은 '배우고(교학) 익힌다수행)'로 쉽게 풀면 그 의미가
명료해 지는것이라 생각됩니다.
본 경에서의 '철저히 앎'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배운 것을 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을 통해 꿰뚫어서 여실히 알게 된 것을
'철저히 앎'이라 설하신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 봅니다.
4. 주석서의 견해에 대한 다른 견해
1) 모든 법들(諸法)의 뿌리에 대해서
ⅰ)
"본경은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하는 가르침(neyyattha)이기 때문에
(열반을 포함한) 네 가지 세상에 속하는(catu-bhumaka) 모든 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존재 더미(有身, sakkaya)에만 한정된
삼계에 속하는(tebhumaka) 법들을 남김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MAT.i.17∼18)
ⅱ)
혹은
"뿌리(mula)'라는 것은
여기서는 공통적이지 않은 원인(asdharana-hetu)의 뜻이라고 알아야 한다.
즉, 존재 더미(有身, sakkaya)에 속하는 법들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조건(avenika- paccaya)을
뜻한다."( MAT.i.57)
ⅲ)
혹은 더 나아가 위와 같은 주석서나 복주서의 견해에 근거하여
"이 경우의 '모든 법들(sabbe dhamma)'은
오취온(五取蘊) 즉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에 포함 된 것으로만 제한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류도 등의 네 가지 도와 예류과 등의 네 가지 과와 열반이라는 출세간의 경지를 제외한
삼계의 법들만이 모든 법들에 포함된다."
ⅳ)
위와 같이 같이 받이들이고, 그와 깉이 받아들인 이상
"본경에서 모든 법들(諸法)은 존재 더미(有身) 즉 오취온을 뜻하고
모든 법들의 뿌리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과 무명이라는 주석서와 복주서의
이 설명은 중요하다." 와 같은 견해
ⅴ)
더 나아가
"자신의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법들이라 한다.(attano lakkhanam dharentiti dhamma)"
(한편 자신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법들이라 한다는 이 설명은
아비담마에서 "자신의 고유성질(自性)을 가졌다고 해서 법들이라 한다(attano
sabhavam dharenti ti dhamma)."(DhsA.39 등)라고 정의하는 것
고명하신 장로들께서 본 경애 붙이신 주석이라 그 이유가 있으실 것이나, 과연 본 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렇게 제한적인 해석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가시지 않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의문을 기록해 봅니다.
세존께서는 '모든 법들'의 뿌리라고 하셨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혹은 유신에
속하는 법들만의 뿌리라고 하지 않으셨고,
분명 본 경은 유학(즉 예류도∼아라한도까지의 7성자들)에 대해서 '철저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하시고 있고, 아라한과나 여래들께서는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시어
구경법으로서의 '열반'을 역설적으로 천명하고 계시는 바,
네가지 도, 네가지 과, 열반의 출세간법은 본 경에서의 '모든 법'에서 제외되고 삼계의 법만이
해당한다 함이 눈 앞의 세존의 법문과 너무나 상치되고,
그런 제한된 해석의 결과는 모든 법들의 '뿌리'가 주석서의 그것과 같이
결국 갈애, 자만, 사견, 무명이라는 어색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모든 법들의 뿌리'를 설하신다고 하신 바,
괴연 세존께서는 갈애, 자만, 사견, 무명을 '모든 법들의 뿌리'라고 설하신 것일까요?
이것이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 그 몸에 때와 냄새나는 똥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눈있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더럽고 냄새나서 가까이 갈 수 조차 없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다 칩시다.
그때 지나던 행인이 있어 그러한 점을 그 사람에게 알려주고, 비로소 그 사람도 그것을 자각하게
되어 깨끗한 물에 목욕하고 더러운 것을 다 벗겨내고 온 몸에는 향수를 바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어 남들이 보아도 깨끗하고 수려한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칩시다.
그때 그 사람의 깨끗한 몸, 향기로운 냄새, 깨끗한 옷의 뿌리 혹은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더러운 때와 냄새나는 똥과 더러운 옷이 그 뿌리 혹은
'웡인'이라고 한다면그것은 바로 말한 것이겠습니까?
만일 이와 같은 설명이 맞는 것으로 한다면, 더러운 때와 똥과 더러운 옷들을 뿌리로 가만히
두더라도 깨끗한 몸, 향내, 깨끗한 옷이라는 열매는 때가 되면 절로 이루어진다라는 역설도
맞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것은 역설이요 희론이요 도움이 되지 않는 언설이요, 그러한
사람에 대한 방치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바른 견해입니까?
