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설일체유부의 교학
부파의 여러 학파 가운데 아마 가장 많은 아비다르마 논서를 낳고
그리고 학문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파로 성장한 것이 서북인도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사르바아스티바아디인 파이다.
이 학파의 이름은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의미하고
보통 한역명으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혹은 줄여서 유부라고 알려지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상좌부의 계통에 속한다. 비교적 일찍 상좌부에서 지말분열해서 독립했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장기간에 걸쳐 여러가지 발전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이 있다"라고 하는 이 학파의 독특한 기본적 입장은 학파 분립의 당초부터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1)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교설이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무상하다고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에 대해 당치않은 욕망을 품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교의
이며 올바른 지혜이다. 그런데 평상적인 인간은 무지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에 상주성을 기대한다.
이 기대가 어긋날 때, 실망과 노여움을 느낀다.
무아인 것에 대해 "나"를 의식하고 "나의 것"을 의식한다.
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요구, 갈망이 생기고 고뇌한다.
기대해서는 안될 것을 기대하고 의식해서는 안될 것을 의식하는 곳에 번뇌에 의한 업이 있다.
그 결과는 고이다.
무지를 떠나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무아를 무아로 아는 올바른 지혜를 얻음으로써
인간은 번뇌의 구속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루(無漏)의 깨달음의 영역으로 진행하는 불교의 실천체계는 이 간명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이를 엄밀히 설명하는 것이 아비달마의 임무라고 아비달마논사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일체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정밀한 학설로 전개하고 이를 가지고 무상과 무아를 논증하려한 것이다.
무엇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연하여 결과로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주불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인과의 관계 위에서 생겨난다"는 견해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원인, 혹은 원인없이 우연히 생겨난다는 견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다.
이처럼 무릇 현실에 있어서 인간 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의 사실은 연기한 것이지만
그것을 또한 유위(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연기하고 있으며, 유위이며, 무상인 이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무위(無爲)이다.
(2)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무상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과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 유루의 세계로 부터 무위 무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유루의 세계는 사제에서 볼때 고제와 집제이며 무위 무루의 열반은 즉 멸제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있는 도정에 있기 때문에 무루이다.
(3) 다르마(dharma, 法)의 이론
설일체유부라는 명칭은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설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부파는 독특한 다르마의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자세히 논증하여 연기 - 유위 - 무상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다르마라는 말은 극히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어서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의논을 거듭해 왔으나 그것을 종합하면
(1) 법칙, 법, 기준 (2) 도덕, 종교 (3) 속성, 성격 (4) 가르침 (5) 진리, 최고의 실재, (6) 경험적 사물 (7)존재의 형태 (8) 존재의 요소 등의 의미로 다르마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다.
한역 불전에서는 이 모든 의미가 법이라는 하나의 역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는 다르마라는 어휘를 위의 (6),(7),(8) 중의 어느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존재, 현상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서로 얽힌 무수한 법(法)의 이합집산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같은 법의 이론의 기본적 입장이다.
완성된 설일체유부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의 요소로서 법을 75가지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이른바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라고 한다.
오위라는 것은
색법(물질의 요소, 11), 심법(마음, 1), 심소법(마음의 작용, 46),
심불상응행법(물질도 마음도 아닌 관계, 능력, 상태 등을 나타내는 요소, 14) 및
무위법(3)을 말한다.
이러한 75가지의 법은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같은 인과관계 위에서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세계이다.
그렇다고 할때 그러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기본요소인 법(法, dharma)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은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유위의 다르마 전체에 공통된 성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순간성(刹那滅)이며, 다른 하나는 삼세실유성(三世實有性)이다.
이 두 성질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며, 사실 다른 학파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나
실은 설일체유부의 입장에서는 이 둘에 의해 제행무상을 변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법의 이론"에서 본다면 실은 순간에 생겨나 소멸해 버리는 유위제"법"(有爲諸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제"법"의 하나하나는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모두 소멸해버리는 찰나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순간에도 그대로 컵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행한 제법을 상속하여 그것과 동류의 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번째 순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비지속적, 순간생멸적인 제법의 연속적, 비단절적인 생기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 현상이 우리의 경험적 세계의 사실로서 있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법이 생기한다고 해도 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기라는 것은 "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현현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난 이전의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동안의 한 순간의 법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에도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한다.
법은 삼세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변함없는 특성(自性)을 갖고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삼세에 실유한다.
이와 같은 유부의 순간적 존재론에 대한 멋진 비유가 있다.
필림의 흐름은 리일에서 리일로 움직여 그침이 없으나
필림에 현상된 한 토막의 화면 그 자체는 처음의 리일 속에 있을 때도 램프에 조명될 때도 다음 리일에 감겨진 뒤에도 움직이거나 병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에 차례차례로 투사된 영상은 하나하나로서는 순간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면서, 그것이 무수하게 부단히 연속함으로써 변화하며 활동하고 시간적 경과를 가진 한편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첫 리일은 다르마의 경과라는 삼세 중의 미래의 영역에 해당하고,
램프에 의하여 조명되는 순간은 현재에 해당하고,
나중의 리일은 과거의 영역에 해당한다.
필림의 한 토막 한 토막이 곧 다르마, 엄밀히 말하면 같이 생하는 무수한 다르마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의 활동변화에 의하여 엮어지는 이야기는 정녕 현실의 경험적 세계 즉 제행무상의 세계에 해당한다.
리일에서 리일로 필림이 흐르듯이 다르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확대되어 있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야기의 경과와 같이 경험적 시간은 그것을 종으로 관철한다.
그 두가지 시간의 교차점을 절대의 현재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들 경험적 세계에 사는 자는 언제나 거기에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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