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76. 십이처(十二處) - 현상계 일체의 12가지 구성요소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6. 12. 12:30

 

십이처(十二處)란 무엇인가.

 

여섯의 내부적 영역(六內處)외부적 영역(六外處)을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1) 눈(眼)과 시각대상(色),

2) 귀(耳)와 소리(聲),

3) 코(鼻)와 냄새(香),

4) 혀(舌)와 맛(味),

5) 몸(身)과 감촉(觸),

6) 마음(意)마음현상(法)이라는

 

감관감각대상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들은 통상 6가지 안팎의 영역(六內外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보거나 듣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12가지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십이처는 현상계 일체를 포섭한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 따위의

오온(五蘊)‘나’의 실존을 이루는 경험적 요인들을 다섯의 갈래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반면에 십이처는 그러한 요인들이 어떠한 토대 위에 성립해 있는가를 밝힌다.

 

오온은 주객이 혼융된 ‘나’의 현실을 가리키는 반면에

십이처는 그러한 현실의 발생 배경을 드러낸다.

 

이것을 통해 오온이 여섯 쌍의 감관감각대상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십이처는 안팎의 영역이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면서 현상계를 이루어내는 양상을 묘사한다.

 

 

 


십이처 가운데 6번째 쌍에 해당하는 마음과 마음현상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마음을 제외한 여타의 감관은

그때그때의 감각대상과 관계할 뿐 경험한 내용을 비교하거나 종합하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면서 기억하거나 예상한다.

또한 감각적 차원을 벗어난 내면의 원리들을 사고하는 능력까지도 지닌다.

 


마음현상(法)은 이러한 모든 것을 내용으로 하면서

마음(心,意,識, mano)이라는 감관의 대상이 된다.

 

마음은 이러한 마음현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통합적 인식을 수행한다.

 

 

 


붓다는 십이처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앎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SN. IV. 15).

 

십이처를 벗어난 무엇은 그 존재의 여부마저도 따질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십이처라는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 안에 갇힌 죄수에 비유할 수 있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에서부터 사회적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혹은 지구적 차원을 넘어 범우주적 차원에 이르는 거대한 사태에 이르기까지

따지고 보면 십이처에서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따라서 붓다는 십이처가 곧 세상(loka)이라고도 말한다(SN. IV. 52).

 

 

 


그런데 십이처가 세상과 동일하다면

십이처를 통해 세상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도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초기불교 경전에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열쇠

다름 아닌 여섯의 감관에 있다는 언급이 나타난다(SN. IV. 95).

 

또한 여섯의 감각적 접촉의 영역을 잘 길들이고 잘 지키고 잘 단속하면

괴로움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등장한다(SN. IV. 70).

 

이 점을 고려할 때 십이처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이처를 통해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례는 어떠할까. 다음의 경문은 새겨 둘 필요가 있다.

 

“말룽끼야뿟따여,

 보거나 듣거나 감각하거나 의식한 사물에 관련하여,

 

 보았을 때는 본 것만 있고,

 들었을 때는 들은 것만 있고,

 감각했을 때는 감각한 것만 있고,

 의식했을 때는 의식한 것만 있어야 한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렇게 된다면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라는 것이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그것에 의함’이라는 것이 없다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라는 것이 없다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양쪽의 중간도 없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SN. IV. 73).”