지나던 행인의 바른 견해(正見), 바른 시각, 가르침, 그리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한
애초 더러웠던 그 사람의 마음의 바뀜, 그의 청정으로의 지향이 그러한 변화의 원인이요 뿌리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뿌리'는 주석서의 그것과 같이 '갈애, 자만, 사견, 무명'이라 할 것이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의 그것과 같이 더러운 것을 더러운 것이라 볼 줄 아는 청정한 눈,
세존께서 예를 들어 설하신 24가지 대상 혹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존재, 그 존재 앞에 폂쳐지는
물질·정신현상(名色),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界), 그곳에서 그들이 감득하는 일체와 그 알음알이(識), 그 알음알이로부터의 일체의 사량분별,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아(個我, 아트만, atman)를 초월한 전체(梵, 브라만, brahman)로의 범아일여(梵我一如), 그리고 그 모두를 바로 보아(正見) 초월한 열반이라는 개념 내지 전부 혹은 그것을 넘어선 일체를 바로 볼 줄 아는 '지극한 청정',
즉, 구경법으로써의 '열반'이 세존께서 설하신 모든 법의 '뿌리'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법'을 해석함에 있어
'모든 법'은 유신의 법 혹은 오취온 내지 삼게의 법에 해당한다고 제한 할 것이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열반을 포함한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법이라해야 본 경의 취지와 맞다고 할 것입니다.
본 「모든 법들의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은 기실 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습적인 표현을 빌려서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괴로움의 종식, 즉 궁극의 열반에 대한 법문으로서
초기경전에도「열반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차리리 「열반경」이라 이름하여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구경법인 '열반'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이르기 위하여는
어떤 단계들이 있는지, 왜 거기에 도달해야 하는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사자후를
하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구경법으로서의 '열반'이 모든 법의 '뿌리'라고 해야
수레바퀴의 축을 꿰뚫은 바른 견해(正見)이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불교사에 대한 공부가 없는 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될지 모르나
에를 들어 대승의 경전인 「유마힐소설경」을 보면,
"법이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며, 지금도 꺼져 없어질 것이 없는 것이 적멸의 뜻인 것이오" 등과
같이 마하가전연(마하 깟짜야나 장로)를 희롱함이나,
"머무를 바 없는 것은 근본이 없나니, 머무를 바 없는 것으로 모든 법을 세웠나이다.'라고
문수사리를 희롱함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을 환상과 같이 알며, 법에는 자성(自性)도 타성(他性)도 없으므로
그 자체로는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습니다,"와 같이 마하 가섭(마하 깟사빠 장로)를 희롱하는 것을 보면
비록 「유마힐소설경」처럼 세존께서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설하신 바 이를 제쳐두고,
또한 열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까지도 제쳐두고서는
오직 그 열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량분별을 앞다투면서 아라한들을 조차도 성문으로 폄하하여
희롱할 수 있는 것처럼 망상된 위작을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도하고 혹세무민함이 가소로움에도 불구하고 (스왁가또 바가와또 담모 -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본 경에서의 '모든 법들의 뿌리' 등을 해석함에 있어서 후대 주석서와 같은 편협한 혹은 제한적인
해석은 유마힐소설경에서처럼 대승의 논사들에게 충분한 논란거리 내지 유희의 빌미를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2)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았다'에 대해서
본 경은 끝은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았다."로
끝납니다. 이것은 다른 경과는 사뭇 다른 경의 결말이며 너무 특이하기도 하여 여기에는 상당한
주석이 더해지고 있는 바,
Be(Burmese script ed. of M./미얀마 육차 결집본)이나 Se(Sinhala script ed. of M/스리랑카본)
에는 위와 같이,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의 저본인 Ee(Roman script ed. of M.)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그 비구들은 흡족해진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로 옮겼음을 알 수 있어
보통 다른 경에서처럼 "그 비구들은 흡족해진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로 마무리 되지
않은 본 경의 취지에 대해 혼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석에 의하면 한때 삼베다에 능한 오백 명의 바라문 학도들이 세존 아래 출가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 배움에 의지하여 자만이 생겼고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시에
안다."라고 생각하여 세존을 존경하지도 문안드리지도 않게 되었는 바, 그러자 세존께서 이
「모든 법들의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을 설하셨고, 그들을 그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경의 결말과 같이기뻐하지 않은 것이며,) 그래서 자만심이 꺾여서 성심을 다해 닦았고,
그후에 세존께서 그들의 지혜가 익은 것을 보시고 「고따마까 경」(A3:123)을 설하신 바
그들이 그 자리에서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석서의 설명은 그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궁색해 보입니다.
세존께서는 적어도 제가 알기에는 듣는 자가 알지 못할 가르침을 펴신 적이 없다는 점에서,
또 초전법륜경(S56:11)에서 사성제를 설하셔서 예류도를 얻게 하시고, 이어서 무이경(S22:59)을
설하셔서 오비구가 아라한이 되었다면, 무아경의 내용이 오온을 바로 봄이라는 심오한 법문인 점을
볼 때 괴연 그렇겠구나라고 이해가 가겠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는 본 경이 내용이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반면 그 후 설하셨다는 「고따마까 경」
(A3:123)을 보면 그 내용이 심오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 내용상 본 경 「모든 법들의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오백 비구들이 「고따마까 경」에서 무엇을 추가적으로 증득
하여 일시에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들이 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역시 보이는 것입니다.
