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전연구원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사띠(sati)는 '마음챙김'으로 정착되어 갑니다.
이 마음챙김이란 술어는 1988년에 고요한 소리의 활성스님께서 정착시킨 것입니다.
곁에서 스님께서 고심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봤습니다.
너무 좋은 번역이라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이 술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면서
지금 마음챙김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
그동안 몇몇 법우님들이 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하필이면
마음챙김 즉 마음을 챙김으로 옮겨서 사용하는가 질문도 하시고, 의문도 가지시고,
반론도 제기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강의 때마다 말씀을 드렸지만 그 이유를 저희 까페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해봐야겠다 싶어서
이 글을 적어봅니다.
1]
사띠(sati)를 마음챙김으로 옮긴 데는 몇 가지 근거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근거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보기로는「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을 들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제4권「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은 여섯 동물의 비유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히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각각 다른 삶의 분야와 다른 먹이의 영역을 가진 여섯 마리 동물들을
튼튼한 밧줄로 묶은 뒤,
이 밧줄들을 모두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에 묶어 두었다 하자.
각각 다른 삶의 분야와 다른 먹이의 영역을 가진 여섯 마리의 동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먹이의 영역과 삶의 분야로 가려고 할 것이다. ········
그러다가 이들 여섯 동물들이 지치고 피곤해지면
그들은 그 말뚝이나 기둥 가까이에 설 것이고 거기에 누울 것이다. ········
비구들이여, 여기서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이라는 것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딖고
많이 (공부)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리라.'라고.
그대들은 이와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S35:247)
*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대상: http://blog.daum.net/ibakdal/17370320
1) 들숨날숨
2) 자세
3) 행동거지
4) 몸의 각 부위
5) 몸의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6) 시체에 대한 9가지
이처럼
- 여섯 가지 알음알이로 세분되는 마음은 여섯 동물에 비유되고
- 사띠(sati)는 밧줄에 비유되고
- 말뚝이나 기둥은 사띠의 대상인 몸 혹은 몸·느낌·마음·법(身·受·心·法)으로 정리되는
21가지 혹은 44가지 사띠의 대상 가운데 하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띠라는 밧줄로 마음을 챙겨서 대상에 묶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챙김으로 옮기면 대상에 마음을 챙기는 것이 되어서
「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에서 말씀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의 뜻이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기는 것은 이러한 분명한 경전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2]
이러한 비유가 있기 때문에 디가니까야 제2권「대념처경』(D22)에 해당하는
「디가니까야 주석서」와 들숨말숨에 마음챙김을 설명하는「청정도론」VIII. 153∼154도
이렇게 강조합니다.
"애를 들면,
소치기가 사나운 암소의 젖을 마음껏 마시면서 자란 사나운 송아지를 길들이려 할 때
그 암소로부터 송아지를 떼어내어 한 곁에 큰 기둥을 박고서 그곳에 고삐를 매어 묶어 놓을 것이다.
그때 그 송아지는 이리저리 날뛰어도 도망갈 수 없게 되자
그 기둥을 의지하여 앉거나 누울 것이다. ········
여기서 마치 송아지 길들이는 자가
송아지를 기둥에 묶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마음챙김으로써
대상에 굳게 묶어야 한다." - 「청정도론」VIII. 154 -
여기서는 마음이라는 송아지를
사띠라는 밧줄로
기둥이라는 대상에 묶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처럼 마음챙김이라는 밧줄으로 마음챙김의 대상인 기둥에 튼튼하게 묶어
마음이 불선법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음챙김의 확립입니다.
이러한 미음챙김의 대상을 몸·느낌·마음·법(身·受·心·法)의 넷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라 부릅니다.
3]
다시 상윳따니까야 제5권「운나바 바라문 경」(S48:42)에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노(意)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노(意)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운나바 바라문 경」(S48:42) -
이처럼「운나바 바라문 경」(S48:42)에서 세존께서는
마음챙김(sati)이 마노(意, 마음)를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4]
2세기(후한 시대)에 안세고(安世高) 스님이 옮기신「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이라는
경의 제목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스님은 '아나빠나'(aanaapanaana, 出入息, 들숨날숨)을 '안반(安般)'으로 음사하고 있으며,
사띠를 '수의(守意)' 즉 마음(意, manao)를 지키고 보호(守)하는 것으로 의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대상을 챙겨서 그 마음이 해탈/열반을 향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사띠(sati)를 설명하는 위의 「운나바 바라문 경」(S48:42) 이나 「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과
같은 가르침을 경전적인 근거로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5]
그리고 「청정도론」도
"그의 마음이
수승한 마음챙김으로 보호될 때
(anuttaraaya satiya samarakkhiyamaana cittassa)" (Vis. XVI.83)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안세고 스님이 사띠를 수의(守意)로 해석힌 것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불설대안반수의경」 외에도 CBETA로 검색을 해보면
별역잡아함경이나 법구경이나 출요경 등등 중국에서 안반수의(安般守意)나 수의(守意)로
번역한 경우가 백 군데가 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던 초기부터 sati는 '마음을 보호하는 것(守意)'으로 이해되었
으며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운나바 바라문 경」(S48:42)과 「청정도론」(Vis. XVI.83)의 설명과도
일치하는 해석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역도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옯긴 졸은 근거가 됩니다.
7]
그리고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띠(sati)를 염(念)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 念자는 '이제 今과 마음 心'자로 파자(破字)됩니다.
한자를 설명하면서 파자를 하여 단어를 설명하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도 지금여기에서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으로 사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8]
어디 이 뿐입니까?
sati는 영어로도 거의 예외 없이 mindfullness로 정착이 되고 있는데
이것도 사띠를 '마음(mind)에 두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몇몇 분들이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을 봅니다.
슬어를 어떻게 한글로 정착시키는가하는 것은 옮기고 그 술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이라서
존중해야 하겠지만, 저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차라리 '정신차림'이라 한다면 이해는하겠지만 앎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면
이것은 통찰지(pannaa)나 지혜와 관계된 술어가 되어 혼란이 오게 됩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sampajaana를 알아차림으로 옮깁니다.
sampajaana는 sati와 짝이 되어 많이 나타나는 술어인데
담마상가니 등과 주석서들에서 이것은 위빳사나와 통찰지 등과 동의어로 설명합니다.
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기는지에 대해서 몇 가지 근거를 적어봤습니다.
법우님들의 공부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겟습니다.
2015. 2. 5
각묵 합장
- 원글: 초기불전연구원 카페에서 퍼옴
PS: 역경을 하시느라 말로 다 못할 고생을 하셨는데
이같이 그 뜻을 풀어서 명확히 해주시니
초기불전연구원의 대림스님, 각묵스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을 연민히여,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이상과 행복을 위해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셨으니,
이제 두 분 스님께서도 이와 같은 뜻을 따라 당신들의 몸을 희생하셔서
부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셨습니다.
공덕이 크시고 참으로 큰 일 하셨고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두 분 스님께서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
이러한 거룩한 승가의 힘으로도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오래오래 머물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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