(고따마따 경 : http://blog.daum.net/ibakdal/17371535)
이러한 해석은 본 경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일어난 후대의 부가적인 주석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았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의 소견으로는 이와 같은 심오한 법문을 들은 비구들이야말로(몇 명의 비구였는지 본 경에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들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그 비구들은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본 경 자체에서 아라한들이나 여래들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대로
그들은 본 경의 설하심을 듣고 그 자리에서 실로 열반을 증득하였기에 "열반을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설하신대로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가 일어난 것이며
일체의 인식과 대상이 쌍멸(雙滅)하여
열반에 들었다 하더라도 그 열반을 기뻐할 자는 이미 어디에도 없기에
열반을 기뻐하려 해도 열반을 기뻐힐 자가 이미 없는 것입니다.
실로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경의 마무리인 것입니다.
* Episode 1
어떤 노스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젊은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법에 자성이 있습니까?"
노스님은 잠자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법도 또한 나고 죽습니까?"
노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네."
젊은 스님은 되물었다.
"법 또한 형성되었다가 소멸한다는 뜻입니까?"
노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자네 앞에 동전이 하나 있네.
갈애와 괴로움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뒷면은 부처님의 가르친 법과도 같아서
그 둘은 뗄 수 없는 것이라네.
세존께서는 법대로 열심히 닦아 갈애와 괴로움을 멸진한다고 하셨다네
그래서 말일세, 그 동전의 앞면이 자네 앞에서 천천히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게
그때 법은 어디에 있는가?"
젊은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법 또한 없습니다."
노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그 동전이 없어지듯 그를 보는 자 또한 멸진함을 말씀하셨네.
그와 같이 나와 동전이 쌍멸한 후에
무슨 법이 나고 죽는가?"
젊은 스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노스님은 잠자코 말이 없는 젊은 스님에게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법이 자성이 있는가?"
젊은 스님은 다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노스님은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대는 말이 없는가?"
젊은 스님은 또한 말이 없었습니다.
노스님은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 앞에 말없이 앉아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젊은 스님은 이 물음에 아무 말없이 일어나서 노스님께 삼배하고 물러나 길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에 나무 그늘에 앉아 그는 지나간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한때 누가 '자네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업일세"라고 대답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한동안은 '자네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오온이라네.'라고 대답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후 아주 오랫 동안은 "자네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연이생(緣而生)일세"라고 대답하며
만족스러워 했던 일을 생각하며 가만히 웃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자신을 연이생(緣而生)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길로 어느 산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 탁발하러 나오는 일 외에는 나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공양하는 마을 사람들이 "스님은 누구십니까? 법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도 그는 합장하고
절할 뿐 말이 없었습니다. 낡은 누더기에 영락없는 거지 행세로 탁발 나온 스님을
아이들이 놀려대거나 돌맹이를 던지며 장난치더라도 그는 환한 표정으로 미소 웃을 뿐
아무 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나 동네 아이들은 그를 '바보스님', '벙어리스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철저히 앎, 갈애의 소멸,
철저히 앎, 갈애의 소멸,
절저히 앎, 갈애의 소멸,
이와 같이 「모든 법들의 뿌리에 대한 법문」을 받아지녔습니다.
삼보에 귀의하옵고,
청정한 믿음으로 이러한 법문을 설해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높고 높은 스승님 길 가르쳐 주신 분께 예경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
이 경을 사경한 공덕몫을
이 경을 전해 주신 초기불전연구원 대림스님과 각묵스님께 회향합니다.
회향을 받아 건강을 속히 회복하시기를,,,,
또한 대림스님이 거하시는 장유의 반룡산의 천신들께 회향합니다.
실로 용들이신 님들과 대림스님 사이에 자애가 생기기를,,, 계를 지키는 승가는 세상에 위없는
복밭이라 세존께서는 설하셨나니,,,, 스님을 항상 보호하시기를,,,,
또한 새 보금자리에 우리 가족을 포근하게 안아 주시고 인근의 많은 주민들을 품어주시는
보라산의 천신들께 회향합니다.
회향을 받아 행복하시기를,,, 걱정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부처님의 법을 만나 도과를 얻으시고
닙바나에 이르시기를,,,
또한 늘 부처님의 제자들을 지키고 돌보시는 꾸웨라 대천왕, 다따랏따 대천왕, 위룰하까 대천왕,
위루빡까 대천왕과 그 식솔들에게 회향합니다. 행복하시기를,,,, 우리를 연민하시기를,,,,
또한 저의 부모님께 회향합니다. 이 생에서 부처님의 법을 만나 행복의 문을 열게 되시기를,,,,
화목하게 되시기를,,,, 자애와 연민을 더하시기를,,,,
31천 모든 중생 안전하고 행복하시기를,,,,,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2015.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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